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헤일 알 하산

(타이거 대령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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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인물이 타이거 간지난다

타이거 대령 이라고 알려진 인물.
2015년 12월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아랍어:سهيل الحسن 영어:Suheil Al-Hassan

1 개요

시리아군인이며 "타이거"는 별명이다. 1970년 라타키아 주 해안도시인 자블레(Jableh)에서 태어났다. 라타키아 주 해안 지역은 알라위파 다수 거주지역으로, 그 또한 알라위파이다. 시리아 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정부측의 휼륭한 야전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압도적인 신임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1년 시리아 홈스 군사학교[1]를 중위 계급으로 졸업하였고, 시리아 육군 부대의 공수훈련을 전담하여 여기에서 성과와 두각을 드러내면서 시리아 공군 정보사령부에 배치되었다. 2005~2006년간 이라크의 혼란을 틈타 증가하는 알 카에다의 활동을 제압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시리아 내 알 카에다 내부에 침투하고 이라크-시리아 국경지대로 침투하는 알 카에다 조직원들을 효과적으로 격퇴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수헤일 알 하산 대령은 시리아 육군의 특수부대(Qawat Al-Khassa)의 지휘관으로 전보되었으며, 2013년까지 라타키아 외곽 지대에 주둔해 있었다. 이후 자신의 특수부대를 중심으로 정규전에 적합한 기동 전투단 형태로 확대 개편, 이것을 호랑이 부대(Qawat Al-Nimr)로 칭하며 2013년 8월 이들리브 주의 마을인 아리하가 반군들에게 함락되자, 이에 대한 탈환작전을 지휘하면서 처음으로 시리아 내전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었다.[2]

2014년 봄에 시리아 국영 SANA통신의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매스미디어에 노출되었으며, 그가 세운 전공이 알려지면서 정부군에서는 공화국수비대 104공수여단을 이끄는 드루즈파 출신의 잇샴 자헤라딘 소장과 더불어 정부군의 영웅이자 아이콘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후 프랑스의 르 몽드 지를 비롯한 여러 서구권 매스미디어에서도 언급되면서 유명해졌다. 롬멜이나 몽고메리와 같은 전쟁 영웅들처럼 수헤일 알 하산 소장도 자신을 드러내는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2015년 이전에는 최상단 이미지와 같은 마른 얼굴에 스냅백 타입의 군모를 착용했지만, 2015년 이후부터는 살이 붙은 얼굴에 턱수염을 기르고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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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후의 스타일)

수많은 전공으로 2014년에 이미 준장 진급 인사명령이 있었지만 야전에서 부하들과 함께 싸우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2015년 10월 4일부터 진행되어 11월 13일 종결된 알레포 동부 쿠웨이르 군사공항 구원작전을 성공시키면서 기존의 준장 진급안을 포함시켜 11월 25일 소장으로 특진되었다. 이후 소장 권한에 맞게 타이거 사단으로 확대 개편, 휘하에 타이거 여단, 사막의 매 여단(Liwa Suqur al-Sahara), 치타 여단[3] 데리고 팔미라를 탈환하였고 IS가 재점령한 사헤르 가스 유전에 대한 공세를 감행하였다. 2016년 7월 현재는 사막의 매 여단은 라카 원정군으로 차출되었다가 패전 이후 휴식하는 중이고, 타이거 부대는 알레포 북부 셰이크 나자르 공업도시로 이동하여 알레포 도심지 반군 지역에 대한 포위기동을 개시했으며 7월 7일 요충지인 말라 농장을 점령하고 유일한 도심 반군 지역의 보급로인 알 카스틸로 고속도로를 차단하였으며, 2016년 9월에는 한번 뚫렸던 알레포 남부 포위망을 복구하고 하마 지방의 반군 공세를 격퇴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지휘 스타일은 야전에서의 직접 지휘와 기동전으로 요약된다. 다른 지휘관들이 고전적인 전선 정면에서의 진퇴를 반복하는 데 비해 기동전으로 주요 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적이 이를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시도하면 바로 물러나서 적에게 고지를 내주고 포격과 공습으로 적을 크게 소모시킨 다음 다시 재점령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적을 크게 소모시켜 결국 적이 공세역량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전법을 주로 사용한다. 기동전 범주에 포함되는 모든 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SNS나 언론을 이용한 기만 전술에도 상당히 능하다. 가령 2016년 9월 하마 전선에 파병될 때 제4기갑사단과 타이거 부대 예비대를 투입한다고 선전하고는 본대를 이끌고 오거나, 하마 전선에 잔류한다고 선전하고는 갑자기 알레포에 나타나 공격을 지휘하는 식이다.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시리아 내전의 여러 세력들의 허점을 찌르는 활용법이다.

잇샴 자헤라딘과 더불어 야전에서 직접 지휘하는 만큼 사망설이 상당히 많이 뜨는 사람이기도 하다. 2015년 5월 이들리브 참패 때 경호원이 사살되고 장기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망설이나 중상설이 돌았으며, 2015년 11월 16일경 하마 지역에서 천막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사망했다는 기사가 있었으나 그의 측근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6년 1월 18일 쿠웨이르 군사공항에서 그가 탑승한 헬리콥터가 반군의 맨패즈에 격추당했다는 기사가 떴으나 역시 생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때 건재를 과시하는 사진이 떴으나 피부가 마치 마네킹처럼 반질반질하고 굉장히 어색한 악수 포즈를 부자연스럽게 취하여 마네킹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이 일었으나, 2016년 알레포 동부 IS포위 및 열병합 발전소 탈환작전에서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고 맨얼굴로 야전 지휘를 하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생존이 확인되었다. 마네킹 같은 피부 질감과 부자연스러운 포즈는 동영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면서 조작이 아니라 원래 피부가 그렇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6년 8월 남부 알레포 전역에서도 오른손을 다쳐 9월 현재까지도 붕대를 감고 다니고 있으며, 8월에는 반군의 공격으로 경호원 2명이 사살당해 타이거 소장이 죽었다는 소식이 떴으나 건재하였다. 9월 하마 전선에서도 착륙하던 시리아 정부군의 가젤 헬리콥터가 TOW미사일에 격추당하면서 타이거 소장이 탑승한 헬리콥터라는 루머가 돌았으나, 실제로는 다른 여단장이 탑승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탑승자는 전원 사망) 실제 사망 루머는 여기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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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라 탈환 이후 러시아 장교에게 다마스쿠스 검을 선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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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는 아들이 하나 있는 것으로 Al-Masdar뉴스를 통해 알려졌다.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2 타이거 부대

