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군

大韓帝國軍. 대한제국의 군대.

1 연원

대한제국군의 성립 기반은 당연히 조선군이다. 그러나 1894년에 시행된 갑오개혁으로 인해 기존의 군제가 모조리 바뀌면서 새로운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 등의 조직을 통해 세를 불려 나갔으나 일본의 개입 및 국가의 역량 부족, 여기에 고위층들의 욕심이 겹쳐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았다.

병력 충원에 있어서는 국민개병제에 의거한 징병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은 있었지만 여건과 의지의 부족으로 시종일관 모병제를 채택, 유지하였다. 통수권자는 황제였다.

갑오개혁 직후에는 군무아문(軍務衙門)에 담당하였고 을미개혁 때 표현이 군부(軍部)로 바뀌었다. 군부대신이 오늘날의 국방장관 역할을 했다.

2 군종

200px-Imperial_Korean_Army_Soldiers.JPG
대한제국 육군의 .

2.1 육군

육군의 경우 해산 시점에서 티오상의 정원은 9천명 규모였으며 실제로는 8천명 정도가 있던 것으로 본다. 단 이는 4차에 걸친 군제 개편의 결과를 거친 수치이고, 2차 개편 때는 정원이 최대 2만 5천에 달하기도 했다.
250px-Training_Korean_Empire_Army.jpg
위는 훈련받는 대한제국군이라는 제목으로 돌고 있는 사진이나, 상황으로 볼 때 신형 기관총의 시연 행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훈련의 분위기가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봐도 저 기관총 사수(?)는 콧수염 기른 백인. 이를테면 설치 기사 또는 영업맨이 온 셈.

2.2 해군

%B1%A4%C1%A6%C8%A3.jpg
483791360529587c78006601.jpg
대한제국 해군이 두 번째로 도입한 군함 광제호와 승조원들

그나마 실체적으로 존재는 했던 육군에 비해 대한제국 해군은 정말 존재했다고 말하기가 눈물겨운 수준이다.

갑오개혁으로 수군을 혁파한 후 한반도에는 해상방위전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수군을 해체할 때는 장래에 현대적인 해군을 설립하여 해상방위를 맡기겠다...는 마스터플랜은 있었으나, 대한제국에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해군사관 양성을 위해 강화도 갑곶에 해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통제영학당을 설립하기도 했으나 정권이 바뀌면 곧바로 전 정권의 실적을 싹 밀어버리는 일이 빈발하니 지속적인 사업 진행이 되지 않아 졸업생도 못내고 폐교되었다(...).

그 와중에 고종은 군함만 있으면 최강해군이 되겠지 하고 군함 구입한답시고 사기나 당하고, 그나마 군함이랍시고 구입한 화물선은 항구에서 썩어가는 신세가 되는 막장 해군이다가 합방으로 아예 소멸한다.

기존의 진관 체제에선 통제영을 최고 기구로 하는 수군이 존재했다. 수군기지는 주로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883년 12월에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이 설치되고 민영목이 기연해방사무(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된다. 초기에 기연해방영은 경기도 연해만 맡아서 기연(경기도의 기, 연해의 연)의 수군 2천명만 관리했지만 곧 경기도 전체의 수군을 관리하게 되었으며 1888년 4월에는 통위영으로 개편되었다. 강화도에는 통제영학당(總制營學堂)이 설치되어 해군장교를 양성한다. 관련 블로그 해방영

1892년에 조정은 해군 양성을 위해 영국총영사에게 교관파견을 요청하였다. 1893년 3월에는 해군학교가 설치된다. 영국의 군사교관인 콜웰(W. H. Callwell) 예비역 해군 항해대위와 조교로 온 커티스(J. W. Curtis) 하사가 교육을 맡는다. 1893년 9월에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대상으로 교육이 시작된다. 하지만 일본을 비롯한 대외의 압박이 나타나면서 1894년 11월에 통제영학당은 폐교된다. 여기까지가 조선군에서 해군의 최후.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한동안 실질적으로 해군이 없다가 일본에서 1903년에 중고상선(석탄운반선)을 한 척 구입하여 갑판대포를 얹어 군함으로 개조하는데 이것이 한국의 첫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揚武號)이다. 4문의 80㎜ 포를 장고 5[1] 기관총 2정을 장착해서 화력도 빈약했다. 참고로 동시기 일본 해군연합함대 기함으로 쓰였던 전함 미카사의 무장은 305㎜ 주포에 부포로 152㎜를 달았다. 안습. 양무호는 1904년엔 러일전쟁 때 일본 해군이 징발해 사용한 뒤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부산에 가서 견습선원들을 위한 실습선으로 쓰이다가 1960년대에 철광석을 싣고 가던 중에 싱가포르 근처의 바다에서 침몰했다.

