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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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형택
생년월일1976년 1월 3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강원도 횡성
출신학교건국대학교
신체 사이즈180Cm, 88Kg
소속팀삼성증권
그랜드 슬램 경력
호주 오픈2회전 (2003, 2008)
프랑스 오픈3회전 (2004, 2005)
윔블던3회전 (2007)
US 오픈4회전 (2000, 2007)
수상 경력
아시안 게임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은메달(복식), 금메달(단체)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은메달(단식), 은메달(복식), 은메달(단체)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은메달(단식), 금메달(단체)
유니버시아드1999 팔마 유니버시아드 금메달(단식), 금메달(복식)
개인전 통산 성적161승 164패
커리어 타이틀 획득1회
복식 통산 성적40승 72패
복식 타이틀 획득1회
상금 획득2,355,686 달러

1 개요

대한민국테니스 선수 겸 테니스 지도자. 그리고 MBC SPORTS+의 테니스 해설위원이기도 하다. 아시아 선수가 성공하기 힘든 테니스에서 고군분투하며 대한민국 테니스의 자존심으로 활약한 선수였다. 오른손잡이이며 한손 백핸드를 구사하고, 하드 코트에 강한 특성을 보였다. 개인 세계 랭킹 최고 순위는 ATP 싱글 랭킹 36위(2007년 8월 6일)[1], 복식 세계 95위(2006년 1월 16일)로 단식과 복식에서 모두 세계 100위권 안에 들었던 수준급의 선수였고 선수 생활 때 온갖 한국 남자 테니스 사상 최초 기록과 최연소 기록을 세우던 선수였다.

한국 테니스계는 2009년 이형택 은퇴 이후 이형택의 공백을 메워줄 후계자 육성에 실패하년서 수년간의 긴 침체기에 빠질 정도였다. 2015년에 들어서야 정현이 맹활약하면서 이형택의 제대로된 후계자가 등장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테니스계에 이형택은 한국 선수도 어쩌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증명이면서 한편으로는 높은 기준이기도 했다.

2 선수 시절

2.1 프로 전향~1999년

1995년 프로 전향 이후 1995년 4월에 한국서울에서 열린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에 주최측이 초청한 본선 와일드카드를 받고 처음으로 ATP 투어 남자 단식 본선에 출전하여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국내 최강자이던 3년 선배 윤용일을 2-0(7-6<9-7>, 6-3)으로 꺾고 역시 처음으로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 16강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16강전에선 세계 랭킹 82위로 대회 8번 시드를 받은 그렉 루세드스키[2](캐나다)에게 세트 스코어 0-2(4-6, 4-6)로 완패하여 탈락하였다.

1995년 5월에 한국 테니스 서킷(퓨처스 대회 전신) 1차 대회 남자 단식에서 만 19세 4개월의 나이로 퓨처스급 대회 첫 우승을 달성했다. 1995년에 퓨처스급 대회 우승은 1번이었으나 4강에도 여러번 올라간 덕택에 1995년 연말 세계 랭킹 순위는 241위로 프로로 전향한 지 1년도 안되어 국내 선수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물론 이형택이 국내 선수들 중에서 독주한 것은 아니며 1999년까지는 3년 선배인 윤용일과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였다.

1996년 4월에 한국의 서울에서 열린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에 주최측이 초청한 본선 와일드카드를 받고 본선에 출전하였으나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세계 랭킹 111위인 알렉스 라둘레스쿠(독일)에게 세트 스코어 1-2(3-6, 6-3, 1-6)로 패하여 탈락하였다.

이형택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는 퓨처스급 대회 남자 단식에선 매년 지속적으로 여러번 우승하였지만 챌린저 대회 남자 단식에선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 하지만 1998년 12월에 태국방콕에서 개최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남자 테니스 단체전에서 한국팀의 일원으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받음으로서 군면제 혜택을 받게 되었다.

