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역사

프랑스의 역사
Histoire de France
~18세기19세기20세기~
고대 ~ 중세앙시앵 레짐프랑스 근대 정부 체제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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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프랑크 왕국서프랑크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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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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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군트 왕국메로빙거 왕조카롤링거 왕조카페 왕조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비시
서고트 왕국독일령
아르모리카브르타뉴아키텐 왕국노르망디 공국1차 프랑스 식민제국2차 프랑스 식민제국

1 개요

프랑스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2 갈리아서부터 프랑크 왕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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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에 항복하는 베르생제토릭스, 1899년 작품.

고대에는 로마인들이 골족의 땅이라 하여 갈리아라고 불렀다. 통념상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9년 만에 갈리아를 정복한 갈리아 전쟁을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1] 골족은 로마에 동화되어 갔으며 제국 말기에 이르러서는 까만머리 까만눈을 가진 로마 원주민들과의 판이한 외모로(프랑스 스페인 포루투갈의 까만머리 까만눈을 가진 라틴족들은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로마인의 후손들이다) 로마인들은 야만족으로 규정했으며 로마로 대거 노예로 끌려갔다. 골족은 로마 귀족 이주민들의 영향과 로마에서 자유민 신분으로 된 골족 노예들에 의해 로마제국의 영토로서 로마화되어갔다 이를 갈로-로망 문화라고 한다. 그러나 조르주 뒤비에 따르면 이 시점이 프랑스 민족이 생겨난 시점은 아니며, 정체성이 분화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 즈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로마가 영향력을 잃으면서, 갈리아 지방 일대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들어와 프랑크 왕국을 세운다. 프랑크 왕들은 로마(동로마 제국)로부터 책봉받아 갈리아 지방을 다스렸다. 다른 게르만족 국가들은 제대로 된 정치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멸망하였지만, 프랑크 왕국은 히스파니아 지방으로 쳐들어 온 이슬람 제국을 무찌르고 교황청과 협조하여 나름대로[2]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만들었다. 메로빙거 왕조에서 카롤링거 왕조를 거치면서 이는 강화되었고, 카롤루스 대제교황 레오 3세로부터 제위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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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계속 분열된다. 이 시점에 중세 봉건제가 탄생하게 된다. 사라센인, 바이킹, 마자르족, 동로마 제국이 계속 제국의 영역을 침입해 오면서, 각 지방은 방위를 위해 주종 관계를 맺고 농노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또 지중해에 준동하는 사라센 바르바르 해적 때문에 지중해 교역이 쇠퇴하여 폐쇄적이고 자급적인 경제로 변화했다. 프랑크 왕국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는데, 지방간의 교류가 줄어들자 각각 프랑스 지방의 프랑스어, 이탈리아 지방의 이탈리아어로 분화되었고,[3] 게르만족의 전통이 강했던 독일에서는 독일어가 흥하게 된다.

3 카페 왕조 통치기부터 백년전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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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성사를 받는 클로비스 1세]

일반적으로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고, 일드프랑스 지방의 지배자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오른 시점부터를 '프랑스 왕국'으로 본다. 독일이 오토 2세 때부터 샤를마뉴와 같이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는 관습을 확립했기 때문에, 프랑스클로비스 1세세례성사를 받고 랭스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가진 것으로 정통성을 대신하였다. 카롤루스 대제를 스틸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프랑스 왕들은 스스로를 클로비스 1세의 후계를 자칭한 것이다. 이 관습은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져서 샤를 7세백년전쟁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랭스를 되찾기 전까지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카페 왕조의 통치하에 프랑스(서프랑크) 왕국은 명분상으로나마 존속하였다. 프랑스의 각 지방은 지방 영주들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차라리 '앙주 제국'을 소유한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보다도 강력하였다. 사실 카페 왕조 왕들이 수도가 있는 일드프랑스 지역 이외에 대해 할 수 있는 권한이 거의 없음에도, 귀족들은 공적인 대표자를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 고대로부터 잔재한 혈통적 신비성과 계속 장자상속이 가능하였던 기적적인 운이 카페 왕조의 '생존'에 기여하였다.