이듬해에는 1,056t급 광제호(光濟號)를 구입한다. 3인치 포를 3문 장착하고 있는 광제호는 배 자체도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에서 발주한 새 배로, 양무호와 비교하면 훨씬 괜찮은 함정이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 광제호는 해군 함정의 업무 대신 세관 측의 연안감시선 역할을 맡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석탄 운반에 쓰인다. 전반적으로 상선에 대포만 몇 개 달아놓은데다 중고 선박을 시가의 두 배라는 바가지 씌운 금액을 지불하고 살면서 화물선 역할밖에 못 했던 양무호보다, 그래도 밀수 단속 등의 업무에 동원된 광제호가 상대적으로 배의 성능이나 도입 목적 달성도는 높은 편이었다.

377904767529588b88915804.jpg
양무호와 광제호 두 척의 초대 함장은 모두 신순성(愼順晟, 1878~1944)이었다. 그는 대한제국 해군 해체 이후 상선사관으로 근무했다. 경술국치 전날, 신순성 함장은 광제호에 게양되어 있던 태극기를 내려 보관하고 있었는데, 조국 해방을 1년 앞두고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 신태범 박사가 광복 이후 열린 한국기선 취항식에서 일본으로부터 인수받은 기선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이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대한제국 해군을 다룬 책으로 한국근대해군창설사가 있다.

조선말 부터 들여온 대한제국 황실 혹은 정부 소유 함정들(기선, 500톤이상)[2] - 해군 함정은 아니지만 편의상 여기에 서술

  • 창룡호(蒼龍號, Signal) 경하 혹은 기준 403톤 만재 536톤 - 1887년 도입
  • 현익호(顯益號, 붕기복호, Bankchef Henrikssen) 만제 709톤 - 1892년 도입
  • 이운호(利運號, 조주부호, ???) 1000톤급 - 1893년 도입

3 구조 및 규모의 변천

갑오개혁 직후 조선의 군대는 새롭게 만들어진 훈련대와 해체된 기존 군영의 군사들을 모아 임시로 편성한 신설대가 유일했으며 그나마 서울에만 있었고 지방은 아예 무방비상태였다. 덕분에 을미의병이 아주 제대로 일어나게 된다. 막을 관군도 없겠다. 무기는 관아에 쌓여있겠다. 물론 김홍집 내각도 지방에 새로 만들어진 군대를 둔다는 구상 정도는 있었고 실제로 을미개혁 당시 평양 등지에 훈련대 대대를 두기도 했지만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면서 이는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만다.

이후 제정 러시아 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시위대가 다시 만들어지고 지방에는 해산된 구식군대의 병사들을 임시로 편성한 지방대와 진위대가 만들어진다. 또한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도 만들어지게 된다. 육군무관학교는 1896년부터 1909년가지 존속했고 해군 장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은 통제영학당 정도가 있지만 1894년 이후엔 유명무실해진다. 해군이 거의 관심사가 아니어서.

이후 점차 그럴듯한 모습을 갖춰가면서 제주에도 진위대가 설치되고 한성에는 육군법원과 병원까지 만들어지게 된다.

1899년(광무 3년)에는 최고통수기구인 원수부와 참모본부인 참모부가 개설되어 근대 군 통수기구가 도입되었다. 원수부 산하에는 군무국, 검사국, 기록국, 회계국이 설치되었으며 헌병사령부가 원수부 직속으로 설치되었다. 또한 황제의 근접경호를 맡는 경호실 격의 호위대가 창설되었는데, 원수부 군무국 총장이 호위대장을 겸임하였다.

