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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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4월 10일 ~ 1956년 9월 6일
한국서양화가.

1 작품 세계

살아생전 를 많이 그렸는데, 어렸을 때부터 소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 그릴 때는 하루 종일 소만 바라봤다고 한다. 아내인 마사코 여사의 증언으로는 소를 관찰하다가 소 도둑으로 몰려서 부리나케 도망가야 했던 경험도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흰소'(1954년 작)가 있는데 이것은 백의민족이었던 한국을 의미했다. 그림을 보면 소가 말라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는데 당시 6.25 전쟁 이후로 먹고 살기 힘들었던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이중섭의 그림 '황소'는 2006년 35억 ~ 45억원 가격대로 경매에 오르기도 했는데, 정작 생전에는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6.25 전쟁을 직격탄으로 맞은 세대라... 제주도로 피란 간 때의 경험이[1] 창작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지만 어쨌거나 안습. 부두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다가 이마저도 건강 문제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당시 담배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 또한 유명하다.

간신히 1955년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시회를 열었지만, 1년 뒤에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황달 및 정신병 등이 겹쳐 사망했다[2].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다.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사후에는 그 진가를 인정받아 작품이 고가에 거래된다는 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비교되는 예술가.

고가의 거래에 대한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다. 이중섭이 피난 생활을 했던 제주도 서귀포시에는 그의 작품들을 모은 전국 유일의 이중섭 미술관이 있는데, 2002년 개관했을 당시 진품을 단 한 점도 소장하지 못한 채 리플리카(복제화)를 전시해야 했다. 2013년 현재도 이중섭 미술관의 소장품 중 '황소' 등 이중섭의 대표작 상당수는 리플리카 신세이다[3]. 이러다 보니 박수근과 함께 가장 위작이 많은 한국 화가이기도 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총후 화가(일제를 찬양하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로 일한 흑역사가 있다. 물론 원해서 그런 건 아니고, 이중섭이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한 형[4]이 총후 화가로 만든 것이었다. 오히려 이중섭은 일제 시대에도 언제나 한글로 서명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오산 학교 출신이었다. 당시 오산 학교의 미술 선생이 주장했던 '조선 사람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 한다'라는 연설을 듣고 깊게 감명받았다고.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유학파 출신이다.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할 당시 아내를 만났으며 '아고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같은 반에 이(李) 씨가 세 명이나 있었는데[5] 턱(일본어로 '아고')이 길었기에 저런 별명(아고+리)이 붙었다고.

해방 직후에는 강제적으로 공산당 동맹에 가입했는데 회의에 갖다올 때마다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맥없다"(맥 빠진다)라고 호소했다고. 공산당에서 원하는 그림과 이중섭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맞지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6.25 전쟁 당시 폭격을 견디지 못하고[6] 남쪽으로 도망쳤다. 이 때 노모에게 당시 그린 그림 대부분을 맡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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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0일 탄생 96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구글 두들. '흰소'를 로고화했다.

참고로 이중섭은 서명을 할 때 항상 풀어쓰기로 서명을 했다고 한다.

2 가족 관계

원래 원산 일대의 지주인 부잣집 아들이었다. 광복되기 바로 전에 결혼한 그와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는 금슬이 좋았던 걸로 알려져 있다. 1939년에 서울 문화학원에서 문학도였던 아내와 처음 만났고 결혼했다. 1943년에 집에 결혼 허락을 청하고 2년 걸렸다고. 마사코와 결혼한 후에 이남덕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라고. 이중섭과 마사코는 서로를 '아고리', '아스파라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아고리'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 친구들이 턱이 길었던 이중섭을 부르던 별명이었다. 요즘말로 말하면 '턱돌이' 비슷한 셈.

