정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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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대통령 후보
기호이름기호이름기호이름
1정동영5심대평9전관
2이명박6문국현10금민
3권영길7정근모11이수성
4이인제8허경영12이회창
이름정동영(鄭東泳)
출생일1953년 7월 27일[1]
출생지전라북도 순창군
최종 학력웨일스대학교 대학원 저널리즘학 석사
소속 정당국민의당
지역구전북 전주병
종교무종교가톨릭(세례명 : 다윗)[2]
가족아버지 정진철, 어머니 이형옥의 4형제 중 장남[3]
배우자민혜경
자녀2남
약력(현)제20대 국회의원
(전)제15,16,18대 국회의원
(전)통일부 장관
(전)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외부 링크홈페이지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 1953년 7월 27일 생으로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이다. MBC 기자와 앵커를 지냈고 15, 16, 18대 국회의원 및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를 지낸 경력이 있으며 안철수, 천정배 의원과 함께 국민의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덤으로 한 때 같은 방송사에서 일했던 누구 못지 않은 파문전사다. 꽤나 동안이다. 2016년, 한국 나이 기준으로 64세다.

2 유년 시절

전라북도 도의원을 지낸 아버지(순창군)로부터 태어났다. 전주시에서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재수로 입학해 졸업했다.[4]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이 그랬듯이 운동권으로 지냈다가 구금된 적이 있었으며, 아버지를 여의고 대학시절에는 서울에서 옷을 팔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강제징집 되고나서 제33보병사단(현 17사단) 사단 본부대 행정병으로 군 복무후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우여곡절의 학업 끝에 1978년 문화방송(MBC)로 입사한 뒤 대학까지 졸업하여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3 언론인

추억이 되어버린 정동영의 앵커 시절

문화방송에 입사한 뒤 기자를 거쳐 오른 뉴스 앵커[5]는 그의 대표적인 커리어라고 할 수 있다.

기자 시절에는 5.18 민주화운동에 현장 특파원으로 취재한적이 있었지만, 취재 내용은 보도되지 못했다.[6] 주미 특파원으로 지내는 동안 1984년 웨일스 대학교 언론학 대학원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걸프전과 독일 통일 등 굵직한 사건을 현장취재한 적도 있었다. 물론 전두환을 찬양하는 흑역사도 있었지만 어차피 이때는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했기 때문에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를 내는거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1995년 12월 3일 전두환 구속 당시 MBC 뉴스데스크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

귀국 후에는 뉴스 앵커로 지내면서 억압받는 언론 상황에서도 소신있는 보도로 언론인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주며 명품 앵커라는 별칭이 생겨났다.[7]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마감뉴스인 뉴스데이트 앵커로 재직했는데 언론인 인생을 좌우할수도 있는 정권에 반하는 보도를 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되어버린 일은 유명한 일화.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다만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에 취재하던 도중에 좀 흑역사스러운일도 있었기는 했다. 여하간 삼풍백화점 사건으로 본인이 느낀바있어서 정계에 입문하기는 했지만.

4 정치 활동

4.1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

1996년 김대중 당시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뒤로는 정치인으로 완전히 전업하였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 국회의원 오탄 대신 전주시 덕진구 지역구로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97,858표)를 달성하며 국회에 입성했다.[8]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16대 국회 당시 천정배, 신기남[9]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의 정풍 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이자 동교동계 좌장이었던 권노갑 의원을 비판하며 퇴진 요구를 한 것.[10] 이 사건으로 정동영은 일약 민주당 내 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는 새천년민주당 경선에 참여했으며, 노무현으로 후보가 확정될 때까지도 경선을 완주하여 유력한 차기 권력으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대선 후에는 다시 천신정이 함께 동교동계 퇴진[11]과 민주당 쇄신론을 내세웠으며, 이는 신당 창당론으로 이어져 민주당 분당 및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역이 되었다.

열린우리당 창당 후 초대 의장에 선출되어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을 급등시키며[12] 탄핵 정국 및 17대 총선을 이끌었으나, 젊은층의 투표를 독려하는 취지의 발언이 노인 폄하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13][14]어쨌건 이 발언 때문에 2010년대에 들어 본인도 60대가 되었는데 보수성향의 네티즌들에게 '자기도 60대인데 투표하지 말고 집에서 쉬시라'라는 비난과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저 발언의 여파로 비례대표 후보에서 사퇴하였다. 선거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로 끝났으나, 개헌선까지 가능하다는 전망에 비해서는 다소 미미한 결과였다.[15] 이후 통일부 장관을 맡으면서[16] 열린우리당 의장에서 물러난다.