1999년 10월에는 중국상하이에서 열린 ATP 투어 하이네켄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이형택은 세계 랭킹이 288위였기에 예선전부터 출전하였는데 예선 3라운드를 모두 통과하며 본선에 진출하였다. ATP 투어 하이네켄 오픈 남자 단식 본선 32강전(1회전)에선 세계랭킹 100위인 라몬 델가도(파라과이)를 2-1(3-6, 6-4, 6-2)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16강전에선 세계 랭킹 153위인 토드 우드브리지(호주)와 풀세트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 세트 스코어 1-2(7-5, 2-6, 6-7<8-10>)로 아깝게 역전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1999년 11월에는 일본요코하마에서 열린 요코하마 챌린저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함으로서 이형택 자신의 첫 챌린저 대회 남자 단식 본선 결승 진출과 우승을 만 23세 10개월의 나이로 동시에 해냈다.

2.2 2000년

이형택/2000년 항목으로

2.3 2001년

이형택/2001년 항목으로

2.4 2002년

이형택/2002년 항목으로

2.5 2003년

이형택/2003년 항목으로

2.6 2004년

이형택/2004년 항목으로

2.7 2005년

이형택/2005년 항목으로

2.8 2006년

이형택/2006년 항목으로

2.9 2007년

이형택/2007년 항목으로

2.10 2008년

이형택/2008년 항목으로

2.11 2009년

2009년 1월 첫째주에 인도의 첸나이에서 열린 ATP 투어 첸나이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이형택은 본선 자동 출전권을 받아서 본선에 출전하였으나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세계 랭킹 55위로 대회 8번 시드를 받은 마르셀 그라노예르스(스페인)에게 세트 스코어 0-2(4-6, 5-7)로 완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2009년 1월 세째주에 호주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 신청할 때의 이형택의 세계 랭킹이 107위여서 본선 자동 출전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형택은 예선전부터 나섰으나 예선 1라운드에서 패하여 탈락하였다.

2009년 투어 초반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왼쪽 무릎 부상 여파로 좋지 못한 컨디션이었던 이형택은 최악의 부진에 빠지면서 2009년을 마지막 시즌으로 은퇴를 결심하는데 2009년 5월에 열린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과 2009년 6월에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에 출전하기 위해 치료에 전념하였으나 결국 왼쪽 무릎 부상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손목 통증까지 겹치자 예선전 출전을 포기했다.

부상 여파가 지속되면서 결국 이형택은 상당수 대회 출전을 포기하고 2009년 7월에 열린 데이비스컵, 2009년 10월에 열린 삼성증권배 챌린저 대회에만 출전한 후 2009년 11월 공식 은퇴하게 되었는데 이형택이 현역 선수로 달성한 커리어는 세계 랭킹 최고 36위,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16강(4회전) 진출 2회,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32강(3회전) 진출 4회,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 16강 진출 3회,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회, ATP 투어 남자 단식 준우승 1회, ATP 투어 남자 단식 4강 진출 5회[3]를 기록하였다. 현역 선수로 달성한 커리어로 보면 역대 한국 테니스 선수 사상 최고의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3 커리어 평가

