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괄

趙括
(? ~ B.C. 262)

중국의 전국시대의 무장…이 아니라 막장. 고대 중국의 똥별들의 대표주자.

(秦) 에게도 빳빳하게 굴 정도로 강해진 (趙)의 국력을 한순간에 말아먹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잔인하게 털려버렸다.

명장 조사의 아들이라 어려서부터 많은 병서를 익혔고, 아버지 조사보다 병법에 더 밝았다 한다. 그러나 어디 전쟁이 병법만 가지고 되는 것인가. 오죽했으면 '전쟁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인데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며 아버지가 아들더러 장수가 될 그릇이 결코 아니라고 했으니…. 아빠 말 좀 들어라!

조사가 죽은 뒤 진(秦)과 조(趙)가 전쟁을 벌였는데, 진의 백기가 백전노장 염파를 상대하기 껄끄럽자 '염파야 껌이지만 조괄은 좀 짱인 듯'하고 헛소문을 낸다. 애초에 염파가 전략적 견벽거수를 하고 있었고, 이 짓거리에 슬슬 조왕도 지쳐 있을 때라 이에 솔깃한 조 효성왕이 염파를 내치고 조괄을 장수로 기용한다. 이때 재상 인상여는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효성왕에게 "조괄은 고작 그의 부친이 남긴 병법서만 읽었을 뿐 전장에서 임기응변할 줄 모르므로, 그를 장수로 삼는 것은 마치 거문고 술대를 풀로 붙여둔 채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만류했다.[1] 심지어 조괄의 어머니(곧 조사의 아내)까지 나서서 "조사는 거느리는 식객이 수십이요, 나라 안팎에 수백의 벗을 두었을 만큼 인망이 두터웠으나, 조괄은 그만한 인망이 없고, 왕이나 종실에서 내린 하사품을 조사는 부하들에게 배풀었으나, 조괄은 독점하고 있으며, 출정 명령이 떨어지면 조사는 집안일에 일체 신경쓰지 않고 군무에 몰두한 반면, 조괄은 군무에 아랑곳없이 재산 불리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청컨데 조괄을 장수로 내보내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제발 자기 아들을 장수로 삼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효성왕은 듣지 않았고, 결국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뭔 사달을 내도 가족은 벌하지 않겠다는 조왕의 약조를 받고서야 물러났다. 당시 戰國의 법에 '삼군을 이끈 장수가 패적(敗積)하면 그 일족을 친다' 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괄의 어머니와 인상여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아니 그 어머니마저 이렇게 깔 정도면 등용하기 전에 좀 많이 생각을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효성왕도 만만찮은 찐따였거든

이렇게 낙하산으로 떨어진 조괄은 변변한 실전 경험도 없으면서 병법대로 나서겠다며 장평대전에서 염파가 기존에 세웠던 전략을 모조리 뜯어고치고 덤볐다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매복으로 털려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사망한다. 정확히는 명장 백기의 거짓퇴각에 걸려 두 갈래 길에서 역격당한 뒤 40일 동안 포위당하다가 굶다 못해 반자이 어택![2]

이때 사로잡힌 조의 병사가 무려 40만이었다. 진에선 이들 포로를 유지할 역량이 안 된다 판단해 생매장해버렸다. 동시대의 유럽과 달리 중국에는 조직적인 노예제가 없었고 노예를 사고 파는 시장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럽이었으면 포로를 노예 시장에 내다 팔았겠으나 당시 중국에선 이런 수단이 없었고 포로로 먹여 살릴 수 없다면 돌려보내거나 혹은 죽이거나 양자 택일을 해야했고, 특히 그냥 돌려보낼 경우 패배의 굴욕감에 불탄 이들이 뒤에 큰 후환거리가 될 거라 생각하고 이런 잔인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얄궂게도 훗날 그 후예들은 초패왕에 의해 생매장당한다.[3] 이후로 조는 국력이 쇠약해져 슬슬 막장테크를 탔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나라에 젊은 남자가 씨가 말랐을 정도라고 한다.

적절한 대상으론 삼국지마속, 깎아내리자면 하후무와 비슷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후한서> 마원전에 따르면 조사의 후손이 마원이라고 하는데[4] 조괄의 후손인지, 조괄의 형제의 후손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일화에서 유래한 성어가 지상담병(紙上談兵) 즉 주둥아리로는 우주를 정복할 기세 또는 입스타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다'이다. 종종 조괄병법이라고 표현할 때도 있다. 똑똑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꼴통을 일컫는 비유로 쓰인다. 이건 뭐 보통 고문관이 아니다! 역시 대륙의 똥별은 스케일도 다르다 참고로 이 시대의 紙는 필사용 하급 비단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이게 나중에 종이의 어원이 된다.

참고로 <사기>에 인상여 曰, 조괄은 合變[5]ㅇ벗어라고 하엿다.

조선 말기 순조 제위 초때 유배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중에서 아들들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을 책망하면서 조괄이 천하의 불효자식이라고 하지만, 아버지의 글을 잘 읽었기 때문에 어진 아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라면서 독서에 관심이 없는 아들들을 디스했다.

1 재평가

중국에서는 조괄에 대해 재평가하려는 언론들이 있는데 논리를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1. 생산력
진나라 보급선이 길어서 문제지만 상앙변법 덕에 생산력수준이 높았고 땅덩어리도 조나라보다 더 거대했기에 지구전으로 대변되는 국력싸움으로 가면 조나라 군량이 더 먼저 바닥날 가능성이 높다.