2006년 다시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으며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지휘했으나 패배의 책임으로 사임했다.

4.2 제17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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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가족이 행복한 나라"

- 대선 당시 슬로건

2007년 대선시즌이 임박하자 당초 여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던 고건은 불출마 선언을 하고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는 치열한 경쟁끝에 이해찬손학규를 밀어내고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17]참고로 노무현 휘하에 있던 이력 때문인지 친노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정동영은 16대 대통령 선거를 위한 경선 시즌 때까지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경쟁하던 관계였다. 다만, 경선 결과를 승복했고, 노무현 정권 탄생주역이기도 했으며, 노무현이 정동영을 다음 대권주자로 푸시해 주고자 'NSC 상임위원장을 겸직하는 부총리급 통일부 장관'을 시켰다. 친노라고 하긴 좀 그래도 노무현과 연합하고 지원을 받은 케이스. 물론 이건 정권 중반까지의 이야기고, 정권 후반부에는 참여정부의 실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18] 친노 세력과는 거리감이 생겼다.[19] 현재도 친노가 아닌 소위 비노로 분류되고 있다.

경선을 통해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가 되어 본선에서는 한나라당이명박 후보와 경쟁을 하게 되었으나, 여당의 지지부진한 지지율[20]과 후보 단일화 실패, 뚜렷하지 않은 정책비전으로 인해 이명박의 절반도 채 되지않는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한편 이회창의 무소속 출마로 일각에서는 제15대 대통령 선거같이 보수표 분산의 효과를 기대하기도 했으나, 이마저도 넘사벽이었던 표차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이명박에게 밀리며 역대 대선 중 가장 큰 표차로 마감하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보다 자세한 과정은 제17대 대통령 선거 문서 참조. 정도령이 되지 못하고

그리고 대선용으로 만들어졌던 정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얼마 안 가 유시민, 이해찬 등이 탈당하는 등 이미 예상 가능권 안이었던 시나리오를 맞게 되었고, 18대 총선의 참패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후신이던 통합민주당에서 여러 계파가 범람하는 단초가 되며 이는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4.3 제18대 국회의원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로 옮겨 출마하였으나, 뉴타운 광풍속에 정몽준에 밀려 패배. 이듬해 보궐선거(김세웅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국회의원직 상실) 출마 뜻을 밝혔으나, 민주당 측에서는 공천을 하지 않았고 이에 반발하여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전주시 덕진구 선거구에 출마, 민주당 후보를 크게 앞서며 70%대의 득표율로 압승하여 국회 복귀에 성공했다. [21]
사실 공천 문제로 탈당했을 뿐 무소속으로 남아버리고 싶진 않았는지 당선된 뒤 복당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왔고, 공언한 대로 이듬해 복당했다. 참고로 정동영 폭행녀는 이때의 임기 말기에 벌어진 사건. 이 사건을 전후하여 이름하여 "정동영 죽이기"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정동영은 "현장왕" 이라는 별명이 붙으며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다. SOFA 개정안 발의, ISD 반대, 등등의 행보를 보였다.[22] [23]대체로 노무현 정권의 정책과 친노인사들에 비판적인 진보진영에서도 정동영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각종 집회며 이슈마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모습을 보인 덕분이다. 특히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강한 야권 지지층에게 정동영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과 사회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강력한 개혁적 성향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면이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지역구였던 전주시와 전라북도의 중요사업이었던 한국토지주택공사 유치와 10구단 유치에 실패하면서 지역 민심을 악화시켰다. 물론, 집권 여당과 청와대가 영남바라기였던 이명박 정부였고, 정동영 본인이 정부를 상대로 궐기대회를 열고 시위를 했다고 하지만 한국토지주택공사를 통으로 털리고, 10구단 유치마저도 실패하는 바람에 두고두고 비판 받을 정치적인 실책이 된 셈. 실제로 당시 전라북도와 전주의 분위기는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였고, 다들 지역 내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던 판국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LH 본사 유치를 두고 경쟁했던 경상남도 도지사가 같은 야당 소속의 김두관 지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작의 여지가 더더욱 좁아진다. 이를 두고 당시 전북사람들은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냈던 정동영과 민주당 대표를 지냈던 정세균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24][25]

