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일본 제국)

조선왕조의 군대에 대해서는 조선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가리키는 말. 조선왕조의 군대인 조선군과 헷갈리지 말도록 하자

2 역사

일본군이라고 부를 만한 집단이 한반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은 삼국시대였지만, 당시의 일본은 지금과 달리 일본 열도 서쪽 절반 정도만 차지하고 있는 신생국이자 백제의 동맹 중 하나 정도였다. 이후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고려 병사들이 따라가서 만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접점이 없다가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 셋이 사실상 한반도에 보인 과거 일본의 군사적 접촉의 전부이다.[1]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일본/군사사 항목 참조.

그러나 일본 제국군대로써의 일본군을 처음 접한 것은 근대 운요호 사건부터이다. 메이지 유신을 편 이후 다시 정한론이 득세하자 신생 일본 해군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듬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시켰다.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을 제압하는 목적으로 주둔중이었던 청나라의 군대와 교전을 시작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듬해에는 군인 출신 외교관 미우라 고로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하면서 간접적으로 을미사변에도 가담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했을 때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아래 덕수궁을 점령하여 고종과 관료들을 위협하는 역할도 맡았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군군대해산에 맞서기 위해 남대문 전투 등 교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했고, 이후 의병의 발생을 막기 위해 대규모 토벌 작전인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인 결과 한반도 안의 조직적인 저항은 일본군에 의해 사실상 사라지면서 이후 일본군은 35년간 한반도의 유일한 군사조직으로 군림하게 된다.

2.1 창설

일본군이 한반도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1880년 공사관을 경비하기 위해 파견된 6명의 인원이 시작이나, 장래 조선군이라는 이름이 붙을 조직이 형성되는 시초는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1904년 창설된 한국 주차군이다. 이들은 대한제국에 대한 무력 압박 및 항일의병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대한제국 군대해산에도 동원되어 대한제국군을 해산하는 업무도 담당하였다. 이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사라지고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자 조선 주차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이 시기까지는 조선에 주둔하는 부대가 확실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본토 주둔 사단들이 순차적으로 2년 주기의 로테이션으로 조선에 파견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대대 또는 여단 등의 개별 부대가 증파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조선의 영토화가 확고해지면서 1915년에 조선에 상설 주둔하는 육군 2개 사단이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준비된 19사단(나남. 현대의 함경북도 청진시), 20사단(경성부)의 2개 사단이 조선을 군관구로 하여 정식으로 편성되면서 1918년에 조선군 사령부가 발족한다. 다만 이들은 조선을 군관구로 하고 있으면서도 병력은 대부분 일본 본토에서 차출하여 충원했다. 당시 조선인에게는 병역 의무가 없었고, 조선 거주 일본인은 물론 병역 의무가 있었지만[2] 이들은 숫자가 충분하지 않아 재선 일본인만으로는 2개 사단의 병력 수요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군 사령부 본부는 현재의 서울 용산구 일대에 위치했으며, 20사단 사령부 및 예하부대도 이곳에 주둔했다. 1945년 종전 이후에는 이곳의 군사 시설들을 미군이 사용하여 주둔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미국 8군 사령부가 이곳이다.

2.2 활동

조선총독부도쿄에 있는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을 거치지 않고 덴노에게 직속되었듯이, 조선군 역시 육군대신의 통제를 받지 않고 덴노에게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1910년의 한일합방 당시에는 아예 주차군의 전 지휘권이 조선 총독에게 있었으며, 1919년 이후 "협조를 요청할 수 있다"고 규정이 변경되었으나 사실 국내적으로 큰 의미는 없었다. 이때는 이미 조선 내의 치안 업무가 거의 경찰의 역할로 넘어갔고, 조선군이 조선 내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한 것은 3.1 운동 진압이 최후였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조선의 내정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별로 없었지만 조선군 사령관의 조선총독으로부터의 독립성을 강화하였고, 이후로 조선군이 능동적으로 관동군의 대륙 진출에 협력하는 등 대외활동에 보다 자유롭게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치안 유지 이외에 대외적인 조선군의 1차적인 임무는 만주소련 국경의 방어였다. 만주사변만주국이 성립하면서 만주로부터 대규모의 침략을 받을 위험은 없어졌지만 보천보 전투[3]와 같은 항일 게릴라의 습격은 1920년대 이후로 수시로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방어의 필요는 있었다. 또한 소만국경에서도 1935년부터 등 분쟁이 빈발하여 소련과의 마찰 위기가 상존했으며, 한소국경에서도 긴장이 고조되어 장고봉 사건이 발생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자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이에 대한 대비가 강화되었다.

