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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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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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35대 고건
직무대행 이헌재
36대 이해찬직무대행 한덕수
37대 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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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웃을 줄 알아요
이름이해찬(李海瓚)
출생일1952년 7월 10일
출생지충청남도 청양군
본관전주 이씨
최종 학력서울대학교 사회학 학사
소속 정당더불어민주당
지역구세종
의원 선수7
의원 대수 13, 14, 15, 16, 17, 19, 20
가족 관계5남 2녀 중 다섯째
배우자김정옥
자녀1녀
약력(현)제20대 국회의원
(전) 제13~17, 19~20대 국회의원
(전) 국무총리 (2004년~2006년)
(전) 교육부장관 (1998년~1999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 (1995년)
외부 링크[공식 사이트]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마감된 가운데 이해찬 무소속 후보가 세종시 도담동 선거사무소에서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자 선거 캠프 직원들 및 지지자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1]

Cf7pjPtUEAAbS5S.jpg
가만있자 내가 몇선이였더라? 에이 모르겠다 떡이나 자르자
지지자들과 20대 총선 당선 축하 떡을 자르는 이해찬 당선인. 참고로 이해찬 바로 왼쪽에 있는 인물은 이춘희 세종특별자치시장.[2]

1 개요

한국의 정치인이자 사회학자. 민주당계 정당의 대표적 전략가 중 한 명으로 유명하며 그 능력을 인정받아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의 요직을 지낸 인물이다. 사회학 기초 교과서 중 하나인 C. 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공역하기도 한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르비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3]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던 시절 고인의 자발적인 역할 분담으로 역대 국무총리들 중 가장 강력한 권한을 휘둘러 실세 총리의 대명사로 불리며[4] 더불어민주당에서 문재인 전 대표와 함께 친노무현계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투 탑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리고 무려 7선 국회의원인데 이는 더불어민주당 현역들 중 최다선이며 20대 국회를 통틀어서는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8선) 다음가는 수준이다.

이회창자유선진당 총재와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기 쉽다. 또한 정의당노회찬 의원이랑 헷갈리는 사람도 간혹 보인다고.


2 생애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현 청양읍) 출신. 참고로 이해찬의 조상은 덕흥대원군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시절 여타 정치인들과는 달리 이해찬은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부친인 이인용씨가 청양면 면장 출신이기 때문. 이인용씨는 해방 후에 32살의 나이로 청양면장을 맡아 4.19 혁명 때까지 면장을 지냈을 정도로 마을주민들에게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이승만자유당 정권에 말기에 치러진 지방선거[5]에서 야당 후보로 나서 면장에 당선 되었다고 하니, 지역 주민들의 신망이 투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서울로 상경해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를 입학한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를 다녔으나 적성에 맞지않아 자퇴하였고, 이듬해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로 재입학했다.[6]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주로 운동권에서 활동했는데,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약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 사건 후 무역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는등 재야 인사로 지냈다.

그러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이 되었다가 해금 조치되면서 1980년 복학하여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았는데, 그해 6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해찬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7]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그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1985년에는 처음 서울대를 입학한지 14년만에 졸업하였다. 1987년말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을 지냈다.


3 정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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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총선 포스터[출처]

학생 운동의 이력을 지니고 있었던 이해찬은, 여러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관악구 을 지역구로 공천을 받아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5회 연속으로 관악을 국회의원 당선에 성공했고 20대까지 합해서 현재 7선 의원을 기록 중이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주로 야당이었지만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고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아 정권 교체에 공을 세웠다. DJP연합 당시 정책 공조 협상으로 이해찬 의원은 선거 전략가로 더 알려지게 된다.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에 따르면 선거 운동 들어가기 직전에 이긴다고 말하며 퍼센티지까지 말했는데 소수점까지 딱 맞아떨어졌다고.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여당의 일원이 된 이후로는 교육부 장관으로서 교육 정책을 주도하고 공무원 성과급 제도를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부작용들로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교육 정책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을 딴 이해찬 세대를 양성하는 데 일조했다.

국민의 정부가 저물 때쯤 노무현을 지지하였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 되었다. 고건 당시 국무총리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고 얼마 안 가 국무총리에서 사임하자 후임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 시절 [국회 질의에서] [야당 측과의 공개 설전을 마다하지 않은] [파이터 기질을] [발휘했다].

