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 불가침조약

(독소불가침조약에서 넘어옴)

영어: Nazi-Soviet Non-Aggression Treaty
독일어: Deutsch-Sowjetische Nichtangriffspakt
러시아어: Договор о ненападении между Германией и Советским Союзо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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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신혼 생활은 얼마나 오래 갈까?


크레믈린에서 만나 악수하는 이오시프 스탈린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이데올로기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인 두 나라가 은밀한 회의에 열중해서 터무니없는 현실 정치(Realpolitik) 속에서 동유럽 국가들을 조각내는 것, 그것은 기괴한 일이었다.(···중략···) 이데올로기는 스탈린에게 대수롭지 않았다. 소련 국경 저 먼 쪽에서는 국가 이성(raison d'etat)이 더 우세해졌다. 그는 파시스트 독일과 조약을 맺을 수 있는 만큼 손쉽게 제국주의 서구와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소련이 보기에 유럽의 반동 국가들은 모두 사회주의라는 쇠바퀴에 깔려 종국에는 모두 가루가 될 것이었다. (···중략···) 무엇보다도 독일은 소련이 1939년에 그저 꿈에서나 바랄 수 있던 것을 내놓았다. 그것은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이 독일의 동의를 받아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제공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작은 완충 국가들의 네트워크 대신에 독일과 소련이 국경을 맞대는 상황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은 감내할 만했다.

- 리처드 오버리 저, 류한수 역,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p. 77-79

1 개요

히틀러야심을 얕본 스탈린의 실수
이 조약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피할 수 없게 되었다

1939년 8월 23일 체결된 독일 제3제국소련 양국 간 체결된 불가침조약. 조약 체결자인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도 한다.

2 독일-소련 관계의 파국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만 해도 독일과 소련은 매우 사이 좋은 우방국이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군비를 제한받음과 동시에 국제 연맹 가입을 거부받고 있었고,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역시 국제 사회에서 왕따당하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비록 양국이 1차 대전 때 피터지도록 싸웠다고는 하나, 소련에게 있어 그것은 로마노프 왕조러시아 제국의 일이었고, 독일 역시 제2제국의 문제였다.

때문에 독소 양국은 1922년 라팔로 조약이라는 우호 조약[1]을 체결하여 독일은 소련에게 여러 선진 군사 기술을 제공하고, 소련은 군비 제한이 많은 독일에게 비밀리에 신기술 연구 및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는 시설을 자국 영토 내에 제공하는 등 서로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아울러 양국 모두 폴란드라는 가상 적국[2]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기도 했다. 독일은 국경 인정 문제로, 소련은 1920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후로 폴란드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러나 이런 양국 관계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깨져 버렸다. 히틀러는 때려 잡자 공산당!을 외쳤으며 자연스레 소련과의 관계는 나빠졌다.

3 1938년 위기와 소련

1938년, 독일이 주데텐란드를 요구하며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로 유럽에 전쟁이 터질 위기에 처하자 소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군사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으며, 유사시 동맹국의 안전 보장을 위해 참전하여 독일과 싸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그러나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지 않아, 폴란드 혹은 루마니아 영토를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폴란드는 죽으면 죽었지 소련군에게 영토 통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기 때문에, 루마니아로부터 영토 통과 허용을 약속받았다.

이때 영국, 프랑스는 소련과 처음으로 접촉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을 크게 신뢰하지 않아 이들이 선택한 건 독일과의 화평이었고, 그 결과가 바로 뮌헨 협정. 일명 서구의 배신이었다.

4 1939년 위기와 서방-소련의 접촉

4.1 소련과 영프의 동상이몽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를 강점한 이후에도 야욕을 버리지 않고 폴란드에게 폴란드 회랑을 요구하면서 유럽에는 다시 전운이 고조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동맹국이 사라진 이상,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에 직접적인 병력 지원이 가능한 새로운 동맹국이 절실히 필요했다. 바로 소련이었고, 여기서 소련과 서방국가는 다시 접촉했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서 간접적으로 싸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은 절박해 있었다. 1938년과 달리 이번엔 양측은 상당히 진지하게 접촉하며 의견을 주고 받았다. 최우선적으로 독일의 팽창 저지와 제압을 목표로 하는데에는 양측의 의견이 동일했다.

