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자

1 고대 중국인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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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가 깊은 병이 들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하였다.

"내 발을 펴 보아라! 내 손을 펴 보아라!
(詩)에 이르기를: "전전긍긍하며 조심하는 모양이 깊은 못가에 서 있는 듯, 얇은 얼음판을 밟는 듯하다" 하였다.
이제 비로소 내가 걱정면하게 되었구나, 얘들아!"

曾子 (기원전 505년~기원전 435년)

증자는 중국 전국 시대의 유가 사상가로 원래 이름은 증삼(曾參).[1]

원 문종 3년[2]에 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3] 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사당(孔門祠堂)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이다.

후에 공자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되며, 공자와 나이차이는 46세. 부친 증점도 공자의 제자였다.

공자의 뛰어난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은 배우는 자세와 효를 실천하는 자세때문이고, 사실 스승인 공자가 직접적으로 "증자는 둔하다"라고 할 정도로 머리가 뛰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뛰어나지 못한 머리 대신 매일같이 스승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했고 배운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공자는 증삼에 대해 그렇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워낙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제자(약 46세)로 오래 보지 못했던 것도 있고 그의 우직한 성품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논어에서 공자는 증자를 "(우직해서) 어리석다"고 평가했는데, 주희는 논어의 주석에서 "이런 우직함때문에 증자가 학문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공부는 역시 머리보단 엉덩이다.

논어에서 증삼이 아버지 증점에게 잘못을 저질러서 맞을 때 변명을 하지않고 맞고만 있다는 이야기[4]를 공자가 듣자 크게 화를 내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유는 단지 순간의 화로 자식을 매질해 죽게 만들면 그 부모가 가질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크고 후회가 많을 것인가 해서이다. 적당히 도망가서 아버지의 화가 풀어질 때까지 숨어 있다가 차후 그 문제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우직하게 맞고있는 증삼을 나무란 것이다. 증삼의 효는 공자가 보기엔 불효이자 융통성 없는 행동이었다. 공자도 융통성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제자인 증삼의 행동은 자기가 봐도 심각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 결국 이 고사를 통해 후대 증삼 계통의 유학의 일면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제일 뛰어났던 안회는 요절했고, 공자의 말씀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잘 실천하는 그가 적통을 이어받아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에게, 자사는 맹자에게 그 계보가 이어진다......라는 건 훼이크고 사실은 공자 제자 중 가장 젊었고, 증자의 제자들이 후에 유학을 꽉 잡았기 때문에 증자가 공자의 적통이 된 셈.[5]

일반적으로 공자의 제자 중 뛰어난 제자로 알려진 10철이나 72현들은 대부분 타국 출신들이었고 공자가 효로 언급한 인물은 증삼이 아니라 민자건이었다. 그러나 민자건은 제자를 두지 않고 본인의 실천적인 효를 중요시 하고 가난으로 요절했기 때문에 그 후학은 없어졌다.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안회는 일찍 죽었고 친구이자 공자 제자들 중에 리더격인 자로는 출사한 위(衛)나라의 국내문제에 휘말려 희생당했다. 또 자공이나 자하, 자유 등은 3년상이 끝나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활동했으며 말년에 가장 아낀 자장 역시 고향인 진(陳)나라로 돌아가 활동했다. 이렇듯 뛰어난 제자들은 일찌감치 자신의 고향에 출사를 해 노나라에서 제자를 기르지 않았으며 제자를 기른 후학 중[6]에선 증삼이 가장 성공했기 때문에 결국 노나라에서 공자의 적통을 인정받게 되었다. 전국초기에 활약한 오기도 노나라에서 공부를 한 유학자였는데 증삼의 아들 증신에게서 배웠다.[7] 이렇듯 노나라에서 헤게모니를 잡은 증삼일가는 결국 유학의 정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맹자를 통해 결정적으로 크게 발전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다.

