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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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은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약칭은 SPD(에스페데)이다.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정당이자 대표적인 수권정당. 또한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좌파 정당이기도 하다. 전세계 사회주의 좌파 진영의 오래된 미래, 변혁노선을 둘러싼 논쟁의 역사.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어 있다.

1 초창기 (창당 ~ 1914)

독일 통일 이전인 1863년에 만들어진 독일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이 그 원류이다. 독일 통일 이후인 1875년에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당명을 바꿨으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反사회주의 정책과 이를 기초로 한 탄압으로 제도권 정치에는 참여하지 못했다.[1] 이 시기 사회민주당이 정치조직으로서 산업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을 표방하면서 정당의 틀을 갖춰나가는 중이었고, 노동운동과 친화적이었다. [2]

1890년 총선에서 대약진하고 이 선거에서 패한 비스마르크가 물러 난 뒤엔 빌헬름 2세에 의해 반사회주의법이 폐기되면서 오늘날의 당명인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했으며, 마르크스주의를 당의 핵심 이념 및 지향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말년의 엥겔스가 사회민주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흔히 공산주의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호칭되기때문에 의외로 묻혀지는 사실이지만 계보상으로 본다면 사회민주당이 마르크스의 직계이고 후의 소련 볼셰비키, 독일 공산당이나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 좌파당은 오히려 방계에 가깝다.직계가 집을 포기하고 나가서 그렇지 방계는 집을 자기식대로 재건축 해버렸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자유주의가 진보적인 이념 취급을 받았을 시절이었던지라, 이 시절 포지션은 극좌였다. 이후 제국의회 선거에서 꾸준히 주요정당의 자리를 차지했으나, 당시 독일 제국의 선거제도가 현재 프랑스처럼 결선투표제인데다가 계급투표 성향이 강했고, 도시지역에 의석수가 인구에 비해 덜 배정되어있어서 집권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제도권 진출을 통한 사회주의 성립이라는 수정론적 관점으로 바뀌게 된다.

여전히 당의 핵심이념은 마르크스주의였지만, 독일 사회민주당은 적극적, 폭력적 활동과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확산을 주도하기보다는 내부에서 사회주의의 기반을 갖추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르크스적인 역사 발전론에 따라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국가에서는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가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 그러한 이론의 토대였는데, 이는 이후에 자본주의의 '자동 붕괴론'으로 이름 지어졌다.

독일에서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전쟁 수행을 위한 독일의 국채 발행을 지지하는 데서 시작하여 독일의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아직 자본주의의 후진국인) 러시아 따위에게 독일이 무너지면 (자본주의의 최종 단계에 더 가까운, 즉 공산주의에 더 가까운) 독일 내 사회주의의 기반도 붕괴할 것'이라는 논리였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국제성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흔드는 것이었다. 결국 제2인터내셔널은 제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된다. 이로 인해 당 내부에서는 반전을 주장한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소수파'가 독일 공산당으로 떨어져 나갔다.

(물론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대다수의 유럽 국가에서도 좌파진영은 너나 할 것 없이 찬전여론에 적극 동참했다. 예외가 당시에 러시아 좌파 내에서도 소수파에 불과했던 레닌 그룹 정도였고, 러시아 혁명으로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수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전쟁 중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러시아 공산세력은 "제3인터네셔널"로 계승을 주장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소비에트 연방을 차린 후 코민테른(국제 공산주의자회)을 차리면서, 공산주의의 주도권은 소비에트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의 집권과 독소전쟁을 통해 코민테른 역시 러시아의 일국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획일적으로 위성국에 하달하는 위계조직이 된다. 이는 현실사회주의가 결과적으로 국가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서 기인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2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황이 독일의 절망에 빠졌고 독일이 휴전을 요청하자 연합국에서 전범으로 취급한 빌헬름 2세와 독일 군부와는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독일 군부는 사회민주당에 전후처리를 떠맡겼다.

11월 혁명으로 제2제국이 종식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민주당은 정국의 주도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중심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전부터 받아들였던 수정론적 관점을 당의 핵심목표로 구체화하며, 혁명론을 공식적으로 포기, 제도권 정당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대신 혁명론은 독일 공산당이 가져가게 된다.

