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뉴 페르남부카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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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
3초 예수님

이름주니뉴 페르남부카누 (Juninho[1] Pernambucano)
본명안토니우 아우구스투 히베이루 헤이스 주니오르
(Antônio Augusto Ribeiro Reis Júnior)
국적브라질
생년월일1975년 1월 30일
출생페르남부쿠 주 헤시피
신장178cm
포지션공격형 미드필더
소속팀스포르트 헤시피 (1993~1994)
CR 바스쿠 다 가마 (1995~2001)
올랭피크 리옹 (2001~2009)
알가라파 (2009~2011)
CR 바스쿠 다 가마 (2011~2012)
뉴욕 레드불스 (2013)
CR 바스쿠 다 가마 (2013)
국가대표40경기 6골

1 소개

올랭피크 리옹의 레전드.[2]

역사상 최고의 프리키커 중 한 명

무회전의 달인. 전인호 선생님
프리킥이 패널티킥보다 쉽다고 하시더라

주니뉴, 주닝요, 전인호[3]로 국내에 알려져 있다. 단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브라질 국대로 뛴 주니뉴는 주니뉴 파울리스타라는 선수다.

자타공인 프리킥의 달인으로, 역대 최고의 프리키커 중 한명으로 꼽힌다. 리옹에서 통산 100골, 이중에서 44골이 프리킥이였다. 무회전이 대표적이지만 프리킥 자체를 섬세하게 잘 찬다. 기본적인 킥력과 킥 정확도가 사기적인 수준.[4] 또한 커리어 통산 프리킥으로만 70골 이상을 득점했는데[5] 평범한 중앙 미드필더들이 선수 생활을 다 통틀어도 프리킥은 커녕 온갖 골을 다 합쳐봤자 어지간해서 70골 넘기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주니뉴의 가공할 킥력과 그 정확성을 엿볼 수 있다.

무회전 프리킥으로 일가견이 있는 안드레아 피를로마저도 주니뉴의 프리킥을 보고 연습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을 정도로 역대 최고 레벨의 프리키커이다.

2 행적

2.1 클럽

스포르트 헤시피 유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CR 바스쿠 다 가마로 이적. 점차 출장 횟수를 늘려가며 준주전급 위치로 도약한 뒤, 96~00년도까지 6시즌 동안 바스쿠에서 활약했다. 이후 01/02 시즌에 신흥 강호로써 당시 대대적인 스쿼드 강화를 하던 올랭피크 리옹[6]으로 이적. 오자마자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리옹의 주전 자리를 꿰어찼고 이후 통산 8시즌, 08/09 시즌까지 리옹의 핵심적인 에이스이자 주장으로써 리옹의 리그 7연속 우승이라는 대업적의 주역 노릇을 했다.

이 시절의 리옹이 바로 그 유명한 레알 마드리드 킬러 시절이었는데 그 주역이 주니뉴. 한창 광렙하던 시절의 이케르 카시야스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에서 만난 리옹과의 경기에서 주니뉴의 프리킥에 손도 못 댈 정도의 골을 먹히고 벙찐 표정을 짓는 짤도 있다. 이 굴욕은 올리버 칸도 당했다.

리그앙에서는 나름대로 우주 방위대나 다름없는 스쿼드를 구성하던 전성기 리옹의 스타 플레이어들조차도 자신들의 이전 커리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박한 커리어를 보유한 주니뉴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같이 뛰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고. 성격 자체가 신사적이고 정중하고 프로로써의 자세에도 충실하여 구단 역사가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은 리옹에서는 리옹 역사상 최고의 선수, 최고의 주장으로 손꼽는다. 실제로 리옹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EPL이나 세리에 A같은 빅리그 클럽들에게서 관심을 가졌었으나 본인의 유럽 커리어는 리옹에서 끝날 것이라 할 정도로 리옹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했던 수준.

08/09 시즌이 끝나고 노쇠화로 인한 기량 저하가 눈에 띄기도 했고 일반적으로 노쇠화한 스타 플레이어들이 으레 그렇듯이 말년에 거액의 수입+주전 보장을 위하여 카타르 리그의 알 가라파로 이적하였다. 카타르에서 나름대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2시즌 동안 카타르 리그에서 뛴 뒤, 자신의 실질적인 커리어 시작지라고 할 수 있는 브라질 리그의 바스쿠로 이적하였다. 바스쿠에서 거의 주급을 무료 봉사에 가까운 수준으로 적게 받았는데 본인이 일부러 그렇게 요구했다고. 자신의 커리어를 꽃피울 수 있게 해준 바스쿠라는 구단에 대한 의리성 차원에서 한 일이라고 한다. 바스쿠에서도 2시즌 간 주전으로 뛰며 신체 능력은 저하했으나 죽지 않은 킥력과 킥 정확성을 바탕으로 여전한 활약을 뽐내다가 2012년 12월, 미국 MLS의 뉴욕 레드불스로 이적하였다. 13/14 시즌의 MLS에서도 38세의 나이로 현역으로 맹활약.

