簡牘
1 개요
죽간(竹簡)과 목간(木簡 또는 목독木牘)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죽간은 말 그대로 대나무(竹)를 세로로 쪼개서 만든 것이고, 목간은 나무를 쪼개서 만든 것으로서 다른 말로 목독(木牘)이라고 한다. 사용시기는 크게 잡으면 상 왕조 시기인 기원전 13세기에서 위진남북조 시기인 4세기까지 장장 1700여 년간 사용되었으며, 후한 대 환관인 채륜이 105년 포장용으로 쓰이던 원시적인 종이를 개량 및 대량생산하는데 성공함으로서 종이가 문자생활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함에 따라 간독은 차츰 그 자리를 내주었고 6세기경에 중국 본토에선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신라나 백제, 일본 같은 주변국에서는 죽간이 아닌 목간을 7, 8세기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서에는 종이를 쓰는 사례가 늘어나게 되면서 간단한 메모지 및 필체연습용으로 쓰이는 등 보조역할만 맡다가 서서히 사라지게 되며, 고려시대까지는 물품 보낼 때 물품과 관련된 정보를 기록하는 꼬리표용으로 목간을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1] 21세기 와서 한국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에서 새롭게 주목하는 물품이기도한데 삼국시대 당대의 문헌이 빈약한데다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경우에는 삼국이 멸망한 뒤 수백년 후에 쓰여졌기때문에 윤색이나 생략이 있을수밖에 없기에 한계가 뚜렷한 반면에 목간은 당대에 제작된것이기 때문에 당대의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볼수 있기도 하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밖의 역사도 상당히 자세하게 알아낼수있는 물품이 될수있기 때문이다. 물론 위에 적혀있듯이 길게 쓰기 힘들기 때문에 그 한계도 뚜렸하지만 그럼에도 고대사 문헌의 부실함은 어느정도 보완해줄수 있는 중요한 물품이라는건 변하지 않는다.
2 역사
간독이 언제부터 쓰였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확답은 없으나, 상서(商書) 다사(多士) 편에 보면 '은나라 선조에게만 책(冊)과 전(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엔 이미 문자가 발명되었고 이를 이용해서 점사의 과정 및 결과를 적은 갑골문이 대량으로 출토된 것을 감안하면 상대에 이미 간독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2] 하지만 상대의 기록은 갑골문을 제외한 발견이 아직 보고되지 않았으며, 사실상 죽간이 본격적으로 쓰이던 시기는 춘추시대로, 전성기는 전국시대(기원전 5세기경)부터 후한대(2세기) 사이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간독문서 대부분이 이 700여년 사이에 집중된다.
3 제작 공정
대나무를 쪼개어 곧바로 사용을 하면 안의 습기 때문에 좀이 슬기 쉽고, 대나무의 푸른 빛 때문에 먹으로 쓴 글씨를 눈으로 보기 어렵다. 때문에 대나무 안의 수분을 일단 제거하는 일련의 처리과정을 한청(汗靑), 한간(汗簡), 혹은 살청(殺靑)이라고 불렀다. 한간과 살청은 지금도 일부 출판업계에서 각각 '원고를 작성하고 있음'과 '원고를 다 작성함'이란 뜻의 은어로 사용된다.
살청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쪼갠 대나무 조각을 불에 쬐어 안의 하얀 진액을 빼서 푸른 빛을 없앤 후 말려서 두께는 2~3mm, 폭은 0.5~1cm 정도, 길이는 밑의 단락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책의 종류에 따라 맞추어 가공한 후 그 위에 기록할 편지나 문서, 책의 내용을 적었다. 보통 한 개 당 30~40개의 문자를 썼으며 50개를 쓸 경우도 있었다. 드물지만 50개 이상 쓸 경우도 있었는데 이럴 땐 가운데 붉은 먹으로 일직선을 그은 후 양쪽에 글자를 작게 썼다.
최종적으로 간독 문서를 만들 때는 무두질한 가죽끈(韋)[3]이나 삼으로 만든 마끈으로 위아래에, 길이가 긴 죽간은 중간에 한두 군데를 추가하여 적으면 10~30개, 많으면 40~50개의 죽간을 엮어 한 두루마리를 만든 후 제목을 썼다. 간독책의 특성상 둘둘 말아 보관하므로 한 두루마리의 맨 첫째 간독 및 맨 마지막 간독 뒷면, 즉 대나무 겉껍질 쪽 가운데에 제목을 쓰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독에는 목탄이나 주사(朱砂)[4]나 칠액(漆液)으로 기록했다. 이전부터 사용한 목탄이나 주사같은 경우에는 목간에는 쓰였으나, 특성상 죽간에는 묻지 않았으므로 죽간에는 옻을 정제한 칠액으로 기록했다. 이런 칠액의 경우 특유의 점성때문에 처음은 두껍고 이후는 급격히 가늘어지는데 그 모양이 올챙이처럼 생겨서 과두문자(蝌蚪文字. 올챙이글자)라고 부른다.