4.4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통합당 내에서 정동영에게 험지 출마를 요구하는 여론이 있었고 이에 전주 불출마 선언을 하고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거구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당내 예비후보였던 전현희(당시 제18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와의 경선에서 승리하여 민주통합당 후보로 확정되었다. 본선에서 40% 에 달하는 득표력을 보여주었지만 아쉽게도 낙선했다.[26]

4.5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2015년 1월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의 문제를 제기하며 탈당한 뒤 국민모임에 합류하여 4.29 재보선에서 관악을에 출마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고사하였지만 출마하게 되었고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관악을 지역구 국회의원에 무소속[27]으로 출마하였다. 새누리당오신환 - 새정치민주연합의 정태호 - 정동영의 3강 구도로 선거는 진행되었고 여론조사에서 엎치락 뒤치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만일 당선된다면, 정동영으로선 정치적 부활을 이룰 수 있는 큰 분수령이 될 선거였다. 관악구가 전통적으로 야권 성향이 강한 편이지만[28] 위에서 언급했듯 정동영 본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선거구가 자주 바뀌는 철새 이미지 [29] 에다 무소속 패널티 (서울서 무소속 당선 사례는 전부 민주당이나 새누리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경우였다.) 및 야권 후보 난립[30][31] 등으로 불안한 전개를 해야 했다.

결과는 오신환 후보가 43.9%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되었고 정동영 후보는 2위를 기록한 새정연의 정태호 후보(34.2%)에 이어 20.2%의 득표율에 머물어 3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선거 구도를 불리하게끔 만들어버린 참모진의 삽질 등 불리한 요소가 많았다지만, 거물급 정치인이 3위를 했다는 것은 타격이라 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신당 창당에도 차질이 생겼다.

그 후 중국에서 잠시 머물다 고향인 순창군에서 지내며 자숙기를 보내고 있지만,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나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제19대 대통령 선거 주자로 거론하기도 한다.[32] 천정배 의원과 더불어 야권신당 창당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모임과의 관계는 국민모임이 정의당과 통합하는 과정에서 배제된 걸로 보인다. 실제로 정의당의 주류 계파인 참여계의 정동영 전 의원에 대한 비토는 상당했다. 자세한 내막은 노동당 진보결집 기획단 간담회 7페이지 참고[33]

최근 야권의 자중지란에 몸값이 연일 상한가를 치며 주목받고 있다. '몸값상승' 정동영, 정계복귀 임박 [34]

4.6 정치재개 임박 (2015.12. ~ 2016. 1.)

12월 20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정동영 전 의원이 머물고 있는 순창 복흥에 찾아가 복당을 요청했으나, '서로 다른 길에 서있다, 하지만 내겐 민주당, 야당의 피가 흐르고 있다. 형제라고 생각한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 아직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은 만큼, 향후 행보는 섣불리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

12월 29일, 이종걸 원내대표와 회동했다. # 이종걸 의원은 정 전 의원과의 회동에 대해 '(정 전 의원과) 전반적인 사회 개혁 문제들에 대해 얘기했다'면서 "(정 전 의원이) 대여 전선에서 새누리당의 '반 개혁'을 우리 당의 개혁정신으로 막아내는 게 야권 전체의 통합에도 큰 도움이 될 거란 긍정적인 얘기를 해줬다"고 밝혔다.

1월 2일, 천정배 의원과 회동했다. 천 의원은 이날 정 전 의원에게 이제는 호남개혁정치 복원에 적극 나서달라"고 요청했고, 정 전 의원은 이를 경청한 후 "숙고해보겠다"고 답했다. #

1월 9일, "통일국가·복지국가를 염원하는 시민 모임"에서 정 전 의원이 머물고 있는 순창군 복흥면을 찾아 "정동영 전 의장의 정계복귀를 촉구하며, 정동영은 국민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1996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정계에 진출했지만 2016년에는 국민의 명령으로 정계에 복귀해야 한다" 면서 정 전 의원의 정계복귀를 거듭 촉구했다. # 성명서 전문 이에 대해 정동영 전 의원은 대안야당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정계복귀가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 [35]

4.7 정치재개 이후 (2016.2. ~ )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합니다.