1939년 4월 17일, 막심 리트비노프는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되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외무장관이 되었다. 몰로토프는 '발트해-지중해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 세 열강이 모두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동맹 관계를 제안하는 내용을 적은 문서를 영국, 프랑스에 전달했다.

그러나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우선 회담 시작 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문서를 전달받은 지 6주가 지나서야 영국에서 답신이 왔으며, 그나마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초조해진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프-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어서야 영국, 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가 아니라 여객선 '시티오브엑스터(City of Exeter)' 호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입항하여 소련 측에 저 새끼들 놀러왔냐? 같은 나쁜 인상을 심어 주고 말았다.

8월 12일이 되어 모스크바에서 겨우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회담에 참가한 협상단도 문제였다.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다.[3]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프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반면 영-프 협상단장의 자격은 소련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사령관 조제프 두망크(Joseph Doumenc) 장군이었는데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상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나[4]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영국은 한 술 더 떴다. 영국 협상단장 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5]은 일개 함장 출신인 데다 영국 정부에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협상 권한이 없었다. 자국의 거물들을 협상단으로 때려박은 소련에서는 영-프의 진위를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

소련 협상단은 매우 당황하고 불쾌해했으나 계속 협상을 이어나갔다. 곧이어 소련은 소련군이 독일로 진군할 수 있도록 동유럽 국가, 특히 폴란드 제2공화국(당시 영-프와 동맹국)이 길을 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협약을 양국 정부와 맺었는가를 질문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폴란드가 '때려죽여도 소련의 도움은 안 받겠다!'는 초강경 자세를 굽히지 않는 게 문제였다. 냉전 당시 같은 동구권 국가였으며 민족 구성도 슬라브족으로 비슷한 면 때문에 가끔 오해하지만 폴란드와 러시아이란-이라크 관계[6]으로 아주 사이가 좋지 않으며 그 역사도 아주 유구하다.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가혹한 통치를 받았는데, 폴란드가 3국에게 분할 통치를 받는 동안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비교해서 러시아는 그야말로 엄청난 탄압을 가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국내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 폴란드에서 먼저 공격해서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7] 1919년-1921년 소련과 전쟁을 치른 경험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는 벨라루스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을 차지했는데, 일단 소련이 폴란드를 지원하면 폴란드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건 당연지사고 심하면 일전에 얻은 동부 영토까지 그대로 떼어먹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폴란드의 주요 외교적 노선은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의 중립 추구였다. 이 상황에서 소련과의 일방적인 동맹은 독일의 어그로를 끌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래서 폴란드는 결국 독소 불가침 조약이 성립될 때까지 소련군의 자국 영내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고 이것은 영-프-소의 회담이 결렬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약소 민족의 전형으로 2차 대전 때 독소 양국에 의해 커다란 박해를 당했기 때문에 식민지 시절의 조선에 감정이입이 된 나머지 일부에선 폴란드를 동정하곤 하나, 이 당시 폴란드는 오히려 주변국에 대해 끊임없는 마찰을 일으키는 불량국가였다. 폴란드는 독립하자마자 영토 욕심을 부려 막장화된 옛 러시아 영토(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일으키켜 우크라이나의 반을 먹기도 했고, 발트 3국을 집어삼키려고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하기도 했으며, 뮌헨 협정 때는 히틀러에 맞장구쳐 체코 분할에도 참가했다. 특히 당시 폴란드 사회는 민주국가가 아니라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사후 그 부하들(일명 대령단(colonels)이란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군사 독재, 군국주의 사회로서, 자국의 국력도 생각하지 않고 동서 양쪽의 강적들에게 계속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즉, 폴란드 지도부는 소련은 소-폴 전쟁 때 한번 승리한 바 있으니 자신 있고, 독일군은 재군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전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도와주겠다고 나선 소련의 손을 거절한 이유에는 민족적 악연도 있지만, 저렇게 자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군과 소련군은 국력의 한계로 제대로 기계화되지 못한 폴란드 군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처럼 당사자가 소련의 지원을 거부하겠다니 소련이 폴란드를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이 시점에서 소련이 서방을 의심하는 결정적인 일이 발생했다.

