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조

(이천석에서 넘어옴)

懿祖묘호의 한 종류로 대체로 왕조 개창자의 선조에게 올린다.

1 고려의 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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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추존 국왕
국조 손보육의조 작제건세조 왕륭대종 왕욱안종 왕욱문원대왕 왕정정간왕 왕기조선국양헌왕 왕도
묘호의조(懿祖)
시호경강대왕(景康大王)
작제건(作帝建)
배우자원창왕후(元昌王后)
아버지당숙종(唐肅宗), 당선종(唐宣宗)[1]
어머니정화왕후(貞和王后)
생몰기간? ~ ?

1.1 개요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로 이름은 작제건(作帝建)이며 정화왕후(貞和王后)의 아들이다. 918년 손자 왕건쿠데타궁예를 몰아내고 스스로 고려왕에 앉은 후 작제건을 의조 경강대왕으로 추존하였다.

1.2 작제건설화

기록이 거의 없으나 작제건을 신성시하기 위한 작제건 설화가 내려져온다.

당(唐)나라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때는 목종(穆宗)의 재위 때인데 장난 삼아 황제의 용상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절[揖]하는 자세를 짓거늘 목종(穆宗)의 아들 무종(武宗)은 마음으로 그를 꺼려하더니 무종(武宗)이 즉위하매 선종(宣宗)이 궁중에서 해(害)를 만나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여 몰래 빠져 나와 멀리 도망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고루 세상의 험난함을 맛보았다. 염관(鹽官)의 안선사(安禪師)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대우가 특히 각별하였으므로 염관(鹽官)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의 속군(屬郡)이요 염관(鹽官)은 항주(抗州)의 속현(屬縣)이니 다 동해에 접하여 있어 상선이 왕래하는 지방이었으므로 화를 무서워하여 항상 깊이 숨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산수를 유람하는 것으로 명목 삼아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 선종이 마가갑(摩訶岬)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러 보육(寶育)의 집에 머무를 때 두 딸을 보고 기뻐하며 옷이 따진 곳을 꿰매 주기를 청하였다. 보육(寶育)은 중국에서 온 귀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마음 속에 "과연 술사(術士)의 말과 부합된다."고 생각하고 곧 큰딸로 하여금 명에 응하게 하였더니 문턱을 넘다가 코에 피가 흘러나오므로 진의(辰義)를 대신으로 드디어 천침(薦枕)하게 되었다. 기월(期月) 동안 머무르다가 임신하였음을 깨닫고 작별할 때 말하기를, <나는 당(唐) 나라의 귀성(貴姓)이라.>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라.>고 하였다. 곧 아들이 태어나니 작제건(作帝建)이다.

ㅡ 고려사 편년통록

작제건은 성인이 되자 아버지를 찾으려고 당나라로 가는 신라 사신단의 호위무사가 되어 배에 오르는데, 이후의 내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명궁 거타지 설화와 똑같다...

상당히 작위적인 설화로, 실제로 고려 충선왕 대에 원나라 한림학사가 "당 숙종은 젊었을 때는 궁을 벗어난 적이 없고 황제의 지위에 올랐을 때는 안사의 난을 수습하느라 바빴는데 언제 고려까지 갔다는 거임?"이라고 충선왕에게 설화의 내용이 사실인지 물어봤으나 대답하지 못했다고(...) 대신 편년강목의 저자인 민지가 당 숙종이 아니라 선종이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2 의 의조

묘호의조(懿祖)
시호광황제(光皇帝)
이(李)
천석(天錫)
생몰기간? ~ ?

추존황제 광황제(光皇帝) 이천석(李天錫)은 당고조 이연의 조부이다. 북위의 당주였으며 사후 사공으로 추존되었다. 이연이 의왕으로 추존하였고, 674년 당고종이 의조 광황제로 추존하였다.

3 후당의 의조

묘호의조(懿祖)
시호소열황제(昭烈皇帝)
주사집의(朱邪執宜)
생몰기간? ~ ?

추존황제 소열황제(昭烈皇帝) 주사집의(朱邪執宜)는 후당 장종(後唐莊宗) 이존욱의 증조부이다. 이존욱이 즉위 후 의조 소열황제로 추존하였다.

4 의 의조

요의 추존 황제
숙조 소열황제 야율누리사의조 장경황제 야율살랄덕현조 간헌황제 야율균덕식덕조 선간황제 야율적노
의종 문헌황제 야율배장숙황제 야율이호순종 순성황제 야율준
묘호의조(懿祖)
시호장경황제(莊敬皇帝)
야율살랄덕(耶律薩剌德)
생몰기간? ~ ?

추존황제 장경황제(莊敬皇帝) 야율살랄덕(耶律薩剌德)은 요태조 야율아보기의 증조부이다. 야율아보기가 즉위 후 의조 장경황제로 추존하였다.

5 의 의조

항목 참조.
  1. 작제건 설화에서 부친으로 등장하나, 왕씨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창작임이 거의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