사회민주당은 독일 신정부 구성에 큰 공헌을 했으며, 신생 바이마르 헌법에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여러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사항들을 삽입하는 등 성공적으로 새 국가의 출발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무엇보다 11월 혁명에서 무장봉기에 반대한 것이 중도층의 호응을 얻었으며, 우파에서도 우리랑 이념은 다르지만 그래도 대화는 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식하게 된 것이 큰 효과를 얻었다. 덕분에 중도우파인 민주당이나 중앙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공화국 초기에는 다수의 총리를 배출하는 등 내각을 주도했다. 그러나 패전 직후의 혼란과 프랑스-벨기에군의 자르지방 점령 등 내외적 악재로 여러 차례 곤경에 빠졌다. 이후 사회가 좀 안정된 1928년 총선에서 승리, 다시 연정을 구성해 이번엔 제대로 나라를 꾸려나가려 했는데 세계 대공황이 터져버렸다.

대공황과 뒤이은 국내정치의 혼란 속에 사회민주당은 중도지지층 다수를 우파에, 좌파지지층 다수를 공산당에 빼앗기는 위기에 처하고, 1930년 이후에는 총리직까지 잃게 된다. 그래도 꾸준히 원내 1당이었으나 과반의석은 아니었고, 위기를 이끌어갈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부재하여 위기를 헤쳐가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활동 금지 및 정당해산을 당했다. 나치가 강성하던 1932년 이후로도 줄곧 원내 제2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정국 주도권을 쥐지 못한 것이 끝내 파국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당의 핵심지도자들은 체포되거나 국외망명을 떠났다.[3]

3 전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망한 후, 외국에 망명했던 주요 정치지도자들과 국내 잔존저항세력이 결합하여 당을 부활시켰다. 이후 전후복구와 냉전의 위기 속에서 기민련에게 여당 자리를 넘겨줬지만 독일의 제1야당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에 대한 반대를 명백히 하고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과 함께 유럽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핵심으로 나서게 된다. 참고로 동독지역의 사회민주당 조직은 당시 독일 공산당과 합당하여 독일 통일 사회당을 설립하였다.[4]

자기들도 케케묵은 마르크스주의로는 결코 집권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해 공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대중정당으로 변모하는 대변화를 꾀한다. 그렇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도 만년야당 신세를 면하지 못하다가 1966년에 기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면서 여당자리에 올랐고, 1969년 총선에서 승리, 反나치 망명지도자였던 당수 빌리 브란트를 총리로 내세웠으며 이후 동방정책을 추진하여 화해에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 많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게토를 방문해 전쟁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무릎끓고 사죄한 사건은 전세계에 좋은 의미로 충공깽을 선사했다. 그러나 1974년, 빌리 브란트의 비서 하나가 동독 간첩으로 확인되자 브란트가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등 위기를 겪었고, 1982년에는 자민당이 사민당과의 관계를 청산함에 따라 기민련-기사당 연합과 자민당 연정에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1998년, 녹색당과 적녹연정을 만들며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총리가 되었으며, 2005년에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총선에서 패배, 기민련-기사당 연합의 앙겔라 메르켈에게 총리를 넘겨주는 대신 대연정을 구성했다. 그러나 2009년에는 참패하며(23.0% 146석/620석) 야당으로 회귀했다.

2010년 이후로는 지지층 일부가 녹색당이나 좌파당으로 옮겨가는 지지층 이탈 현상과 함께 여론조사상 지지율이 녹색당보다도 뒤지는 위기에 처한 상태였고 2013년 총선에서 제2당이 되었다. 기민당과 대연정 협상에 착수했다. 결국 주요 쟁점이었던 시간당 8.5 유로의 최저임금제 도입을 관철시키며 대연정에 참가하였다. 사민당은 내각에서 6개의 장관직을 얻었으며, 지그마어 가브리엘 당수는 경제부 장관을 맡으면서 환경부 소관이었던 에너지 분야를 가져왔고, 부총리를 겸하게 되면서 내각 2인자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2016년 들어서 메르켈 총리의 지지율이 점점 하락하자 사민당은 기민/기사련을 버리고 좌파당(!)[5], 녹색당과 연대할 생각이 있는 듯 하다. (일명 적적녹 연대)
[1]

4 역대 선거결과

4.1 제국의회

1871 3석 3.2%
1874 9석 6.8%
1877 12석 9.1%
1878 9석 7,6%
1881 12석 6.1%
1884 24석 9.7%
1887 11석 10.1%
1890 35석 19.8%[6]
1893 44석 23.3%
1898 56석 27,2%[7]
1903 81석 31.7%
1907 43석 28.9%[8]
1912 110석 34.8%[9]

