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녕

오서 「정황한장주진동감릉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傳)」
정보황개한당장흠주태진무동습감녕능통서성반장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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甘寧
(? ~ 215?[1]/219?[2])

조조에게 장료가 있다면 손권에게는 감녕이 있다.

1 개요

중국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 는 흥패(興覇). 파군 임강현 사람.

2 정사

2.1 익주의 토호

고향이 익주 파군인데 본디 감녕이 남양 사람인데 선조가 파군에서 빈객으로 지내 파군 사람이 되었다는 기록도 주석으로 있는걸 보면 이주민 2, 3세대에 속했다고 여겨진다.

젊어서 파군에서 관리를 지내고 천거되어 촉군승[3]으로 임명되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본군으로 돌아갔다. 사람됨이 싸움을 잘하고 무리를 끌고 다니기 좋아했기에 동네 건달들을 모아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도적단을 만들어 인근에서 행패를 부렸다.

이때 감녕은 호화판으로 도배를 하고 살았는데, 땅에서 출입할때는 수레와 기마병들이 길게 늘어서 정렬했고, 물에서는 배들이 늘어섰으며, 시종들을 비단으로 치장시켜 감녕이 가는 곳마다 빛이 날 정도였으며, 비단으로 돛을 만들어 배를 맸다가 떠날 때는 이걸 잘라버리는 기행을 벌였고, 비단으로 돛을 맨다고 해서 금범이란 말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물소 꼬리로 만든 깃발을 등에 지고, 손에는 활을 들고, 허리에는 항시 큰 구리방울을 달고 다녀 사람들은 감녕의 구리방울 소리만 들어도 몸을 사렸고, 관리들조차 감녕에게 영합해 서로 나눠먹었었고 그렇지 않은 관리는 온갖 보복을 받았다고하며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배가 언급되는 것과 파군의 위치를 봤을때 아마 형주와 익주를 잇는 물길을 장악해 익주의 주요 이권사업인 비단무역을 독점하고 왕 부럽지 않은 위세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이쯤되면 이미 조폭이라기보단 군벌 레벨로 봐야할 수준...

2.2 익주를 떠나다

그렇게 촉 지방에서 두목 노릇을 20년[4]동안 하며 보니 점차 성격도 누그러지고 제자백가의 책을 가까이하여 부하들을 데리고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의탁했다.

다만 유언전에 주석으로 달린 영웅기에 따르면 194년, 익주에서 유언이 죽고 아들인 유장이 집권하자 형주 별가 유합(劉闔)과 유장이 거느리던 심미, 누발, 감녕이 장안에서 이각이 임명한 익주자사 호모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주하여 형주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의 이름 중에 감녕이 보이며, 또한 반란군 인사들의 면면에는 뜬금없이 형주 별가가 끼어있는데 이로 인해 감녕이 유표에게 달아나기 이전에 이미 유표가 감녕 등의 반란을 지원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감녕의 본전에서는 감녕이 형주로 간 것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자백가의 책을 가까이하여'라고 어물쩡 넘어가고 있지만 이를 본다면 실제로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도망친 것이라는 쪽이 신빙성있게 보여진다.

2.3 황조의 푸대접

하지만 막상 유표는 감녕을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유표를 지켜본 감녕 역시 유표가 군사업무에 관련된 일을 전혀 모른다고 여겨 그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오나라를 따르려 했지만 강하태수 황조가 하구를 막고 있었기에 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황조에게 의탁했다고 한다.

어쨌든 황조에게 갔지만 황조 역시 바른말만 하는 감녕을 예우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을 때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황조가 패하고 추격을 받아 위태로워지자, 감녕은 활을 쏘아 능조(능통의 아버지)를 죽여 황조를 구하는 공을 세웠지만 황조는 여전히 감녕을 처음(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과 같이 대했다고 한다. 이 공으로 황조의 부장, 소비가 감녕을 수 차례 천거했으나 황조는 오히려 감녕을 견제하기 시작해 감녕의 빈객들[5]을 유혹해 흩어지게 하는 등 더욱 푸대접한다. 실의에 빠진 감녕은 황조를 떠나고 싶었지만 도망쳤다간 붙잡힐 것이 두려워 떠나지 못한 채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감녕의 마음을 알았던 소비는 황조에게 말해 감녕을 주(邾)의 현장으로 삼아 원하거든 다른 곳으로 가도록 했다.[6]

2.4 손권에게 투항

소비가 준 기회덕분에 감녕은 8백명의 무리를 모아 그대로 손권에게 투항해 버린다.