동양의 효의 대명사.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살펴보라고 한다. 제자들이 스승의 몸을 살펴보자 자잘한 상처나 흉터가 하나도 없었다. 그 이유는 공자가 말한 효의 가장 첫번째 중요한 것이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를 소중히 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항상 살얼음판을 걷듯이 몸가짐을 조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모가 매질할 때는 맞고 있었다더니? 스승의 가르침을 따름과 효에 대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사상도 효를 가장 중요시 했으며, 효경을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오자병법을 저술한 오기가 증삼의 아들 증신의 제자였는데, 오기가 공부에만 몰두하여 부모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을 보고 파문했다고 한다.

한번 한 말은 책임지고 지키는 성품이라고 전하며 한비자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아들이 자꾸 울고불고 증자를 따라나가겠다고 하자, 증자의 아내는 "아버지가 다녀오면 돼지를 잡아 주겠다." 라고 말하며 아이를 달랬다. 그런데 외출에서 돌아온 증자가 아내 말을 듣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인 하나뿐인 돼지를 진짜로 잡은 것.

이런 일화도 있다. 한번은 맹자의 제자가 증자의 일가와 식사를 같이 했는데, 상 위에 회와 구운 고기, 그리고 고욤나무 열매가 올라와 있었다. 고욤나무 열매는 상당히 맛이 없기로 당대에도 정평이 나 있던(...) 물건인데, 아 글쎄 이걸 증자가 손도 대지 않고 냅다 회와 고기만 쳐묵하는 게 아닌가? 이에 맹자의 제자가 '뭐야 이거, 그럼 지금까지 증자가 효의 대명사였다는 건 죄다 뻥카였구만' 하고 자기 스승에게 가서 이 이야기를 하니 맹자가 대차게 까면서 하는 말이 "님 모르는 소리 쩌네효. 증자 아버지가 고욤나무 열매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걸 모르심?" 효도는 무조건 좋은 것만 갖다드린다고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일화.

증자의 아버지는 찐 배를 좋아했는데 아내가 배를 잘못 찌자 이혼하기까지 했다. 효도는 셀프다 그냥 아내가 요리치라서 못 참고 이혼한 걸지도 후에 조선시대에 남자들이 마누라 내쫓아낼때 칠거지악 드립을 치며 증자의 예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증자 마누라는 과일 하나도 못 찐다고 쫓겨나는데 밥을 이따위로 해? 나가 그래도 한 번 결혼했기 때문에 평생 재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올 김용옥은 과거 논어 강좌에서부터 논어한글역주에 이르기까지 증자를 대차게 까고 또 깐다. 도올은 주자도 대단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자기가 주자(주 선생님)라고 부르기엔 좀 부족한 면이 있다며 까지만, 그래도 증자처럼 가루가 되도록 까이지는 않는다. 도올은 실제로 "내가 공자, 맹자까지는 대단하다고 인정하고 쳐 주지만 증자, 주자 같은 아류는 못 쳐주겠다 이거야" 이런 말을 일반인 대상 강연들 도중에 몇번 한 적이 있다.

그가 증자를 까는 부분은 충서에서 중요한 것이 서인데 이를 수직적 관계의 충으로 왜곡했고, 이 과정에서 충의 의미가 현재의 충성의 의미로 변질되었고, 효를 완전 수직적 관계로 고착시켜 본래의 공자의 유교를 변질시켜 지금 유교가 가진 수직적 관계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 본래 공자 시대까지만 해도 유교는 그러한 형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부모는 부모다워야하고, 스승은 스승다워야하며, 연장자는 연장자다워야하고, 상사는 상사다워야 존중받는다 -> 부모는 부모니 따르고, 스승은 스승이니 따르고, 연장자는 연장자니 따르고, 상사는 상사니 따라라.로 변질시킨 셈.

"공자말년의 제자들, 공자의 유랑의 장정의 고난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한 적이 없는 어린 세대들은 공자의 인간내면의 핵심적 생각들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그들에게 공자는 이미 너무도 멀리 있었다. 그들은 이미 신화화 되어버린 공자의 형해만을 쫓고 있었다. 공자의 사상은 안회와 더불어 죽은 것이다. 증자의 효행은 공자의 인의 지극히 협애한 일면만을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증자의 효에 대한 생각은 점점 형식주의적으로 윤색되어갔고 그것은 결국 곡례 스타일의 제식으로 고착화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종교적인 충효의 사상으로 비약의 전기를 맞는다. 아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280~337)의 기독교 신앙의 공인(the Edict of Milan, 313년)이나, 한무제가 유술을 독존한 것이나 우리는 보편사의 문제의식 속에서 동일한 성격의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할지도 모른다."

