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츠 신고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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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경기 뛰지도 못한 우리 히어로즈 시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No.99
다카쓰 신고 (高津臣吾)
생년월일1968년 11월 25일
국적일본
출신지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소속팀야쿠르트 스왈로즈 (1991~2003)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4~2005)
뉴욕 메츠 (2005)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06~2007)
우리 히어로즈 (2008)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9)
싱농 불스 (2010)
니가타 알비렉스 BC[1] (2011~2012)
지도자니가타 알비렉스 BC 감독 (2012)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군 투수코치 (2014~)

일본의 前 야구선수. 일본프로야구, 메이저리그, 한국프로야구, 대만 프로야구 리그에서 모두 뛴 경험이 있으며 은퇴 전에는 마지막으로 일본 독립리그 니가타 알비렉스 베이스볼 클럽[2]에서 활동했다. 2013년 시즌 종료 후 투수코치로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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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시절

2.1 일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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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절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클로저" 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활동하던 15년동안 4번의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고, 2012년까지 286세이브로 일본 최다 세이브 기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3] 특히 큰 경기에서 활약이 컸다. 그가 현역 생활을 하는 동안 야쿠르트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의 헹가레 투수는 항상 다카쓰였을 정도. 그의 일본시리즈 통산 성적은 11경기 16⅔이닝 2승 8세이브 평균자책점 0.00.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야쿠르트 팬들은 신고를 "미스터 제로"라고 불렀고, 훗날 임창용이 야쿠르트의 철벽 마무리로서 이 칭호를 물려받게 된다.

입단 당시에는 선발로써의 활약이 기대되는 선수였다. 특별히 눈에 띄는 투구를 하진 않았지만 오랜 훈련을 거쳐 싱커에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1993년에 첫 세이브를 달성함과 동시에 마무리 투수로 전향을 하고, 시즌 20세이브를 올리면서 야쿠르트가 노무라 카츠야 감독 부임 이후 두 번째 리그 우승과 구단의 두 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한다.

1994년 최다세이브를 차지한 것을 필두로, 3년간 야쿠르트의 마무리로 자리잡으면서 90년대 중반 야쿠르트 최강 신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997년에 부진하게 됨과 동시에 이토 토모히토[4]가 부활을 하게 됨에 따라 이 해에는 중간계투로 보직을 옮기고, 사실상 더블 스토퍼 체제로 1998년까지 활동한다.

1999년에 와카마츠 츠토무 감독의 취임과 함께 마무리 투수에 복귀해, 최다 구원을 하면서 화려하게 재기한다.

2001년에도 최다세이브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팀의 리그 우승에 공헌한다. 일본시리즈에서는 55홈런의 터피 로즈를 필두로 한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막강타선[5]을 무실점으로 묶으며 팀의 우승에 공헌한다.

2003년에 사사키 카즈히로가 보유하던 일본통산 229세이브의 기록을 갱신하고, 다시 한 번 최다세이브 타이틀을 차지했다.

2.2 미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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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의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FA로서 메이저리그의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해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입단 첫 해인 2004년에는 6승 4패 19세이브 평균자책점 2.31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다카쓰 극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WHIP도 0점대를 찍었으며, 무엇보다도 35세의 나이에아메리칸리그 신인왕 투표에서 2등을 했다.[6]

그러나 다음 해에는 미스터 제로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5점대 평균자책점의 미미한 활약을 보이다가 시즌 도중 방출. 그 후 뉴욕 메츠와 마이너 계약을 하지만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채 방출된다.

2.3 일본으로의 복귀

시즌 초에는 중간계투로 활약했지만 당시 야쿠르트의 셋업-마무리 조인 이시이 히로토시, 이가라시 료타[7]가 부진하는 바람에 클로저로 복귀한다. 이때 사사키 카즈히로에 이어 미·일 통산 300세이브를 기록한다.