그러나 전쟁 때문에 고향 원산을 떠나 흥남 철수 때 한국으로 내려와 부산, 제주도로 옮긴 후 게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으며 힘들게 살게 된다. 가난 때문에 1952년엔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마사코와 첫째아들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이기도 했고, 장인어른이 돌아가시면서 그녀에게 유산을 남겼는데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원래는 온 가족이 함께 일본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이중섭은 여권이 없어 가지 못하고 마사코와 아이들만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마사코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했으며(친정아버지가 미쓰이 창고 주식회사 사장이었다) 그 때문에 둘의 결혼을 반대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다르다. 마사코는 훗날 자기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마사코의 아버지는 사위가 조선사람인 건 상관없는데, 화가라서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 것 같아 그 점에 대해서만 불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의 의견을 존중해 이중섭과의 결혼을 허락하였으며, 딸의 결혼식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1953년 7월, 이중섭은 친구 구상의 도움으로 대한대운공사 선원증을 얻게 되어 단기체류로 일주일 동안 일본으로 갈 수 있게 되는데, 이 때 마사코의 어머니는 이중섭이 항구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신원보증서까지 구해주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에게 부탁한 게 아니고, 농림대신에게 부탁해서 보증을 해 주었다고.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 했던 이중섭을,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이 앞길을 막아서는 안된다며 설득해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낸 사람 역시 장모다.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 후 죽을 때까지 1년 동안 가족과는 거의 만나질 못한 채 한국에서 홀로 막노동을 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현대판 기러기 아빠랑 비슷한 처지인 것. 이로 인해 그가 간간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나 그림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고 한다. 아내는 2016년 현재 95세로 일본 도쿄에서 거주중.

한편 첫째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안타까워 했으며, 때문에 아들이 관 속에서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발가벗은 채[7]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들은 그저 '벌거벗었다'는 이유 때문에 일본식 춘화로 취급되어 정부에서 철거해 버리기도 했다. 어린이에 대해서 너무한 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 정부의 수장인 이승만해방 이전 일을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해 본다면 이런 일은 당연하게 자행되었다. 어디까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그림에는 복숭아 등 동양화에서 장수나 복을 상징하는 사물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의 사후,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2005년 3월 16일 첫 공개해서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년 10월 가짜로 밝혀져서 파장이 일어났다. 이씨가 한국고서 연구회 고문 김용수와 함께 공모해 사기를 친 것. 이를 기점으로 이중섭 작품에 대한 위작 논란이 있었다. 한국미술품평가원에 따르면 이중섭이 위작이 가장 많은 작가라고 한다. 187건의 감정 중 무려 108건이 위작이고 진작은 77건, 감정 불능 2건이었다. 의뢰된 작품의 58%가 가짜였던 셈이다. #

3 참고 자료

  1. 그래도 이 피난 생활이 이중섭에게는 그나마 가장 평화로운 삶이었다고 한다. 서귀포시에는 그가 가족들과 피난 생활을 했던 집이 아직도 남아 있고, 당시 집주인이셨던 김순복 할머니가 생존해 있다.
  2. 친구들이 병문안을 가자 며칠 전에 죽은 이중섭의 시체가 침대 위에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죽은 그의 곁에 있는 것이라고는 병원비 독촉장이 전부였다고. 이 정도면 엄청난 안습이다.
  3. 6.25 전쟁 당시 월남하면서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고향에 그대로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 이상은 현재 구할 길이 없다. 이 외에도 그는 전쟁 통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쓸모없어진 엽서나 담뱃갑의 은박지(날카로운 것으로 새긴 뒤에 잉크를 은박지 위에 칠하고 닦으면 파인 곳에만 잉크가 스며든다. 은박지 작품 3점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 소식이 들려온 지 며칠 뒤에 죽었지만.)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4. 당시 상당한 권력자였으며 해방 이후 부르주아로 몰려 비참한 꼴을 당했다.
  5. 일본에서는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서로 성씨로 부른다.
  6. 원산, 평양, 남포 등은 당시 UN군의 표적 제 1순위였다. 한 미군 장교는 "원산에서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원산에서 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라고 회고했을 정도.
  7.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