4.2 바이마르 하원

1919 163석 37.9%[10]
1920 102석 21.7%[11]
1924(1차) 100석 20.5%
1924(2차) 131석 26.0%
1928 153석 29.8%
1930 143석 24.5%
1932(1차) 133석 21.6%
1932(2차) 121석 20.4%[12]
1933 120석 18.3%

4.3 서독 하원

1949 131석 29.2%
1953 151석 28,8%
1957 169석 31.8%
1961 190석 36.2%
1965 202석 39,3%[13]
1969 224석 42.7%[14]
1972 230석 45.8%[15]
1976 214석 42.6%
1980 218석 42.9%[16]
1984 193석 38,2%
1987 186석 37.0%

4.4 독일 하원

1990 239석 33.5%
1994 252석 36.4%
1998 298석 40.9%[17]
2002 251석 38,5%
2005 222석 34.2%[18]
2009 146석 23.0%[19]
2013 193석 25.7%[20]

4.5 유럽의회

1979 35석 40.8%
1984 33석 37.4%
1989 31석 37,3%
1994 40석 32.2%
1999 33석 30.7%
2004 23석 21.5%
2009 23석 20.8%
2014 27석 27.3%

5 사족

가끔 한국에서도 노인들이나 극우 성향을 가진 인간들 중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을 보고도 "빨갱이 정당" "독일 내부의 적" "이적단체" 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민당은 공산당이 아니다. 물론 창당 초기에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관점을 채택하고 혁명론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여 그냥 온건 야당 정도로만 활약 중이다. 그리고 사민당 소속이면 모두 종교 부정하나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독일 사민당이라고 해서 종교를 버리거나 하는 정치인들은 없다. 진짜 우리가 생각하는 강한 좌익 타이틀은 동독 등에서 활동한 독일 공산당이나 좌파당 등이 가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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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 이름이 빌리 브란트 하우스(Willy-Brandt-Haus)다. 포츠담 광장에서 꽤 가깝다. 독일인이 지은 건축 답게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외관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 답게 전임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상이 있다.(...)

그외 준군사조직으로 국기단이 있었다.
  1. 다만 편법적으로 선거에 참여하긴 했다.
  2. '이 시기 사회민주당은 정당이라기 보다는 노동조합에 가까웠다'라는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당과 노동조합과의 관계는 노동자운동에 친화적인 좌파 내의 굉장히 오래된 논쟁이다. 일반적 좌파이론으로 보면, 당이 주로 정치투쟁을 통한 사회변혁을 지향한다면,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삶의 조건과 이를 지키기 위한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경제투쟁을 지향한다. 당은 정치조직이고 노동조합은 경제조직이다. 사회주의자법이 있을 당시 사회민주당이 군주국가에서 벗어난 법치국가, 의회의 인정, 정당의 합법화 등을 위해 투쟁했다면,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의 합법화, 임금, 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한 관리감독과 노동시간 준수를 위한 노동입법 등을 주장했다. 물론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노동자계급의 정당을 표방했고, 노동조합의 요구를 수용했고 이를 입법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노동조합과 친화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민주당의 주요 간부들은 노동조합보다는 주로 야학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교양협회를 통해 주로 조직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박근갑, 2009. <복지국가 만들기 - 독일 사회민주주주의 기원>, 현대의지성 참고.
  3. 이 가운데 대표적으로 나치당에 의해 희생당한 사민당 정치인으로는 쿠르트 슈마허가 있다. 그는 나치 치하시절 내내 강제수용소에 복역하면서 매우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빌리 브란트 역시 나치 치하에서 벗어나고자 스웨덴으로 망명.
  4. 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공산당에 흡수되다시피 했다.(...)
  5.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 통일당의 후신이라 하여 서로 적대하는 사이였다
  6. 득표율 1위 기록 원내 4당
  7. 원내 2당 등극
  8. 원내 4당
  9. 원내 1당 등극
  10. 집권
  11. 1890년 이후 최저득표율
  12. 1890년 이후 최저득표율
  13. 최다득표율 기록 경신, 1966년부터 1969년까지 기민/기사련과 연정
  14. 자민당과 연정
  15. 역대 최다득표율
  16. 1982년 자민당의 이탈로 정권상실
  17. 정권교체, 역대 최다의석, 녹색당과 연정
  18. 기민/기사련과 연정
  19. 정권상실, 전후 최저 득표율
  20. 기민/기사련과 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