그러나 2007년에 숙소의 호텔에서 욕실에서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왼발 엄지에 골절상을 입게 되었다. 결국 2군으로 격하되었으며 나중에 전력외 통보를 받았다.[8]

2.4 한국 시절

그리고 2008 시즌 우리 히어로즈의 대체 외국인선수로 입단, 한국 무대를 밟게 된다.(계약금 6만 달러, 연봉 12만 달러) 팀이 워낙 침체했던 시기여서 18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했지만,[9] 그래도 1승 무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0.86으로 호투하며 이렇다할 마무리 투수가 없었던 히어로즈의 뒷문을 잘 지켰다. 그러나 공격력 보강을 위해 외국인 야수를 구하겠다는 구단 방침 때문에 재계약은 하지 못했다.

턱돌이가 다카츠 신고를 응원하기 위해 기모노를 입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2.5 미국 재도전

2009년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이 때 당시 나이는 무려 40세.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2.6 대만 도전

2010년에 싱농 불스와 계약을 한다. 이로써 4개국의 리그를 경험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가 된다.이제 호주가서 쿠옹과 세이브왕 경쟁만 하면 된다.

시즌 종료 결과 1승 2패 26세이브 1.88의 평균자책점으로 재기를 꿈꿨다. 잘하는 건 좋은데 승부조작으로 질이 떨어질대로 떨어져서 이런지도 모른다. CPBL 세이브 순위 2위로 시즌을 마감. 다만 본인도 이제 점점 나이가 차오른다는걸 느끼는지 올 시즌은 전력투구모드였다고 한다.

전기리그/통합 우승팀이기 때문에 타이완시리즈 1,2,6,7차전을 홈에서 치루는 기회를 얻으면서 진출하자마자 바로 타이완시리즈행. 하지만 싱농 불스완벽한4연패로 결국 TS에서 등판은 불발되었다.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나이 탓인지 재계약은 불발되었다. 지못미.

2.7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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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리그에서 돌아온 이후 일본 독립리그 니가타 알비렉스 베이스볼 클럽에서 뛰게 되었다고 한다.

다카쓰 신고의 오랜 팬들은 이제 다카쓰가 선수생활 은퇴하고 훌륭한 코치나 감독이 되어서 뛰어난 투수들을 많이 길러내기를 원하는 눈치다. 너무 현역만을 고집하는 탓에 코치나 감독이 될 기회마저 없는거 아닌가하고 걱정하는 눈치다. 쿠도 키미야스와 비슷한 현역중독에 걸린거 아니냐는 소리도 있다. 다만 2012년 시즌은 알비렉스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기는 했다.

결국 2012년 9월 4일 44세의 나이로 선수 은퇴 기자회견을 할 예정.# 은퇴 경기에서는 경기 종료 뒤 야쿠르트에서 한때의 파트너였던 후루타 아츠야가 다카쓰의 공을 받는 이벤트를 연출하기도 했다.[10]

2013년 시즌 종료 후, 다승왕 루키일본프로야구 한시즌 최다홈런 신기록을 세운 특급 거포를 데리고도 리그 꼴찌를 한 야쿠르트의 신임 투수코치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야쿠르트 투수진은 멸망했다.

3 스타일

클로저로서는 이례적으로, 구위가 상당히 안 좋은 투수이다. 사이드암에 매우 느린 구속을 자랑하며, 싱커와 커브가 특기. 평균 직구 구속은 120km/h 중반 정도로, 프로에서는 매우 느린 축에 드는 편. 다만 젊은 시절 최고 구속은 140km이 나온 적도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야쿠르트는 160km/h를 던지는 사이드암 투수를 마무리로 영입한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을 절묘한 컨트롤과 완급조절만으로 커버하는 것이 다카쓰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싱커를 이용한 범타처리에도 능하며, 직구와 여타 구종의 구속 차이가 물경 40~50km/h 가까이 나기 때문에 타이밍을 뺏기면 속절없이 헛스윙이나 범타가 된다. 배트를 휘둘렀는데 공은 한참 뒤에 지나가는 귀신같은 광경을 한국에서도 몇 번 볼 수 있었다.[11]

또한 뚜렷한 투구습관이 없는 것도 장점. 직구와 커브, 싱커가 모두 완전히 똑같은 팔각도에서 나오기 때문에 타자로서는 더욱 헷갈릴 수 밖에 없다. 그야말로 OX퀴즈를 하는 기분. 땀을 뻘뻘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던졌는데 정작 던진 공은 80km/h짜리 초슬로커브라 보는 이는 만감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경을 느끼게 된다.

