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아난

UN 사무총장
6대7대8대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이집트)
코피 아난
(가나)
반기문
(대한민국)
< 200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2000 - 김대중유엔, 코피 아난2002 - 지미 카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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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아니다

Kofi Atta Annan
1938년 4월 8일 ~

가나정치인, 외교관, 경제학자이다.
1938년 쿠마시에서 출생. 그 당시 가나는 영국식민지였는데 그당시 가나는 골드코스트, 황금 해안으로 불렸다.

가나외교관으로 UN 제7대 사무총장을 지냈다. 가나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사람이다.

가나의 부족인 판티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족장이면서 전 아샨티 주의 주지사였다.

또, 코피 아난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2 어린 시절

그의 이름 코피는 아칸족에서 금요일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1954년에서 1957년까지 케이프코스트에 있는 감리교 고등학교에 다니고 ,그곳에서 기숙했다. 1958년 콰메 은크루마 과학기술대학교에 입학했다.

3 경력

4 평가

미국과 대립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친미파.

4.1 재임배경

아난이 UN 사무총장직에 앉게 된 것은 전임 총장인 이집트 출신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를 고깝게 여긴 미국의 덕이 크다. 따라서 부트로스 갈리의 행적에 대해서 빠지지 않고 논해야 할 것이다.

전임 총장인 부트로스 갈리는 언급했듯 이집트출신이라 사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마뜩찮았으나. 그가 프랑스 교육을 받았으며, 이슬람 신자가 아닌 콥틱 기독교도라는 사실과 그의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내심 안심했으며 그의 인준에 있어서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태껏 UN이라는 조직은 대개 강대국의 개였고 개와같이 보였다. 부트로스 갈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개혁하기 위해서 강한 UN을 주장하였으며 강대국들의 윤리적인 문제에 대하여 아낌없이 비판하였으며. 강대국들이 UN을 얕보지 말라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는 미국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렸다. 그리고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그리고 이 것 뿐만이 아니라. 당시 세계의 경찰을 꿈꾸던 미국에 대항하여 세계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물론 그게 다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은 미국을 제외한 제 3세계국가와의 호응을 이끌어 냈고. 당연히 당시의 비상임이사국인 한국도 그를 지지하였다. 1996년 그의 재선 예비투표에서 상임/ 비상임 이사국 회원들의 14표를 받았으나. 다 아는 어떤 한 나라의 Veto로 인하여 떨어졌다.[1] 특히, 클린턴 행정부는 총장 재임시 10억달러 이상의 분담금 체납을 하고 있었으며, 특히 한국에도 유명한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통해서 UN경영의 방만함을 핑계이유로 납부를 거부하고 있었다.

반면에 아난은 영어권인 가나에서 태어났고 또한 미국에서 학위를 딴 사람이다. 이러한 토양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으로 총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른바 미국이 원하던 관리형 총장의 회귀이다.

4.2 UN 관료출신 사무총장

사실 역대 UN 사무총장외교관들의 자리였으나, 아난은 독특하게도 UN관료 출신이다. 그의 커리어는 WHO 행정원으로 으로 시작하여 PKO 사무차장까지 올라간 인물이였다.

그리고 그가 사무총장직에 오르자마자 시작한 것은 UN의 구조조정이였다. 사실 올브라이트가 사사건건 시비를 따졌던, UN의 몸집을 줄이는데 그의 첫 행보였다. 약 1000개의 직책을 폐지, 기구를 통폐합 하는 등의 구조조정을 시도했다.

이 시점에서 아난이 충실한 미국의 개라는 이미지가 부각된 것은 사실이지만. 받은 돈은 없는데(물론 떼인거지만.) 적극적으로 개입을한 전임 총장의 뒤치닥거리는 UN의 건전성을 위해서도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은 임기 내도록 진행되었으며. 후임 총장도 하고 있다. 비록 미국의 개라는 이미지를 얻기도 했지만, 반면에 행정가적인 면모로 국제사회의 신뢰를 사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관료출신의 배경은 UN이라는 조직을 장악하는데 최대의 장점이자 카리스마로 작용하였다.

4.3 국제개입

이른바 관리형 총장이라고 해서 국제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게. 그가 임기 후 국제분쟁에 개입한 것이 바로 97년 임기 당해부터 동티모르 분리독립에 대한 개입이였다. 이후 98년 IMF 크리에 국제사회에 비난에 부딪힌 인도네시아가 분리독립을 허용 이후 PKO가 주둔하여 치안을 담당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상록수 부대가 파견되었다.

또한, 이라크사담 후세인정부와의 사찰을 유도해냈다는 것이다. 물론, 적절한 당근으로서 이라크의 원유를 수출을 허용하고 대신 이라크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석유-식량" 정책이였다.[2] 전임 총장과는 달리 PKO를 통한 적극적 개입보다는 외교적 또는 정치적인 개입을 우선하려는 성향이 도드라지는 타입이다. PKO사무차관 시절의 경험을 충분히 활용한다는 반응도 크다.

그리고, 키프로스북키프로스연방통일안을 제시한 아난 계획 역시도. 그의 작품이다. 물론 실패한 것이긴 하지만. 아난 계획에 대해서는 영문 위키백과를 참조하도록 하자. [1]

르완다 학살을 코피 아난의 실책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개입에 늦은건 서방 눈치본다고 늦게 반응한 부트로스 칼리의 책임이 크다. 물론, 당시에 PKO 차관으로서 의 책임을 묻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본인도 이 일에는 죄책감을 느끼는듯. [2]

9.11 테러를 직접 목격한 사무총장으로서, 미국의 패권주의와 이라크 전쟁에 적극반대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 아난은 유엔 헌장위반을 주장하였다. 물론, 막지는 못했지만.

4.4 미국과의 관계

아난과 미국과의 관계는 임기 초 동반자로 볼 수 있었지만, 임기 중, 후반에는 웬수관계라고 보는 것이 맞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UN에 당시에 13억 달러의 분담금을 체납하고 있었으며, 이는 부르토스 갈리 이후에도 연체중이였다. UN의 구조조정을 완수하는 와중에도 못내겠다고 뗑깡을 부리는 미국을 연임전에 비판하였고, 다행히 연임하였으나. 연임 이후에는 이른바 도덕적 배신이라 불리우는 미국의 폭주체제를 정면에서 맞선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외교적인 역량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이라크 문제의 경우는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들의 폭주로 대량학살병기 차단이라는 미명하에 파토를 내다못해 아랍을 다시 혼돈의 도가니로 만들었고. 또한, 국제적 위협을 낳게된 이슬람 국가를 탄생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아직도 임기내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점을 이라크 전쟁으로 꼽았다고 밝혔다. [3]
  1. 덕분에 부트로스갈리는 역대 UN사무총장중에 유일하게 연임을 하지 못했다.
  2. 물론, 이 정책이 말이 많은건 사실이다. 대북 쌀지원 수준이라고 폄훼하는 부류도 있고, 코피 아난의 자식도 이쪽 관련된 비리와도 연관된 스캔들이 터져서 코피 아난의 입지가 흔들리기도 했다. 게다가 이라크전쟁으로 이러한 평화적 시도도 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