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삼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No. 20
정영삼
생년월일1984년 4월 21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대구광역시
출신학교계성고 - 건국대학교
포지션가드
신체사이즈187Cm, 85Kg
프로입단2007년 드래프트 4번 (전자랜드)
소속팀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2007~ )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등번호 11번
김택훈(2006~2007)정영삼(2007~2008)서장훈(2008~2011)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등번호 3번
정선규(2006~2008)정영삼(2008~2010)송수인(2012~2013)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등번호 2번
박승환(2006~2007)정영삼(2010~2011)이현민(2011~2012)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등번호 8번
박광재(2011~2012)정영삼(2013~2014)김태형(2014~2015)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등번호 20번
이주열(1997~1998)[1]정영삼(2014~)현역

한국농구선수.

1 아마추어 시절

대구 출신으로 계성고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에 진학했다. 건국대학교에서 노경석과 함께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돌파력이 뛰어나고, 준수한 슈팅력을 갖췄는데, 특히 장신 선수들과 수비벽을 헤집고 들어가 성공시키는 돌파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비록 팀 전력이 강하지 않아서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대학 무대 최고의 슬래셔로 이름을 날렸다.

2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시절

200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4번[2]으로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에 지명받아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드래프트 후 팀에 합류했을 당시 용병 키마니 프렌드는 왜 저렇게 잘하는 선수가 지금 당장부터 뛰지 못하냐고 아쉬움을 드러냈을 정도로 극찬을 받았다.[3] 프로 선수로서 데뷔 첫 해에는 주전과 식스맨을 오가면서 팀의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주로 했고,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정영삼의 주가를 단 번에 올리는 일이 벌어지는데, 바로 2008 베이징 올림픽 세계 예선전이었다.

젊은 선수들 위주로 리빌딩을 하고 출전한 한국 남자 대표팀은 예상 외로 괜찮은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농구 팬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비록 슬로베니아, 캐나다에게 패하면서 아쉽게 토너먼트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상당히 준수한 경기력을 보여줬는데, 그 선봉에 바로 정영삼이 있었다. 유럽과 북미의 장신 선수들 상대로도 전혀 주눅들지 않으면서 돌파를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농구 팬들은 드디어 한국에도 자신감 있는 돌파를 성공시키는 선수가 나왔다면서 흥분했다. 특히 몇 달 후 NBA에서 뛰게 된 슬로베니아의 고란 드라기치돌파로 농락하면서 18득점 3어시[4]를 기록한 경기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다.

하지만 흥분도 잠시... 정영삼은 부상으로 인해 그 뒤로 기량 성장에 심각한 정체를 가졌다. 어깨허벅지를 다치면서 사실상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고, 슈팅력이나 돌파력 모두 성장보다는 정체 내지 퇴보를 겪으면서 팀의 전력 구상에서도 점차 주전보다는 백업으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8년 대표팀 이후 대표팀에서 제대로 된 기량을 발휘한 적도 없었다.

결국 2011년에 입대해서 2013년 초까지 상무에서 군복무를 수행한다. 2011-12 시즌 2군리그 MVP를 차지한 것을 보면, 부상만 없다면 어느 정도 기량은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

전역 후 실질적인 전자랜드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비록 다른 팀에서 에이스 소리 듣는 국내선수들에 비하면 스탯면에서 뒤질지 몰라도 2013-14 시즌 전자랜드의 컨셉 자체가 끈끈한 조직력에 의한 농구였기 때문에... 이는 문태종이 이탈한 데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전자랜드의 전력이 전시즌에 비해 하락했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정규시즌 4위로 준플 진출에 성공한 데는 이현호, 김상규 등 지난 시즌엔 식스맨급 전력이었던 선수들의 알토란같은 활약과 더불어 정영삼의 분투가 컸다. 팀 내에서 정영삼의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준 경기가 6강 플레이오프 마지막 5차전 KT전이었는데 이 경기에서 정영삼은 1쿼터 시작하자마자 발목을 접질리면서 실려나갔고, 정영삼 없는 전자랜드KT에게 그야말로 영혼 밑바닥까지 탈탈 털렸다.