전쟁이 발발할 시 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치에 관해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8] 중포 5천여 문, 전차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천여 대를 파병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영국 협상단은 16개 사단이라고 밝혀 보로실로프가 통역 잘못한 것 아님?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황당한 소련이 세부 사항을 캐묻자 영국은 사실은 단 4개 사단만이 전투 가능하다고 실토했다. 회담 종료 후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묻자, 사실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좀 더 뒤에야 완편된다는 것이었다. 이뭐병... [9][10]

이런 어처구니없는 답변이 돌아오자 소련은 멘탈붕괴한 나머지 할 말을 잃었고, 영국이 의도적으로 소련과 독일의 전쟁을 부추기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이는 곧 서방에 대한 강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4.2 소련의 입장

소련의 이러한 의심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직후 서방 세계는 직접 군대를 파병하여 적백내전에 개입해 사회주의 정권을 붕괴시키려다가 실패한 전례가 있었다. 즉, 소련으로선 서방 세계가 독일, 일본 제국 같은 전체주의 국가와 소련의 전쟁을 유발하여 양측을 모두 공멸시키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3월 10일에 있었던 공산당 대회 선언문에서 스탈린은 다가올 전쟁을 제국주의자들끼리의 전쟁이라고 부른 점에서 이런 의심을 느낄 수 있다.

당장 이 수치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첫 대륙 원정군 규모인 4개 사단에도 못 미치는 소규모 병력만 즉시 투입 가능한 데 반해 전쟁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고 보였으므로, 소련 입장에선 영국인들이 제대로 싸울 의지 자체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11] 실제로 영국은 이미 1938년 후반부터 방위 산업 생산 규모를 대폭 확장하기 시작한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인들은 실제로 영국군이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직 지상군보다는 공군, 그리고 공군보다는 동맹국들이 싸우는 데 필요한 금융 자본의 확보에 더 열심인 상황이었다.[12]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도 독일과의 전쟁이 다시 벌어지면 참호전이 될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동(폴란드)서(프랑스)로 각각 100만의 대병력[13]을 면전에 둔 독일군은 적어도 한동안은 지체될 것이나, 혹은 영국 육군의 개입 없이도 이 두 국가의 전력만으로도 독일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1차 대전 때도 영국 육군은 초반 2년간 매우 소극적으로 임했고,[14]이는 대륙의 전쟁에 개입하는 영국의 전통이기는 하지만, 당장 미치광이 히틀러와 독일군의 총칼에 맞설 수 있는 소련이 "돈 대 줄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좀만 참으셈.."이라는 태도를 좋게 봤을 리는 만무하다.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

요약하면 영국은 나름대로 스스로 대륙 전쟁에 개입할 때의 전통을 따랐지만, 타국이 보기에 이는 설득력이 부족한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확실한 전쟁 준비보다는 금융 자본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는 영국 측의 태도는 당장 나치와 총칼을 맞댈 수도 있는 소련에게는 "이 새끼들 같이 싸울 생각은 안 하고 돈벌이만 급급해?"라는 커다란 의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영국의 금융 자본은 1차 대전 때도 프랑스에 전쟁 자금으로 각국에 엄청난 차관을 빌려주었고, 패전국인 독일에 전쟁 배상금을 탕감해주면서도, 정작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에는 그런 혜택 없이 받을것을 전부 받아가서 커다란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반영 감정이 고조된 바 있었다.근데 빌려준 걸 안 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기는 하다 [15]영국이 육전에 대한 대비보다는 전쟁에 필요한 자본을 확충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던 것은 대륙 국가들이 당분간은 어떻게든 독일을 막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이는 엄청난 오판이었다.[16] 소련 입장에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사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문제로 전쟁이 시작되면, 군병력 동원이 오래 걸리는 자신들을 대신해서 소련과 폴란드가 힘을 합쳐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쯤 독일군을 동부에 붙들어 주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소련은 그런 장기 지연전의 결과로 소련군만 피를 흘리고 마는 게 아닌가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독일과 소련이 다같이 기진맥진해 있을 때 영불이 기습 공격으로 두 나라를 동시에 무너뜨리는 것조차 가능해 보였다. 매사에 의심 많은 스탈린으로서는 그런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 러시아 제국 시절 때부터 영국과 수십 년 동안 적대적인 관계[17]였기 때문에 소련의 그런 의심은 충분히 타당했다. 적어도 스탈린에게는 타당해 보였다.