하지만 역시 예전에 오나라 장수인 능조를 죽인 일이 있어서인지 바로 가지 못하자 여몽주유의 추천으로 손권 앞에 나아가게 된다. 감녕은 황조 등을 치자고 진언하자 손권은 승낙한다. 감녕은 장소의 만류마저도 소하의 예를 들며 물리친 후 황조를 공격해 강하의 악현과 사이현을 점령한 후에 당구에 머문다. 황조가 풍칙에게 죽은 후 손권이 황조의 수하였던 소비도 죽이려고 했는데 감녕은

소비는 옛날 저에게 은혜를 베푼 자입니다. 저는 소비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전에 길가에서 죽어 장군 휘하에서 목숨을 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소비의 죄는 주륙을 당함이 마땅하지만, 특별히 장군께서 그의 머리를 저에게 주시길 원합니다.

라고 말하며 그를 살려줄 것을 청한다. 소비가 도망치면 어쩔 것이냐는 손권의 물음에는

소비는 찢기는 화를 면하고 다시 살 수 있는 은혜를 받는다면 오히려 달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도망칠 생각을 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저의 머리를 대신 상자에 넣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손권이 결국 소비를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 때를 기점으로 손권은 감녕에게 병권을 주고, 당구에 주둔하도록 했다.

2.5 남군 공방전

이후에 감녕은 주유 밑에서 적벽대전에 참여했고 적벽대전이 끝나고 주유가 남군의 조인과 싸웠지만 아직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감녕은 이릉성을 탈취하지만 곧바로 조인이 보낸 몇 배나 되는 적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병사들이 모두들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감녕만은 태연자약하게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고사성어 담소자약의 유래, 감녕은 주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써서 포위를 풀었다.

2.6 익양대치

손권이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탈취한 일로 노숙이 관우와 익양에서 대치하게 되었을 때 이를 수행했다. 당시 관우가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그중 정예 5천을 가려내어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겠다고 했다. 감녕은 당시 병사 3백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노숙에게 병사 5백을 요청하여 관우에게 대항하겠다고 말해 노숙이 가려 뽑은 병사 1천을 받아 그 날 밤 가니 관우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7] 감녕은 관우가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며 건너면 반드시 사로잡는다고 자신했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결국 도강을 하지 못한 채 강 건너에 머무르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를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8]

당시 관우의 용맹이 대단히 높게 평가받았음을 생각하면 감녕의 대담한 태도는 무척 인상적인 것이다.[9]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 양신, 하이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2.7 환성 전투

후에 감녕은 환현 공격에 참가해 승성독(升城督)으로 임명됐다. 감녕은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 올라가 장사들의 선봉이 되어 결국은 주광(朱光)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았다. 전후 공로를 평가하니 여몽이 가장 컸고, 감녕이 그 다음이었으므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제수되었다.

2.8 2차 합비 공방전

215년, 감녕은 합비 공방전에 참가했는데, 마침 역병이 유행하여 군대는 모두 물러났고, 오직 수레 아래의 호사(虎士) 1천여 명과 여몽ㆍ장흠ㆍ능통 및 감녕이 손권을 따라 소요진(逍遙津) 북쪽에 있었다. 장료는 멀리서 이러한 모습을 관찰하고 즉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급습하였다. 감녕은 뒤에서 적에게 화살을 쏘았으며, 능통 등은 직접 앞으로 나가 필사적으로 장료군과 싸웠다. 감녕은 군악대에게 무엇 때문에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고 거세게 소리 질렀다. 그때 감녕은 웅장하고 강인했다고 한다. 손권은 특별히 감녕을 칭찬했다.

2.9 유수구 전투

유수구 전투에서는 감녕이 단 100명의 군사로 야습을 성공시켜[10] 그나마 좀 체면치레를 했던 관계로 손권은 '조조에게 장료가 있지만 에게는 감녕이 있으니까 충분히 승산이 있다.'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이 일화를 214년의 유수구 전투의 일로 보면 감녕전의 순서가 맞아서 떨어지지만, 손권의 발언을 보았을 때, 장료를 매우 인상깊게 봤을 215년의 합비전투 이후의 발언으로 봐야 자연스러워 217년의 유수구 전투의 일로 보기도 한다. 진위여부는 불명.