- 도올논어 1권

2 자본증가

增資 / Increase of Capital

주식회사의 자본금을 증가시키는 행위.

자본금은 주식 수로 표현되는데, 유/무상증자의 구분은 주식을 어디서 가져오느냐에 달려있다.

크게 투자자들한테 을 받고 주식을 찍어내는 유상증자와, 회계 적립금(자본잉여금) 등을 자본금으로 전환시켜서 서류상 자본금을 증가시키는 무상증자가 있다. 주식배당무상증자쪽에 가깝다.
  1. 증자의 자(字)는 자여(子輿)로 수레라는 뜻이다. 때문에 원래 '증삼'이 아니라, '증참(曾驂)'이라고 읽어야 한다. 이때 참(驂)자는 '곁마'라는 뜻이다. 이는 수레를 끄는데 힘을 쓰는 주력마가 아니라 곁에서 보조해주는 말이라는 뜻으로, 겸손함을 표현하는 이름이었다. 현재는 관습적으로 '증삼'이라고 읽기에 본문은 그대로 둔다.
  2. 지순(至順 )원년, 서기 1330년
  3. 성(郕)은 의미가 조금 불분명하다. 일단 관련된 걸 짚어 보면, 춘추시대에 성나라가 있긴 있었는데, 증자 출생 약 200년 전에 이미 멸망당했다(...). 다만 함께 추봉된 자사, 맹자의 예를 보면, 아마 증자 본인의 출생지와 관련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게 설득력 있는 게, 스승 공자와 증자 본인의 고향인 노(魯)나라 영토 안에 옛 성나라 땅이 있었기 때문. 국(國)은 당연히 '~나라'의 뜻. 종(宗)은 조종(祖宗)의 그 종. 공자가 유학의 '태조(太祖)'라면, 증자는 유학의 '태종(太宗)'인 것이다. 본래 수제자였던 안회가 돌연사(...)함으로써 대신 이었던 증자가 유학의 맥을 잇게 되었으므로... 성(聖)은 '~하신 성인聖人'의 뜻. 앞의 '종'과 결합되어 '종성(宗聖)'을 증자의 고유 칭호로 만든다. 대충 '공문(孔門)의 도통(道通)을 받아 흥성(興盛)케 하신 성인' 정도의 의미로 파악하면 될 듯. 공(公)이라 함은 쉽게 말해 공작(公爵). 앞에서 굳이 뭔 뜻인지도 모를 이름의(...) 성나라(郕國)를 갖다 붙인 이유는 바로, 이 '공작'이 제후의 작위이므로 반드시 거할 나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명색이 공작이니 체면 살려주기 위해 사라진 나라를 가공으로 세워서 거기에 영주로 앉힌 셈.
  4. 당시 그의 아비는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하는데, 다 패고 자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술이 깬채로 잠에서 깨자 증사에게 미안해 했다고 하는데, 당시 증삼은 쥐어터진 얼굴인 채로 (공자에게 배운) 피리를 아버지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불어줬다고 한다.
  5. 성리학, 양명학도 맹자계열인데 맹자계열을 거슬러 올라가면 증자가 나온다. 하지만 순자는 증자계열이 아니다.
  6. 후일 위(魏)나라를 건국한 문후는 자하의 제자였으나 자하는 은둔생활을 즐겼기 때문에 많은 제자를 남기지 않았으며 결국 증삼만큼 많은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
  7. 증삼의 아들인 증신의 제자이다. 사서에서는 증자라고 기록되어 있어 증삼에게 배웠다고 생각들을 하나 자(子)는 일반적으로 당대에 선생에 대한 경칭이기도 했다. 증삼은 연대상으로 오기가 10대가 되기 이전에 요절했다. 오기가 노나라로 유학할때는 증자의 제자와 자녀들이 노나라 학계를 주름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