또 한가지 특징이라면, 장작쌓기주자를 내보내는 경우가 많다는 점. 클로저로서는, 아니 투수로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부분이나, 결국 실점은 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내 대작가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점은 전성기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팬들은 다카쓰가 등판하여 장작놀이하는 모습을 다카쓰 극장이라고 부른다. 똥줄은 타들어가지만 대체로 엔딩은 해피엔딩. 주자를 많이 내보내지만 실점하지 않는다는 점은 위기 관리능력과 더불어 장타를 맞지 않는 요령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사실 공이 느리다보니 반발력이 약해 쉽게 장타가 나오지 않는 점도 있고.

  1. Baseball Club, 야구단
  2. J리그 축구팀인 알비렉스 니가타와 같은 팀이다.
  3. 이 기록은 이와세 히토키에 의해 깨지게 된다.
  4. 후루타 아츠야가 자신이 받아본 것 중 최고의 슬라이더라고 극찬한, 140km대에 엄청난 횡변화를 보이는 고속 슬라이더를 던졌던 투수였다. 하지만 부상 등으로 오랜 활약을 하지는 못하였다.
  5. 이 때 긴테쓰의 타선은 '이테마에 타선'(いてまえ打線, 오사카 사투리로 '박살내라'라는 뜻의 속어라고 한다)이라 불리면서, 팀 방어율 꼴찌의 안습한 투수진에도 불구하고 팀타율 .280, 팀홈런 211개의 무지막지한 타선의 힘으로 퍼시픽리그 정상에 올랐다. 101홈런을 합작한 터피 로즈, 나카무라 노리히로의 클린업을 중심으로 이소베 코이치, 요시오카 유지, 가와구치 켄시 등 3할-20홈런급의 쟁쟁한 타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6. 이 해 AL 신인왕은 오클랜드의 유격수 바비 크로스비가 차지했다. 여담이지만 3위는 다름아닌 꼴자스 빠따에 고통받은 잭 그레인키.
  7. 각각 당시 일본인 좌/우완 투수 최고구속기록 보유자였다. 팬들에게는 '로켓 보이스'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8. 후루타 아츠야가 감독 사임 겸 선수 은퇴를 선언하자마자 바로 전력외 통보를 받았는데, 이것은 야쿠르트 프런트와 사이가 좋지 못한 후루타와 친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실제로도 후루타와 친했던 왕년의 좌완 에이스 이시이 카즈히사도 07시즌 종료 후 FA권리를 취득하자마자 도망치듯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9. 이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가 있는데, 일본의 NHK에서 일본과 미국을 거쳐 대한민국에서 활약하는 신고의 모습을 취재하여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로 기획하고 한국에 취재 팀을 파견하였으나, 때마침 소속 팀인 우리 히어로즈가 부진해 그의 마무리 등판 기회 자체가 부여되지 않아 한동안 그가 세이브를 올리는 모습을 취재하지 못하였다. 거기다 때마침 베이징 올림픽으로 올림픽 브레이크까지 겹쳐서 NHK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이나 다카쓰를 취재하지 못하였다. 한국의 야구 팬들 사이에서는 이러다가 NHK직원들 집에 못가는거 아니냐는 농담 반 걱정 반의 우스갯소리가 나왔고, 머나먼 세이브라는 인간극장을 패러디한 유머글도 나왔다.# 결국 한번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기어이 세이브 장면을 찍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팬들은 NHK의 장인 정신에 박수를 보냈다(...). 근데 두산 베어스이리키 사토시도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10. 여담으로 후루타의 은퇴 시합에서 현역 마지막으로 배터리를 이룬 투수 역시 다카쓰였다. http://www.youtube.com/watch?v=k8pa-mYAMow
  11. 이는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도 여과없이 드러난다. 구속이 20(...)대....팀덱+12를 받아도 구속이 40을 못 넘는다. 대신 구위 제구 변화구 정신력이 모두 80을 넘는 컨트롤과 완급조절만으로 커버하는 모습을 그대로 적용시 놓았다. 물론 재평가 이후엔 대폭 너프가 되어 예전 모습을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