그가 지휘하는 부대를 타이거 부대(Qawat al-Nimr)라고 부르며, 최초에는 정권 수뇌부 알라위파의 거주지역인 라타키아에서 주둔하는 특수전 부대였으며 내전 하에서 병력의 훈련을 도맡았다. 하지만 2013년 여단급 기동제대로 재편성되어 전투에 나섰으며 전차와 포병을 자체적으로 보유한 혼성 태스크포스이나 보병의 중요성이 높은 시리아 내전의 특성상 보병의 비율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경보병 부대로 분류된다. 아사드 대통령이 자신처럼 젋고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낸데다 알라위파이기까지 한 타이거 소장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부대 편성에는 전 시리아군에서 최고의 인재만 선발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주었으며, 따라서 병력의 질은 시리아 정부군 중에서도 최정예부대에 해당된다. 타이거 부대가 여단급 혼성제대임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자 마찬가지로 정예병력에 실력이 검증된 대령이 지휘하는 유사 부대를 몇개 더 창설하였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모하메드 알 자베르 대령이 지휘하는 사막의 매 여단(Liwa Suqur al-Sahara)이다.

타이거 대령이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사단급 제대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주둔지는 하마 주에 있다. 정권보위가 주 임무인 수도방위 제4기갑사단과 더불어 최신 장비를 가장 먼저 지급받고 있다.

3 활약상

시리아 정부전쟁영웅

시리아 정부군의 장군으로써 정부측과 반정부측, 그리고 동서방 양쪽에서 온갖 과대평가와 폄하를 받고 있지만 타이거 대령이 과거의 명장들처럼 유독 주목받고 있는 군사적 지도자라는건 사실이다. 어찌보면 시리아 정부가 내전 종식을 위한 구국의 영웅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이 경우 타이거 대령은 내전 종식 이후 (어쩌면 아사드조차도 넘을 정도로) 엄청난 정치적 입지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최근 서방권에서는 전쟁영웅의 등장을 경계하기 시작하기 때문인지 지휘관의 공훈보다는 이름없는 일반 병사들을 띄우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역사상 전쟁영웅은 민주국가에서도 쉽게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4] 현재 시리아 정부군은 여러 반군그룹과 일진일퇴를 걸치며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수헤일 알하산의 부대만이 연속된 공세작전을 통해 반군을 몰아내고 정부의 입지를 다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어쩌면 내전 종식 후 실권을 장악하거나 대선에 출마하여 차기 시리아 대통령이 될수 있을지도?

또한 수헤일 알 하산은 다른 시리아 정부인사들과 달리 조직적인 전쟁범죄에 가담하거나 연루된 이력이 없기때문에 만일 내전이 종식되기만 한다면 그는 현재 온갖 전쟁범죄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아사드 정권 대신 시리아 정계의 명목상 내지 실질적인 실세로 진출하게 되고 이것이 서방 강대국들과의 협상에서 이득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시리아 반군측에서는 그가 2011년 아직 민주화 운동에 불과한 시점에 시민들에게 발포를 명령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그가 시리아 정부와 시민 양측에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3.1 주요 전역

3.1.1 2013년

  • 아리하 전투 : 타이거 대령의 데뷔전이 된 전투. 2013년 8월 이들리브주 아리하 시가지가 반군에게 함락되자 출병하여 공군의 공습 지원을 받아가면서 10일만에 아리하 시가지를 탈환하였다.
  • 알레포 전역 : 2013년 9월 26일 반군이 알레포 시로 통하는 정부군의 유일한 보급로가 위치한 카나시르 시가지를 점령하여 정부군의 보급이 어렵게 되었다. 대규모의 보급 행렬을 호송하기 위해 타이거 여단이 출병하여 10월 3일 일주일을 넘는 격전 끝에 카나시르 시가지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되찾았으며, 일주일 후에는 주변 40여개 마을을 해방시켰다. 이로써 반군의 알레포 포위 시도가 좌절되었으며 250km를 전진하여 알레포 시가지로 돌입하였다. 이후 2013년 말까지 알레포 국제 공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고 시리아군 80번 기지를 재탈환하였다. 뒤이어 산업도시 셰이크 나자르에 위치한 반군의 군수공장 지대에 대한 탈환작전에 돌입하였다. 이곳은 반군이 공업시설을 이용하여 무기를 제작/정비하는 전략거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셰이크 나자르 공업도시의 탈환은 2014년 7월에 완료되었다. 한편 2014년 5월 22일에는 1년 넘게 포위되어 버티던 알레포 중앙 교도소를 해방시켰으며, 알레포 시가지 중심부까지 점거하였다. 이때 타이거 대령이 확보한 하마에서 카나시르를 거쳐 알레포로 이어지는 보급로와 시가지 중심부 점령지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3.1.2 2014년