2.10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감녕의 주방에서 일하는 어린이가 일찍이 허물이 있자 여몽에게로 달려가 투항했다. 여몽은 감녕이 그 아이를 죽일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즉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후에 감녕이 예물을 갖고 여몽의 모친을 배알하고 직접 모친과 당에 오른 후에야 비로소 주방의 어린이를 감녕에게 돌려보냈다. 감녕은 여몽에게 그 아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잠시후, 배로 돌아오자 그 아이를 뽕나무에 묶어놓고 직접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일을 마친 후, 뱃사람들에게 명하여 배의 닻줄을 내리도록 하고, 옷을 벗고 배 안에 누웠다. 여몽은 매우 노여워하며, 북을 쳐서 병사들을 모아 배로 가서 감녕을 공격하려고 했다. 감녕은 이 소식을 들었지만, 고의로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안 여몽의 모친이 '주군(손권)에게서 중대사를 떠맡은 네가 주군의 신하인 감녕을 너의 사사로운 노여움 때문에 죽게 한다면 설령 주군께서 힐문하지 않더라도 그 행동이 신하된 자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라며 여몽을 만류하였고. 여몽은 본디 지극한 효자였으므로, 모친의 이 말을 듣고 곧 마음을 풀고는 감녕의 배로 가서 웃으며 감녕에게 '흥패(감녕의 자), 어머니께서 그대를 식사에 초대하셨으니 어서 올라오시오!'라며 화해를 청하였고, 감녕은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며 여몽에게 사과하고는 여몽과 그의 어머니와 함께 온 종일 즐겁게 지냈다는 뒷이야기가 전한다. 죽은 아이는 더이상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지만 넘어가자. 배원소?

이렇게 보면 훈훈해보이지만어디가?오의 군사 체계가 얼마나 개판독립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2.11 죽음

건강실록[11]에 따르면 215년 죽는데 그의 병사는 반장이 이끌게 된다. 다만 반장전에 따르면 관우 토벌 이후에 감녕의 군대를 인수 받았다고 하는데(대략 220년), 그 5년 사이의 주인없는 군대를 방치할리 없기 때문에 모순되기도 한다.

감녕이 죽은 후, 손권은 매우 애통해했다. 아들 감괴(甘瑰)는 죄를 범하여 회계군으로 이주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2.12 죽어서 신이면서 왕이되다

속자치통감 續資治通鑒 권 129 : 오吳의 장수 감녕甘甯을 소의무혜유애령현왕昭毅武惠遺愛靈顯王으로 추가로 봉했다.

육유陸遊의 입촉기 入蜀記 권 4 : 13일. 부지富池의 소용묘昭勇廟에 이르러, 호주壺酒를 가지고 돼지를 희생犧牲으로 삼아 소의무혜유애령현왕신 昭毅武惠遺愛靈顯王神 을 뵈었다. 신은 오대제吳大帝 때 절충장군折衝將軍 감흥패甘興霸다. 흥패가 일찍이 서릉태수西陵太守가 됐기에, 이 곳에서 제사를 받았다. 개보開寶 중, 강남을 평정하고 나서, 강회江淮의 신사神祠의 봉작을 더해줘, 비로소 포국공襃國公에 봉했다. 선화宣和 중, 왕으로 진작시켰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대중들에겐 잘 부각되지 않는 건데 화살로 적장을 물리친 경우가 많다. 능통의 아버지 능조부터, 황조, 채모의 동생 채훈, 악진[12]까지... 이쯤되면 황충 저리가라다.[13] 문제는 2차 창작물에서 감녕의 활 실력에 대해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궁술이 동작대 궁술대회서만 묘사되는 하후연조차 양궁선수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어째서! 비인기팀 선수의 서러움 그외 정사에 있지도 않은 황개의 고육지계를 말리면서 주유에게 간청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실제 감녕의 성격을 생각하면 흠좀무, 이 때문에 몇몇 삼국지 게임에선 감녕이 오나라 진영에 없는 경우 적벽대전 이벤트가 활성화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황조와 싸울 때 정보에게 쫓겨나는 황조를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황조를 무시하고 그를 죽이는 장면도 나온다.(이는 자신이 오나라의 신하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릉대전에서는 이질에 걸려서 설사를 흘리며 전장에 나섰다가(...) 사마가의 화살을 뒤통수머리(!)에 맞아 도망가다가 나무 밑에서 죽었다...고 나와 있지만 연의의 창작. 정사에선 그냥 노환으로 죽은 것으로 보인다.