초기엔 중앙군을 구성하고 지방군을 중앙군과 비슷한 편제로 고쳐나갔는데 편제상 1901년에 18,378명 규모였다. 실제론 1897년에는 중앙군인 시위대가 약 2,600명, 지방의 지방대는 7천 명 수준이었다. 1905년부터는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군축이 이뤄져 시위대는 2,513명으로 축소되고 친위대는 폐지되었고 지방군인 진위대는 4,438명 수준이었다. 합해서 7천 명 수준. 1907년엔 다시 군제개혁이 이뤄져 중앙군이 개편되면서 늘어나 4,215명이 됐지만 진위대는 4,305명이었다. 인원변화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지만 일본은 남부의 병력을 북부로 이동시키는 등 중국을 대비한 식민화 작업에 들어갔다.

4 계급

일본군의 계급체계를 모방했으나, 계급 상하관계를 일본의 대-중-소 체계와 달리 정-부-참 체계라는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하였다. 조선군의 관례상 대-중-소는 부대의 전투서열상 상하관계를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한 것. 현재도 구세군 대한민국 지부에서는 정-부-참 체계로 계급명을 나타낸다. 영관이란 표현은 현재 동북아에서 한국에서만 독자적으로 쓰이는 명칭이다. 중화권에선 교관급 장교로 표시하며 일본에선 좌관급 장교이다. 조선경비대 시절에 잠시 다시 정-부-참을 도입했으나 1948년을 지나서 대-중-소로 고정했다. 이 계급을 육해군 모두 썼는지 육군만 썼는지는 추가바람.

  • 원수급
  • 장군급
    • 대장 - 참모부 총장, 황제 시종무관부 무관장. 종1품.[3]
    • 부장 - 참모부 총장, 교육총감, 황태자 배종무관부 무관장. 정2품.
    • 참장 - 참모부 국장, 원수부 산하 각 국 총장, 교육부 총감/부감/참모장, 헌병사령관. 종3품.
  • 영관급
  • 위관급
  • 교관급(한국군의 부사관)
    • 특무정교
    • 정교
    • 부교
    • 참교
  • 군졸급(한국군의 병사)
    • 상등졸
    • 일등졸
    • 이등졸

병사와 부사관들은 계급장에 소속부대를 표기했으며, 참교부터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줄이 하나씩 추가되었다.
장교부터는 계급장 양 옆에 별이 표시되며, 장군부터는 별이 금색으로 바뀌었다.
위관급은 중앙에 태극문양, 영관급과 장관급은 중앙에 무궁화잎이 태극문양을 둘러싸고 있었다.
계급장이 잘 정리된 사이트들 1 2

1894년에 해당 계급을 설치했다. 실록에 따르면 대장은 연령정년이 없고 부장이 70세, 참장이 65세, 영관급 장교는 54세, 대위에 상당하는 정위는 47세, 기타 위관급 장교부사관은 45세였다.

주요 장관급 장교대한제국군/장관급 장교를 참고할 것.

5 편제

대한제국군편제
대한제국군 원수부대한제국군 군부대한제국군 참모부대한제국군 교육부대한제국군 시종무관부
대한제국군 동궁배종무관부육군무관학교
대한제국군 호위대대한제국군 훈련대대한제국군 시위대대한제국군 헌병대대한제국군 친위대
대한제국군 진위대대한제국군 상무영


대한제국군 편제가 잘 정리된 블로그

6 실전사례

황권 수호군이다 보니 실전 경험은 거의 없다. 다만 함경도 쪽 진위대가 간도 지역을 놓고 청나라와 국경 분쟁을 벌인 탓에 수시로 소규모 교전이 있었다. 양측 수비대가 서로 국경을 넘어 상대 진영이나 마을에 레이드를 다녔던 듯 하며, 러시아 공사가 이런 월경 공격에 대해 침략행위라며 항의하는 서한을 대한제국 외부(외무부)에 보낸 적이 있다. 단, 간도 영유권 문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유명한 이범윤사포대는 대한제국 정규군이 아니며, 이범윤이 간도 지역에서의 교전을 위해 임의로 모집한 사병이다.