  • 하마 전역 (2014년 7월 ~ 2014년 10월) : 2014년 7월 하마(Hama)주 북부에서 알 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의 대규모 공세가 실시되었다. 이 공격은 하마 시가지와 하마 군사공항에 대한 탈환을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 알 누스라 전선 총사령관인 아부 무함마드 알 줄라니(Abu Mohammad al-Julani)가 직접 출진하여 기독교도들이 거주하는 도시인 마르데(Mhardeh)에 육박했다. 당시 시리아 정부군은 하마 지방에 예비병력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고 있었으며 타이거 대령도 알레포 전역에서 활동중이어서 뺄 수 있는 병력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타이거 대령은 셰이크 나자르 공업단지에 대한 점령을 급히 완료하고 타이거 여단을 이끌고 8월 말 하마 주에 진입했으며, 즉시 아르즈(Arzh), 키탑(Khittab)을 점령하고 군기지를 재탈환하면서 기독교도들의 도시인 마르데에 대한 알 카에다의 공격을 돈좌시켰다. 한달만에 대공세에 몰리던 하마 주의 상황을 반전시켰으며 오히려 반격을 가해 시리아 정부군이 10개월간 공세를 가했음에도 점령하지 못했던 전략거점 모렉(Morek)시를 점령하였다.
  • 제2차 사헤르 가스 유전 공방전(2014년 11월) : 2014년 초, 알 카에다 소속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ISIL)는 알 카에다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각지의 반군에 대한 기습공격을 결행, 자유 시리아군알 카에다의 점령지를 순식간에 빼앗아 반군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가를 선포하였다. 뒤이어 라카 시내에서 3년동안 버텨온 정부군 17기갑사단 93여단 기지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포로를 처형하였으며, 라카 주에 대한 공습 견제를 담당하던 정부군 알 타브카(Al-Tabqa)공군기지를 점령하여 라카 주의 전략적 안전을 확보하였다. 뒤이어 2014년 10월 정부군의 주요 전략거점인 홈스 사막의 사헤르 가스 유전지대를 탈환하고 기름을 퍼가기 시작하였으며, 팔미라 근방의 T-4공군기지에 대한 대공세를 걸어 격전이 거듭되었다. 이에 11월 시리아 정부군의 정예부대인 사막의 매 여단(Liwa Suqur al-Sahara)이 출정하였고 이와 함께 타이거 대령도 부대를 이끌고 출진하였다. IS는 11월 내내 공세를 걸었으나 타이거 부대와 사막의 매 여단의 반격에 결국 패배하였고, 정부군은 12월 1일 사헤르 가스 유전지대를 완전히 탈환하였음을 선포하였다.

3.1.3 2015년

  • 2015년 북서부 대공세 (2015년 4월 ~ 6월) : 시리아 북서부 이들리브 지방의 대부분은 반군에 점령된 상태였으나, 이들리브, 아리하, 지슈르 앗슈구르의 세 도시를 잇는 M4고속도로 축선만큼은 강력한 방어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세 도시를 점령하고, 주둔한 정부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알 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과 자유시리아군 일부 조직, 이슬람 전선 소속의 아흐라르 알 샴을 비롯한 여러 반군집단들이 그간의 반목을 접어두고 사상 최대의 반군연합체 "정복의 군대"(Jaish al-Fatah)를 결성하였고, 2015년 3월 28일 이들리브에 대한 전면 대공세에 돌입하였다. 3월 28일 전황도
대공세를 견디지 못한 시리아군은 후방의 아리하로 철수하였고 시리아 전역에서 가용병력을 총동원, 5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4월 아리하에 출진하여 이들리브 교외 알 이들리브 수복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때 타이거 대령은 후방인 지슈르 앗 슈구르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4월 24일 이들리브로 향하는 M4고속도로를 차단하기 위한 반군의 가브 평야 공세, 그리고 후방인 지슈르 앗 슈구르를 공격하는 정복의 군대의 대공세가 실시되었다. 4월 24일 전황도