아시아, 특히 테니스 불모지 출신으로 세계랭킹 40~100위대를 유지했던 투어 중견급 선수였다. 꾸준히 해외무대에서 뛰었다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겠지만 데이비스 컵, 아시안 게임, 올림픽 등 국가대표로 대회 출전하는 것을 종목불문 중요시하는 한국 스포츠계의 풍토때문에 실제 커리어에 도움이 안되는 종합대회, 단체전에 매번 차출되어 나갔고, 국내의 낮은 저변 확대를 위해 국내대회에 강제로 출전해야 했던 것 등 때문에 세계랭킹 관리가 힘들어 더 올라갈 기회를 놓치고 아쉽게 커리어를 마감한 케이스이다. 프로 전향은 1995년에 했다고 나와있지만 실제 해외 원정 투어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이형택 본인이 최근 언론에 기고한 칼럼에 따르면 대학 졸업 후인 2000년 8월에 US 오픈 출전을 겸해서 했던 미국 원정 투어 여행이 처음이었다고 하고, 다른 나라 프로 테니스 선수들처럼 빠르면 주니어 연령 막바지 시기나 늦어도 시니어 연령 초창기에 본격적으로 해외 투어를 도는 활동을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커리어를 쌓고 은퇴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면에서 한국 테니스 환경에서 나오기엔 굉장히 뛰어난 테니스 선수였다고 할수 있다. 그나마 1998년 자신이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단체전 금메달로 병역혜택을 받은 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단체전에서 한국팀의 주역으로 맹활약해 금메달을 따내며 전웅선, 김선용 등 후배 테니스 선수들의 합법적 병역 브로커 역할을 해준건 천만 다행(...) 이형택이 은퇴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이후 처음으로 노골드에 그쳤다. 아시아 끝판왕이었던 이형택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

이형택선수가 아시아에서 최상급(3손가락)에 들었던 건 맞지만 태국의 테니스영웅인 파라돈 스리차판[4]을 넘진 못했다. 상대전적도 밀리고, 아시안게임 단식 결승에서도 패배를 기록.. 대만의 루옌순[5]이나 일본의 마츠오카 슈조[6] 등도 실적으론 이형택과 맞먹는다.[7]

그리고 201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인 니시코리 케이[8]는 2014시즌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면서 스리차판의 커리어를 넘어섰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스리차판은 포스가 굉장했으나 전성기가 굉장히 짧았고 은퇴후엔 연예계 활동이나 타종목 외도(레이싱이나 골프 등)에 힘쓰고 있어서 자국내 테니스계에 남기는 업적으론 이형택선수가 더 높은게 사실이다. 이형택급의 실적을 기록한 선수가 대만과 일본에도 있다곤 하나 그 나라에서 테니스영웅으로 대접받는 극소수기도 하고. 한국 테니스계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존재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4 은퇴 이후, 그리고 현역 복귀!

2009년 11월 1일 은퇴식을 갖고 선수 생활에서 물러났다. 이후 춘천에 이형택 테니스 아카데미를 열고 테니스 유망주들을 길러내고 있으며, KBS N 스포츠의 해설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그런데 2013년 5월 현역 복귀를 선언하며 코트로 돌아왔다! 9월 한국선수권대회를 정식 복귀 무대로 보고 있다고. 이번 복귀는 이형택이 만37살의 나이에 복귀를 선언할 때까지도 이형택 이상의 선수를 키워내지 못한 한국 테니스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것 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인터뷰 테니스 코리아 인터뷰

이후엔 주로 코치에 전념하면서 복식경기를 병행중. 2015년 3월엔, 유망주 홍성찬 선수의 전담코치를 하며 홍성찬 선수와 퓨처스대회에 나가 1회전에서 톱시드 복식조를 꺾기도 했다.

5 기타

2014년 KBS 2TV의 오락프로그렘 우리동네 예체능 테니스편에 코치로 고정출연하였다. TV 오락프로그램 첫 출연이었다. 한편 당시 해당 프로그램의 여자코치는 가수 윤종신의 아내인 전미라 전 테니스 선수였다. 한편 2015에는 동 프로그램의 족구편에도 잠깐 출연한 적이 있다.

