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영학당

統制營學堂. 대한제국해군사관학교.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1], 총제영학당(總制營學堂)이라 부르기도 했다.

현재 주소로는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61번지이다. 통제영학당지라고 인천에서 지방기념물로 지정해뒀다.

1 개요

대한제국의 해군 장교수병을 양성하는 시설이었다.

항목은 통제영학당으로 만들었지만 당시에는 수사해방학당이나 총제영학당이란 말이 쓰였다. 자세한 관련 기사

2 배경

조선 후기에 등장한 이양선들 때문에 조정은 해양전력을 양성하는데 관심을 가졌다.관심 가졌다 1883년에 연안해군인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설치했다. 기연은 경기도를 말한다. 지휘관은 기연해방사무라고 불렸는데 민영목(閔泳穆)이 보임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84년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기연해방영으로 들어온 군영들은 다시 원대복귀되었다. 1893년이 되자 고종은 삼도육군통어영을 해연총제영(海沿總制營)으로 바꾸고 민응식(閔應植)을 지휘관인 해연총제사로 임명하였다. 해연총제사는 강화유수(강화군수)를 겸임했는데 강화부에 해군동영(海軍東營)을 설치하고 해군 장교와 수병을 양성하기 위해 수사해방학당을 설치했는데 통제영학당을 말한다.

3 역사

1893년에 생겼다. 위치는 강화도 갑곶진이었으며 설립예산은 청나라로부터 들여온 1천원이었다.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18세에서 26세의 사관생도[2]와 수병을 모집했다. 근데 단순히 사관학교라고만 부를 수가 없는 게 최초 모집 인원이 사관 50명에 수병 300명으로 해군사관학교에 해군제1군사교육단을 합친 모양새였다. 처음에는 장교 50명에 수병 500명을 모으려고 했지만 잘 안 왔다. 신체를 중요시 하는 유교의 영향으로 죽으면 시체도 못건지는 수군에대해 기피 현상이 있었기 때문.

일단 군사교육에 들어가기 전에 영어교육부터 먼저 시켰다. 1893년 9월부터 영어교육이 이뤄졌고 이듬해인 1894년 4월에 영국군 해군 출신인 콜웰(W. H. Callwell) 대위와 커티스(J. W. Curtis) 하사가 왔다. 교육 시작 후 3개월 뒤인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해군총제영이 부대 해체되면서 그 휘하 기관이었던 통제영학당도 운영이 불투명해진다. 결국 1894년 10월에 폐지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해군의 경우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을 통제영학당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 육군사관학교 역시 육군무관학교를 전신으로 삼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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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군사학, 항해학, 포술학 등을 가르쳤다. 서 있는 사람 중에 제일 오른쪽이 콜웰 대위이며 왼쪽으로 차례대로 조선인 장교, 조교인 커티스, 영국 총영사 힐러(Hiller), 영어교사 허치슨이다.
  1. 수사(水師)는 수군을 뜻하고 해방(海防)은 해상방어를 뜻한다.
  2. 사관생도는 15세에서 20세 사이로 모으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