타이거 부대는 사상 최대의 맹공에 의해 800여명의 부상자를 내며 탄약 부족 사태에 직면하였다. 탄약 부족으로 방어가 불가능해지자 타이거 대령은 국방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800여명의 부상자는 곧 전투에 투입될 수 있지만 탄약이 없으면 싸울 수 없다면서 급히 지원을 요청하였다. 국방장관은 지원을 약속했으나 이는 실제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타이거 부대는 헤즈볼라의 지원을 받아 분전을 거듭하였으나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타이거 대령의 경호원이 적 저격총에 맞아 사망할 정도로 상황이 절망적이었다고 하며 주변인의 증언에 의하면 "타이거 대령은 전례 없이 동요하고 있었다" 고 한다. 결국 정복의 군대의 맹공에 의해 지슈르 앗 슈구르는 함락당했고 타이거 부대의 대원들이 포로로 잡히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들리브에 공세를 가하던 정부군은 오히려 역포위당해버리는 사태에 직면했고 M4고속도로 재개통과 지슈르 앗 슈구르 재탈환을 위해 후방으로 병력을 배치하면서 이들리브 공세는 돈좌되고 병력이 분산되었다. 반군은 즉시 아리하 시가지에 공세를 가했으며 맹공에 결국 아리하 시가지가 함락되면서 이들리브 알 무스타파 육군훈련소는 점령당했고, 정부군은 결국 라타키아로 이어지는 M4고속도로를 뚫으며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다.
타이거 대령의 커리어에서 최대의 패배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시리아 정부군이 가까스로 유지하던 세력 균형이 무너진 대사건으로 이 여파로 인해 라타키아 북부까지 정복의 군대에게 점령당했다. 정복의 군대는 전과 확대를 위해 지슈르 앗슈구르 남부 알 가브 지방에 대한 공세를 7월부터 8월까지 가했으나 정부군의 반격에 공세가 돈좌되었다. 타이거 부대는 7월 방어전 및 반격에만 참여하였고 8월 반군 역습 때에는 철수하여 휴식에 들어갔다.
  • 쿠웨이르 군사공항 구출작전 (2015년 9월 ~ 11월) : 알레포 동부 쿠웨이르 군사공항은 공군학교를 포함한 주요 기지였으나 2012년 반군에게 포위된 이후 항공 보급만을 받으며 3년을 버텨 왔다. 이란 혁명수비대를 비롯해 정부군과 지원 세력이 쿠웨이르 군사공항의 구원 계획을 여러 차례 입안하였으나 가용전력의 부족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참전으로 공군전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더불어 이들리브 참패로 나빠진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쿠웨이르 군사공항 구원작전이 입안되었다. 한편 이들리브 전투의 패배를 추스르고 3개월간 정비한 타이거 대령과 그의 부대는 이란 혁명수비대와 국가방위대[5], 바트당여단과 러시아 항공우주군의 보조를 받아 선봉으로써 쿠웨이르 군사공항 구원작전에 임하게 되었다. 9월 22일 시리아 공군의 공습으로 시작된 작전은 IS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순조로운 진행을 보여 10월 내내 주변 마을과 소도시를 점령하면서 10월 21에는 쿠웨이르 군사공항에서 4km떨어진 지점까지 전진하였고, 11월 10일 밤에는 시리아 국영방송 기자들이 쿠웨이르 군사공항에서 전격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3년동안 포위된 쿠웨이르 군사공항을 해방시켰다. 300여명의 잔존병력이 저항하던 쿠웨이르 군사공항의 장병의 대다수가 긴급한 의료 지원을 필요로 하는 수준이었다고 하며, 이들은 임무 교대되어 안전한 라타키아 지방으로 이송되었다. 시리아 정부는 이 전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패배 분위기를 불식시켰고 러시아의 참전으로 인하여 승리의 앞날만이 있다는 이미지를 주는 데에 성공하였다. 또 이 전투의 주역인 타이거 대령에게는 소장 진급명령을 하달함으로써 마침내 수헤일 알 하산은 만년 대령에서 소장으로 진급하게 되었다.
  • 알레포 동부 공세 (2015년 12월 ~ 2016년 2월) : 쿠웨이르 군사공항 해방을 완료한 타이거 부대, 사막의 매 부대, 바트당 여단, 이란 혁명수비대는 계속해서 군사공항 주변의 마을들을 장악하면서 군사공항의 안전을 꾀했다. 알 바브(al Bab)시가지를 비롯한 알레포 동부의 여러 도시를 탈환하는 가운데 알레포 시가지의 공업도시 셰이크 나자르에 주둔한 시리아 정부군이 동쪽으로 전진을 개시하면서 타이거 부대 또한 열병합 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을 포위하기 위해 기동하였고, IS군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타이거 부대의 전진을 막지 못하고 패퇴했다. 2월 3일 타이거 부대는 셰이크 나자르와 13km떨어진 지점까지 진군하였고 IS가 주둔한 타이바흐(Tayyibah) 마을로 돌입하여 격전을 벌여 IS주력이 탈출을 시작하였다. 2월 7일에는 셰이크 나자르에서 7km떨어진 지점까지 진군, IS는 열병합 발전소 지점의 포위망에 갇히기 시작했으며 이를 뚫기 위한 반격을 개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마침내 2월 20일에는 타이거 부대가 열병합 발전소를 완전 통제하는데 성공, 2월 21일에는 IS가 모든 지역을 빼앗기고 무질서하게 탈주하다가 포로로 잡혔다. 쿠웨이르 구원에서 알레포 동부 공세로 이어지는 작전을 통해 정부군은 알레포 동부의 영토를 다시 빼앗을 수 있었고 러시아 참전과 더불어 정부군 대반격 성공을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3.1.4 2016년