6 참고 링크

  1.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로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 기록이다.
  2. 1991년에 프로로 전환하여 2007년에 은퇴하였고 1997년에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 4위까지 기록하였으며 전성기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였던 선수로 1995년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할 무렵에는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회, 준우승 1회를 기록중인 젊은 선수였다. 특이점으로 1995년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 우승 직후인 1995년 5월에 어머니의 모국인 영국 측의 집요한 설득으로 캐나다 국적을 버리고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은퇴시의 통산 주요 성적은 1997년 US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1997년 윔블던 남자 단식 8강 진출, 1998년 마스터스 파리 오픈 남자 단식 우승, 마스터즈 시리즈 남자 단식 4강 진출 2회, ATP 투어 남자 단식은 우승 13회, 준우승 10회를 기록한 선수이다.
  3.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번과 ATP 투어 남자 단식 준우승 1번을 포함하면 ATP 투어 남자 단식 4강 이상을 7번 올라간 것이 된다.
  4. 니시코리 케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아시아 최고의 남자 테니스 선수를 꼽는다면 파라돈 스리차판을 꼽았다. 스리차판은 1997년에 프로로 데뷔하였고 2001년까진 이형택과의 대결에서 눌렸지만 이후엔 이형택을 압도하였는데 전성기가 2002년부터 2006년까지였는데 니시코리 케이 이전의 아시아 최고의 남자 테니스 선수답게 아시아 국적 선수로는 전성기 기간 중인 2003년에 세계 랭킹 최고 순위인 9위를 기록하였으며 2010년 은퇴 때까지 ATP 투어 통산 우승 5회, 준우승 6회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랭킹 최고 순위에 비해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은 1번도 8강에 진출하지 못했고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에서도 4강 진출 3회를 기록하여 큰 대회에서 부진한 편이었다.
  5. 2001년에 프로에 데뷔하여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최고 성적은 2010년 윔블던 남자 단식 8강 진출, ATP 월드 투어 남자 단식에서 기록한 최고 성적은 2014년 ATP 월드 투어 오클랜드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2010년에 세계 랭킹 최고 순위 33위를 기록한 대만 남자 테니스 선수 중 역대 최고의 선수.
  6. 1986년에 프로에 데뷔하여 1998년에 은퇴하였는데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최고 성적은 1995년 윔블던 남자 단식 8강 진출이며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 1992년 ATP 투어 서울 오픈 남자 단식 우승, ATP 투어 남자 단식 준우승 2회, 1992년에 세계 랭킹 최고 순위 46위를 기록한 선수로 니시코리 케이가 등장하기 이전의 일본 남자 테니스 역대 최고의 선수였다.
  7. 이들의 그랜드 슬램 대회 최고성적은 모두 이형택보다 살짝 위지만 대신 이형택은 루옌쉰이 못한 투어 우승을 기록한 점, 물론 마츠오카 슈조의 경우 그랜드 슬램 대회 성적은 물론이고 투어 대회 우승 1회, 준우승 1회로 투어 대회 우승 1회, 준우승 1회인 이형택보다 약간 위지만 대신 이형택은 마츠오카 슈조와 달리 투어 대회에 출전한 8년간 꾸준히 투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며 세계 랭킹 순위를 꾸준히 70위 이내의 위치를 유지하였고 여기다 마츠오카 슈조가 못한 세계 랭킹 순위 40위 안에 들어간 것을 고려하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8. 니시코리 케이는 만으로 20대 후반, 30대 초반인 요즘 남자 테니스계에서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한다. 동년배(89년생)에서 부상만 없다면 메이저 우승에 상당히 근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US 오픈을 우승한 델 포트로(88년생)는 부상으로 시즌을 통짜로 자주 날리고. 동년대 가장 강력한 경쟁자들인 어니스트 굴비스, 밀로스 라오니치, 돌고폴로브 등을 상대로 전적이 앞선다. 그리고르 드미트로브는 랭킹은 높지만, 아직은 애송이 그만 마리아 샤라포바랑 연애질 좀 적당히 하고, 테니스만 하면 대성할텐데 심지어 황제 로저 페더러에게 전적이 2-1으로 앞선다. 물론 세계 랭킹 1위 조코비치(88년생)가 나이먹어서 기량이 떨어져도 니시코리 케이가 실력을 유지하고, 니시코리를 위협할만한 상대가 나타나지 않는 다는 조건에서만이지만. 다만, 요즘 10대 후반, 20대 초반들의 면면들을 보면 도미닉 팀, 버나드 토믹, 잭 삭 등인데, 얘네들은 니시코리를 넘기 매우 힘들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