- 정치재개 선언에서

2월 18일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 소속으로 전주 덕진구에 출마할 듯.#

2월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테러방지법 강행, 제2의 유신독재 꿈꾸나"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국민들이 가장 불신하는 국정원이 아니라 사후 통제가 가능한 부처에서 대테러 업무를 관장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요구”라고 주장하며 테러방지법 반대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어느 정도 예상대로 전주시 덕진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상대는 자신의 정책 참모를 맡은 바 있었던 김성주 현 국회의원이다. 김성주 의원과는 정치적으로도 동지'였'으나, 같은 전주고등학교 - 서울대학교, 거기다가 학과까지 선후배 관계여서 더욱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하여 그동안 큰 관심이 모이지 않았던 전주시 덕진구가 2016년 총선 최대 관심 지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거 결과 47.7%의 득표율을 얻어 47.0%를 득표한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후보에게 신승하며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정치적 후배' 김성주 꺾고 전북 전주병서 4선 성공 또한, 당초 전북에서 국민의당 바람이 부진할 거라는 예측을 깨고 국민의당 바람을 주도함으로서 전북 영향력을 재확인했다는 관측이 있다.

하지만 참여정부열린우리당 의장이자 최대 계파의 수장, 부총리급 통일부 장관을 거치며 참여정부의 최고 실세 중 한 사람이였던 그가 선거 기간 중에 '친노 패권주의'와 '영남 패권주의'를 거론[36]하며 친노 세력, 특히 참여정부 비판에 앞장 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일부 비판이 있기도 하였다. FTA반성문을 쓸 정도로 참여정부의 실책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했음에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전라북도에서 국민의당 바람을 주도했다지만 본인은 경쟁자였던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의원을 상대로 989표, 득표율 0.76%p 차이로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었기 때문에 정동영이란 이름값에 비하면 기대 이하의 성적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국민의당의 지지율이 정동영 합류 직후에 덕진에서 더민주에게 무려 20% 넘게 밀렸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주장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국민의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며 전북 지역에서의 절대 열세를 뒤집은 셈. 중앙일보가 2016년 2월 23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덕진에서의 국민의당 지지율은 20.4%에 그쳐 42.0%의 지지율을 보인 더불어민주당의 50% 수준에도 미달했다. 한편 해당 여론조사에서 정동영의 지지율은 정당 지지율에 비해 10% 이상 높은 반면 김성주 의원의 지지율은 정당 지지율보다 낮았다.[37]

또한 정동영이 출사표를 던진 전주병 지역구를 더불어민주당이 꼭 이겨야 할 전략지역으로 선정하고 정동영을 맹비난하며 당력을 총집중하였음에도 이루어낸 승리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더 크다.

매일경제신문이 7월 1일 정동영 의원이 부인의 7촌 조카(...)를 본인 7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아내의 7촌 조카면... 보좌관으로 두고 있었다고 7월 2일 보도하였다. 이 인물은 정 의원과 20년을 같이 일했었던 사람으로 정 의원 아내의 7촌 조카라고 한다.# 이에 대한 댓글 반응은 본인 7촌도 아니고 아내의 7촌 조카까지 문제삼는것은 어거지라는 반응이 많다. 오죽 깔 게 없었으면 부인의 7촌까지 뒤질까 기타 의원들은 멀다고 해봐야 6촌인데, 이쪽은 부인의 7촌으로 사실상 남이나 다름 없지 않냐는 의견. 다만 다른 의원들의 친인척 보좌관 채용 건으로 논란이 되다 보니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보도를 하다가 이러한 것까지 보도하게 된 걸로 보인다.

근데 7촌 조카를 채용한 사실이 또 언론에 보도됐다. 아무리 멀다해도 2명씩이나 채용했으면 문제가 되는 게 보통이지만, 7촌 조카도 충분히 멀 뿐더러(...) 독립운동가의 손자[38]여서 친인척 채용 논란에서는 까임방지권을 획득했다.

한편으로 아내의 7촌 조카 채용이 논란이 된 것에 대해, 국민의당이 기존 양대 정당들을 비판한 것에 대한 부메랑이라는 의견이 일각에서 있다.