국무총리대통령과 더불어 내각을 이끄는 막중한 자리지만, 대통령의 강력한 권한에 눌려 제대로 권한 행사를 하지 못하고, 그냥 얼굴마담이나 대통령의 방패막이나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노무현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면서 참여정부의 국무총리들은 비교적 강력한 권한을 휘둘렀다.

이해찬 총리도 그 혜택을 본 인물로서 '대표적인 책임총리(또는 실세 총리)'[8]라는 타이틀이 생겼고,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을 지휘하는 등 현실 정치에서도 실세 총리로서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 지금도 책임총리나 실세 총리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 이해찬 총리다.

그러나, 강원도 양양군에 산불이 번지는 와중에도 골프를 친 사건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고, 이후로도 이런 행적은 정치적 부담이 되어버려 평생까임권 공격의 주요 소재가 되어버렸다. 이후 골프와 관련된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국무총리에서 사퇴했다.

사실 이해찬 총리가 재직 시절 골프로 구설에 오른 것은 양양 낙산사 산불건 외에도 몇 차례 더 있었다. 가장 먼저 구설에 오른 포천 포사격 훈련 사고는 당시 골프를 치다가 사건 보고를 받고 즉각 조문을 가서 별 문제가 안 됐지만, 양양 낙산사 산불 사건으로 상당한 논란이 되었고, 같은 해 남부 지역에 홍수로 수해를 입고 있었는데도 제주도에서 골프를 치는 바람에 빈축을 샀다. 결정적으로 2006년 3.1절 기념식에 불참하고 부산에 골프치러 갔던 것이 발각되자 청와대에서도 쉴드를 포기했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정도면 좀 지나친 골프광

10년 만의 정권 교체로 다시 야당이 된 이후 유시민친노 세력을 모아 탈당한 뒤 기존의 열린우리당의 부활을 염두로 신당 창당에 박차를 기울였다. 바쁜 일정 때문인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연임 기록은 일단 5선으로 마감했다. 그러다 대선이 임박해오자 민주통합당에 복당하였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서울호남이라고 불릴 만큼 서울에서 민주당 지지세가 제일 막강했고 자신이 내리 5선을 지내기도 했던 서울특별시 관악을 지역을 떠나 세종특별자치시에 출마했다.

이해찬 후보는 자유선진당심대평을 무려 14%P차로 밀어내고[9] 4년 만에 국회로 복귀했다. 당초에는 지역 거물 정치인이던 심대평의 당선이 점쳐졌지만[10][11] 이해찬 후보는 국무총리를 지낸 경력 하나만으로도 전국적인 인지도가 월등한 데다 국무총리 시절 세종특별자치시 설립에 앞장선 경력도 있고 여기에 지역적 연고까지 있어서 생각보다 큰 7000여표 차로 이겼다. 여담으로 2년 뒤 치뤄진 6.4 지방선거에서도 세종시장은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당선되기도 했다.

민주통합당의 첫 지도부였던 한명숙 지도부가 19대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그 뒤를 이을 당대표를 뽑는 전당대회 경선에 출마해 김한길 의원 등을 쓰러뜨리고 당선되기도 했었지만 대선 국면에서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지도부 인적쇄신론이 나오면서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당대표 대행을 맡기고 사퇴했다.

그 후에 한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다가 박근혜정부개성공단을 일방적으로 폐쇄하는 조치를 내리자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노동자들에게 들어가는 임금의 70%가 북한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개발에 들어간다'고 주장했다가 야당이 '이명박 정부부터 지금까지 약 5억 2000만 달러가 개성공단에 들어갔는데, 이 돈이 무기 개발에 쓰여진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방치했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반론하자 급히 말을 바꾼 것을 두고 한 차례 비판한 뒤, 현역 통일부 장관도 모르고 있었던 개성공단의 임금 흐름을 설명하며 홍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자후를 보여주기도 했다.[#]

2016년 3월 14일, 더불어민주당김종인 지도부가 그의 지역구인 세종시를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해 이 의원을 쫓아내면서 다시 그의 존재감이 되살아났다.

공천관리위원회는 이해찬 후보에겐 부적격 사유가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그를 공천하려고 했지만 김종인 대표가 차일피일 결재를 미뤘다고 한다. 이 행동을 놓고 모두들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에게 '내 손으로 잘라내기 전에 본인이 명예롭게 물러나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해찬 의원은 자진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결국 더민주 지도부는 이해찬 의원을 쫓아내기에 이른다.