그 외에 병력이 부족한 관동군을 지원하여 중국에 대한 침략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은 본국에 병력 증원을 요청했는데 당시 재정부족에 시달리던 본국 정부는 침략의 확대를 거부했다. 이에 관동군에 동조한 조선군 사령관이 독단으로 20사단 병력을 재편성해 조직한 1개 여단을 월경시켜 관동군의 지휘를 받도록 했으나, 이러한 독단적인 조치에 대해서 본국에서는 아무런 처벌도 가하지 않았다. 도리어 전쟁이 확대되면서 1개 여단이 증파되었고, 20사단 사령부까지 나갔다. 그리고 20사단은 중일전쟁의 확대로 아예 본격 참전 테크를 타게 되며, 1939년 말이 되어서야 소집 해제로 조선에 복귀하였다.

이뿐 아니라 조선군은 만주사변 발발 시점에서 독자적으로 간도를 침공하려고 획책하기도 했다. 이 당시 간도는 장학량 정권의 지배하에 있는 변두리 지역이었는데, 관동군 주력은 만주의 핵심을 제압하느라 이런 변두리까지 손을 뻗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 간도는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항일 게릴라의 주요 근거지였던 탓에 이 기회를 차서 조선군이 직접 토벌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선 확대를 꺼리는 중앙 정부의 견제로 인해 이 출병은 성사되지 못했고, 곧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설마 이걸 가지고 '그때 조선군이 출병했으면 간도가 조선에 통합되었을텐데'라고 생각할 인간은 없겠지

이후에는 태평양 전쟁의 격화로 인해 다수의 전투부대가 남방전선으로 차출되었다. 여기에 전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연합군의 침공 가능성이 커지자 1945년에는 결호작전을 위해 일본군의 구조가 개편되면서 조선군은 해체되고 한반도는 17방면군 예하 조선군관구에 속하게 되었다. 여기서 17방면군은 전선에서의 전투를, 조선군관구는 후방의 지원 업무를 담당하며 사령관과 참모장은 겸임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가 되자 한반도 북부 지방은 관동군의 작전 범위로 편입되어 조선군관구와 분리되었으며, 이후 남북한 전역에서 부대를 새로 편성하고 장비와 병력을 충원하며 방어 준비를 하던 중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라는 핵펀치를 얻어맞고 일본 본국이 손을 들면서 조선군이 가열차게 건설한 방어시설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2.3 소멸

8월 15일의 종전 선언 이후에도 북한 지역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항전, 또는 자폭[4]하는 병사들이 일부 존재했으나 대부분은 조용히 패전을 받아들였다.

2.3.1 남한

종전 이후에도 남한에서는 조선군이 최강의 무력집단으로서 치안을 통제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총독부와 여운형이 협상을 통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권력을 넘기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자 극력 반발하여 무력으로 건준의 권력 접수를 막았고, 시가지에 전차, 장갑차를 포함하는 무장병력을 들여보내 조선인들이 장악했던 행정 및 언론기관들을 무력으로 탈환하면서 반항하지 못하도록 위압했다. 이로 인해 남한 지역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러는 한편 불만을 터뜨릴 우려가 있는 조선인 병사들은 즉각 제대시켜 집으로 돌려보내고, 현지에 가족이 있는 일본인 병사들도 제대시켜 가족을 추스리게 했다.

9월 6일에 서울에 도착한 미군 선발대와의 교섭을 통해 9월 8일 미군이 진주할 지역에서의 즉각적인 일본군 병력 철퇴 및 무장해제 일정이 논의되었으며, 9월 16일에는 38도선 이남의 일본군 병력 전체가 정식으로 미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리고 미군의 진주 일정에 따라 조선군은 순차적으로 담당 구역을 인계하였다.

9월 12일에 17방면군사령부가 해체되면서 조선에 있던 일본군은 이제 경성 위수관구 사령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세우고 미군에게 승인을 받은 철수 계획에 따라 인천항과 부산항을 이용(대전 이북은 인천, 이남은 부산)하여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8월 15일 이후 제대했던 병사들도 재소집(일본인만 해당)하여 군적에 넣은 후 철수시켰다. 포로수용소 경비병, 헌병 등은 전범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았으며 무기와 탄약 등은 대부분 미군의 감독을 받아 바다에 버렸다. 병력의 철수는 11월 초에 완료되었으므로 사령부는 11월 20일에, 서울에 있던 연락부는 12월 22일에 철수하였다. 병기 파기를 맡은 작업대는 1946년 4월 26일에 귀국하였으며 이로써 조선군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다.