게다가 상술했듯 1939년 다자 안보 체제 구축 회담 당시 영국-프랑스의 대표단은 소련 측 대표단에 비해 격이 많이 낮은 인물로 구성되어 있었고, 영국 협상단은 국가 원수를 대신해 협상에 서명할 권한조차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독일과의 전쟁 발발 시 유럽 본토에 투입 가능한 병력을 4개 사단이라고 실토해 버리는, 소련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에 믿음이 더더욱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4.3 영국의 입장

그러나 반대로 보면 단순히 스탈린이 계산하기에,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게 더 도움이 되어서 혹은 단순한 오판, 확증편향적 오류에 근거한 판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영국이 육전을 피하려고 한 것은 이기적이긴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이기적이지 않은 국가는 없다. 프랑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영국도 1차 대전때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으며,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나는 육상전에는 될 수 있으면 참전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18] 이는 1차 대전때 젊은이의 1/3이 전사한 프랑스가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국방예산의 절반 가까이를 쏟아부어 알자스-로렌 국경에 마지노 요새를 건설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치당이나 나폴레옹과 같이 갑자기 팽창하는 강대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동맹을 맺은 것이지 애호와 우정의 감정으로 친교를 맺은 것이 아니다. 차관을 빌려 주면 다른 꿍꿍이가 없는 이상은 이자까지 쳐서 갚게 만든다. 물론 프랑스가 가장 많이 피를 흘려서 영국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프랑스가 영국을 위해 피를 흘린 것은 아니다. 독일이 승천하기 이전에는 서로 물어뜯던 사이였으며 그런 차관의 가장 피해자인 프랑스조차도 영국과 동맹을 맺은 것은 필요에 따라서 동맹을 맺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러한 이유로 영국이 싫어서 동맹을 못 맺었더라면 프랑스부터가 영국과 동맹을 맺지 않았다. 독일 차관의 경우 미국이 개입하기도 헀다는 점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소련 수뇌부도 국제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어느 나라가 이기적이지 않은 아름다운 마음을 품고 정성을 다하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랑 편을 먹어야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가느냐다. 그리고 구태여 영국을 빼더라도 프랑스군이 있었으며, 정말로 영국이 섬나라의 이기적인 습관 때문에 그렇게 일이 돌아갔었던 것이라면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기 때부터 영국에게 학을 떼고 협력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던 이유는 프랑스가 무리하게 공세로 나서다가 개박살 것도 있으며 영국 입장에서는 삼국 협상을 맺긴 하였지만 협상 내용상 반드시 영국이 참전했어야 할 의무는 없었는데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했기 때문에 개전한 것으로, 당시 영국 입장에서는 당장 징병제로 전환한들 보급할 장비가 모자라 괜히 인명과 자원을 낭비하게 될 뿐이었다. 그리고 차관을 모은다고 하지만 금융 자산은 전쟁에 매우 중요하며 지리학적인 특성에 따라서 다른 전략을 취하는 것은 상식 중에 상식이다. 억울하겠지만 그게 국제 사회이며 독일을 못 막았을 때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피를 보는 것은 인접국인 프랑스지 영국이 아니다. 또한 영국이 피를 안 흘렸냐고 한다면 영국은 결국 병력을 모아서 대륙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나폴레옹 시대든 세계 대전이든 말이다. 애초에 영국은 금융 자산을 지키기 위해 폴란드의 차관 요청도 거절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련이 영국과 프랑스와 접촉한 이유는 극단적인 반공 국가인 나치 독일을 견제해야 하는데 자신만 싸운다면 두들겨 맞고 엄청난 피를 흘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즉 소련도 영국과 프랑스, 폴란드가 대신 싸워 주길 원하는 것이지 영국, 프랑스, 폴란드가 소련을 믿고 따라준다면 앞서 나서서 파시스트를 분쇄하고 세계 평화를 되찾아보겠다가 아니다. "저 놈들이 내가 싸우는 동안 뒤통수를 쳐서 죄다 가로챌 속셈이다"라는 식의 의심은 어느 동맹국 사이에서도 일상적으로 있어 왔던 상황이다.

