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리

1 Coolie

머슴을 뜻하는 힌디어 kuli(क़ुली)[1]가 어원인 단어이다. 중국어에서는 발음이 같고 뜻도 어느 정도 겹치는 苦力라는 표기법으로 정착되었으며, 광동어로는 咕喱라고 표기한다. 영어로는 Coolie라고 한다.

해외에서 활동한 중국인 저임금 노동자를 일컫는 명칭.

넌 짐차칸으로 가야해!

크게 보면 화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략 19세기부터 하류계층의 중국인 임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중개인과 몇 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같은 중국인 십장 아래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활요건만 갖춘 채 막노동에 종사했는데, 부두, 건설, 토목 등에 동원되었다.

이들이 주로 건너간 곳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멕시코, 미국, 캐나다, 페루, 푸에르토리코, 브라질, 쿠바, 아르헨티나, 칠레 등이다.[2] 특히 멕시코의 바하 칼리포르니아로 건너간 쿨리들은 1910년 멕시코 혁명으로 대거 학살 당하기도 했으며 이홍장이 전권대신으로 광서제의 명으로 홍콩일본하와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멕시코로 건너가 보상 문제를 협의하게 되었다.[3] 아메리카 외 유럽동남아시아에도 건너갔으며 싱가포르중국계 싱가포르인의 조상들도 이 쿨리들이 대부분이다. 그 외 호주, 뉴질랜드오세아니아에도 금광 및 철도 건설 노동자로 대거 건너간다.

하지만 청나라가 자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을 얻어내기 전 까지 이들은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노예제가 금지되자 노예 청부업자들에게 흑인의 다음 타자는 동양인이었고,[4] 불평등 조약을 맺고 식민지를 할양하며 열강의 먹이로 전락한 중국은 이것을 얻을 좋은 땅이었다. 베이징 조약 중에는 당시 해외 이주를 제한하던 청나라에 대해 백성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청나라인이 영국 식민지 등의 해외에 나가 일자리를 얻는것은 자유이며, 이를 위해 영국의 선박에 탑승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이다'. 즉 영국인으로서 중국인을 노예선에 태울 권리가 있다는 것(...)

이전부터 열강은 중국 각지에서 온갖 인신매매를 벌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노동자들이 계약서를 작성하기는 했지만 말이 계약이지, 문맹인 청나라인들을 속여 노예로 계약한 것이다. 이런 실상이 드러난 것이 마리아 루즈 호 사건. 페루 선적의 마리아 루즈 호가 카야오로 향하던 중에 수리를 위해 요코하마에 기항하자 쿨리 한 명이 도망쳐나와 '구해달라'며 일본 당국에 호소한 사건으로, 일본이 출항을 금지시키고 조사한 결과 이 배의 모든 계약노동자들이 문맹으로 어떤 내용인지도 알지 못하는 채 극도로 비인간적인 조건의 계약서에 서명했음이 드러났다. 더 막장인건, 그나마도 납치당해 끌려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것.

아메리카로 출발한 쿨리들도 흑인노예의 운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들은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일했는데, 계약기간은 기본적으로 8년으로 극도로 열악한 환경으로 이 기간을 채우기 전에 죽는 인원이 전체의 80%에 달했으며 반기를 들거나 고향으로 탈출을 시도하면 총살당했다. 서부에서 이들은 '조니(Jonnies)'라는 유래를 알 수 없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혹독한 착취는 기본이었다. 오죽하면 그 험한 서부에서 'He doesn't have a Chinaman's chance(아무런 기회도 없다)'라는 숙어가 생겼을 정도. 심지어는 백인들이 아무 이유 없이 중국인 마을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일까지 있었다. 물론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지만.
이런 참상은 마리아 루즈호 사건으로 실상을 알게 된 청 황실이 1874년에서 1880년에 걸쳐 멕시코와 칠레, 캐나다, 싱가포르 등으로 관리를 파견하고 협약을 갈아치움으로 개선되어, 쿨리들은 80년대에 와서 인권을 얻게 되었다.

쿨리의 후예들은 미국의 대륙횡단철도를 자신들의 조상이 건설한 것이라고 하여 뿌듯하게 여기며, 홍콩 영화에서 미국의 개척시대가 나오면 빠짐 없이 쿨리가 등장한다.
또, 희귀한 경우긴 하지만 철도노동을 하던 쿨리들의 일부가 남북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면 아메리카의 쿨리와 일본인들의 수가 급증하게 되어 이들이 집단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된 미국이나 멕시코인 고용주들은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한국인들을 광고를 통해 모집한 뒤 막노동판이나 농장에 데려와 노예와 다름없을 정도로 싼 값으로 부려먹었다.

국내에도 인천 부두 등에서 항만 잡부 등으로 들어왔으며[5], 짜장면은 원래 이들이 먹던 작장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2 데 붓쵸의 비디오판 한국명

  1. 타밀어로 고용된 일꾼을 뜻하는 kuli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튀르크어로 노예를 의미하는 qul에서 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2. 쿨리들이 많이 건너간 페루는 광동어 라디오 방송국까지 리마에 갖고 있으며 페루식 중국요리가 유명하다.
  3. 청나라신해혁명으로 망하기 정확히 1년 전 일이다.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자국의 미국, 캐나다, 멕시코, 페루, 쿠바 등에 파견된 노동자들의 실태를 조사해 파악하게 된다.
  4. 중국인 뿐 아니라 조선인도 타깃이 되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을 일컫는 말은 애니깽으로, 멕시코·쿠바 등지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했던 농장에서 재배한 '에네켄(henequen)'에서 유래했다.
  5. 이러한 이유로 현재 인천에는 한국 유일이자 제일 큰 차이나타운이 들어서 있다. 화교들을 경계하던 한국 정부로 인해 이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