중세 성기에 이르자 암흑 시대에서 벗어났고, 지중해 무역은 회복되어 시장 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농노제는 현물 지대에서 점점 화폐 지대로 변해갔다. 농사 기술이 매우 발달하여 삼포제가 실시되어, 국내 경제도 발달하였다. 카페 왕조는 지방 영주들의 땅을 하나하나씩 집어삼키면서 성장해갔다. 존엄왕 필리프 2세 시절에 성장한 카페 왕조의 원동력이 명백히 나타났다. 그와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는 프랑스 영토를 두고 종종 다투었으며, 결국 잉글랜드 존 왕 시기에 이르자 아키텐을 제외하고 프랑스 왕에게 프랑스 영토를 모조리 넘겨주게 되었다. '존엄(라틴어로 Augustus로, 곧 로마 초대 황제의 칭호이다)'이라는 칭호만 봐도 그렇다.

까페 왕조에서 발루아 왕조로 넘어가자 왕국에 위기가 닥친다. 잉글랜드에서 전쟁을 걸었는데, 이것이 바로 백년전쟁이다. 당국은 이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고, 지속적인 전쟁을 낳았다. 전시 보급을 이유로 대규모 약탈(시보셰라 하는 행렬이 지속적인 약탈 행위를 하였다.)이 이루어졌고 영토가 황페화되었다.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비해 유리한 점이 있었다면 바로 약탈이 상대보다 덜 심했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군대는 용병으로 구성되어 더 심한 노략질을 하였다. 흑사병이 출몰하기도 하여 자크리의 난과 같은 대규모 농민 반란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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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프랑스에 불리했던 전세는 역전이 되고 1453년이 되자 잉글랜드는 칼레만 남겨두고 쫓겨나게 된다. 긴 전쟁으로 인한 가장 큰 수혜자는 프랑스 왕이었다.

4 위그노 전쟁부터 프랑스 혁명 전까지

1500년에 이르면 거의 대부분의 토지가 프랑스 왕령이 되고, 자국내에서는 황제나 마찬가지인 존재라고 여길만큼(실제로 칭하지는 않았다.) 권력이 막강해졌다. 국외에 대하여 정치력을 행사할 수준도 되어서 이탈리아를 두고 합스부르크가와 투쟁하였으나 이 무렵에는 카를 5세가 버티고 있던 합스부르크에게 연전연패하였다. 또한 이 와중에 종교개혁으로 왕권의 위기가 닥친다.

중세 프랑스에 거주하는 칼뱅 개혁교회 신자들은 위그노라고 불리었는데 16세기 중반 총 인구 1600만명 중 최대 7~8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수는 약 5%로 전체 인구에 비례해서는 아주 적었으나 왕권에 반항하는 대귀족들이 주로 신봉하였기에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이는 당시 왕조였던 발루아 왕조와 위그노 측의 부르봉 가문, 그리고 가톨릭 측의 기즈 가문이 뒤얽힌 위그노 전쟁이라는 수십 년의 분쟁을 촉발하였다. 위그노 전쟁의 결과로 발루아 왕조가 부르봉 왕조로 교체되고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내전을 종결하였다. 사실 이 시점에 백년전쟁과 같은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은 것은 기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종교개혁으로 많은 진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을 참조하자.

