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중

1 삼국지연의의 가공인물

蔡中

체중이 아니다!

채모의 집안 동생으로 유비 암살 작전 때 양양의 남문을 맡고 있었으며 주로 채화와는 세트로 엮인다.형주쌍벽

조조군 휘하에서는 채화와 함께 부장을 지냈으며 채모와 장윤이 반간계로 억울하게 죽자 조조순유의 조언에 따라 채화와 함께 오나라 진영에 거짓항복의 일환으로 들어갔다.

감녕, 황개, 감택의 항복을 받았다고 좋아했지만 가족들이 조조군에 있다는 점 때문에 올 때부터 주유에게 들켰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고 적벽대전 때 항복한 군사들과 함께 감녕의 길잡이를 맡아 남쪽 기슭으로 따라갔다. 거기서 조조가 군량을 쌓아놓은 오림까지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맡아 깊이 영채로 들어갔으며 입구에 이르러 가치가 없어지자 단숨에 감녕에게 살해되었다. 이미 채화는 이전에 주유에 의해 제물로 참수되었다.

1.1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 꾸준히 등장하나, 채화와 함께 능력은 백하팔인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45/53/3/24. 제사와 누선을 가지고 있으며 CPU 세력에 잡히면 왠지 처형을 자주 당한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44/47/2/10/19. 특기는 당연히 없고 능력치 총합은 122로 백하팔인은 면했지만 역시 안습.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40/54/2/22/43로 채화보다 눈꼽만큼 능력치가 좋다. 이 능력으로는 쓸 곳이 없을 것 같지만 채화와 함께 조조군 쪽 상성인 무장 중 정말로 흔치 않은 수군 적성 A 무장이기에 조조군에서 수전을 해야 할 때에는 부장으로 참전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시리즈와 비교하면 채중이 매우 쓸모 있는 시리즈.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는

삼국지 12에서는 일러스트도 뚱뚱한 모습으로 등장했는데,체중이 많이 나가서, 사진에서 보다시피 굉장히 억울한듯 한 모습으로 안습하게 그려져 있다(...). 잘보면 살찐 싱하형이다... 거기다가 지력이 2밖에 되지 않는다. 안습. 채화는 한술 더 떠서 지력이 1이다. 참고로 같은 작품 기준으로 하후무 지력이 4다. 하후무보다 2배나 멍청하다니 공께선 내가 뚱뚱하다고 업신여기는 모양인데 나도 1/2(육도+삼략)을 익혀 병법은 알 만큼 아오.

삼국전투기에는 세트인 채화가 안 나오기 때문에 나오지 않는다.

드라마 삼국에서는 형인 채모가 억울하게 죽자 눈물로 장사를 지내고 있다가, 조비가 찾아와 그 억울함을 달래주고 도리어 반대로 연환계를 부탁한다. 형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위해 이를 받아들이나, 항복할 때부터 주유, 노숙, 제갈량 등은 이미 연환계인 것을 간파 당하고 있었고, 결국 거짓 정보나 몇 번 주다가 적벽대전 출전 직전에 끌려나와 '억울합니다!'라고 하다가 죽는다(…).

2 정나라의 대신

祭仲
(기원전 743 ~ 기원전 682)

춘추시대 정나라의 중신으로 벼슬은 상경(上卿)이었다. 는 중족(仲足)으로 채족(祭足) 또는 제족(祭足)이라고도 한다.

원래 정나라는 동주 시대 초기 왕실을 보필하며 가장 큰 세력을 누린 제후국이었다. 그러나 정나라를 후원하던 평왕(平王)이 죽고 그 손자 환왕(桓王)이 등극하자 정나라는 왕실의 소외를 받게 된다. 당시 정나라 군주였던 장공(壯公)은 이러한 처지를 부당하다 여겨 왕실을 대신해 태산(太山)에 제사지내는 역할을 스스로 포기해 버렸다. 거기다 주변 제후국들을 침략하자 환왕은 크게 노해 제후국을 소집해 정나라를 토벌했지만 장공은 채중과 고거미를 보내 이를 물리쳤으며 축담의 화살에 맞아 환왕의 어깨에 부상까지 입힌다. 주나라 군대를 패배시킨 채중은 장공의 환대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정나라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장공이 사망하자 채중은 소공(昭公)의 후견인이 되어 (宋)나라의 후원을 받고 있던 공자 돌의 견제를 물리치고 소공이 정나라의 군주가 되는 일을 돕는다. 하지만 송나라의 군주 장공(壯工)은 크게 노하여 채중을 사로잡아 돌을 즉위시키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채중은 소공을 몰아내고 돌을 옹립하니 곧 이가 정 여공(厲公)이다. 소공 역시 백성의 신망을 얻지 못한 군주였기에 여공은 어렵지 않게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공은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채중을 제거하고 국정의 실권을 쥐려고 했다. 여공은 제중의 사위인 옹규(雍糾)를 시켜 채중을 암살하게 했지만 옹규의 아내인 채중의 딸이 이를 채중에게 발설하여 옹규가 먼저 살해당했다. 이에 채중은 여공을 쫓아내고 다시 소공을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여공은 낙으로 도망쳐 송나라의 후원을 받으며 자신이 진정한 정나라의 군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공은 일찍이 장공이 고거미에게 벼슬을 주는 것을 반대했기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공이 복위한 지 2년 후, 고거미는 중신들이 다 함께 참여하는 수렵에서 소공을 시해했다. 채중은 이에 당황하였으나, 그렇다고 자기가 몰아낸 여공을 다시 불러들이면 당연히 좆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소공과 여공의 동생인 공자 미를 군주로 세운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제나라의 양공(襄公)이 제후들을 회맹했다. 하지만 양공은 과거에 자미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채중은 회맹에 참가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자미는 끝내 고거미를 데리고 회맹에 참가했고 채중의 예상대로 양공에게 피살당한다. 채중은 소공의 막내 동생인 영을 즉위시키고 그의 재상으로 실권을 잡아 정치를 계속하다가 사망했다.

훗날 여공이 영을 죽이고 다시 복위한 시점까지 살아있었더라면 다른 나라로 망명갔거나 아니면 멸족을 면치 못했겠지만 이미 그 때는 이미 죽고 없었다. 다만 채중의 행동을 볼 때 어떻게든 여공의 복위를 막거나 여공을 역관광태웠을 가능성도 있다.

열국지에서는 제족으로 등장하는데 거의 비슷하게 나오며 일세대를 풍미한 권신으로 나온다.

3 채나라의 2대 군주

蔡仲

이름은 호(胡). 채숙(蔡叔) 도(度)의 아들로 아버지가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쫓겨난 후 자신의 행위를 고쳐 주공단의 인정을 받아 주나라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먼저 주공의 봉국인 (魯)나라의 경사를 지내며 노나라를 다스렸고 주공은 이를 보고 주성왕에게 말해 호에게 채나라를 다시 봉해 채숙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채중이 죽자 아들 채백(蔡伯) 황(荒)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