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憲宰
1944년 4월 17일 ~
대한민국의 경제공무원, 정치인이다. 장인어른이 진의종 전 국무총리이다.
1944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8.15 광복 이후 귀국하여 성장하였다.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1968년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에 발령받아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재무부 금융정책과장 시절 8.3 사채동결조치를 입안했고, 1974년 제1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외환 문제 해결에 참여했다. 그러나 1979년 율산그룹[1] 사태에 휘말려서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가서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한국신용평가 사장, 대우그룹 계열사에서 상무이사, 대우반도체의 대표이사 전무로 활동하였다.
1997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조순 한나라당 총재와의 인연으로 이회창 후보의 경제특보가 되어서, 경제공약을 입안하였다. 그러나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하자, 선거 일주일만에 김대중 당선자가 당시 외환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구성한 비상경제대책위원회에 기획단장으로 발탁되었다. 재무부 출신으로 자민련 몫으로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김용환 의원이 이헌재를 영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외에도 정운찬 서울대 교수, 이연홍 중앙일보 정치부장 등 여러 인사들이 이헌재를 추천했다고 알려져 있다.기사1, 기사2[2]
1998년에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그 해에 신설된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발탁되었다. 2000년 1월부터 같은 해 8월까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5월 18일 박태준 국무총리가 부동산 명의신탁 파문으로 조기퇴진하자 1주일 동안 국무총리직을 대행하였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2월 부총리 겸 재정경재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 해 고건 전 국무총리의 퇴임 후에도 신임 이해찬 국무총리 임명 전까지 총리직을 수행했다. 부인의 토지거래 관련 위장전입 의혹을 받자 2005년 장관직을 사퇴하였다.
김대중 정부 출범때부터 금감위원장과 재경부장관으로 당시 IMF가 요구하던 기업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이때문에 지금까지도 여러가지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한쪽에선 방만한 금융권과 기업에 대한 원칙적인 구조조정으로 한국경제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외환위기 조기 극복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높게 본다. 반면에 다른 한쪽에선 소위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재무부 출신 경제관료인맥 즉 모피아(Mopia) 그룹의 대부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여서 한국사회의 양극화를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구조조정도 정작 외환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재벌에 대해선 아무런 조치가 없이 오히려 알토란 같은 공기업과 대기업, 금융기관을 외국자본에 무분별하게 넘겨주면서 대량 정리해고 사태를 촉발시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