내전이 종결하고 난 후 안정되자 프랑스는 대외로 다시 눈을 돌리게 된다. 독일 지역에 비해 일찍 내전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이 프랑스로서는 큰 기회가 되었다.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낭트 칙령으로 타협한 것을 바탕으로 리슐리외와 같은 관료의 주도 하에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도입한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이면서도 30년 전쟁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신교도들과 동맹하였고, 심지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과 동맹하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는 30년 전쟁의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프랑스는 이 무렵부터 유럽의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프랑스를 패권국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던 종교적 관용은 루이 14세 시대에 깎아먹히며 이는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던 위그노들의 이탈로 프랑스 왕국 재정에 큰 타격으로 다가왔다. 루이 15세 시절에도 재정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었고 7년 전쟁등 큰 전쟁에서 잇달아 패배하면서 프랑스 절대왕정의 앞날엔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5 프랑스 혁명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1789년 혁명 이전까지 프랑스 전제 왕권(절대 왕권)은 새로이 부상한 부르주아지(제3신분)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프랑스 군주는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을 채용하고, 자본을 이용하였다.[4] 그러한 조류 속에서 계몽 사상이 등장하였고 부르주아지의 시민 계급 의식과 합쳐 혁명의 원동력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프랑스 군주의 재정이 파탄이 이르자 촉발되었다. 장기간의 관습법과 귀족, 부르주아의 견제가 누적되어 만들어진 앙시앵 레짐(프랑스의 구체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세계 역사에 자유, 평등, 박애라는 타이틀을 새긴 최초의 국가. 이후 공화정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득세하기 전까지 단지 공화정이란 이유로 주변 국가와 적대적이 되었다. 바로 이 시기가 프랑스가 가장 끗발을 날리던 시절로서, 1799년 나폴레옹이 제1통령에 취임한 뒤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때 당시에는 거의 먼치킨적 강력함을 발산하며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을 모조리 격파하는 괴력을 발휘했으나 영국에게 해전으로 덤비다 패배하고,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털려버린 이후로는 약발이 떨어졌다. 결국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프랑스에는 전쟁에 패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서로를 견제하던 열강들의 이권 다툼을 잘 활용하여 프랑스는 빈 회의에서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왕정이 돌아왔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이식된 새로운 정신은 7월 혁명, 2월 혁명 등으로 계속 분출되었고, 결국 몇 차례의 정권 교체를 통해 나폴레옹 3세가 이러한 흐름을 잘 이용하여 다시금 황제를 칭하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당시의 제국주의적 시대상을 따라 적극적으로 아프리카, 인도차이나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정작 유럽 본토에서는 각종 실수로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었고, 그 결정판인 보불전쟁 때는 프로이센에게 아주 제대로 털려서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스당(Sedan)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고, 파리가 포위되는 통에 파리 시민들은 개나 고양이는 물론이거니와 쥐까지 잡아먹는 처절한 상황을 연출했다. 보불전쟁 패배의 결과로 베르사이유궁에서 빌헬름 1세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50억 프랑의 배상금과 더불아 알사스-로렌 지방을 뜯기는 등 톡톡히 망신살을 뻗쳤고, 이에 따른 사회적 혼란으로 파리 코뮌이 성립되지만 곧바로 3만명의 희생당하는 피의 1주일 사건으로 코뮌이 무너지는 등 지옥의 헬게이트가 열렸다. 이런 혼란으로 인해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가 같은 심각한 내홍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혼란을 겪고 난 뒤 1900년대 초반 라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즉 좋은 시대라고 불리우는 시대가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공업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프랑스는 풍족해지고 만국박람회까지 개최하며 부유한 프랑스의 이미지를 보여주었지만.....

현실은 시궁창. 자본가,지주,부르주아들만 이 혜택을 실컷 누렸을뿐 서민 노동자들과 식민지 민중들은 엄청나게 넘사벽이 된 빈부격차를 겪어여 했다. 특히 식민지는 엄청난 수탈을 계속 당했다. 그런 거품경제 속에 살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만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숫제 프랑스 땅에서 난리굿을 피웠다. 파리를 향해 쾌진격중인 독일군을 마른 전투로 막아세우는데 성공한 건 좋은데, 아예 거기에 참호선 파고 눌러앉아 난리를 치다 보니 프랑스 국토가 완전히 박살이 난다. 비록 전승국이었지만 프랑스는 20대 남성인구의 27% 가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부상이나 실종은 제외하고 순수 전사자만 이었다. 부상으로 불구가 된 남성들이 많아서 노동력 부족이 극심해졌고 사회적으로도 '한 세대가 없어지는' 큰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망했어요 . 1차 대전때 참호전이 너무 강하게 기억에 남았는지 마지노 선 파고 우주방어 몰빵하는 전략을 감행. 그러나 독일은 또 벨기에와 아르덴느 숲을 건너 우회[5], 프랑스를 빨리도 털어먹었다. 프랑스는 항복하고 비시 정권이 세워지며 괴뢰정부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전승국. 그래도 마지노 선이라는 명사는 하나 남겼다. 어쨌든 전쟁자체에선 이기긴 했지만, 전쟁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압박과, 또한 전쟁으로 인해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소의 압박때문에,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식민지를 모두 독립시키고 사실상 본토만 남게되는 비운을 초래한다. 참 이래저래 근현대의 프랑스에 있어서 독일은 악몽이자 증오의 대상.

그나마 샤를 드 골자유 프랑스군이 체면치례는 좀 했다.

6 냉전기

대전 후 알제리, 베트남 등 식민지들을 놓지 않으려고 전쟁까지 벌였지만, 결국 실컷 얻어 터지고 물러나는 추태를 보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 본국에서는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식민지 지배를 포기하지 않으려던 제4공화국 정권이 무너지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의 지도자로서 명망을 얻은 드골이 정권을 장악하여 제5공화국 정부를 수립되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매우 돈독한 편이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독립 세력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덕분에 프랑스 왕정은 커다란 재정적자를 떠앉게 되어 루이 16세가 목이 잘리는 결과가 초래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미국인들은 프랑스를 좋아하게 되었다. 또 역으로 공화정 국가를 실현한 미국의 모습을 독립전쟁을 지원나갔던 프랑스인들이 경험한 것이 프랑스 혁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후로 미국과 프랑스는 주요한 동맹국이었으며 프랑스에서는 미국에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하기도 했다.