2.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누구나 다 첨부터 쌈 잘해서 데뷔하는 게 아니다. 명장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전을 거치며 경력을 쌓아야 하는데 조괄은 운수가 사납게 첫상대가 하필이면 진나라 탑클래스 명장인 백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천천히 무난하게 경력을 쌓으며 명장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3. 진나라도 상당한 대가를 치렀다.
"진나라 군사는 사상이 태반이었다." 라는 자료가 실제 존재한다. 즉 조괄이 죽기는 했지만 진군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는 얘기다.

물론 반박의 여지는 있는데,
1. 진나라도 분명 장기전을 치르기에는 껄끄러운 요소가 있었기에 온갖 술수를 써서 상대가 지구전을 포기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2. 경험 쌓는답시고 애송이를 주장으로 내세우는 건 말이 안 된다낙하산인사. 경험 쌓게 하려면 다른 장군 밑에서 부장으로 굴리면서 천천히 성장시킬 수 있는데 국운이 걸린 전쟁에 주장으로 내보낸 건 분명 병크짓이다.[6] 다만 이건 조괄 자신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조왕의 잘못이다.

3. 진나라 군사가 사상이 태반이랬지 그 피해를 조괄이 입혔다는 증거가 없다. 이미 양국은 3년 동안 장평에서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3년 동안 왕흘의 무모한 공성전으로 쌓인 피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신빙성 있다.

또다른 견해도 있다. 조괄이 무모한 공격을 한 것은 조괄 스스로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주장이다. 조나라의 왕이 직접 염파의 장기전에 불만을 표시하며 사령관을 교체한 상황에서 조괄에게 적극적인 공격 이외의 방법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효성왕이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는 조괄을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도 바로 자기 명령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염파는 경험도 많고 지위와 관록이 있는 만큼 왕의 지시를 거부하며 자기 뜻을 관철시킬 수 있지만, 똑똑하다는 명성만 있을 뿐 아직 어리고 아무런 기반도 없는 조괄로서는 왕의 의사를 따르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괄에게도 책임은 있지만 주된 책임은 효성왕에게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 이렇게 보면 조괄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기용하지 말라고 한사코 거부한 것도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참고)

2 창작물에서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에도 등장, 자신만만하게 맨앞에서 나는 조군 총대장 조괄이다! 너 같은 놈에게 볼일은 없다, 비켜라! 라고 왕의에게 외치고 일격에 끔살. 왕의 왈 "당신 때문에 몇년이나 해오던 전쟁이 시시하게 끝났습니다." 말하자면 금광 다쓰고 우방하고 있는데 갑자기 플레이어가 바뀌더니 있는거 없는거 다 모아서 닥치고 꼬라박했다가 털린기세. 일꾼도 긁어모은 거야.. 그런거야..?

삼국지 12에서는 당연히 나오지 않았고 대신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그의 후손인 마등 세력이 업 땅의 재야로 나오고, 마속이 조나라 소속으로 나오는데, 아무래도 조괄을 빗댄 인물 배치인 듯하다.애초에 같은 똥별이니
  1. 이 말에서 유래한 성어가 교주고슬(膠柱鼓瑟). 거문고로 곡을 연주할때는 거문고의 현을 받히고 있는 술대를 옮겨 곡에 맞게 악기를 조율해야 하는데, 이 술대를 풀로 붙혀놓으면 한 곡은 연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곡들은 연주할 수 없게 된다. 즉, 융통성이 없이 어리석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서, 병법을 잘 안다면서 그게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모르는 조괄이 딱 그러했다.
  2. 40일동안 포위당했다고 40일 굶는게 아니다. 일단 휴대한 군량도 있을 것이고 군량이 바닥나면 전마에서 시체까지도(흡좀무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먹으며 버틸 테니... 결정적인 건 사람이 40일 동안 굶으면 과연 일어설 힘도 있을까?
  3. 허나 항우가 생매장한 진의 군사들은 순수 100프로 진나라 사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4. 조사가 마복군이란 호를 받아 그 후손이 마씨를 칭했다고 한다.
  5. 합변. 합하여 변화함이라는 뜻이다. 무릇 전술, 전략이란 상황과 이치에 맞게 변화하고 적용해야하는데, 그냥 글이 써진대로만 하면 개발살 나기 일쑤이다. 마속이 가정에서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산에 진을 둔 것과 비슷한 것
  6. 그러나 여기에도 반박의 여지는 있다. 진나라 재상 범수가 워낙 철저히 기밀을 유지했기 때문에 당시 조나라 조정은 진나라 사령관이 백기로 교체됐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3년간의 대치로 진나라군의 공세는 거의 지리멸렬해졌기에 결정적 한 방을 날리기를 조왕은 원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염파는 계속 수성을 고집했으므로 조왕은 염파가 마땅치 않았다. 물론 염파가 제 역할을 훌륭히 해낸 것도 있지만 당시까지 진나라 사령관이던 왕흘은 대군을 이끌고 왔음에도 3년간 뻘짓만 하고 있었다. 아마 조왕은 왕흘 따위 상대하는데는 젊고 영리한 조괄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령관은 희대의 명장 백기로 바뀐 뒤였고 조나라는 캐망한다. 결국 조괄이 특별히 엄청나게 무능했다기 보다는 조나라랑 조괄이 재수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하는 전쟁에서 함부로 결정을 내려버린 조왕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