4 장단점
일단 중남부 중국 전역에 주변에 흔하게 자생하는 대나무를 사용하고[5] 만드는 데 세밀한 기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만큼 대량생산이 가능해서 가격이 저렴했고, 종이나 비단과는 달리 두께가 있으므로 잘못 적으면 서도(書刀)로 긁어낸 후 다시 적으면 되므로 수정이 용이했다. 실제로 발굴된 목간 중에는 한문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글씨 연습용으로 쓴 목간도 있다고 한다.[6]
하지만 역사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간독은 그 특성상 저장할 수 있는 용량에 비해 부피 및 무게가 너무 나간다는 것이 크나큰 결점이었다. 10만여 자에 달하는 장자를 간독에 적으면 수레 열 대 분량이었으며 남자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를 말한 명가의 사상가 혜시는 여행을 갈 때 지식을 자랑할 겸 항상 다섯 수레에 책을 실어서 보았는데, 이는 책이 많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부피 및 중량이 많이 나가는 것이 큰 원인이었다.
진시황 역시 중국 통일 후 매일 1형석(衡石) 분량의 공문서를 근면성실하게 업무를 보았는데 1형석이 무게가 약 120kg이니 중량이 많이 나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루에 처리는 가능했으나 과중한 업무량임은 분명했고 간독이 경제적이기는 했으나 중량 때문에 문서작성 및 처리에 애로사항이 많아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기원전 6세기 경부터 비단이 문서 작성 및 캔버스지 역할을 하게 되는데, 묵가에 '비단과 죽간에 기록하다'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외로 꽤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단의 장점은 가볍다는 것 외에도 베틀에 짜서 만든다는 특성상 폭과 길이를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었고 담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간독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이런 비단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눈이 튀어 나올 정도의 가격이었다. 한대 당시의 비단 한 필 가격이 80킬로짜리 가마니 9석이었으니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다. 쓸 수 있는 계층은 극소수 귀족들에 불과했고 이런 점 때문에 간독을 대체하기는 불가능했다. 곧 종이가 개발되자마자 빠르게 종이가 간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비단은 간독이 사라진 후에도 그 특유의 감촉 및 물감이 잘 묻는다는 이유로 문인이나 화가들에게는 선호하는 재료로 애용되었다.
5 목독의 규격
현대인들은 보통 목독을 규격없이 대충 잘라서 쓴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규격이 정해저 있었으며 그것도 대충대충 정하는 것이 아닌 아주 칼같은 규격이었다. 물론 시대와 국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중요한 문서일수록 쓰이는 길이가 길어진다는 기본적인 틀은 정해져 있었고 여기서는 한대(전한*후한을 합쳐서)의 규격을 다루기로 한다. 한대에는 크게 '여섯치', 여덟 치', '한 자', '한 자 한 치', '두 자', '두 자 네 치', '석 자' 짜리가 있었고 쓰이는 문서의 내용 및 종류에 따라서 각기 나누어 썼고 앞에서 열거한 순서대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한대의 자(尺)는 23~24cm이고 치(寸)는 10분의 1, 즉 2.3~2.4cm이다.
- 여섯 치
일명 전(箋)이라고 불리며 셈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비공식적으로 의견을 전할 필요가 있을 때, 간단한 내용을 적는 일종의 '메모지' 역할을 맡았다. 간독 문서에도 쓰였는데 주석이나 의견을 남길 필요가 있을 때 전에다 적어 간독 문서에 꽂아서 사용했다.
- 여덟 치
개인적인 일기 및 기록 등을 통칭하는 사문서(私文書)에 주로 쓰였으며, 양한시대 때에는 논어가 이 사이즈로 편찬되었는데 현대의 시각에서는 유교의 창시자 기록인 논어가 왜 개인기록으로 치부하고 별로 중시하지 않았는지 의아하지만 한대에 유행했던 유학학파인 금문학파에서는 공자를 유교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기긴 했지만 좀 비중 있는 인물 정도로만 취급했지 유교의 창시자이자 정신적 지도자로 여기지는 않았다. 공자가 유교의 창시자로 여겨져 논어가 공적 문서로 여기기 시작한 때는 시간이 한참 지난 남송 시절 주자(1130~1200)의 영향이 컸다.