또한 2차 대전 때는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부터 나치를 몰아내고 본토를 수복했으며, 소련의 개입을 막았기 때문에 관계가 좋았지만 종전 후 독재적 정권을 수립한 드골이 독자노선을 강조하면서[6] 미국과 사이가 소원해졌다. 그래도 영국과 함께 마셜 플랜의 최대 수혜자로서 국가 경제는 물론이고 1차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국 지원 없이 54년까지 버티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7]

이후 프랑스와 미국의 관계는 미국 대통령의 성향이 어떤가에 따라 꽤나 오락가락하게 되는데 대전 중 경험으로 프랑스를 평가절하하던 아이젠하워 정권에서는 소원해지고 호의적인 케네디 정권에서는 가까워지는 식이었다. 특히 미국으로서는 프랑스 돼지들이 싸질러 놓은 똥인 베트남 전쟁으로 허우적대고 있을 무렵, 매일 대사관 앞에서 반미 시위나 벌이고 대통령이 "우리도 졌는데 너네들이 거기에서 이길리가 없지 ㅋㅋㅋ"라며 뒷담화를 까는 판이었으니 오죽 하랴?

그런데 사실 이것도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으려던 미국이 프랑스의 스폰서로 나서서 북베트남을 몰아내려다가 실패하자, 스폰서였던 미국이 직접 나선 것이라서 결국엔 두 놈 다 나쁜놈인데 서로 책임 전가하는 꼴이다. 만약 인터넷 등에서 프랑스인과 미국인이 베트남전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우린 조용히 병림픽키배를 구경해주면 된다.

냉전 기간, 프랑스가 NATO를 탈퇴하고 독자노선을 선언, 미국-영국 중심의 유럽 질서에 정면으로 대립각을 세우면서 국민 감정도 꽤나 소원해졌던 적이 있다.

당시 프랑스가 NATO에서 탈퇴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을 미국-영국이 저지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당시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핵무기는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초강대국의 상징이었고, 미국은 프랑스 같은 2류 강대국(미국의 관점에서는)까지 핵무기를 가지게 하여 핵을 확산시킬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핵을 가질 자격이 없는 2류 강대국'이라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 것은 1956년 발발했던 제2차 중동전쟁에서였다. 영국-프랑스 동맹은 기세좋게 수에즈 운하를 점령했지만, 소련은 철수하라는 요구를 하면서 노골적인 핵공격 위협을 했고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에서의 불장난'의 뒤를 봐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들이 받게 된 2류 강대국 취급이라는 굴욕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프랑스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영국이 미국과 함께 프랑스의 핵개발에 반대한 것이었다. 영국은 2차세계대전 중 맨해튼 프로젝트에 자금과 기술, 인력까지 지원한데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미국과 비밀협정을 통해 전후 핵기술을 공유하기로 합의까지 해 놓은 상태에서 미국에게 배신당해놓고도[8], 자체적으로 1957년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곧바로 미국 편에 붙어서 프랑스를 방해한 것이다. 더구나 수에즈 운하 사태에서 함께 소련의 핵공격 위협과 미국의 냉대를 받았던 영국이 등을 돌리고 프랑스의 핵개발을 방해한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프랑스는 무려 국방비의 25%를 핵개발에 쏟아붓는 강경 드라이브를 펼쳐 핵을 손에 넣고야 만다. 허나 핵개발성공 이후에도 미국-영국은 프랑스에 대해 철저한 무시와 냉대로 일관했고[9], 결국 이는 NATO탈퇴 및 독자노선 강행이라는 초강경수를 부르고야 만다. 자세한건 영국과 프랑스의 핵개발 참고.

