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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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코뮌
La Commune d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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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3월 ~ 동년 5월
위치파리
수도파리
정치체제코뮌
,자코뱅,
,공산주의,
,아나키즘,
종교세속주의
언어프랑스어
성립 이전프랑스
제3공화국
멸망 이후프랑스
제3공화국

1 개요

1871년 3월 28일부터 5월 28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운동이자 이 운동으로 70일간 존속했던 인류 역사 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

2 탄생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황제 루이 나폴레옹백부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너무나도 한심한 대처를 보여주자 결국 나폴레옹은 폐위되고 제3공화정이 수립된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공화정부도 나폴레옹 3세 못지않은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굴욕적인 사태가 지속되었다. 빌헬름 1세의 즉위가 베르사유 궁에서 이루어졌으니 말 다했다... 거기다가 새로운 국민의회가 자리를 잡은 도시가 하필이면 또 앙시앵 레짐의 상징이던 베르사유. 전쟁 직후에는 보르도에 수립되었으나 임시정부가 완전히 구성되고 베르사유로 옮겼다고 한다.

파리가 혁명이 일어났던 바로 그 도시인만큼 파리 시민들은 왕당파와는 정 반대인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안 그래도 전쟁의 굴욕적인 패배로 불만에 차 있던 시민들은 이런 일로 인해 더더욱 분노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쌓여가던 불만이 폭발한 것은 의용군인 국민위병의 처리 문제였는데, 안 그래도 불신을 받던 임시정부가 프랑스군의 예비군의 역할을 하던 의용군을 무작정 무장해제시키려 하자 파리 시민들과 의용군의 불만은 폭발했고, 의용군은 이를 거부했다. 더욱이 이들의 무장해제를 담당해야했던 파리의 정규군이 이들과 손을 잡으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달았고, 곧 3월 26일 선거가 실시되어 파리 코뮌 정부가 수립되었다.

3 진행

파리 코뮌 정부는 자코뱅파,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 다양한 이념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여성 참정권의 보장, 최대노동시간 제한 등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진보적인 정책을 폈다.

코뮌 정부의 활동에 호응하여 프랑스의 다른 여러 도시에서도 코뮌 운동이 일어났지만, 이것이 단결되어 거국적인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4 결말

초기에는 코뮌 측의 병력이 훨씬 우세하였으나, 2주일만에 전세는 역전되었다. 베르사유의 정부는 충성심이 의심스럽던 파리에서 철수시킨 정규군 대신 지방에서 징집한 군대를 집결시키고 비스마르크와 교섭하여 포로로 있던 40만의 프랑스군을 귀환시킨다. 코뮌과 정부 간의 협상도 있었으나 결국 정부는 4월 2일부터 전투가 시작된다. 코뮌 측은 훈련부족과 기율 결핍으로 패배를 거듭한다. 특히 명확한 지휘계통의 부재와 다양한 정파들 간의 상호 불신으로 인해 전투는 계속된 패배로 이어진다.

당시 코뮌군의 훌륭한 지휘관이었던 로셀은 군사위원회 의장직을 그만 두면서 사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코뮌 의원 동지들, 모두들 토론은 하나 아무도 따르지 않는 지휘의 책임을 나는 계속하여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코뮌은 토론은 하나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만일 내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군사력이 있다면 나는 적을 징계할 수 있다..... 포병위원회의 엉터리가 포병대 조직을 막았고, 중앙위원회의 머뭇거림이 집행을 천연시키고, 대장들의 사소한 선입견이 군대 동원을 마비시키고 있다...."

결국 5월 21일 밤부터 정부군은 시내로 돌입하여 28일 오후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피의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코뮌 측 중에서 절망한 과격파들은 파리의 대주교를 비롯해서 수많은 반대파를 학살하였고 튈르리 궁과 팔레 루아얄을 비롯한 역사깊은 건물들을 불태우면서 끝까지 항전하였다. 정부군 측에서도 사로잡은 포로를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즉결 처형하는 등 처절하게 보복했다.
보복은 보복을 일으키고 그 강도를 계속 더 해 갔다.

이 때 죽은 사람의 숫자는 대략 3만명 정도로 잡는데#, 파리 인구가 현재도 250만명이 안 되니 이때는 더 적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인구의 1%가 넘는 사람들이 죽어나간 대학살극이었던 셈이다. 다만 파리 코뮌의 학살을 추모하고 잊지 말자는 성향이 강한 프랑스 좌파는 프랑스 혁명 당시에 일어났던, 파리 코뮌보다 0하나 더 붙은 숫자, 그것도 인구가 적은 농촌의 민중들이 학살당한 방데 학살에 대해서는 항목에 따르면 외면하고 심하면 폄하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 학살극 이후 코뮌 정부는 마침내 해체되었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5 영향

비록 코뮌은 실패로 끝났지만,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시도는 이후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훗날 러시아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을 세우는 데 성공한 블라디미르 레닌부터 파리 코뮌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 연습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했으며, 이후 전세계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의 본보기/반면교사가 되기도 했다. 특히 소련은 자국 함대의 핵심전력 중 하나였던 강구트급 전함 3번함 '세바스토폴'을 '파리쥐스카야 코뮤나'로 개칭하기까지 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사에 비춰보면, 파리 코뮌은 그간 프랑스 혁명을 이룬 상퀼로트들의 최후의 폭력을 동반한 혁명이라고도 할 수있다. 역사가 데이빗 톰슨에 의하면 파리 코뮌은 1789년 이래의 프랑스 혁명적 전통의 매듭 중 가장 큰 것으로서, 파리 코뮌이 문명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야만적으로 끝나자 이후 폭력에의 호소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가 평화적 타결로 혁명을 이어가는 이유가 파리 코뮌에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뷰리라는 역사가는 파리 코뮌을 통해 프랑스가 얻은 영향으로 우선 파리 코뮌을 통해 혁명의 중점이 파리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들었다. 이전까지 프랑스의 정치적 중심은 파리였으며,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모든 혁명은 파리에서 시작되고 지방의 반발은 파리의 중심을 차지한 혁명세력에게 짓눌렸다. 그러나 파리 코뮌은 '파리를 차지했는데도 지방에 밀려서 패배'했다. 파리의 절대 우위가 사라진 것이다. 폭력과 불안정 및 사회적 위기는 늘 동반된다는 생각을 버리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실패로 조직화된 사회주의의 성장을 다시 지연시켰다는 면도 있었다. 물론 이후 프랑스에서도 사회주의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지만, 주류가 되기는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파리 코뮌이 해체되면서 국민위병 부대도 해체, 19세기 내내 정부와 별개로 민중을 대변했던 힘이 소멸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파리 코뮌을 통해 제2제국으로부터 제3공화국의 실현이 한층 더 빨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인터내셔널가가 이 사건으로 인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인터내셔널가의 탄생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2000년피터 왓킨스가 감독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코뮌이 이 사건을 소재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