특히 서방 군대가 적백내전에 개입했기 때문에 소련이 위협을 느꼈다고 하는데 당시 소련은 최근까지도 세계 혁명을 운운하던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 와중에 동맹국인 제정 러시아의 수뇌부를 갈아 버린 소련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지 않는 게 말이 안된다. 오히려 안 보냈으면 신의 없는 서방 동맹을 운운할 만한 일 아닌가. 동시에 폴란드의 불안은 대국적이지 못한 것처럼 묘사하는데 그 폴란드는 물론 소련에게 선빵을 치기도 했지만 러시아에게 수백 년 간 쥐어짜인 기억이 있는 국가였다.

둘째로 몇 개 사단이나 당장 동원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영국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게 현실이며 전통적인 해상 국가였던 영국이 소련이 보기에 비교적 흡족할 만큼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쪽이 더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애초에 영국은 1936년도부터 재무장을 시작해서 재무장 시작일로부터 3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비대한 해군의 유지비에 막대한 재정이 소모되고 섬나라라는 특성상 육군이 예상 배정에 우선순위가 되는 것이 더 이상하다. 또한 당시는 1939년, 아직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시기로서 영국과 프랑스가 경제적으로 편했던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결국 그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소련에게 들이밀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는 적백내전에서 영국-프랑스와 악연이 있던 소련의 의심과 겹쳐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19]

여기에 대해 추가적인 자세한 내용은 "필사적인 포옹 : 독·소 불가침 조약 (1939·08·23)과 소련 측의 동기분석"을 중심으로 수정주의적 해석으로는 Geoffrey Roberts의 논문을, 전통주의적 해석은 The Deadly Embrace: Hitler, Stalin and the Nazi-Soviet Pact라는 책을 보기를 권한다.

5 소련의 정책 변화와 독일의 접근, 그리고 조약 체결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 태도를 보고는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을 생각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되면 이들이 독일과 소련을 싸우게 하고 뒤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 의심은 상당히 그럴듯 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인들도 정말 그런 이이제이를 바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영국과 프랑스의 분위기는 그곳에 산재한 소련 간첩망에 의해 스탈린에게 보고되었고, 의심 많은 스탈린은 결국 영불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9년 5월 영/프/소와 집단 안보 체제를 주장하던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장관을 해임하고 심복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외무장관에 앉혔다. 그러나 리트비노프의 해임은 독일에 우호적인 제스쳐가 아니었으며 5월 이후에도 소련은 독일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날수록 연합국과의 회담은 진전이 없었다. 1939년 8월 20일부로 영-프와의 회담은 허무하게 종료되었다.

이때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

독일 또한 지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선을 마구 넓혀서 패배한 이후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며 아울러 소련과 서방 세계가 접촉하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실제 참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만약에 대비하며 동부에서의 세력균형을 위해 소련을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20] 독일은 소련에게 추파를 보내기 시작했다.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21]을 제안했다.