그외 지역에 배치된 진위대의 주된 실전 대상은 의병화적 진압이었다. 보통 의병사에서는 일본군과 싸운 것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의병과 제일 많이 맞선 대상은 관군, 즉 임금(황제)의 명을 받드는 조선군(대한제국군)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의병이건 화적이건 치안을 어지럽힌다는데서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4] 국민을 지키는 국민군이 아니라 황제를 지키는 친위군이라는 대한제국군의 기본적인 성격상 이런 특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5]

게다가 그 당시에는 실제로 의병을 사칭한 진짜 화적들도 있었고, 국내외의 야심가와 연결된 반란군도 존재하였다. 정치적 사회적 불만 때문에 일어난 무장 봉기는 어떤 경우에도 의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들을 진압하는 것은 말 그대로의 치안활동이다.

의화단 사건 당시에 고종은 일본 공사에게 "우리도 청국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라고 했으나 일본 공사는 "아직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필요한 상황이 아닙니다"라며 거절했다. 거기다가 일본 공사는 본국에 보내는 전신에 이 일화를 두고 "우스운 일이다"라며 고종을 비웃었다. 그럴만 한 게 당시 대한제국군은 8개국 연합군에 패해 도망쳐 온 의화단 세력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폐하...

7 장비

현실적 여건상 소화기부터 중화기까지 모두 외국에서 수입한 장비가 주류를 이루었다. 총기 및 탄약을 자급하기 위해 포공국을 설치하고 제조 설비를 수입하였으나, 어찌나 실적이 부진했는지 수입한 설비는 녹만 슬고 대한제국이 망하는 그날까지 "탄환 하나 스스로 제작하지 못한다"고 재야의 선비들에게 욕을 들어처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대한제국군이 사용한 주요 장비는 아래와 같다.


육군 군복들. 육군의 복제는 러시아, 프랑스, 프로이센 군복을 참고했다고 하며, 예장(예복), 정장(정복), 상장(常裝, 근무복), 군장(전투복)이 있었다. 자세한것은 대한민국 군복을 참고할 것.

8 파국

대한제국 군대해산 참조.

9 소멸

군대해산 이후 일부는 의병으로, 일부는 황제의 호위병으로 존속했으나 대부분은 해산되어 집으로 갔다. 이중 상당수는 경찰관이나 헌병보조원으로 채용되어 옛 동료들의 반대편에서 총을 잡았다. 관련 페이지 관두는 사람들은 정부 측에서 은사금도 받았다. 장교나 준사관의 경우 해산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은사금은 받지 않았고 그 가운데 일부는 조선인 일본군 중 조선군인으로 흡수되었다. 1907년 이후에도 조선보병대, 조선기병대와 군부의 일부 기관은 남아 일부 군인들이 근무했으나 1910년에 일본군으로 소속을 완전히 옮긴다. 노백린 등은 군대 해산 후에도 근무하다가 이때 군문을 떠났다. 일본군 소속으로 옮긴 뒤에 계급명칭은 그대로 유지하고 일본군의 계급에 상당하는 것으로 대우하다가 1920년에 계급명칭까지 일본군과 완전히 합친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대한제국군의 잔재는 합방 후에도 이왕가의 호위를 맡은 조선보병대였다. 조선기병대가 해체된 뒤에도 이들은 살아남아 무사태평한 나날을 보내다가 차츰 규모가 축소되더니 1930년대에야 사라진다. 1931년에 대부분의 군인들이 전역 조치되고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의 흔적은 사라지게 된다.

10 참조 문서

  1. 거의 오늘날 소총구경이다.
  2. 창룡호와 현익호에 양무호와 광제호 두 척의 초대 함장인 신순성이 부함장으로 근무
  3. 원래는 정장이 되어야 하나 대장이라는 용어가 예전 조선군 시절부터 있었기 때문에 대장 계급명 사용.
  4. 사실 이건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무장 봉기를 정당화 하는 저항권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5.18 민주화운동 정도의 긴급성이 요구되는데, 정작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술국치 상황 정도를 제외하면 이런 상황이라고 할 상황이 없었기 때문.
  5. 반봉건 반외세로 동학농민운동도 자신의 왕권에 위험이 된다고하여 청나라와 일본군을 끌어드인 고종황제라 새삼스러운것도 없다.
  6. 다만 주력은 아니었다. 주력은 밑의 크루프 포
  7. 알프레드 크루프가 세운 크루프 사에서 만든 그 명품 독일제 포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