7월 19일, 4년 8개월 만에 본회의장에 올라 정부의 독단적 사드배치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정동영, 4년8개월만 본회의장 단상 올라 사드 배치 맹폭

이날 정동영 의원은 안보가 목적이라는 사드 배치로 인해 안보와 국익의 '두 마리 토끼'를 놓쳐버린 박근혜정부를 맹공하며. '사드는 하나의 무기체계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겹겹이 둘러싼 국제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구조를 뒤흔드는 문제"라며 '사드배치 이후 경제가 흔들리고 북한 비핵화의 문이 닫히고 평화통일의 길은 영영 멀어지게 된다면 아무리 대통령이 결정했다 해도 국민 대표인 국회가 초당적으로 지혜를 모아야할 문제' 지적했다.

이어 "시대착오적 대결구도가 다시 한반도 주변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며 "미래로 가야 하는데 왜 지구상에서 한반도만 후퇴하는가"라고 박근혜정부의 이번 결정을 비판하며 사드 배치 철회를 적극 촉구했다. 이런 정 의원의 논리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에 황교안 국무총리는 한때 답을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5 이야깃거리

바쁜 사람들은 30초부터 보면 된다.
그나저나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前 대통령과 김종필박지원이 풋풋하다.[39]

  • 주말 뉴스데스크를 진행하던 시절에 방송사고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1995년 8월 5일자 뉴스데스크의 전체 영상을 보면 오프닝이 나가고 제공자막이 뜰 때에 들어왔으며 광고 중에 머리에 무스를 바르는 등의 준비를 하는게 그대로 나오는데, 당시 TV에서는 정상적으로 광고가 나갔다. 다른 날짜의 뉴스들과는 달리 유독 이 날 영상만 광고가 아닌 스튜디오측 화면이 녹화된 버전으로 업로드된 것. 만약 스튜디오측 화면이 TV로 송출되었더라면 7년 전에 발생한 사건 다음으로 엄청난 방송사고로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방송사고가 아니다.
  • 위 영상이 2010년 10월 5일 뉴스데스크 40주년 기념 특집 때 소개되었는데, 막상 본인은 저게 남아있다는걸 전혀 예상치 못한 탓에 보자마자 엄청나게 폭소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소감을 묻는 질문에 "저 때는 젊고 잘생겼네요."라는 자뻑 멘트를 거하게 날렸다. (...) 2010년대에도 생김새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게 더 대단한 듯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얼마전 까지는 자신의 고향인 순창군에 머물고 있었으나, 최근 자신의 전 국회의원시절 지역구인 전주시 덕진구 에 출마한다는 소문이 지역 정가에 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 몇년 전부터 재야에서 다시 정계로 복귀할 때 한 가지 일이 있는데, 바로 강연회다. 예를들어, 4.29 재보궐 선거 4달전에는 자신의 모교인 전주고등학교에서 졸업생을 대상으로 정치에 대해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걸 미루어 봤을 때, 최근(2016년)에 전주에서 여성들을 위한 특강을 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정치재개가 임박한것으로 보인다. #
  • 대선 후보 당시 조선일보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이명박도 같은 대답을 했다는 점은 함정
  • 2009년 누명을 쓰고 온두라스에 수감된 한지수씨의 무죄판결을 이끌어낸 숨은 주역중 하나이다. 제7차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한지수씨 신원보증 문제에 대해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을 몰아부쳐 외교통상부의 신원보장 약속을 받아내고, 주한 온두라스 친칠리 대상을 직접 만나 인도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언론 보도와 정치권에서까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뒤늦게 정부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정부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과장을 파견보내 부검 결과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면서 한지수씨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정동영, 한지수씨 구하기 '동분서주' #

