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근(趙性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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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 1938년 | ||
복무 | 대한제국군 일본군 | |
기간 | 1893년 ~ 1931년 | |
임관 | 무과 급제 | |
최종계급 | 대한제국군 참장 일본군 중장 | |
최종보직 | 불명 |
1 개요
2 생애
1876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893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인이 되었다. 대한제국군 훈련대[1]에서 근무하다가 1895년에 관비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했다. 1896년에 원대복귀 명령이 내렸으나 복귀하지 않았다. 즉 탈영인데 1897년에 일본육사에서 교육을 수료했고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정부는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교육 후 대한제국군 부위(중위)로 재임관했고 병과는 보병이었다. 다시 일본에 유학 가서 돌아와 육군무관학교의 교관을 지냈다. 1900년에 정위(대위)로 진급했고 1904년에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군 접대위원으로 러일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04년 참령(소령), 1905년 부령(중령)으로 진급했다. 1906년에는 의친왕을 수행해 방일해 훈장을 받아왔다. 여러모로 이병무와 커리어가 거의 일치한다. 1906년에 정령(대령)으로 진급했고 1907년 군대해산 직전에 참장(준장)으로 진급했다. 군부 참모국장과 군무국장 서리를 지냈다.
1910년부터는 일본군 소속의 조선군주차사령부에서 근무했다. 1920년에 조선군이 일본군 계급으로 이동하면서 육군소장으로 진급했고 1928년에 육군중장으로 진급했다. 1931년에 전역했고 은사금으로 거액을 받았다.
그후 관변단체에서 일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이를 옹호하는 활동을 했다. 1932년 이봉창이 히로히토 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조선총독부에 사죄 의사를 밝히며 근신했다. 1933년에는 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1938년에 사망했다.
3 가족
그의 아들인 조백현(趙伯顯, 1900-1994)은 보성고보,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규슈제국대학에서 농학을 공부했다.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농학교수로 근무했다.
그의 장녀인 조남숙은 역사학자 이병도와 결혼했다. 즉 그는 이병도의 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