단, 감녕이 전사한 곳으로 알려진 지방에서 들리는 말에 따르면, 유비군과 싸우다 전사한 감녕의 시신을 까마귀들이 날아와 지켰다고 한다. 그래서 감녕을 지방의 수호신격으로 모시고 까마귀를 그의 심부름꾼으로 여겨, 그 지방에서는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까마귀들에게 먹이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4 감녕의 나이

그 맹렬한 무용에 거칠고 사치스러운 해적의 이미지를 더해 호쾌한 건달 청년 쯤의 이미지로 묘사되지만 익주에서 관리를 지내다 사임하고 20년 동안 수적질을 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미 유표에게 임관하는 194년의 시점에서 최소한 40대 이상의 나이였을 것이다. 194년에 40 전후라면 대충 조조, 원소, 손견와 비슷한 연배다. 보통 할아버지로 묘사되는 장소가 156년생인데, 오히려 감녕이 장소보다 몇 살 많았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따른다면 유수구에서의 활약은 진정한 노익장뽜와을 과시한 일화라 할 수 있다.

단, 수적 두목 생활이 '20년'간 계속되었다는 표현에서 20년이라는 것은 정확히 20년이 아니라 대충 이십년 가까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도 높으니까 몇 년정도 더 적게 잡을 수는 있다. 또 유표의 지원 아래 유장의 권력세습에 반기를 들었다가 형주로 달아난 촉의 호족 감녕이 본 항목의 감녕과는 동명이인이라고 가정하면 또 4, 5년 정도 어리게 볼 수 있다.

또한 겨우 15, 6세의 어린 나이에 군에서 천거되어 관리가 되었고 커리어를 엄청나게 빨리 시작했다는 가정도 할 수 있는데,(약관 20세에 천거되는 것도 대단한 속성 코스다.) 사실 10대 소년이 장리로 천거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며, 현승도 아니라 군승, 그것도 꿰찬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어쨌든 가능성이 0은 아닌 이상, "나의 감녕은 이렇지 않아!"를 외치며 최대한 어리게 보려고 우긴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장료, 만총도 10대부터 관직생활 시작했다

하지만 저 20년이라는 표현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되는 게 삼국지집해에서는 선후관계를 유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도망친 후에 수적생활을 한 것으로 해석하여 2가 덧붙여진 거라 해설한다. 즉, 유장에게 반란→수적생활→유표에게 귀의 순으로 해설하고 있다. 이것에 따르면 20년 수적생활 자체가 모순인 셈이다.

호쾌한 청년 이미지가 익숙하긴 하지만 감녕의 나이를 어떻게든 최대한 어리게 잡으려고 해도 손교와 싸움난 일화를 보았을 때 적어도 손교보다는 1세대 위, 손교의 아버지뻘의 나이였을 것이다.[14] 하지만 창작물에서는 나이가 별로 많지 않게 묘사되어 버린다. 절충안을 따지면 160년대생 정도라고 위안을 삼아도 좋을 듯.

연의에서는 222년 이릉대전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건강실록에 따르면 215년에 죽었다고 한다. 결국 감녕은 병으로 죽은게 아니라 늙어서 죽었다고 봐도 앞뒤가 맞아버린다.

다만 반장전에 따르면 감녕의 병사를 받는 시기가 관우토벌 이후라서 확실히 215년에 죽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반장전을 따지자면 대략 219년 즈음 사망했다고도 볼 수 있다.

5 감녕전의 순서 문제

건강실록에 따르면 감녕은 215년에 죽었는데 감녕전의 마지막 부분의 순서는 상당히 이상하다. 일단 묘사한 사건 순서로 배치하되 다른 전에 나오는 시간을 써보도록 하자.

  • 강릉(남군)에서 조인과의 전투 (208년 ~ 209년)
  • 익양대치에서 관우를 막음 (215년)[15]
  • 주광을 물리친 환성 전투 (214년 5월)
  • 유수구에서 100명으로 조조 기습 (212~213, 214년 7월, 216~217 중 하나)
  • 합비 공방전에서 소요진 전투 (215년 8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익양대치의 이야기인데 오주전의 경우 익양대치를 214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선주전과 요립 전의 의견에 따라 익양대치를 215년으로 할 경우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걸 삼국지집해의 역주에서는 감녕이 관우뢰를 만든 것은 옛날 일이라고 칭했다.

