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騰
(? ~ 212년)
1 개요
중국 후한 말의 군벌이자 삼국지의 인물. 자는 수성(壽成).
2 정사
2.1 출생
마등은 우부풍 사람으로 남만을 정벌한 한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다.[1] 마등의 집안은 가난하여 그의 아버지는 마평(馬平)[2]은 장가를 들지 못했다가 강족 출신의 여자를 만나 국제결혼 마등을 낳게 된다. 마등도 가난하여 나무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사실 마등은 마원 이래 대대로 강족 등 이런저런 오랑캐들의 피가 마구 뒤섞인 탓에 중국인이라고 보기 힘든 외모를 갖고 태어났다.
2.2 양주의 반란자
184년 한수, 왕국 등이 강족, 저족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자 군(행정단위의 군)의 모병에 지원했다. 마등은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며 성격이 좋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에서는 마등을 남다르게 여겨 장교로 배치했으며 거듭 공을 세워 군사마를 거쳐 편장군까지 승진했고 양주자사 경비(耿鄙)의 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경비는 실정으로 애당초 반란의 씨앗을 만든 장본인인데다 반란을 막다가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었고, 반란군의 기세가 강하자 마등은 오히려 반란에 가담하며 왕국을 지도자로 받들고 반란군의 주요 인물로 활약했다.
정부군의 진압 책임자였던 동탁은 고전을 거듭했는데, 이에 조정에서는 황보숭을 투입했고 황보숭이 왕국을 격파하여 반란의 발기자인 한수가 왕국을 죽이자 지도자를 잃은 반란군은 와해되었다. 하지만 조정 또한 혼란스러운 상태였으므로 양주에서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온전히 미치지 못했고, 마등은 한수 등의 다른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무리를 이끌고 지역에서 할거했다.
2.3 사면, 군벌화
이후 동탁이 정권을 잡고 황제를 갈아 치우는 등 권력을 휘두르자 관동 지역의 관리들은 일제히 반발해 서로 연합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일으키는 등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에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하고 마등과 한수를 사면했다. 왕국의 사망 이후 지리멸렬한 상태였지만 아직 세력을 갖추고 군벌을 유지하고 있던 마등과 한수를 회유하여 자신의 지역적 기반인 양주에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지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192년, 동탁은 마등과 한수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관동 군벌들을 제압하는데 참가시키려 했으나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왕윤에게 암살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윤도 이각, 곽사에게 패하여 다시 정권이 바뀌었고, 이때서야 장안에 도착한 마등은 이들에게 정서장군의 관직을 받고 다시 양주로 돌아갔다. 마등은 얼마 전까진 반란군 수괴의 하나였지만 이각, 곽사가 정권을 잡은 이후 관직의 인플레가 극심했기에 이런 이례적인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다.
2.4 군웅할거 시대의 행보
194년, 마등은 자신의 군대를 먹일 군량이 모자라자 이각에게 원조를 요청하나 거절당한다. 크게 노한 마등이 장안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시중(侍中) 마우 등의 관료들 또한 이각, 곽사를 몰아내기 위해 내부의 호응을 빌미로 마등을 부추겼다. 이에 마등은 장안에서 50리 떨어진 장평관에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유언과도 연합했으나 내응 계획이 들통나 내응하던 마우 등은 모두 목이 날아갔고, 마등 또한 이각, 곽사의 공격에 참패한다. 이에 한수가 나서 마등과 이각의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지만 결국 마등에게 가세했고, 마등은 재차 이각, 곽사 등과 싸우지만 깨강정이 되도록 털리고 다시 양주로 도망친다.
이각은 마등, 한수와 내통한 관리들을 모조리 주살했고, 이를 핑계삼아 번조를 죽이고 그 무리를 병합했지만, 다시 마등, 한수를 사면하고 한수를 안항장군(安降將軍), 마등을 안적장군(安狄將軍)으로 임명한다.