소련으로서는 구미가 매우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서방놈들과 함께 자기들 도움은 죽어도 싫다는 폴란드를 돕느니, 세력권을 나눠서 서로 맛있게 잘 먹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독일의 제안이 훨씬 당근이었다. 8월 17일 소련은 독일과의 회담에 동의했고, 8월 19일 양국은 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경제 협정 체결 후 며칠 뒤인 8월 20일,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 귀하

1939년 8월 20일

1. 본인은 독일과 소련의 관계 개선을 위한 디딤돌인 새로운 독소 무역 협정의 서명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2.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의 체결은 장기적인 독일 정책임을 의미한다.
3. 귀측의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전달한 불가침조약을 수락하지만 이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들을 가장 신속히 설명하고자 한다.
4. 독일과 폴란드 간의 갈등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 폴란드의 대국에 대한 무례한 행위는 언제라도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5. 양국이 함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의도가 있다면 빨리 서둘러야 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귀하가 나의 외무장관을 8월 22일(화), 혹은 늦어도 8월 23일(수)에 맞이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귀하의 즉각적인 회신을 요망한다.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은 이 전보를 받고 매우 기뻐하며 다음날 답신을 보냈다.

히틀러 총통 귀하

1939년 8월 21일

귀하의 서한에 감사한다. 나는 독일과 소련간의 불가침 협정을 계기로 양국 간의 정치적 관계가 개선되었으면 한다. 양국의 국민들은 평화로운 관계가 필요하다. 독일 정부가 불가침 조약에 합의키로 한 사실은 정치적 갈등의 제거와 양국 간의 평화와 협력을 구축할 계기가 될 것이다. 소련정부는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의 8월 23일 모스크바 방문에 동의하는 것을 귀하께 알린다.[22]

이어 스탈린은 답신을 보낸 8월 21일 외무라인에 영프와의 군사협상을 중단시키고 독일과의 협상준비를 하도록 한다.

8월 23일 히틀러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당시 모스크바 공항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리벤트로프는 허겁지겁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몰로토프의 영접을 받으며 공항에서 점심을 먹은 후 바로 클레믈린으로 갔다. 크레믈린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한 스탈린이 직접 외교단을 맞이했다. 사실 의전에서 일개 외무장관을 최고권력자가 맞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좀더 환영 제스처를 보였다면, 바지사장이었던 소련 국가원수 칼리닌이 영접했겠지만, 당시 전쟁이 임박했음은 유럽인이라면 누구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최고권력자였던 스탈린이 격식에 상관없이 바로 나와 일개 외무장관을 맞이한 것이다.

이때 스탈린이 한 말은 이렇다.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 앞으로 2년 뒤에 또 할 텐데 뭐..

- 이오시프 스탈린,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며[23]

원래는 양국의 외무장관인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협상을 해야했으나, 실제로는 스탈린이 여기에 동석해서 사실상 스탈린이 리벤트로프와 교섭하게 되었다. 협상은 리벤트로프가 도착한 8월 23일 오후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으나, 의외로 양 독재국가는 아귀가 잘맞아서 여러 현안에 대해 쉽게 합의했다. 스탈린과 리벤트로프는 협상이 의외로 술술 풀리자 점점 의기가 투합하여 나중에는 서로 극단적인 농담까지 주고받았을 정도였다. [24] 실제로 리벤트로프는 스탈린에게 1936년의 독이일의 3국협정은 겉으로는 소련을 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영-프-미가 주도하는 서방질서를 흔들기 위한 것이라고 협상 시간 내내 계속 주지시켰으며, 이는 영프에게 의심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던 스탈린의 입을 귀까지 찢어지게 만들만큼 기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영프와의 협상은 질질 끌어서 1년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렇게 소련-나치독일은 단 하루만에 유럽의 운명을 결정할 모든 현안에 대해 합의하고 다음날인 24일 모든 항목에 대한 합의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아래 그림과 같이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600px-MolotovRibbentropStalin.jpg
크렘린에서 조약에 서명하는 몰로토프. 몰로토프 바로 뒤에 있는 사람이 리벤트로프이다.졸려 보인다 그리고 그 오른쪽이 강철의 대원수. 리벤트로프의 왼쪽 군복 입은 사람이 당시 소련군 총참모장이었던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위에서 지켜보는게 레닌이다 눈빛이 저 병신들 뭐하냐고 하는듯한 눈빛이다

스탈린은 조약 체결후 환영 만찬에서 리벤트로프에게 "히틀러 총통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이 협약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맹세했고, 리벤트로프도 이 조약에 대해 끝까지 충실하겠다고 다짐해했다. [25]

6 결과

공개된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일과 소련은 10년 기한의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양국은 경제협력을 통한 상호이익의 증진을 도모한다.