김종인 대표는 '정무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며 이해찬 후보를 컷오프한 구체적인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언론에선 주로 당내 다선 의원 물갈이의 연장선상에서, 또는 실체없다는 말도 많지만[12] 어쨌든 많이 비판받는 '친노 패권주의'를 표면적으로나마 청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친노계 좌장인 이해찬 의원을 제거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도 정치권의 호사가들은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이라면 무소속으로 나와도 충분히 생환할 수 있을 터이니 더민주의 총선 승리를 위해 '컷오프 → 탈당 → 무소속 당선 → 복당 시나리오'를 암묵적으로 종용했고, 이해찬 의원도 그 뜻을 캐치해서 '김종인친노를 제거하고 있다'는 모습을 크게 홍보(?)하기 위해 최대한 요란하게 탈당한 게 아니냐는, 마치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고수들 간의 말없는 대화라며 낄낄거리기도 했다. -하기야, 둘 다 정치판에서 구른지 수십 년인데 이 정도도 주고 받지 못하면...-

또 부수적인 이유로는 과거 서울 관악을 선거에서 이해찬 후보와 맞붙었다 패했던 김종인 대표의 사적인 감정(...)에서 기인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었고[13] 세종시에서 여론조사를 돌려보니 결과가 형편없어서 탈락시켰다는 말도 나온다. 심지어는 문재인 전 대표가 친문계 세력으로 친노계를 재편하려고 배후에서 조종해 친노계의 2인자인 이해찬 의원을 김종인 대표를 통하여 쫓아낸 거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다 나왔다. 기자들의 상상력이란

언론 보도를 인용하자면, 문재인 전 대표 쪽은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을 잘라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해찬 의원 컷오프가 확정되기 전날, 문재인 전 대표와 김종인 대표가 전화 통화를 했는데 여기서 김 대표는 '전체 선거 구도를 위해 어쩔 수 없다. 내게 맡겨달라'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를 보면 김 대표 본인도 '친노 패권주의' 프레임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일반 대중의 시각을 생각해 이해찬 의원을 일찌감치 잘라내기로 마음을 먹었던 거 같다.

어찌되었든, 탈당은 없을 거라는 언론의 추측성 보도와는 달리 이해찬 후보는 3월 15일, "어떠한 결격 사유도 없는데 모욕을 주고 강제로 쫓아내면서 친노를 척결한다고까지 말하는 객관적이지 않은 공천 방식은 인정할 수 없으므로 무소속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종인 대표는 이해찬 후보의 상대로 다른 곳에서 출마를 준비하던 인지도 낮은 후보를 보냈다 다만 자길 따라 동반 탈당하겠다는 세종시 당원들과 시장, 시의원들은 당에 남아 있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하고, 본인도 당선될 경우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결과는 새누리당 박종준 후보, 더민주 문흥수 후보를 여유 있게 꺾고 비교적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당선된 직후 인터뷰에서 이해찬 의원은 김종인 대표의 '정무적 판단에 따른 컷오프'에 대해 엄중히 항의해 사과를 받아낼 것이며 복당이 된다면 당을 바로잡겠다'며 복당하면 차기 당대표 선거를 겨냥한 듯한 뉘앙스를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당선으로 그는 7번의 선거에서 한 번도 지지않고 전승한 국회의원이 됐는데, 이는 윗 당선 수를 따져봐도 9선 의원인 故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자민련 총재, 박준규 전 국회의장 외에는 없으며, 8선 의원 중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경우 2번의 낙선, 정일형 전 의원의 경우 한 번의 2위가[14] 있으며, 새누리당서청원 전 최고위원의 경우 1번의 낙선이 있어 김재광 전 의원만 8선 모두 당선(!)되는 진기록을 가졌다. 같은 7선 의원인 정몽준 전 의원은 국회의원 선거는 7회 모두 당선되었으나, 2014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패배하여 1번의 낙선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해찬 의원은 농담 삼아 "좀 교만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왜 선거에서 지는지 모르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당선되는 즉시 복당하겠다며 복당을 일찍이 천명했지만, 탈당한 인물들을 복당시키느냐 마느냐를 놓고 싸우고 있는 새누리당과는 달리, 더불어민주당은 탈당해 무소속으로 20대 국회에 입성한 이해찬, 홍의락 두 의원의 복당 문제를 거의 거론하지 않는 분위기다.