  • 카나시르 보급로 재탈환 작전 (2016년 2월) : 카나시르 시가지는 하마에서 알레포로 이어지는 보급로 가운데 위치한 도시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IS는 알레포 동부 패배를 설욕하고 IS수도 라카로 진격하던 777기계화여단을 멈추기 위해 중요 보급로인 카나시르 시가지에 대한 탈환작전을 2월 21일 오후 10시에 개시했으며, 2월 23일까지 카나시르 주변의 도로와 마을들을 점령하여 시리아 정부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한편 타이거 부대를 선봉으로 헤즈볼라와 알 쿠드스 여단[6]이 협동하여 2월 23일부터 카나시르 구원작전에 나섰다. 2월 28일 카나시르 시가지와 주변 마을에서 IS세력을 일소하고 알레포로 들어가는 보급로를 다시 개통시켰다. 7일간의 보급로 차단기간 동안 알레포 시내의 물가는 크게 뛰어올라 서민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졌으나 타이거 소장의 활약으로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 팔미라 탈환 작전 (2016년 3월) : 팔미라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도시가 아니었으나 정부군이 데이르에르조르 주와 시가지를 장악하는데 있어서 보급선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거점으로써 기능하고 있었다. 2015년 5월 "정복의 군대"에 의한 대규모의 이들리브 상실을 막기 위해 팔미라에 주둔하던 정부군이 급파되면서 팔미라의 방어는 크게 약해졌고, 이에 IS는 데이르에르조르 주에 대한 완전통제를 위해 팔미라를 2015년 5월 13일부터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정부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병력이 부족하여 결국 팔미라 도시를 IS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으나 반격을 통해 사헤르 가스 유전이나 T-4 공군기지 방어에는 성공했다. 이후 이들리브가 정리되면서 2015년 6월 재공세에 들어갔으나 팔미라 시가지를 탈환하지는 않고 주변부 지역을 정리하여 군사시설 방어를 확고히 하는 선에서 마무리했을 뿐이었다. 한편 ISIS가 팔미라 고대 유적을 파괴하고 유적지에서 포로를 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시리아 정부군이 극단주의에 맞서 고대 유적과 역사를 보호한다는 이미지를 선전함과 동시에 데이르에르조르에서 포위된 정부군을 구제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2016년 팔미라 탈환 작전이 입안되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작전인 만큼 타이거 소장이 지휘권을 가지고 타이거 여단, 치타 여단, 사막의 매 여단을 비롯하여 헤즈볼라, 이란 혁명수비대, 러시아 항공우주군, 국가방위대 등의 주요 병력을 소집하여 2016년 3월 9일부터 대공세를 개시하였다. IS는 도시 외곽에 참호를 구축하고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정부군의 로켓 포격에 IS 팔미라 사령관 칼릴 모하메드가 사망하고 강력한 다방면 공세에 주변 지역을 계속해서 빼앗겨 3월 23일부터는 팔미라 시가지에 돌입하여 근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IS는 25일 팔미라 주민들을 분산시키고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전방위적으로 돌입하는 타이거 부대와 헤즈볼라, 국가방위대 등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팔미라 시내에 수천개의 부비트랩을 설치하고 도주하였다. 2016년 3월 27일 팔미라는 정부군의 손에 완전히 해방되었으나 산발적인 교전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팔미라 해방작전의 성공으로 타이거 소장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졌으며 시리아 정부군의 이미지도 크게 개선되었다.[7]
  • 북부 알레포 전역 (2016년 6월 ~ 7월) : 2013년경 정부군이 곳곳에 고립되어 포위당했던 시리아 제1의 도시 알레포[8]는 타이거 소장의 활약으로 최종적으로 반군과 정부군이 알레포 도심을 나선형으로 점령한 형태가 되었다. 정부군은 여러 차례 나선형으로 파고들어간 반군 점령지를 돌파하여 보급로를 끊고 포위섬멸하는 작전을 입안했으나 정치적 상징성이 막대한 알레포를 잃지 않으려는 반군의 저항과, 반정부 정서가 엄청나게 강한 알레포 시민들의 비협조 탓에 여러차례 공세가 돈좌되고 수십명씩 병력을 잃는 실패를 반복해 왔다. 2016년 4월에는 정부 매체를 통해 타이거 소장이 이끄는 혼성부대가 알레포 공략에 나선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팔미라를 점령한 드림팀이 알레포 도심 탈환작전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으나, IS가 5월 다시금 사헤르 가스 유전지대를 탈환하고, 2016년 6월 라카 대공세를 위해 사막의 매 여단을 비롯한 병력들이 차출되면서 알레포 포위섬멸 계획은 불투명해졌다. 타이거 부대는 5월경 IS에 대항하여 제3차 사헤르 가스 유전지대 재탈환 전투에 나섰으나, 공세 중간에 타 부대에게 지역을 인계하고 갑작스레 철수하였다.
한편 6월 초부터 정부 매체에 의해 타이거 부대가 알레포 북부 셰이크 나자르 공업단지에 주둔한 것이 확인되었고, 6월부터 최정예부대인 수도방위 제4기갑사단[9] 과 합류하여 서서히 남진을 개시하여 알레포 도심으로 이어지는 반군의 유일한 보급로인 알 카스텔로(al-Castello)고속도로를 점령하기 위해 고속도로 북쪽에 위치한 알 말라 농장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였다. 반군은 말라 농장을 잃으면 알 카스틸로 고속도로가 화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 보급이 사실상 끊어지기 때문에 타이거 부대조차도 T-90전차를 전장 유기[10]할 정도로 격렬한 저항을 반복하였으나,
타이거 소장이 철수하면서 미리 포격 지점을 정해놓고 그 지점에 노획품을 일부러 놓아둔 뒤 반군이 노획품을 챙기느라 지체하는 사이 대규모 포격으로 반군을 하루만에 200여명[11]을 사살하는 대 전과를 올렸다. 여기에 이들리브에서 알레포로 증원되는 반군 병력을 러시아-시리아 합동 공습 패키지가 대기하고 있다가 모조리 타격하는 바람에 가용병력의 부족에 직면, 타이거 부대의 재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7월 7일에는 말라 농장을 완전히 빼앗겼으며 알 카스텔로 고속도로는 차단당했다. 7월8일 전황도 7월 10일까지 누르 알딘 알 젠키 운동, 자유시리아군 중앙사단 등이 반격을 거듭하였으나 결국 말라 농장 탈환에 실패했고 작전 실패의 책임을 놓고 반군연합체 알레포 정복군과 정복의 군대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루머도 나돌고 있다. 7월 13일에는 결국 알 누스라 전선이 직접 나서서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반격을 개시했으나 똑같은 낚시 작전에 걸려 2대의 전차, 4대의 장갑차, 20여명의 병력을 상실하고 알 누스라의 선전 영상에 나온 병력과 차량이 모두 파괴된 채로 타이거 여단의 인증샷에 촬영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7월 21일 알 누스라 전선이 재공세를 위해 병력을 집결시켰으나 타이거 부대는 UAV로 전부 관측중이었고 타이거 부대의 선공에 공격에 사용될 예정이던 알 누스라 측의 자살폭탄차량 2대가 집결지 한복판에서 폭발(...) 알 누스라 전선은 이때 전차 3대, BMP 4대와 50여명의 병력을 손실하고 이후 타이거 부대 측의 추격전에 다시 20명이 붙잡히고 전차 2대와 BMP 4대를 빼앗기는 대 수모를 겪었다.