이 시즌의 활약을 인정받아 시즌 후 남자 농구대표팀 예비명단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구단과 연봉 4억원에 5년의 장기 FA계약을 맺었다. 그대로 전자랜드에 뼈를 묻을 듯.

잦은 부상 탓에 적극적이던 돌파와 스핀무브는 이제 자주 보긴 힘들지만, 더 날카로워진 외곽슛과 미드레인지 게임으로 전자랜드의 토종 득점원 역할을 수행하고있다.

15-16시즌 KCC와 경기 중 정상적인 수비 과정에서 갑자기 허리 통증을 호소했고 더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다. 약 10여일 정도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듯.
유리몸이지만 그동안은 그래도 45경기 이상씩 꾸준하게 출전했었으나 이번 시즌은 정말 많이 못나오고 있다. 그래서 정병국이 퍼졌다

2.1 플레이 스타일

과거에는 좋은 운동능력[5]과 빼어난 스탭으로 슬래셔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속적인 부상 이후에는 돌파는 아주 가끔씩, 자유투 유도 정도로 시도하는 수준이다. 그렇지만 완성도 높은 점퍼를 가지고있어[6] 기본적인 자신의 득점은 해낸다. 스크린을 타고 던지는 미드레인지 점퍼, 팀오펜스에서 나오는 3점찬스가 주요 득점 루트이다. 다만 상대팀이 작정하고 정영삼에게 압박을 가하면 존재감이 매우 미미해지는데 패스능력이 기본은 하지만 좋은 수준은 아니라 2:2 플레이에서 상대 빅맨이 적극적으로 더블팀을 들어간 타이밍에 패스를 내주지 못하기 때문. 돌파라는 선택지가 거의 사라진 지금에는 더 부각되는 단점이다.

3 기타

이름 마지막 글자 때문에 동료 외국인 선수들에게는 (Sam)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듯 하다. 팀의 연고지인 인천광역시의 지역번호와 맞물려서 032라는 별명이 현재 가장 많이 불리고 있다.

처음 승선했던 국대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았으나 이후로는 국가대표와 인연이 없다. 부상이 워낙 많아 비시즌에는 경기를 소화할 몸상태가 아닌 경우도 많았고, 꽤 오랜기간 대표팀 감독을 수행한 유재학 감독시기에는 감독이 추구하는 수비와 맞지않아 선발되지 못했다. 항상 상비군에는 꾸준히 이름을 올렸으나 처음의 임팩트를 생각하면 농구팬에게는 아쉬운 부분.

초등학교 때 농구부에 들어가 첫 경기에서 처음 넣은 골이 자책골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골밑에서 수비 리바운드를 잡았는데 이걸 순간적으로 공격 리바운드로 착각해 바로 슛을 던진 것(...).

  1. 인천 대우 제우스 시절. 1997~1998 시즌 이후 2013~2014 시즌까지 KBL 기록에 따르면 결번이었다!
  2. 원래 창원 LG의 픽이었다. 전자랜드가 최승태를 LG로 보내면서 1라운드 지명권을 대신 받아온 것. 여담으로 당시 드래프트 1~3픽은 김태술, 이동준, 양희종으로, 뽑기운 더럽게 안 좋기로 유명한 전자랜드답게 다른 팀에서 받아온 픽조차 1~4픽 중 4픽이 걸린 것.
  3. 당시에는 2월에 드래프트를 해서 그 다음 시즌부터 뛸 수 있었다.
  4. 드라기치는 11득점 4어시
  5. 경기 중 덩크를 성공시키기도 했다
  6. 돌파가 워낙 주목받아서 슛이 좋지않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커리어내내 30후반~40초반대의 3점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