제주도 주둔 58군은 사령부와는 별도로 9월 28일에 따로 항복하였으며, 제주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다 폐기하지 않고 한라산에 파묻어 놓고 간 무기와 탄약이 4.3 사건을 격화시키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2.3.2 북한

북한 지역에서는 이미 소련군이 들어와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일부 지역에서는 19일까지 교전이 계속되었다. 이후 각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9월 15일까지는 전 일본군의 무장 해제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남쪽에 있던 일본군 장병들이 본국으로 귀환한 것과 달리, 이들은 시베리아로 가서 통나무를 세게 된다.

3 예하부대

주차군 시절에는 본토 사단들이 교대로 파견을 오다가 조선군으로 정식 개편될 때는 19, 20 두 개의 상주 사단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와 침략정책의 길을 가면서 예하 부대가 계속 증설되었고, 종전 시점에는 60만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게 된다. 물론 이 시점에서 장병의 상당수는 징집된 조선인 병사였다.

아래 부대들은 시종일관 조선에 주둔하지는 않더라도 특정 시점에서 조선군 예하에 들어가 있었던 부대들이다. 대부분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급하게 창설된 2류 부대.

추가바람

4 역대 조선군 사령관

역대 조선군 사령관은 모두 일본군 육군 소속이다. 일본군 해군은 조선군과는 별도로 경남 진해에 '진해요항부'라는 해군 기지를 세웠으며, 해군 병력을 파견하였다.

4.1 한국 주차군 시기

순서이름계급재임기간
1하라구치 겐사이(原口兼済)중장1904년 3월 11일~1904년 9월 8일
2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5]대장1904년 9월 8일 1908년 12월 21일
3오쿠보 하루노(大久保春野)대장1908년 12월 21일~1910년 8월 24일

4.2 조선 주차군 시기

순서이름계급재임기간
1오쿠보 하루노(大久保春野)대장1910년 8월 24일~1911년 8월 11일
2우에다 아리사와(上田有沢)중장1911년 8월 11일~1912년 1월 14일
3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중장1912년 1월 14일~1915년 1월 25일
4이구치 쇼고(井口省吾)중장1915년 1월 25일~1916년 8월 18일
5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중장1916년 8월 16일~1917년 8월 6일
6마쓰가와 도시타네(松川敏胤)중장1917년 8월 6일~1918년 5월 29일

4.3 조선군 시기

순서이름계급재임기간
1마쓰가와 도시타네(松川敏胤)중장1918년 5월 29일~1918년 7월 24일
2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郎)[6]중장1918년 7월 24일~1920년 8월 16일
3오바 지로(大庭二郎)중장1920년 8월 16일~1922년 11월 24일
4기구치 신노스케(菊池慎之助)중장1922년 11월 24일~1924년 8월 20일
5스즈키 소로쿠(鈴木荘六)중장1924년 8월 20일~1926년 3월 2일
6모리오카 슈세이(森岡守成)대장1926년 3월 2일~1927년 3월 5일
7가나야 한조(金谷範三)중장1927년 3월 5일~1929년 8월 1일
8미나미 지로(南次郎)[7]중장1929년 8월 1일~1930년 11월 22일
9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8]중장1930년 11월 22일~1932년 5월 26일
10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9]중장1932년 5월 26일~1934년 8월 1일
11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중장1934년 8월 1일~1935년 12월 2일
12고이소 구니아키(小磯国昭)[10]중장1935년 12월 2일~1938년 7월 15일
13나카무라 고타로(中村孝太郎)대장1938년 7월 15일~1941년 7월 7일
14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11]대장1941년 7월 7일~1945년 2월 1일

4.4 조선군관구 시기

순서이름계급재임기간
1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대장1945년 2월 1일~1945년 4월 7일
2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중장1945년 4월 7일~1945년 11월 30일[12]

5 조선군에 복무한 유명인사

순수한 일본군으로서의 조선군에 복무한 사람만 기재. 구 황실에 속한 의장대인 조선보병대는 제외한다.

6 진해요항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 해군은 육군인 조선군과는 별도로 진해에 해군 요항부(要港部)[13]를 두고 라진, 제주도에 전진기지를 두었으며, 경비전대와 항공대(1936년 10월 1일 창설)를 배치하였다. 조선군이 육군대신의 통제를 받지 않았던 것과 반대로 진해요항부는 해군 군령부와 해군대신의 통제를 받는 정상적인 통수체계 하에 있었다.