결국 반군 세력은 알 카스틸로 고속도로 재탈환 역량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마침내 7월 27일, 시리아 정부군이 알레포 반군지역으로 가는 모든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쿠르드족 YPG가 정부군의 작전에 호응하여 알레포 북부의 유스 하우징을 점령하여 알레포 포위망을 완성하고, 수도방위 제4기갑사단도 알 레이라문 공업지대에 이어 쿠르드군과 협동하여 바니 제이드 공업지대를 완전 점령하였다. 결국 반군이 정부군과 협약을 맺고 통로에서 전면 철수함에 따라 알레포 포위망은 완성되었다.
이와 동시에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3개월 안으로 반군이 알레포 시내에서 전면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반군 및 반군 협력자에 대한 특별 사면령을 선포하였다. 만일 철수한다면 길을 열어주고 안전을 보장하고, 항복한다면 특별 사면에 의해 무기를 반납하고 시민증을 재발부받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이에 알레포 시민들과 일부 반군들이 무기를 버리고 정부가 지정한 검문소로 몰려들어 투항하고 탈출을 시작했으나, 7월 31일부터 반군이 알레포 남부에 포위를 뚫기 위해 공세를 가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 남부 알레포 전역 (2016년 7월 ~ 9월) : 타이거 소장과 제4기갑사단의 활약으로 알레포 북부 알 카스틸로 고속도로가 막히자 시리아 제1의 도시 알레포의 보급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에 따라 알레포 지역 반군연합체인 파타 할랍은 파타 알 샴 전선(구 알 누스라 전선)이 주도하는 반군연합체 자이쉬 알 파타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이에 따라 알레포 남부의 얇은 전선을 돌파하여 남부에서 알레포 도심으로 보급로를 뚫는 작전을 입안하였다. 이미 알레포 남부 칸 투만 지역을 6월에 대공세로 점령했기 때문에 남부의 정부군 방어선의 두께가 크게 얇아졌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이에 따라 초반에 5000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7월 31일 오전 10시 45분부터 대공세에 들어갔다. 주요 작전목표는 알레포 남부의 알 아사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포병학교였다.
알 히크마 학교 건물에 명중한 2대의 자살폭탄차량과 함께 시작한 공세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당일 알 아사드 육군사관학교 남쪽에 위치한 1070 알 나스르 아파트건축현장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사실 정부군이 일부러 기동방어를 위해 내준 것으로 반군이 1070 건설현장에 돌입한 사이 정부군이 기동전을 펼쳐 후방을 차단했고, 곧 러시아와 시리아 공군이 대규모 공습으로 박살을 내기 시작했다. 공습을 피하기 위해 타이어를 모아다 태워서 대량의 연막을 발생시켰으나 정부군이 스커드 미사일과 포병을 총동원하여 공격해서 1070 건설현장에 고립된 반군은 반군추산 250명, 정부군 추산 800여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고 8월 1일에는 정부군이 반격을 시도하여 알 히크마 학교까지 재진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첫 전투를 참패로 끝낸 반군은 정부군과의 접전이 벌어지는 라타키아 전선에서 병력을 빼 총 9000명의 병력으로 2차, 3차, 4차의 재공세를 시도했으나 1070 건설현장에서의 공방에서 패배하고 정부군의 방어선을 뚫는 데 실패하고 후퇴했다. 하지만 8월 6일 제5차 공세 "이브라힘 유세프 작전"[12]에서 남부의 알 라무시 육군포병학교를 수비하던 여단장이 전사하자 지휘체계가 흐트러졌고, 자살폭탄차량으로 벽돌벽을 파괴하고 반군이 쏟아져 들어가자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이곳을 교두보로 반군은 여세를 몰아 알 라무시 거리를 완전히 장악했고 다음날에는 북쪽에 있는 공군기술학교까지 점령하여, 알레포 남부 포위망은 완전히 뚫려버렸다.
시리아 정부군은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방어 사령관을 모하메드 아지브[13]에서 지아드 살레 대장으로 교체했고, 15사단과 시아파 민병대, 헤즈볼라 등의 병력을 증원하는 한편 알레포 북부에 주둔하던 타이거 소장이 내려왔다. 한편 알레포 도심으로 통하는 도로는 포병으로 화기 관제를 하여 들어가는 수송차량을 보이는 대로 파괴함으로써 대규모의 보급이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으며, 8월 10일 오전부터 러시아 공군의 대규모 공습과 함께 8월 11일부터 전 전선에서 재공세에 들어갔다.
지아드 살레 대장의 작전은 반군 세력이 점령한 알 라무시 지역을 굳이 탈환하기보다는 후방 지역에서 새로운 포위망을 형성하는 것으로, 타이거 소장은 1070건설현장의 재탈환에 들어갔다. 하지만 하루만에 역포위 작전은 취소되었고 이후 1070 건설현장의 절방가량을 점령했으나 반군의 공세에 시멘트 공장등이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타 부대와 헤즈볼라에게 탈환지역을 인계한 뒤 시멘트 공장으로의 반군 공세를 순식간에 돈좌시켰다.