홍의락 의원이야 본인이 복당할 뜻이 아직은 없다고 말했으니[15] 그렇다고 친다지만, 이미 본인 스스로도 복당을 천명한 바 있고, 더불어민주당의 가장 튼튼한 지지층인 친노 성향의 지지자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한 이해찬 의원의 복당을 입 밖에도 꺼내지 않는 것은 이해찬 의원이 복당해 전당대회에 출마하면 아마도 가장 유력한 당권 주자가 될 것이고, 그럼 김종인 대표는 자기가 갖고 있었던 당 지휘권을 앙숙(?)인 이해찬 의원[16]에게 넘겨줘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걸 원치 않아서라고들 보고 있다.

그래서 이해찬 의원의 복당은 빨라도 아마 더불어민주당의 새로운 공식 지도부가 선출된 다음인 2016년 가을 즈음, 늦으면 대선 직후에나 이뤄질 듯하다. 이해찬 의원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아마도 2016년 9월 쯤에 복당할 수 있을 거라 내다보는 중이라고.[#] 일단 일여다야 구도에서 무소속으로 나갔는데도 무난히 당선돼 '컷오프는 잘못됐다는 걸 세종시민들이 입증해 주었다'는 등의 명분도 생겼고 전당대회에서 친노 성향 최고위원들이 다수 당선되고 친노 진영에서 밀었던 추미애 대표가 압도적 득표율로 새로 당선되면서, 복당은 시간 문제일 듯.

2016년 8월 18일, 세종시 전동면에 있는 자신의 전원주택 근처에서 퇴비 냄새가 난다고 해서 민원을 넣었다.[17]이에 세종시청에서부터 심지어 세종시 행정부시장까지 나서서 이웃 농민의 퇴비를 15톤이나 수거해 가는 바람에 갑질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악취의 농도도 허용치 안이었다는 말이 있었다. [관련 기사]

그러자 이해찬 의원실에서 반론을 제기했다. 문제의 퇴비는 일반적인 퇴비가 아닌 돼지 분변을 바탕으로 한 퇴비로, 악취가 심해 그 주변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이 찜통 더위에도 창문을 열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이해찬 의원도 세종시를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이지만 무엇보다도 함께 피해를 보고 있었던 인근 주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주민들을 대표해 민원을 넣었다는 거였다. 세종시청에서는 '가축분뇨의 관리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땅 주인에게 수거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구 & 보수 진영 지지자들이나 반노 성향의 야권 지지층의 반응은 대체로 '전원 생활을 하려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것'이라며 갑질이라고 주장한다. 새누리당 세종시당도 '이해찬 의원의 민원은 황제 민원이다'라며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문제의 해당 비료를 조사한 결과 중금속아연 함유량이 기준치를 초과해 부적합 결과가 나왔으며 설상가상으로 해당 마을은 상수도를 쓰지 않고 지하수를 쓰는데, 비료가 뿌려진 땅이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중금속아연이 마을의 상수원으로 흘러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의 발행인은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 쪽과 가까웠던 당직자를 몰아내고 더민주 세종시당 사무처장에 앉힌 사람이라 중립적인 시각에서 나온 보도인지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나왔다.[#]

2016년 9월 30일 열린 더불어민주당 당무위원회의에서 이해찬 의원과 징계를 받았던 세종시당 당원들의 일괄 복당을 의결하면서, 더불어민주당에 복귀했다.[[1]]

4 이해찬 세대

교육부 장관 시절 추진한 정책으로 인해 영향을 받은 세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해찬 세대 문서 참고.


5 트리비아

신림동에서 1978년부터 '광장서적'이라는 서점을 운영한 바 있다. 이 서점은 이해찬이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동생 이해만이 운영하였으며, 처음에는 인문사회과학 서점이었으나 1990년대 들어서는 고시서적도 많이 취급하게 되었다. 유서가 깊고 규모가 큰 서점이어서, 신림동 고시서점 중 목이 좋고 가장 유명했던 '상원서적'과 함께 신림동 고시촌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으나, 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되면서 여느 고시서점들과 마찬가지로 몰락하여 2012년 12월 31일 부도를 내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6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관악구 을)
평화민주당39,950 (31.2%)당선 (1위)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민주당64,035 (44.7%)당선 (1위)1995년 7월 의원직 사퇴
(조순 시장하 서울시 정무부시장 임명)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새정치국민회의54,049 (44.9%)당선 (1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새천년민주당48,751 (47.5%)당선 (1위)2003년 열린우리당으로 당적 변경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열린우리당49,673 (41.1%)당선 (1위)
2012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세종특별자치시)
민주통합당22,192 (47.9%)당선 (1위)첫 세종시 국회의원
2016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세종특별자치시)
무소속46,187 (43.7%)당선 (1위)본인 선거이력상 최초로 무소속으로 당선, 세종시 재선 국회의원