6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주시 덕진구)
새정치국민회의97,858 (89.9%)당선 (1위)전국 최다득표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주시 덕진구)
새천년민주당98,746 (88.2%)당선 (1위)전국 최다득표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22번)
열린우리당-후보사퇴노인폄하 발언 논란으로 사퇴함
2007제17대 대통령 선거대통합민주신당6,174,681 (26.1%)낙선 (2위)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작구 을)
통합민주당36,251 (41.5%)낙선 (2위)
20092009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전주시 덕진구)
무소속[40]57,423 (72.3%)당선 (1위)2010.2 민주당 복당
2012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남구 을)
민주통합당48,419 (39.3%)낙선 (2위)
2015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서울 관악구 을)
무소속15,569 (20.2%)낙선 (3위)국민모임과 선거연대
2016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전주시 병)
국민의당61,662 (47.7%)당선 (1위)전주시 최다표차, 전북지역 최다득표 당선
  1. 이날은 6.25 전쟁휴전협정을 맺은 날이기도 하다.
  2. 결혼 이후 아내를 따라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한다. 다만 전주시지역구를 옮긴 2016년 현재 교적상 소속 본당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양재동 본당으로 되어 있어 사실상 냉담 상태인 것으로 파악된다.
  3. 원래는 9남매였다고 한다.
  4. 부친의 친일 의혹이 있었으나, 대선 당시 등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5. 1994년 9월 ~ 1996년 1월 주말 MBC 뉴스데스크 앵커.
  6. 2007년 대선을 계기로 알려지긴 했다. 몇 안되는 당시 상황을 제대로 담은 자료 중 하나다.
  7. 실제 연설과 토론에 상당히 달변이기는 하다. 언론인 경력이 정치인으로서의 커리어에 좋은 영향을 준 셈이다.
  8. 시내를 직접 누비며 유권자들을 만나는 전례없는 방식을 취했다지만, 전주시에서 학력을 지낸 지역적 연고도 있었던데다 호남이 민주당에게 몰표를 쏟는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 경쟁력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2009년 보궐선거서. '무소속'으로 나와 12%에 그친 민주당후보를 72.3% 득표로 크게 앞질렀다. 이어서 출마한 16대 총선에서도 같은 기록을 달성했다.
  9. 속칭 천신정.
  10. 이 일로 악연이 생겨 십수 년 뒤 정동영이 새정연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관악구에 출마할 때 역으로 권노갑이 야권을 분열시킨다며 강하게 비난하기도 한다.
  11. 한화갑이 주 타깃이었는데, 재미있게도 한화갑은 정풍운동 당시에는 천신정에 동조했고, 이 때문에 정풍운동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12. 이른바 정동영 효과
  13. '미래는 20대, 30대들의 무대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해도 괜찮아요. 꼭 그 분들이 미래를 결정해놓을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그분들은 어쩌면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고 20대, 30대는 지금 뭔가 결정하면 미래를 결정하는데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잖아요.' - 국민일보 인터뷰 도중 발언
  14. 이 발언은 청년층이 정치에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도였으나 세대 갈등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부적절한 표현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2010년대에는 다소 재평가되는 분위기가 있는데, 몇몇 웹사이트에서 정몽주니어처럼 정게할배, 노슬아치에 대한 글이 나올 때마다 '정동영 1승 추가'라는 밈으로 쓰이게 되었다.
  15. 실제로 영남권에서 우리당이 접전을 펼친 지역이 많았으며 만약 노인 폄하 발언 논란만 아니었더라면 노년층 표를 어느 정도 확보하여 영남권에서만 10~20석 정도 더 얻을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16. NSC 상임의장을 겸직하는 통일부 장관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위상은 장관이 아니라 부총리급이었다.
  17. 다만 이때 박스떼기 논란이 생기기도 하였다.
  18. 노 전 대통령이 고건에 이어 정동영을 저격한 데다 경선확정 후에도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애초에 당시 노무현 이미지 때문에 당에서도 지원을 꺼리기도 했지만.
  19.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사망 당시 조문하러 갔다가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절은 커녕 진입도 못 하고 쫓겨난 일을 보면 정동영이 친노가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뭐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박살나고 여러 정치인들이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쌍욕 들으며 쫓겨난 것에 비하면 양반이다
