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Kautsky 1854.10.16 – 1938.10.17
1 개요
오스트리아, 독일[1]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언론인. 20세기 초반 마르크스주의에 관하여 최고의 권위자로 대우받았고, 별명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교황(Papst des Marxismus)이었다. 명색이 무신론자이신 분들이 교황이라니...
2 생애
1854년 중산층 예술가 가정에서 그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프라하에서 출생했다. 이후 빈으로 이주하여 빈 대학교에서 역사와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며, 이 시기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한편 공산주의의 대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도 교류한다. 엥겔스와의 교류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유작이었던 <잉여가치론>(Theorien über den Mehrwert)을 편집하면서 카우츠키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1891년에는 아우구스트 베벨[2], 베른슈타인과 함께 사민당의 에르푸르트 강령을 작성하면서 당 내 최고의 이론가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지위는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하면서 더욱 확고부동하게 됐으며, 1890년대 후반에는 스승이었던 베른슈타인이 민족주의 성향이 가미된 이른바 수정주의를 제창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중심 혁명 이론에 비판을 가하자[3]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한편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처음에 카우츠키는 전쟁을 '전제 봉건적 차르에 대한 성전'으로 규정하고 찬성입장을 보였으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반전적 성향으로 돌아섰고, 1917년에는 아예 사민당에서 탈당한다. 독일 혁명 이후 다시 사민당에 복당한 카우츠키는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본질을 놓고 레닌, 트로츠키와 키배를 벌이기도 하는 등[4] 고령의 나이에도 활발히 집필활동을 해나간다. 하지만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망명을 떠나야만 했고 같은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84세로 세상을 떠난다. 카우츠키 본인은 나치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러지 못해서 아들이었던 베네딕트 카우츠키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7년동안 수감됐으며 아내 루이제는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