7 현대사

2003년 발발한 이라크 전쟁을 전후해서, 미국에서는 'Cheese-eating surrender monkeys'라고 프랑스를 비꼬아 부르곤 했는데 우방국으로서 절대로 신용할 수 없는 새끼들이라고 대중을 넘어서 뉴욕 포스트 같은 미디어조차도 surrender monkey라는 헤드라인을 내걸고 대놓고 까댄 바 있다. 이라크전쟁으로 틀어진 양국 관계가 버락 오바마 집권으로 프랑스 측에서는 개선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양국간의 관계가 틀어진 건 단순하게 정권 교체로 해결될 만한 사안이 아니다. 한마디로 관계 개선은 순전히 프랑스의 기대일 뿐이라는게 미국 쪽 시각이다. 물론 이라크전쟁은 결국 미국과 영국이 손잡고 전세계를 상대로 친 구라였음이 밝혀졌고, 전쟁을 반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옳은 것이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느냐 마느냐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일부 계층에서 여전히 프랑스를 배신자라며 X같이 보는건 사실이나, 이미 미국 내에서도, 조지 워커 부시의 퇴임 이전부터 이라크전쟁이 잘못이었음을 공화당 정치인들조차 인정한 지 오래이다. 심지어 버락 후세인 오바마와 대선에서 맞붙었던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매케인마저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관련된 조크를 하며 부시 행정부를 비판했던 바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 이후 양국 정상은 이미 수 차례 회동하였고, 중동 문제 등에서 뜻을 같이하는 공동발표 또는 회견을 함께 수행하고 있는 바, 이미 현재의 미-불 관계는 조지 워커 부시 시대의 대립에서 벗어나 다시 화합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어찌되든 아들 부시가 망쳐놓았던 것보단 낫다. 참고로, 비슷한 이유로 망가진 미-독 관계도 메르켈 집권 이후에야 회복되기 시작했다.

8 기타

한국전쟁에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1949년 수교.

한국전쟁 참전 외국군 중 사상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파병 병력은 적었지만, 지평리 전투/단장의 능선 전투 등 치열한 전투를 많이 치렀기 때문.

휴전 후에는 대부분이 철수하였으나, 일부 병력은 1964년까지도 국내에 주둔했다.

9 역대 국왕

역사 관련 정보/프랑스 역대 왕 항목 참조
  1. 프랑스인들은 당시를 상징하는 제국인 로마의 영지가 된 걸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로마에 대항한 wiki:"베르셍게토릭스"베르셍게토릭스 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이중적인 기질이 있었다.
  2. 어디까지나 '나름대로'. 공적인 국가 개념이 희박하였기 때문에 후에 형편없이 분열되고 만다.
  3. 사실 이것도 근대의 구분이지 프랑스어도 북부 랑그도일과 남부 랑그도크의 차이가 크게 존재하였다.
  4. 이 부분에서 오해하지 말하야 할 점은, 부르주아지라고 해서 반드시 상업에 종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혁명 당시 부르주아지의 90%는 토지 부르주아지였으며, 10%만이 상업 부르주아지였다.
  5. 1차 세계대전때도 이랬지만 당시에는 기술력의 한계와 독일 제정의 무리한 작전이 겹쳐서 파리 함락에 실패한 반면 2차 세계대전에서는 전차의 등장으로 기동력이 올라간 데다 주변 환경이 1차 세계대전 때에 비하면 양호했기 때문에(1차대전과 달리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서 뒤통수를 맞을 걱정도 없었고 이때 프랑스는 전차에 무전기를 하나도 달지 않은 반면 독일군은 무전기를 대부분 달고 있을 정도로 기본 준비에서 차이가 났다) 독일군은 연합군이 방어할 틈도 없이 바로 개발살을 내버린다.
  6. 전쟁 중 루즈벨트가 드골을 홀대한 탓도 좀 있다. 루즈벨트는 "선거로 당선되지도 않은 주제에 지도자로 군림하려 든다."면서 싫어했고 앙리 지로를 지지했다.
  7. 대전 중 미군병사들이 "빤쓰까지 미제를 입고서 뻐기는 놈들" 이라 자유 프랑스군을 비웃은 사례도 있다.
  8. 미국은 1946년 '맥마흔 법'을 제정, 핵무기의 독점을 선언한다. 이는 영국과의 합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실상은 맨해튼 계획이라는게 있는 줄도 몰랐던 미국의회에서 핵폭탄이라는 것의 존재를 알자마자 미국의 독점으로 하자는 주장이 의회 내 다수파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맨하탄 계획에서 미국이 어마어마한 자원을 투자했는데, 그에 비하면 비실비실한 영국이 투자한, 상대적으로 얼마 안 되는 자원 때문에 핵기술을 공유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미영합의는 결국 외교각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각서보다 상위의 효력을 가진 법에 밀린 것이다.
  9. 핵이 강대국의 상징이기는 했지만 핵을 갖는다고 초강대국이 되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프랑스의 핵은 통제가 안 되는 위험이 있는 반면 소련과의 핵전쟁 상황에서 크게 도움이 되는 전력은 아닌, 골칫거리에 불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