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렴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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垂簾聽政

1 개요

군주가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아직 정치를 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대왕대비와 같은 왕실의 최고 어른이 대신 신하들과 정치를 하는 일종의 섭정제도이다.

수렴청정이라 하여 대비가 정치 전면에 나선 것이 아니라 특정 날짜에 동행하며 조언하거나 반문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섭정과의 차이점은 그 명분인데, 섭정은 어린 왕의 어머니로서 아들을 대신하여 정치하며 보호한다는 명목인데 반해 수렴청정은 선대 왕의 왕비로서 함께 국가를 운영했던 공을 인정받아 어린 왕의 정치를 돕는 것이다.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여인은 한고제 유방의 부인인 여후다.

2 상세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보통 선대 군주의 정실(어머니 뻘)이나 선선대 군주의 정실(할머니 뻘)이 맡는다. 섭정 역할을 하는 여성은 군주의 뒤에서 을 내리고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그에 대한 하교를 내리는 형태였으며, 수렴청정이란 이름도 여기서 기인하였다. 발을 내린 이유에 대해서는 동아시아유교 사상에서 남녀유별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는 듯. 참고로 발을 내리고 뒤에서 하교하는 형태는 중대한 사안일 경우에 한하였고, 대부분의 사안은 신하들이 나서서 왕과 논의해 결정하거나 대비전과 정전(正殿)을 바삐 오가야 했다.

수렴청정이 무한정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왕이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판단하면 왕이 직접 통치하도록 하고 거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수렴청정을 그만두는 기준이 딱히 정해졌던 것은 아니나,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성종이 20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왕이 성인이 되면 수렴청정을 그만둔다는 선례로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도 명종이 20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물론 뒤에서 실세로 남아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3 사례

3.1 한국

한국왕비의 지위를 중시해서, 현재 군주의 생모라 해도 후궁에게는 후에 왕비가 되지 않는 한 수렴청정을 할 자격을 주지 않았다. 수렴의 경우 대비에게만 주어졌다.

고대고구려 태조왕이나 신라 진흥왕 등이 7세에 즉위하여 태후가 섭정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세에는 드라마로 유명해진 천추태후가 아들 목종(고려) 대신 섭정으로서 전권을 휘둘렀다.

조선시대에는 예종(정희왕후), 성종(정희왕후), 명종(문정왕후), 선조(인순왕후), 순조(정순왕후), 헌종(순원왕후), 철종(순원왕후), 고종(신정왕후) 총 8명의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수렴청정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단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지만, 이때 어머니(현덕왕후 권씨)와 할머니(소헌왕후 심씨) 모두 예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수렴청정을 해줄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었다. 단종은 실질적으로 서조모인 혜빈 양씨가 양육했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후궁이었기 때문에 섭정 자격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세종대왕문종의 명을 받은 고명대신들이 사실상 섭정을 했다. 단종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점에서, 문종이 즉위한 뒤에 새로 왕비를 맞아들였던지, 할머니 소헌왕후나 어머니 현덕왕후가 살아 있었으면 수렴청정을 할 어른이 있었기에 단종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만약 소헌왕후 심씨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면, 세조는 어머니에게 매우 극진했기 때문에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2]

단종의 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로 조선의 왕들은 정비가 죽으면 자기 나이가 많든 적든, 정식 후계가 있든 없든, 후궁이 몇 명이든 무조건 재혼해서 계비를 맞아들였다. 선조는 51세 때 19세의 인목왕후와 재혼했고, 인조가 44세 때 15세의 장렬왕후와 재혼했고, 영조가 66세 때 15세의 정순왕후 김씨와 재혼한 게 대표적인 예다. 세종대왕문종처럼 정실 왕비가 죽은 후에도 후계가 있다는 이유로 재혼하지 않았다가 왕실에 수렴청정을 할 여자 어른이 없어지는 상황을 막으려는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공식적으로 음양의 조화를 위해 왕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있었으므로, 반드시 이러한 이유에서라고는 볼 수 없다.

수렴청정으로 가장 큰 권세를 휘두른 사람은 문정왕후였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도 정국을 이끈 여걸이다.[3]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도 이런 여걸에 넣기도 하는데,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엔 사실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의 영향이 컸다는 말이 있다.[4] 순원왕후신정왕후도 수렴청정기에 정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다.[5] 다만 인순왕후는 그냥 선조의 후견인 수준이었다.