신기하게도 당명이 모두 다르다. ㅎㄷㄷ[18]
  1. 저 사진에선 무표정한데, 사실 저 사진은 박수부터 치는걸 찍어서 그런거고 [실제로는 웃었다.(!)]
  2. 단순히 자치단체장과 지역 국회의원의 관계가 아니라, 이해찬 의원이 총리 시절 지금의 세종시를 적극 추진하고 이춘희가 행정복합도시건설청장으로 현장 실무를 담당했던지라 매우 사이가 각별하다. 그래서 이해찬 의원의 컷오프 때 이춘희 시장까지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려 했으나 이해찬이 적극 만류했다고. 이해찬 : 난 어차피 당선될 건데 뭘 자네까지 탈당해? 나중에 와서 떡 자를 준비나 해
  3. 이해찬이 교육부 장관 시절에, 오르비 유저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수시'를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4. 2016년 현재 자신의 국회의원 지역구인 세종시의 설계 및 추진 또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5. 1956년 지방선거로 추정
  6. 신경민MBC 앵커, 현 더불어민주당소속 국회의원과 같은과 동기(72학번)
  7.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항목 참조. 당시 학생운동 전력의 요시찰 인물들이 많이 피해를 봤다.
  8. 사실 이회창이나 김종필도 비슷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권한을 행사하려 해도 대통령과 마찰을 일으키고 사퇴하기 일쑤였다. 이해찬은 본인 의지와 노무현 대통령의 자발적인 역할 분산이라는 박자가 맞아 이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셈.
  9. 정확히는 이해찬 47.9%, 심대평 33.8%
  10. 심대평은 공주시 출신으로 관선 대전시장, 관선 1회 + 민선 3선 충남도지사에다 대전 서구을과 공주시 - 연기군에서 총 2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충남의 맹주를 노리는 인물이었다.
  11. 정당 활동으로는 충남도지사 시절에 자민련 세력을 모아서 국민중심당을 창당, 이후 당대표를 거쳐 17대 대선에 나가기도 했다. 이후 합당하면서 자유선진당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이하게 보수 진영임에도 한나라당이나 새누리당과의 접점은 적은 편. 이해찬에게 패한 후 결국 그대로 자유선진당과 함께 정계에서 사라졌다.
  12. 대놓고 진박 타령하다 쪽박찬(...) 친박에 비하면 강도가 덜한 건 사실이지만, 대법원 판결까지 거스르고 한명숙 전 총리 쉴드를 쳐 당내 반발을 부르는 등 친노 패권주의라 불릴만 한 행태가 분명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허나 진짜 패권을 부리고 있었다면 애초에 '패권'이란 말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런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찍어누르는 게 패권주의니까.
  13. 사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게, 그 선거가 치러졌던 1988년 당시 서울은 평화민주당의 제2홈그라운드나 다름 없었다. 87년에 치러졌던 13대 대선에서도, 14대 대선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1위를 차지한 지역이기도 했거니와 서울 관악구는 더더욱 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민정당 후보가 이길 가능성이 엄청 낮은 곳이었다. 때문에 이때 패배한 것을 무려 28년(...) 동안이나 곱씹었다는건 근거가 너무나 부족하다.
  14. 9대 총선, 중선거구제 하에서의 당선
  15. 이후 대선 전까지 무소속 신분을 정리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더민주로 갈 가능성이 높지만, 다른 을 선택할 여지도 남겨두었다.
  16. 위에 쓰여있듯이 김종인 대표는 13대 총선에서 본인의 출신지인 서울 관악 을에 출마했다가 이해찬에게 패배해 낙선한 적이 있다.
  17. 여담이지만 우리나라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살고 있는 집과 본인 지역구가 따로따로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이해찬 의원처럼 사는 곳과 지역구가 일치한 국회의원은 그리 많지 않다고. 그리고 이해찬 같은 중진 다선 국회의원은 장관급이고 세종시장은 차관급이다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게 당연하다. 서울특별시장의 경우도 장관급이기 때문에 주무 부처 장관의 명령과 권고도 거부할 수 있다.
  18. 이인제 전 의원이나 김한길 전 의원처럼 탈당을 밥먹듯이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가 몸 담고 있었던 민주당의 이름이 자주자주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건 김진표도 마찬가지다. 물론 신민주연합당 시절과 열린우리당 입당으로 인한 탈당 및 20대 총선에서의 무소속 출마등 3번 탈당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