그러나 언론에 공개된 위의 내용은 껍데기에 불과했고, 공개되지 않은 아래 부분이 이 조약의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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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협정에 의한 국경선, 오른쪽은 실제로 분할된 국경선.

이 조약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과 소련은 공동작전으로 폴란드를 분할했으며, 이후 독일의 묵인 아래 소련의 압력을 받은 루마니아는 베사라비아를 소련에 할양했다. 발트 3국은 소련의 협박에 모조리 소련에게 넘어갔는데, 이때 독일은 약속받은 리투아니아를 포기하는 대신 폴란드에서 합의된 것 이상의 영토를 차지했다.

이 조약에서 합의된 분할 대상 중 핀란드는 통째로 소련에 넘어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겨울전쟁에서 침공해 온 소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선전하였다. 결국에는 국력의 격차를 넘지 못하고 패배해서 영토의 11% 정도(산업능력의 30%)를 소련에게 넘겨주게 됐지만, 이웃하는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물자 지원도 이전에는 소련에서 일방적으로 퍼준 것으로 취급했지만 현재 연구로는 소련에서 독일로 간것 만큼 독일에서 난방용 석탄(연간 300만톤), 최신 기계류(엔지니어 파견 포함), 발전설비, 방산 기술(비스마르크급 전함 설계도 등)이 넘어가면서 일방적인 흑자는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동부전선을 안정시킨 독일은 프랑스를 항복시켰고 최전성기를 달리게 되었다. 소련도 동유럽에서 확보한 지역을 발판으로 세력을 크게 키웠으며, 독일과 함께 세계구도 차원에서의 세력분할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은 마침내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련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소련을 기습 공격한다. 독소전쟁의 시작이었다.

7 관련 어록

歐洲天地 複雜怪奇 (유럽 천지가 복잡하고 괴기하다.)

- 히라누마 기이치로

"독-이-일 반공 협정은 사실 소련이 아니라 영미를 겨냥한 것입니다. 스탈린 수상께서도 이 반공 협정에 가입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농담, 협정 후 만찬장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오늘 부로 나도 반공주의자요."

- 스탈린의 농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회상록에서.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 앞으로 2년 뒤에 또 실컷 할 텐데 뭐..

- 스탈린,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며[26]