만약 관우뢰를 만든 것을 옛날이라고 한다면

  • 강릉(남군)에서 조인과의 전투 (208년 ~ 209년)
  • 익양에서 관우를 막음 (209년 ~214년 사이)
  • 주광을 물리친 환성 전투 (214년 5월)
  • 유수구에서 100명으로 조조 기습 (214년 7월)
  • 합비 공방전에서 소요진 전투 (215년 8월)

가 되어 순서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자치통감에서는 그래서 그런지 감녕의 일화 중 관우한테 침 뱉겠다고 하는 부분이나 유수구, 합비에서의 일은 등장하지 않는다.

6 기타

같은 오군의 능통과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 원수로 여겨 껄끄럽게 지냈지만, 연의에선 서로 창칼을 몇 년에 걸쳐서 나누고는 끝내 화해해서 호흡을 맞추게 된다.(능통 항목 참고.) 단 정사에선 둘이 끝내 화해했다는 기록은 없기에, 아마 서로 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손교와 관계는 손교가 술에 취해 발작해서 감녕과 싸웠다가 손권의 편지를 받고 손교와 감녕이 화해했다는 내용은 있다.

여담으로 송나라 때 바람이 없어서 조운선이 출발하지 못하게 됐을 때 감녕이 때마침 바람을 불러왔다며 오왕신으로 봉해진다. 또한 청조 포송령의 요재지이에도 오왕신으로 등장한다.

그의 고향인 파군은 현재의 중경(重慶) 부근인데, 그 곳 만주구(萬州區)에 있는 감녕진(甘寧鎭)은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그의 후손으로는 증손자인 감탁(甘卓)이 있다.

7 미디어 믹스

각종 매체에서 방울과 깃털장식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옛날에 수적질을 할 때 방울과 깃털장식을 했다는 말이 있고 연의에는 유수구에서 깃털을 단 다음 조조군에 기습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 건강실록을 따랐을 때의 사망년도. 그 이외 사서에서는 언제 죽었는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2. 반장전에서의 내용을 토대로 추측되는 사망년도. 반장전의 서술 순서로는 관우토벌 후에 감녕의 군대를 받았다고 한다. 만일 215년에 사망했으면 4년동안 주인없는 군대를 방치할리가 없기 때문에 의문점이 된다.
  3. 승(丞)은 군을 다스리는 태수의 업무를 보좌하는 관직이다.
  4. 삼국지집해에서는 저 햇수가 말이 안 된다고 부정한다. 그 외 자세한 부분은 아래의 감녕의 나이 부분 참조.
  5. 감녕은 본래 수적, 협객 출신이었으므로 사적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6. 그러니까 변방으로 파견을 보내줄 테니, 도망치든 남든 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7. 물론, 관우 입장에서는 무리하게 강을 건널 필요가 없었다.
  8. 이외에도 이 당시 즈음으로 노숙의 이름을 딴 제방인 '노숙제'도 만들어졌다.
  9. 이게 관우를 일방적으로 까내리는 일화로 보일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관우 항목 참조.
  10. 이것을 217년의 일로 보면, 장료가 합비전투에서 시도했던 기선제압 기습공격의 복수전의 성격에 가깝다.
  11. 삼국시대의 오나라 이래로 건강(건업)을 중심으로 한 강남 지방의 국가들의 연대학적 사서이다.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기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사 삼국지와 충돌되거나 모순되는 내용도 존재하고, 여기에서만 존재하는 기록을 교차검증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기도 하다.
  12. 유수구 전투에서 능통을 구하기 위해 화살을 쏴 악진의 얼굴을 맞혔다.
  13. 황충은 활로 킬수 올린 대상은 의외로 등현이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썰어서 킬수 올린다.
  14. 둘의 싸움 뒤에 손권이 손교를 질책하는 편지를 보내는데, '감녕이 네 아버지뻘 장수인데 그렇게 함부로 대해야 쓰겠냐?'는 내용이다. 손정이랑 비슷한 나이대인듯
  15. 관우뢰에 관한 이야기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