전방도 아닌 식민지 영토에 있는곳이었던데다 요항부 등급이었기 때문에 일본군 해군 고위장성들에게는 보통 한직으로 취급되던 곳. 이곳을 거쳐간 일본군 해군출신 인사중 상대적으로 유명한 인물은 요나이 미츠마사이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진해요항부는 진해경비부로 승격되고 요항부 '사령관'도 경비부 '사령장관'으로 승격되었고 병력과 장비가 증강되었다. 패전이 가까워 오던 1945년 7월 20일에는 특별육전대가 창설되었다. 8월 15일 패망을 맞은 후 1945년 11월 30일 진해경비부는 폐지되고 부대는 해산되었다.

7 떡밥

미군은 일본군의 군사능력 제거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총기, 화포, 탄약을 바다에 버렸고 전차, 항공기[14] 등은 소각하여 고철로 만들었다. 부평에 있던 조병창 시설[15] 역시 파기하고 파묻어버렸다. 이때 파기를 면한 장비는 소총과 개인장구류 일부, 그리고 연습기 등 극소수의 항공기 뿐으로, 이들은 미국제 장비가 지급되기 전까지 창설 초기 대한민국 군경의 주무장이 되었다. 심지어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이 일본군장 및 총기류 중 일부가 2000년대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 일부 군 복무중인 밀덕들에게 목격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기 손으로 A급 진품 일본군장 무더기를 소각로 불속에 처넣어야 했다 북한군 역시 초기에는 소련군이 압수했다가 넘겨준 일본군 총기를 사용했으며, 일본제 항공기도 소수 사용했다.

그런데 미군이 이 일본군 장비들을 몽땅 없애지 않고 대한민국 국군에 인계했다면 북한군의 침략에 보다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의견도 일부 있다. 물론 없는 것보다야 나았겠지만, 실상은 별 도움이 안 됐을 가능성이 크다. 제2차 국공내전 당시 중공군이 97식 전차를 비롯한 일본군 장비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던 사례를 들어 성능 여부는 의외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도 있으나, 개전 당시 조선인민군이 보유한 전력을 생각하면 질적 차이가 너무 크다. 치하 30대가 나가도 T34 1대에게 짓밟힐 판에... 게다가 중장비는 부품이 떨어지면 다시 갈아끼워야 하는데 구하지 못할 일본제 전차 및 항공기의 부품이 떨어지면 수급할 방도가 없다.

오히려 일본군 무기를 그대로 두었다면 자칫하면 전쟁 전 만연했던 민간인들의 좌우 충돌에서 죽창 대신 일본제 소총을 들게 할 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몇몇 일본군에서 흘러나온 무기들이 좌/우익 단체로 흘러들어가서 무력분쟁에 사용되었던 사례가 있다. 김두한이나 이정재 같은 조폭들 역시 일본군에서 흘러나온 총기류로 무장하기도 했다.
  1. 왜구는 일본에 거점을 둔 해적으로, 정규군이 아니다. 다만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의 경우에는 일반 해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조직적이고 대규모였기에 다시 봐야 할 부분이 있다.
  2. 경기도 거주 일본인 1천여 명이 용산에서 징병 검사를 받았다는 1936년의 동아일보 보도가 있다.
  3. 나무위키에 항목화된 습격사건이 이것밖에 없다. 이런 비극이
  4. 비행기를 몰고 서울 시가지에 격돌한 조종사가 있다.
  5. 2대 조선총독.
  6. 3.1 운동 진압의 주역이다.
  7. 7대 조선 총독.
  8. 독단 월경의 장본인. 후에 육군대신과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는데...지 맘대로 군대를 움직이고도 이따구로 영전하니 일본군이 망할 군대인 것이다.
  9. 후에 육군대신. 2.26 사건에 동조하다가 예편되었다.
  10. 8대 조선 총독, 후에 총리대신.
  11. 만주 사변을 주도한 그놈 맞다. 조선을 떠난 4월에는 싱가포르 주둔 제7방면군 사령관이 되었고 영국군에 항복하였으며, A급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꼴 좋다
  12. 대전에서 잔류병 귀환 업무를 하던 사령부가 일본으로 최종 철수한 것이 20일, 완전히 폐지된 것이 30일이다.
  13. 당시 일본 해군의 기지는 3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가장 큰 기지를 진수부, 다음을 경비부, 가장 작은 기지를 요항부라고 분류했다.
  14. Ki-84 하야테 등의 고성능기는 몽땅 실험용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15. 이 조병창을 담당하고 있던 책임자가 바로 채병덕이었다. 채병덕은 해방 이후 한국군 창설에 이 조병창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해서 파손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아주 서슴없이 시설을 파괴해 버리는 바람에 크나큰 허탈감을 느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