  1. 이때 게오르기 주코프에리히 폰 만슈타인 등의 미래의 각군 원수들이 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2. 특히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치하 폴란드는 주변국에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3. 스탈린의 최측근을 협상단장으로 임명한 데서 소련이 이 협상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협상 자리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 등 소련군 고위 사령관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4. 이전 버전에는 영-프 대표단 모두 협상 서명권을 지니지 못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두망크 장군은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5. 본명은 레지널드 에일머 랜펄리 플렁켓-언리-얼-드락스(Reginald Aylmer Ranfurly Plunkett-Ernle-Erle-Drax, 1880-1967). 조지 6세 직속 해군 장교였다. 최종 계급은 해군 대장.
  6. 한국식으로 설명하자면 미국이 한국한테 (어디까지나 예시이다!)"북한 때려잡고 싶은데 일본자위대가 지원격으로 한반도 지나가도됨?" 이라 묻으면 한국의 반응은 어떻겠는가?
  7. 이 이전부터 소련과 폴란드 사이에 소규모 충돌은 있었으나 본격적인 침공은 폴란드가 먼저 시작했다.
  8. 실제로 소련은 독소전쟁 때 수백 개의 사단을 동원했으니 소련의 호언장담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독일 국방군은 독소전쟁을 개시할 당시 소련군이 유럽 전선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180개 사단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180개 사단을 모조리 전멸시킨 독일군 앞에는 소련군 360개 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9. 이전 버젼에는 섬나라인 영국이 대규모 육군을 대륙에 파견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말이 안된다고 써있었지만, 1차대전때 대륙에 파견된 영국군 사단만 해도 80여개에 달했었기 때문에, 16개, 4개, 2개 운운하는건 영국이 독일의 확장 야욕을 진심으로 억누르고자 하는지 그 진정성이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영국은 실제로 전간기에 상당히 군비감축을 했기 때문에 능력이 1차대전때보다 매우 줄어들어 있던게 사실이다.
  10.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다면 영어 위키백과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협상 과정 문서를 참조하면 좋다.
  11. 뒷날 독소전쟁 당시 소련에는 하루에 민간인 1만 5천명, 군인 7,000명 이상으로 합계 2만 2000명 이상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전쟁 끝날 때까지 매일 매일. 즉 한두 사단 병력규모, 작은 도시 하나 정도의 사람들이 매일 증발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영국군 4개 사단 따위는 3~4일이면 소멸한다는 이야기니...
  12. 이는 대륙 전쟁에 말려들 때 영국의 관습적인 대응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도, 1차 세계 대전 때도 시작은 똑같았다. 대륙에서 전쟁이 악화되더라도 본진은 털릴 일이 잘 없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자본을 확보하는 데 우선적으로 신경을 썼던 것. 그뿐만 아니라 해군에 집중하는 섬나라의 특성상 영국 육군의 규모는 다른 대륙국에 비해서 규모가 작았던 만큼 대규모 병력을 확보할 시간도 필요하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과 1차 대전 모두 영국은 결국은 대규모의 육군을 투입해서 싸웠다.
  13. 여기에 유사시 연합국을 도울 수 있는 소련군 500만이 플러스 요인이다.
  14. 대전 발발 2년 후까지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였다. 그동안 독일 서부군의 주공은 모두 프랑스군이 막아냈고, 프랑스가 엄청난 손실을 봤다.
  15. 요컨대 벌금은 탕감해줄 수 있지만, 빛은 탕감해줄 수 없다는 논리인데, 국가간 채무관계는 물론 중요하지만, 제1차 대전에서 프랑스가 탱커역을 하면서 독일 서부군의 주공을 막아내는 것을 감안하면 프랑스 국민으로서는 분노할만 하다.
  16. 물론 대륙 국가들이 독일과 전쟁을 하게 되는 동안 돈놀이를 해 보겠다는 불순한 의도도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기는 하다.
  17. 1850년대 크림 전쟁부터 쭉 적대 관계. 1900년대 초에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때도 진영 이름이 동맹이 아닌 협상이었다. 다시 말해 오월동주. 삼국협상국 가운데 오직 동맹 관계는 러시아-프랑스뿐이었다.
  18. 이런 점은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아프가니스탄에서 육군은 철군하면서 무인기 작전만 줄기차기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이다.
  19.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영국-프랑스가 좀더 성의의 제스처를 보였더라면, 나치와 대결할까 봐 절박했던 소련이 독일 측에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래저래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에 성의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폴란드를 더 믿고 있었으며, 동맹 체결에도 건성이었다.
  20. 그 당시 히틀러는 폴란드와의 전쟁을 하기로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으며, 폴란드군 자체는 몰라도 소련이 폴란드를 돕는다면 전쟁을 첫판부터 완전히 그르칠 여지가 있었다.
  21.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를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으며, 스탈린은 리벤트로프를 만날 때 어린애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22. 두 전보의 출처는 이 글이다.
  23.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77
  24. 리벤트로프가 스탈린에게 "독이일 반공협정에 소련도 가입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스탈린이 이에 "오늘부터 나도 반공주의자요"라고 화답한게 바로 이때 나왔다. 히틀러 집권이래 독소양국간의 관계를 본다면, 이런 농담은 마치 사우디왕이 교황에게 "교황 성하도 이슬람교 신자가 되는게 어떻습니까?" 말하자 교황이 "오늘부터 나도 무슬림이요"라고 대답한 것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으로, 리벤트로프가 가져온 보따리가 스탈린에게 그만큼 크게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5.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리벤트로프는 독소전쟁개전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개전 후 소련 외교관들에게 "나는 이 전쟁에 반대했다고 스탈린 각하께 전해주시오"라고 변명하듯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전쟁 내내 소련과의 강화를 모색했다.
  26.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