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 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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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베잘렐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한국 이름 : 헐벗, 흘법(訖法), 할보(轄甫)
1863년 1월 26일 ~ 1949년 8월 5일 (향년 86세)

1 생애

비방이 극에 달하고 정의가 빛을 잃은 이 때에

나의 큰 존경의 표시와 변함 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옛 한국이 낯선 한국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나
민족 정신이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은 죽음의 모습을 하지만'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의 국민에게

이 책을 바친다

- 호머 헐버트,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의 헌사, 1906년[1]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 호머 헐버트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2]

미국 버몬트 주 출신의 선교사였으며[3], 1886년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점차 한국의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하였고[4] 1891년 12월에 귀국하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 일하다가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재입국 하였다. 이 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이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헐버트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도 힘썼다. 그는 한국의 자주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특히, 1905년에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한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5]의 국가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된 을사조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만다.

또한 대한민국의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하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문화훈장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받아갔다. 한글학회에서는 한힌샘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평상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한국어를 익혔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해 1889년에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세계지리 교과서이기도 하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이후에도 서재필, 이승만 등의 독립 활동에 힘을 보태는 등 한국을 잊지 않았다.

2 마지막 지령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되었으나 기관지염으로 8월 5일에 별세했다. 당시에 한국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1달여에 가까운 여행은 역시 노인인 그에게는 너무 무리였는지 한국에 도착한지 1주일만에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을한의 취재기 《인간 이은》에 따르면, 제물포(인천)항으로 배를 타고 방한한 뒤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면서 여기가 제물포, 인천이라는 지명을 똑똑하게 구사했다고 하며, 자신이 떠나왔을 때보다 훨씬 발전했다며 연신 놀라워했다고 한다[6].

사실 그가 죽기 전 한국에 온 이유는 고종황제가 남긴 비자금을 되찾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강제로 폐위된 고종황제는 헐버트에게 상하이 독일 은행에 숨겨두었던 비자금으로 독립운동에 투자할 예정이었고, 출국이 자유로웠던 헐버트에게 찾아달라고 밀명을 내렸다.헐버트는 상해로 가서 비자금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미 고종의 비자금 정보를 알고 있었던 일제가 가짜 증명서와 차용증으로 고종의 비자금을 털어간 상태였다. 설사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독일제1차 세계대전 패전이후 겪은 초 인플레이션 문제 등으로 휴지조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헐버트는 죽기 전에 고종의 못다한 명령을 지키기 위해 귀국하였으나, 고령의 몸으로 찾기는 어려웠고 안타깝게 일주일만에 사망을 하고 만것이었다. 그의 비자금관련 서류는 현재 국립 정부 문서 보관서에 보관되어 있다.

3 평가

그는 조선 개화기 - 일제강점기 - 해방을 모두 눈으로 지켜봤던 말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였다. 저서로는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와 ≪한국사(History of Korea)≫,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 연구(Comparatives Grammer of Korean and Dravidian, A Search for the Siverian Klondike)≫, ≪대동기년≫ 등이 있다.

어니스트 베델, 석호필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꼽히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사후 195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대상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다시 2014년, 한글날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4 기타

2010년 8월, 그것이 알고 싶다 767회 <강제병탄 100년 - 고종황제의 비자금은 어디로 갔는가>편에서 헐버트 박사의 마지막 임무에 관하여 비중있게 다뤄졌다.

2011년 6월, KBS 역사스페셜 74회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꿈>편에서 헐버트 박사의 얘기를 다루었다. 본 방송 100여년전 그의 행적을 보면 가히 '미션 임파서블'급 수준으로 세계를 이동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언젠가 그의 얘기가 영화에서 나올지도 모르겠다.

2014년, 그의 친동생 아처 헐버트(Archer Butler Hulbert)가 생전에 구한말 당시의 한국에서 수집한 각종 자료 모음인 '아처 헐버트 컬렉션'이 공개되었다.
  1. Dedicated/To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As a token of high esteem and a pledge of unwavering allegiance,/at a time when calumny has done its worst and justice has suffered an eclipse/and/To the Korean People/who are now witnessing the passing of old Korea to give place to a new,/when the spirit of the nation, quickened by the touch of fire,/shall have proved that though "sleep is the image of death" it is not death itself
  2. 이 말은 그의 유언으로,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비에 쓰여 있다. 지금이나 당시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미권에서는 큰 업적을 세운 위인들이나 묻힐 수 있는 대단히 영예로운 장소로 꼽힌다. 헐버트가 얼마나 한국에 대해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3. 버몬트 지역은 자유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유독 강하다고 한 비정상회담의 타일러의 인터뷰 #
  4. 유일하게 열의를 보였던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와나 맥빠져
  5. 독일, 러시아, 미국, 벨기에,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청나라, 프랑스
  6. 근데 해방된 지 4년, 정부수립한지 1년도 채 안 지났을 때인데, 이게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얘기해 주는 건 아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