이후 196년, 마등은 본디 한수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지만 사이가 틀어졌으며 마등은 한수를 공격하고 한수는 마등의 처자식을 죽이는 등 크게 싸웠다. 이 무렵 이각, 곽사 또한 서로 내전을 벌이다가 패망했고, 마침 황제를 옹립한 조조가 종요를 시켜 이들을 화해시키고 마등은 전장군, 괴리후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한수와의 화해는 일시적인 것으로, 이후에도 계속 대립과 화해를 반복했다. 양주는 마등, 한수 이외에도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3], 이들의 이해 관계는 제각각이었고 결정적인 주도권을 잡은 자도 없었기에 중원이 원소와 조조의 이강 구도로 굳어졌을 때도 서로 눈치만 보며 중립을 지킨다.
2.5 말년
202년, 원소가 병으로 죽자 조조는 황하를 건너 기주를 공격한다. 원소의 후계자가 된 삼남 원상은 직접 조조를 맞아 싸우면서 별도로 상장인 곽원을 파견해 조조의 측면인 관서 일대를 공격했고, 병주목 고간과 흉노의 선우 호주천에게 이를 지원하게 했고, 곽원은 파죽지세로 인근의 군현을 공략해 간다.
이때 마등 또한 원상과 연합하고 있었으나, 종요가 마등을 회유하자 원상을 배신하고 아들인 마초를 시켜 도하 중인 곽원군을 공격해 궤멸시킴으로서 조조의 측면을 안정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 뒤 208년, 나이가 많아 연로해지자 한수 등 다른 군벌들과의 분쟁이 계속되는 것에 질려 버렸는지 자신의 세력을 장남인 마초에게 물려주고 일가족 전원과 함께 업으로 가서 위위가 되는 등 군벌로서 은퇴하나, 211년에 마초가 한수와 함께 관중십장을 전부 규합하며 조조와 대판 붙었다가 개박살이 난 이후 212년에 조조가 마초의 삼족을 멸하면서 죽임을 당한다.
3 연의
연의에서는 서량태수로 나오지만 서량은 양주의 별칭이므로 군이 아니며 서량태수란 관직은 있을 수 없다.
후한에 반기를 든 반란군 출신인데다 군벌로서 특별히 강대한 세력을 일군 것도 아니며, 대단한 전과도 없고 전체적으로 기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군벌이었지만 '오호대장군 마초의 아버지'라는 설정 때문인지 연의에서는 한의 충신, 열사로 미화되었다.
《삼국지연의》에 한수의 난 자체가 안 나오긴 하지만 마등이 이 반란에 가담한 사실은 전혀 묘사되지 않으며, 이각, 곽사와의 싸움도 단지 한왕실에 대한 우국충정으로 묘사된다. 이후 정권을 농단하는 조조에게 분개하며 유비와 함께 동승의 조조 암살을 위한 연판장에 이름을 올리지만, 계획이 발각되자 서량으로 몸을 뺐고, 조조는 마등에게 이를 갈면서도 그 군사력을 두려워해 치지 못한다. 적벽대전에서도 방통의 책략을 간파한 서서가 마등이 배후를 노리니 자신이 이를 견제하겠다는 핑계로 몸을 빼는 등 그 조조 마저도 섣불리 건들지 못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등 드러나지 않는 실력자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 뒤 조조가 손권을 토벌하는데 협조하라는 핑계로 마등을 허창으로 불러들이자 이참에 조조를 암살할 생각으로 이에 응하나 계획이 발각되어 두 아들 마철, 마휴와 함께 처형된다. 조조의 악랄함을 강조하고 마등을 충의지사로 묘사하기 위해 작가가 수정을 가한 듯하다. 초기 판본에는 일종의 설정 오류인지 마초에게 조조 측 장수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욕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나중에는 삭제된다.
이런 탓인지 삼국지 갤러리에서 騰神이라고 깐다. 실제 역사에서는 기회주의적 역적인데, 연의 말그대로 신처럼 고결한 인품으로 미화 받고 이를 비꼬는 별칭이다.
4 가족 관계
- 마초 - 마등의 장남.
- 마휴 - 마등의 차남.
- 마철 - 마등의 삼남.
- 마대 - 마등의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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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록 - 마등의 딸. 반삼국지 등에서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
마완[4]
5 미디어 믹스
- 마등/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