- 한 자
가장 일반적인 규격이었으며 주로 공적인 문서나 기록물, 일명 공문서(公文書)에 쓰였다.
- 한 자 한 치
황제의 지시사항 및 명령을 담은 명령서, 일명 조서(詔書)에 쓰이는 규격이었으며 한자 한치짜리 조서(尺一之詔)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일반인들은 절대 쓸 수 없는 규격이었다. 자칫하면 황제를 능멸했다는 반역죄에 걸려 자신 및 일가족이 사형당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재미난 일화가 있는데 한 무제 바로 앞의 황제, 한문제(BC179~157) 시절 문제가 당시 중국을 크게 위협했던 흉노족의 왕 노상선우(BC174~160)에게 조서를 보낸 적이 있는데 선우가 답장을 할 때 훗날 진회와 함께 중국의 대 매국노로 불리게 되는 중항열(中行說)[7]이 선우를 설득하여 한자 두치짜리로 답장을 적어보냈으니 당연히 문제는 엄청 열이 받았지만[8] 이 때는 흉노가 14만 기병을 이끌고 장안 일대까지 약탈을 했던 시기여서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으나 이 때의 치욕은 훗날 무제가 톡톡히 갚아주게 된다.
- 두 자
일명 격(檄)이라 불리며 군사 관련 문서, 특히 군사 행동 명령서에 많이 쓰였다.
- 두 자 네 치
육경, 즉 유교 경전에 주로 쓰이던 치수였다. 한나라 때는 특히 춘추 및 효경을 중요시했는데, 한 대엔 춘추는 단순한 경전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는데 한 대에도 법률이 현실을 못 따라갈 때가 종종 있었고 이럴 때 춘추를 뒤져 유사한 사레를 찾아 해결했으니 이런 방식을 일명 춘추결옥(春秋決獄)이라 했다. 이런 상황이니 자연히 춘추를 최고의 경전으로 여기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공자에게 효에 대해서 묻고 공자가 이를 답하는 형식의 내용이 담긴 효경은 내용은 2000여자밖에 없지만 유교가 본격적으로 사회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기 시작한 한 대엔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원리가 부모자식간의 관계인 '효'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으므로 크게 중요시했다.
- 석 자
- ↑ 신안 앞바다의 해저 유물이 일본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것을 목간에 적혀 있는 일본의 절과 승려 이름을 통해서 알아냈다.
- ↑ 후한대 학자 허신의 저서인 '설문해자'에서 상형문자로 죽간을 엮은 모습과 죽간 뭉치를 책상에 쌓아올린 모습을 각각 책 책(冊), 경전 전(典) 자가 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 ↑ 공자가 주역을 너무 많이 읽어서 죽간 책의 가죽끈이 세 번 끊어졌다고 하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이 여기서 유래한다.
- ↑ 황화수은. 신경안정작용이 있어 한약으로도 쓰였으며(현재는 유독성때문에 쓰지 않는다), 현대에도 부적용으로 쓰이곤 한다.
- ↑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연, 조 같은 북중국에서는 나무를 가공한 목간을 사용했다. 목간의 재질은 보통 주로 백양목(白楊)이나 버드나무나 소나무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나무의 색이 하얗고, 목질이 부드러워 먹을 잘 흡수했기 때문이다.
- ↑ 여담이지만 삼국지에 나오는 한복이 화장실에서 이 서도로 자살했다. 서도는 죽간을 수정하기 위한 일종의 지우개였으니 한복은 지우개로 자살한 셈이다(...).
- ↑ 근데 이 사람이 흉노에 붙어버린 건 애초에 모국이 자기를 버렸기 때문이다. 항목참조.
- ↑ 내용도 오만하기 짝이 없어 "천지가 시작하는 곳, 일월이 있는 곳의 흉노 대선우, 한의 황제에게 묻는다. 별고 없으신지..."로 시작하는 한 마디로 한제국을 업신여기는 내용이었다.
- ↑ 법가사상을 토대로 철권통치를 한건 한 무제때이며 그 전 시대는 도가사상을 토대로 한 통치를 하였다. 그리고 유가는 당후기에나 이르러서야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으며 그 전까지는 그냥 숱한 사상들중 하나에 불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