  20. 이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당지지율은 11% 밖에 안됐다. 이것도 많이 나온 거다. 5% 나온 조사도 있다.
  21. 이 당시 그가 내건 선거전 슬로건은 '어머니, 정동영입니다.'였는데 본인뿐만 아니라 무소속 연대를 결성했던 완산 선거구의 신건 후보까지 큰 표차로 당선시키며 압승에 성공했다.
  22. SOFA 개정안 발의, ISD 반대등은 3년 이른 행보였다.
  23. 야권신당을 추진 중인 천정배 의원은 이를 두고 한국정치에 정동영 전 의원 만한 분이 없다. 라고 밝히기도 했다.
  24. 다만, 지역구의 특성을 따진다면 정세균 의원은 전북 동부권인 무진장+임실이 지역구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책임이 덜하기는 하다.
  25. 추락한 호남 정치권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당시 민주당 내에서는 민주당 주류였던 친노 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된 호남 후보 불가론과 PK 공략론이 강력한 공감대를 이루고있는 상황이였고, 그대로 호남정치권의 위상추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호남정치의 위상변화는 이후 20대 총선에서 호남정치복원론을 내세운 국민의당이 압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26. 강남구는 전반적으로 새누리당 성향이 강한 편이다. 지금까지의 전적을 보면 보수당이 자리를 내준 건 갑을 통틀어 3회 뿐.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의석을 내준 적이 전혀 없었지만.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반적인 야권강세도 있었지만 18대 국회 때부터 강남을을 지역구로 낙점하고 8년 내내 지역구 활동에 힘써왔던 전현희 후보가 당선됐다.
  27. 아직 국민모임이 창당을 안했기 때문에 무소속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28. 여당이 승리한 전적은 대선, 총선, 지방선거, 보궐선거를 통틀어서 단 3번 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보궐선거때는, 총선에 비해 새누리 후보 득표율이 10% 넘게 상승하고, 야권 후보 득표율이 10% 넘게 떨어졌다. 오신환의 공약 및 선거 전략이 상당히 먹혀서 이변이 생겨났지만, 야권 득표율을 합하면 54%가 넘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역의 색깔까지 변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29. 당내에서 험지출마를 요구하는 여론이 있었고 이에 지난번 선거의 동작구 선거구에 이어 강남구 을 선거구에 출마한 것이기 때문. 하지만, 본인의 의사가 확고했다면 덕진구를 지켰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묘한 입장 차가 생길 수 있다.
  30.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났지만, 정동영이나 새정치연합의 정치적 입지가 달린 일이기에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새정치측에서 단일화는 없다고 선을 그은 이유도 있고.
  31. 뒤에 서술할 득표율을 보면 단일화에 성공한다 해도 득표율이 5~6%만 새어나가도 오신환이 자력으로 당선될수도 있을 터였다. 실제로 정동영 후보 출마전의 여론조사에서도 새누리가 앞섰다 (...) 야권 후보 난립은 어찌보면 결과적으론 새정연의 핑계(?)라고 볼 수 있다.
  32. 잇따른 선거 패배의 타격으로 현황 지지율에서는 뒤처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만일 다음 총선에서 당선된다면 반등하겠지만 현재로선 사실상 레이스 아웃된 상태. 물론 현재는 정치활동을 하고있지 않아 지지율이 낮지만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여 언론을 타면 지지율이 꽤 오를 수 있다.
  33. 이유는 간단하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참여계는 유시민 개인 지분이고, 유시민이 정계 은퇴한 지금도 어쨌든 그 영향을 받는다고 봐야 하는데, 정동영과 유시민은 열린우리당 시절에 엄청나게 싸워댔기 때문.
  34. 문재인 대표에 이어 이종걸 원내대표, 박준영 전 전남지사, 천정배 의원이 정 전 의원이 칩거중인 전북 순창에 잇달아 찾아와 러브콜을 보냈다.
  35. 정계에서는 정 전 장관의 정계복귀가 늦어도 이달은 넘기지 않을 것이고, 빠르면, 그 시점이 오는 14일에서 17일 전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36. 열린우리당의 창당 명분을 '전국 정당 수립'으로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 4월 12일 오후 3~5시에 전북대학교 구정문에서 했던 국민의당 전주시 출마자 합동유세에서 친노 패권주의와 영남 패권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37. 선거 공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공약한대로 송천동 변전소 문제는 이전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이를 두고 송천동 거주민들 사이에는 정동영이 확실히 힘이 있다는 평이 많다. 하지만, 육군 항공대대 이전은 이미 시에서 조촌동 일대에 부지를 97% 이상 확보한 상황이어서 물리기에는 손실이 너무 크다. 사실상, 보상금 문제를 두고 실랑이하는 단계라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 할 듯.
  38. 故 정진호 지사의 손자.
  39. 영상의 26분부터 볼 수 있다. 김영삼은 30분부터 볼 수 있다.
  40. 무소속인 이유가 당시 당권을 쥐고 있던 범친노계 정세균이 공천을 주지 않았다. 정세균이 중심이 된 당에선 연고가 없던 인천출마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