여담으로 커리어의 반 이상을 프랑스에서 보냈기 때문에 브라질 선수들 중에서는 프랑스 국가 대표 선수들을 가장 많이 만나본 선수이기도 하다. 리옹에서 같이 뛴 국가 대표급 선수들만 해도 플로랑 말루다, 카림 벤제마, 아템 벤 아르파, 에릭 아비달, 제레미 툴라랑 등 상당히 많다.

2014년 1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본인이 향후 축구계에 계속 남게 된다면 리옹에서 코치직을 수행하고 싶다고 하기도.

2.2 국가대표

1999년 3월,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국가 대표 데뷔전을 뛰었는데, 당시 김도훈의 결승골로 대한민국이 브라질에 1-0으로 승리했다. 참고로 이 경기는 아시아 소속 국가대표팀이 브라질에 거둔 유일한 승리이다.

그러나 대표팀과는 거리가 멀어서[7] 메이저 대회에는 단골로 출전하지는 못했고, 2001년 소속팀의 부진 이후로 덩달아 평가가 낮아지면서 2002년 월드컵은 동명의 파울리스타에게 밀려 탈락하였다. 그 후 리옹에서의 에이스급 활약을 보여주자 다시 대표팀에 콜업되기 시작했고, 서브 멤버였지만 2006년 월드컵에는 출전할 수 있었다. 당대 화려한 네임밸류의 선수들에게 밀려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3차전인 일본전과 8강 프랑스전에 각각 출전하였다. 일본전에서는 자신의 장기인 무회전 중거리슛으로 일본을 무너뜨리는 쐐기골을 득점하였다. 대회 이후 주니뉴는 브라질 국가대표에서 은퇴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수비력이 준수하고 활동량이 뛰어난 올라운드 유형의 공격형 미드필더이다. 전형적인 브라질 선수 특유의 리듬으로 화려한 기술을 갖추면서 개인 능력을 보여주는 유형은 아니었고 박스 투 박스처럼 움직이면서 침투하거나 전반적인 플레이메이킹으로 중원을 조율하는 선수였다. 거기에 사기적인 킥력과 축구민족 브라질리언다운 테크닉도 갖춘 미드필더였고 앞서 서술한 킥력을 이용한 전방위적인 공격 지휘를 잘했다. 물론, 최대 장기인 프리킥으로 공격포인트를 쏠쏠히 적립하는 것도 준수하게 해준다.
  1. 포르투갈 어로 'little Júnior'라는 뜻으로, 보통 Júnior가 이름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많이 붙는 애칭이라고 한다.
  2. 올랭피크 리옹 구단에서 자체적으로 주니뉴가 리옹에서 기록한 100골을 모아 비디오로 만든 것이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주니뉴가 나간 이후 리옹은 단 한 번도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지 못했다.
  3. 영어 알파벹을 콩글리쉬로 읽으면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는데, 인터넷 상에서 한 때, 비운의 한국 국적 선수 어쩌고 하면서 떠돌았다.
  4. 놀라운건 주니뉴 본인은 "지쿠가 나보다 잘 찬다."고 했다. 과연 하얀 펠레 지쿠.
  5. 브라질 리그, 리그앙, 중동, 미국에서의 기록을 통틀어서.
  6. 많은 사람들이 리그앙에 대해서 잘 모르는지라 모나코나 리옹 등을 전통 강호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으나 리옹과 모나코 모두 당시는 신흥 강호들이었다. 특히나 리옹의 경우에는 2000년도 접어들어서 장 미셸 율라 구단주의 대대적 투자가 있기 전까지는 그저 2부 리그와 1부 하위권을 오가는 약체 팀이었다. 프랑스에서 전통 명문 구단이라 할만한 클럽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AS 생테티엔 정도.
  7. 당시 브라질의 공격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카카가 하나 같이 전성기였을 무렵이었던지라 주니뉴가 발을 얹기 힘들었다. 플레이 스타일도 화려한 기술(브라질리언으로써 기본 내장된 실력 말고)이나 스피드같은 신체 능력이 아닌 키핑과 킥이 주 무기였는데 호나우지뉴나 호나우두도 킥이 사기였다. 2012년까지의 프리킥 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