수렴청정을 한 역대 대비들은 다음과 같다.

정희왕후 예종(?)[6], 성종 7년
문정왕후 명종 8년
인순왕후 선조 7개월
정순왕후 순조 5년
순원왕후 헌종 7년, 철종 2년
신정왕후 고종 3년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 3년

숙종의 경우에는 불과 14세에 즉위해서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할법했지만, 워낙 강성인 그는 수렴청정도 거부하고 바로 친정에 들어갔다.[7] 최고령 수렴으론 19세의 예종은 실질적으로 수렴을 안한 것이니 19세의 철종이 2년간 순원왕후의 수렴을 받은 것이 최고령 수렴이라 하겠다. 가장 오래 수렴을 한 대비는 2차례에 걸쳐 근 10년간 수렴한 순원왕후다.[8] 신정왕후는 야사의 영향으로 흥선대원군에 놀아난 허수아비 정도로 평가되었으나 실록을 보면 조정에 여전히 목소리를 내는 기록이 많이 보이고 대원군의 개혁에도 적극 참여했다. 인순왕후는 16세의 선조를 위해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잠깐 수렴을 쳤다.[9] 정순왕후는 2차 수렴을 시도하려 했다가 이시수의 논리적 반대에 밀려 그만둔 바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에는 가장 최근에 일어난 수렴청정이라는 것과 64세의 나이라는 순실상 최고령이 수렴을
받았다는 의의가 있다.

3.2 서양

사실 서양에선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처럼 군주의 어머니가 섭정을 자청하여 정치를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보통은 왕가의 종친들이나 귀족들 중에서 힘 좀 있고 권력욕 있는 사람들이 섭정이 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서양의 경우 외국 왕실에서 왕비를 맞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기에, 군주의 어머니가 섭정하면 군주의 외가인 외국의 영향력이 강해질 가능성이 커서 이를 경계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렴청정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중국한국에 많은 편.

3.3 중국

중국에서 수렴청정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한나라여후청나라서태후다. 원래 수렴청정 자체가 중국의 제도다.

중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조선보다는 적서 차별을 덜 엄격하게 했기 때문인지, 선황의 후궁이라도 자신의 아들이 황제에 오르면 태후가 되어 황후로서의 시호를 받고 수렴청정을 할 자격이 주어진다. 정실 황후 출신의 태후가 살아 있다면 원칙적으로 후궁 출신의 태후는 그보다 수렴청정을 할 권한이 약하지만, 자격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3.4 일본

고대 일본에서 여성이 최고 집권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기에 대부분이 차기 유력황족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목적으로 임시로 맡는 역할로 일왕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인지 여성 덴노가까운 친척에게 실권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스이코 덴노 치세 때의 쇼토쿠 태자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별개로, 헤이안 시대인세이라는 독특한 섭정 체제가 만들어졌다. 막부 등장 이후에도 여성 일왕이 한번 등장했지만 실질적으로 인세이 등장 시기에 사문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1. 설령 극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머니가 섭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종에게 칼을 겨누는 건 곧 자기 엄마에게 겨누는 것과 같아져서 수양대군=불효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불효자 딱지는 아주 치명타이다.
  2. 사실 둘 다 사망했다고 쳐도 세종이나 문종이 아내를 또 들였다면 그래도 나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세조에게는 새엄마가 생기는데 새엄마도 엄마이므로 똑같이 대해야 했고 후자의 경우 적어도 섭정기간 중에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선왕의 왕비(=대비)란 정통성이 있으니 야심 많은 세조로서도 건드리기 힘들었다. 다만 이 경우엔 섭정을 빨리 끝내라고 압박은 할 수 있다.
  3. 스스로 여주, 여군이라 칭해도 아무로 뭐라 안 할 정도였다.
  4.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대게는 원상들의 자문에 의존했다.
  5. 그래도 사실 순원왕후는 친정에 의존했고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협조로 많이 임했다.
  6. 사실상 수렴으로 쳐주지도 않는다.
  7. 그래도 숙종 6년까지는 외척+종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8. 문정왕후가 20년이나 영향력을 행세했지만 그중에 8년만 수렴기간이다.
  9. 7개월인데 사실은 선조가 16세인만큼 선조가 20세가 되는 선조 4년까지는 해도 되었다. 아무래도 문정왕후를 의식해서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