뒤이어 계속해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반군을 포격과 폭격으로 유도하여 소모시키던 타이거 부대는 8월 21일에 공세를 통해 시리아텔 언덕과 알카라 언덕(Tel alqara)을 재탈환하였다. 이 언덕은 반군의 보급로인 알 라무시 고속도로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로 정부군의 탈환으로 화력통제가 가능해졌고, 알레포로 들어가는 반군 보급차량은 모조리 대전차미사일과 포격에 박살이 나는 지경에 이르러 사실상 알레포 포위망이 재구축되었다. 이에 반군은 총 7차에 걸친 파상공세를 8월 25일까지 연속적으로 감행하였으나 견고한 방어선과 십자포화망을 구축한 타이거 소장의 화력전 앞에 큰 피해를 내고 모조리 실패하였다. 특히 반군연합체 자이쉬 알 파타는 8월 23일 대규모의 기갑장비를 동원하여 돌파를 감행했으나 친정부 민병대 NDF(National Defence Force)의 대전차미사일 공격을 뚫지 못하다가 정부군의 T-90까지 동원한 전차부대의 요격을 당해 기갑장비를 방기하고 도주하는 추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결국 소모전을 견디지 못한 반군연합체 자이쉬 알 파타는 계속해서 공군기술학교와 포병학교를 내어주다가 9월 4일 일요일 러시아군이 끌고 온 TOS-1 부라티노의 열압력탄두 포격에 큰 손해를 보며 200여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공군기술학교, 포병학교, 육군학교를 완전히 정부군에게 점령당했다. 이날 일요일 공세는 하마 전선에 나가 있던 타이거 소장이 몰래 귀환하여 총지휘를 맡았으며 이로써 알레포 도심지 포위망은 8월 6일 뚫린 이후 한달만에 완전히 재구축되었다. 이후 타이거 소장은 북부 하마 전선 지휘와 알 밥 공략전을 위한 준비에 매진하고 있으며 포위된 알레포 동부 시가지는 지아드 살레 대장의 총지휘 아래 대공세를 감행, 10월 14일 현재 포위된 반군과 항복 협상에 들어갔다.
  • 북부 하마 전역 (2016년 8월 ~ 10월) : 한편 알레포 남부에서의 막대한 소모전을 강요당하던 반군은 방어가 허술하던 북부 하마 지역에 대한 공세를 알카에다 연계 반군인 준드 알 아크사 등의 주도로 8월 29일 개시했다. 처음에는 알레포에 몰린 정부군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양동작전으로 시작되었으나, 하마 북부에 주둔한 정부군 제11기갑사단의 방어가 허술한데다 졸렬한 지휘로 인해 생각외로 전과가 확대되면서 첫날에만 3개의 마을을 점령하고 친정부 민병대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에는 할파야 마을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9월 2일까지 전과를 확대하여 타이밧 알 이맘, 소란 시가지까지 점령함으로써 하마 주의 주도인 하마 시를 5km만 남겨둔 상태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전선 지휘관이 상황이 좋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다가 상황이 악화되자 진실을 말하자 타이거 소장은 크게 분노했다고 전해지며, 알레포 남부에서 귀중한 병력을 빼어 하마 구원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타이거 부대의 예비대와 제4기갑사단 병력 일부를 증원할 것이라고 SNS를 통해 선전했으나 9월 2일 돌연 타이거 부대 본대와 T-90전차부대를 직접 이끌고 하마에 나타나 반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반군은 9월 6일까지 수세에 몰렸고 전선은 정리되었다.
하지만 반군은 9월 24일부터 재공세를 실시하였고 정부군은 9월 29일까지 43개의 마을을 빼앗기는 참패를 당했다. 이에 타이거 소장이 직접 패배의 원인을 점검하자 세명의 장교가 반군에 몰래 디젤 기름과 대전차미사일을 팔아넘긴 부패를 적발했으며 이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대전차미사일을 공급하여 반군의 공세를 돈좌시켰다. 한편 하마 전선에서의 공세를 주도하던 알카에다 연계 반군 "준드 알 아크사"는 중립을 표방하면서 IS에 충성하며 이슬람 반군 지휘관을 암살하던 정체가 발각되어 이들리브 지방의 네임드 이슬람반군 "아흐라르 알 샴"과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하마 전선에 파견되어 있던 준드 알 아크사 대원들이 급히 복귀하면서 전선에 가해지는 압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이거 소장이 알레포 북부 알 밥 공략전 준비중 급히 하마 전선에 복귀하여 반격을 총지휘하기 시작했으며, 10월 8일부터 개시된 반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빼앗긴 마을을 되찾음은 물론 하마 북부의 전략거점인 모렉(Morek)시를 공략할 수 있는 교두보 마안(Ma'an)시를 10월 13일 완전 장악하였다. 이후 잠시간의 재정비 이후 재공세를 펼쳐 마라다스(Maradas)를 탈환했으며 10월 27일에는 대대적인 포격과 공습 지원아래 수란(Suran)시를 탈환하였다.
  • 알 밥 공략전 (2016년 10월) : 터키는 자국 동남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쿠르드노동자당 즉 PKK와 연계된 시리아 쿠르드족 YPG가 주축을 이룬 미국 지원 반군인 시리아 민주군(Syrian Democratic Forces, SDF)이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하며 마침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IS가 지배한 만비지 시를 함락시키며 시리아 북부를 모두 점령할 지경에 이르게 되자 군대를 보내어 시리아 북부를 직접 침공하여 쿠르드족이 시리아 북부 경계선을 점령할 수 없도록 완충지대를 설정하는 "유프라테스의 방패" 작전을 9월부터 실행하기 시작했다. 터키는 전차와 중화기로 지원하고 일선 전투는 터키 지원을 받는 지하드 반군들이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IS가 자라불루스 시가지를 포기하고 철수하여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으나 병력을 집결시킨 IS가 반격을 개시하면서 여러 마을을 뺏고 뺏기는 공방전이 지속되었고 터키도 IS의 대전차미사일에 의해 5대의 전차, 1대의 지뢰제거차량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어 진격이 지지부진해졌다. 이 과정에서 SDF는 미국의 중재로 쿠르드족은 유프라테스강 너머로 철수했으나 아랍인 부대를 남겨놓고 기존의 점령지를 양보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 시점에서 터키와 반군, 그리고 SDF는 알레포 주 북부지방의 전략적 거점인 알 밥 시가지를 누가 더 빨리 점령하느냐에 목적을 두게 되었다.
한편 시리아 정부군은 알레포 주 북부지방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듯 보였으나, 2015년 겨울에 평정한 쿠웨이르 군사공항을 거점으로 하여 알 밥 시가지를 점령할 것을 천명하고 나섰으며, 그 선봉에 타이거 소장과 타이거부대 주력군이 나설 것임을 발표했다. 관찰자들은 알레포 시가지나 하마 전선이 더 위급한데 구태여 타이거부대를 빼서 정치성이 강한 알 밥 공략전에 투입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하지만 알 밥 시가지와의 거리는 시리아 정부군 점령지가 제일 가까워서 선점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타이거 소장은 현재 하마 전선에서의 반격에 주력하고 알 밥 공략전은 실행되지 않고 있다. 그대신 시리아와 러시아 공군이 SDF에 공군 지원을 해주면서 터키와 터키 지원 반군의 쿠르드 영토 공격 시도를 좌절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터키의 쿠르드 공습에 "시리아 국민을 살해했다" 면서 비난성명을 발표하는 등 도움을 주었다. 한편 SDF는 점진적으로 알 밥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정부군이 직접 공세를 가하기보다 SDF를 내세워 점령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 서부 알레포 전역 (2016년 10월) : 타이거 소장의 활약으로 알레포 도심 포위망은 다시 닫혔으며, 미국과 러시아간의 지루한 외교전을 두고 이뤄진 몇차례의 휴전이 결국 깨짐에 따라 시리아 정부군과 러시아 항공우주군은 포위중인 알레포 동부 도심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알레포 남부의 공격은 잠시 성공했다가 다시 물러났지만 공화국수비대가 주축이 된 알레포 북부는 포위에 의한 물자부족과 병력손실로 역량을 잃은 반군 방어선이 계속해서 붕괴하면서 기존의 북부 교외지대를 정부군이 완전 장악하였다. 한편 포위망 바깥의 반군연합체 정복의 군대(Jaysh al-Fatah)는 계속해서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며 1070 아파트 건설현장에 대해 공격을 진행했지만 뺏고 뺏기기만 반복할 뿐 지루한 손실만 내고 있었다. 이미 4개월에 걸친 알레포 전역에서의 참패에 의해 예비병력과 중장비를 크게 상실한데다 러시아 공군의 전략 폭격에 의해 유류 보급에도 큰 차질을 빚고 있어 다시 대공세를 감행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시리아 남부의 여러 포위망들이 정부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 협상을 통해 이들리브 주로 안전하게 이송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이들은 곧 이들리브나 알레포 주의 여러 반군조직에 가입하면서 예비병력이 되었으며, 알레포 주 북부에서 IS와 쿠르드족과 싸우던 터키 지원 반군들도 알레포 도심 근처로 도착했다.[14] 결국 10월 27일 정부군의 방어가 강한 알레포 남부가 아닌 서부 지역으로 대규모 공세가 개시되었다. 북서부 알 자흐라 지구와 서부 알 아사드 지구가 주요 목표가 되었으며 알 자흐라 지구는 10월 30일 현재까지 잘 버티는 중이나 알 아사드 지구는 6개에 이르는 자살폭탄차량에 의해 28일 정부군의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알레포 서부의 알 아사드 지구와 1070 아파트건설현장이 함락되었고 정부군은 3000아파트 건설현장과 알 아사드 군사대학으로 후퇴하여 방어중이다. 만일 알 아사드 군사대학이나 3000 아파트 건설현장이 함락되면 알레포 포위망은 다시 한번 풀리게 된다.
하지만 타이거 소장이 10월 29일 알레포 서부에 도착했다.
  1. 일부 문서에서는 시리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여러 문건에서 혼란이 좀 있는 모양.
  2. 이상은 아랍언론 al-Masdar NEWS에서 보도된 내용이다.
  3. 팀3, 팀6 두개 부대로 구성된 특수전 여단으로 알려져 있다.
  4. 멀리 갈것도 없이 세계 초강국 미국도 전직 대통령인 율리시스 그랜트드와이트 아이젠하워도 장군 출신이었고 한때는 더글라스 맥아더도 대권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은 혁명 직후 터진 전쟁의 영웅으로 부상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샤를 드 골 역시 자유 프랑스의 해방자라는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의 지도자가 되었다.
  5. NDF, 친 아사드 민병대
  6. 시리아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로 구성된 여단 조직이며 이란 혁명수비대 산하 특수부대 알 쿠드스 여단과는 다르다.
  7. 이전에는 서구권 언론에서는 시리아 정부군을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사병으로 간주하고 비하하는 의미에서 Assad's Army로 지칭하였으나, 팔미라 탈환 이후로 정당한 시리아의 군대라는 뜻으로 Syrian army 또는 Syrian Arab Army라는 정식 명칭을 쓰기 시작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8. 수도는 다마스쿠스 였지만 인구나 경제규모는 알레포가 훨씬 컸다.
  9.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동생인 마헤르 알 아사드가 지휘하는 수도방위사단으로, 공화국수비대 개편 이전에는 공화국수비대에 속한 사단이었다. 최신 장비와 최정예 병력을 보급받아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였으며, 민주화 운동과 내전 시기 무력 진압의 최선봉에 서서 반군을 압살하고 특히 2012년 7월 반군의 다마스쿠스 대공세에서 미친 대격전을 벌여 수도를 회복한 전적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장기간의 전투와 특히 남부 다라 지방의 전투에서 손실이 막심하여 괴멸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시가전에 보다 적합한 보병과 장갑차 위주의 기계화사단으로 재편되어 있다.
  10. 타이거 부대측은 고장이 발생하여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줄 지경이 되자 어쩔 수 없이 유기하였다고 한다. 이 전차는 이슬람 전선 휘하의 파벌인 "누르 알 딘 알 젠키 운동"에서 노획했다가 알 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에 T-72와 돈을 받고 팔아넘겼다.
  11. 전 화력을 투사하여 200여명 사살이라는 것은 상당히 없어보이지만 시리아 내전은 병력의 숫자가 적고 거리 대비 병력 밀도가 낮아 대규모 전역에서도 60명이 사망하면 심각한 참패에 해당된다. 그런데 하루만에 200명을 사살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대승/대패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12. 이브라힘 유세프는 1979년 알레포 남부의 알 라무시 포병학교에서 수니파의 봉기를 외치며 생도 83명을 학살한 무슬림 형제단출신 테러 살인마이다. 알레포 도심에 포위된 반군조직 누르 알딘 알 젠키 운동의 사령관이 하필 이 이브라힘 유세프의 아들인 야세르 유세프이다. 이슬람 과격파에게는 매우 상징이 큰 이름이다. 남부 알레포 공세를 이브라힘 유세프 작전으로 명명한 것은 4차 공세때부터였다.
  13. 상당히 어이없는 실책을 저질렀다. 알레포 전선에서의 방어시설 구축을 소홀히 하여 알 라무시 육군포병학교에서 방어진지라곤 정문의 일부 병력과 기지를 감싼 벽돌벽이 전부로, 벽돌벽을 무너트리고 돌입하자 사실상 무주공산 상태여서 불과 수십명의 반군에게 돌입을 허용했고 기관총좌 하나도 만들어놓지 않았다고 한다. 전투 초반 알 히크마 학교에 자폭차량 돌입을 허용한 것도 같은 실책 때문이라고 한다.
  14. 이들은 터키군의 지원 하에 터키 영토를 통해 빙 돌아오는 수법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