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토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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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etoriani (Praetorian Guard)

1 개요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 제국의 황제를 호위하는 최측근 친위대로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존속한 제국의 엘리트 부대를 의미한다. 다만, 그 용어 자체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활동할 때부터 로마군 장군들의 직속 호위부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2 역사

2.1 기원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는 프라이토리움, 즉 군의 지휘관들이 사용하는 지휘용 막사에서 유래한 단어로, 속주 총독을 맡을 수 있었던 법무관(프라이토르) 수준의 군지휘관을 측근에서 호위하는 병사들을 뜻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공식적인 황제 직속의 무력집단으로 편제하기 전에도 로마의 이름난 장군들은 특별히 선발한 병사들 내지는 신임하는 정예부대를 이러한 직속부대로 활용하곤 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친위대라고 거명하고, 게르만 족장 아리오비스투스와의 회담에 호위대로 대동했던 제10 에케스트리스 군단[1]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2.2 창설

오랜 내전을 끝내고 로마의 절대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자신이 직접 제어할 수 있는 직속 무력집단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9개 대대로 편제되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최초로 편성하게 되는데, 초기에 각 대대의 병력은 500명 정도였지만, 이내 두 배에 달하는 1000명으로 증강되었다. 여기에 각 대대별로 약 30기 정도의 기병이 배속되어 1만명이 조금 못되는 규모였다. 구성원은 모두 로마 내지는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즉 창설 당시부터 프라이토리아니는 본국 출신들로만 구성된 엘리트 부대를 지향했던 셈이다.

비록 이렇게 친위부대를 편성하기는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일단 카이사르 이래로 사실상 빈사상태에 빠져있던 공화정을 부활시켰다는 형식을 취하면서 권력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 직속의 무력집단이 시민들과 원로원에 필요 이상으로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창설 초기에 근위대는 3분의 1에 해당되는 3개 대대 1500명에서 3000명 정도가 로마 시내에 상주했고, 나머지는 로마 근교에 배치되었다. 그 임무 또한 황제의 궁전과 주요 시설들을 순찰하거나 요인들을 경호하는데 그쳤다.

2.3 정치군인

예니체리의 대선배인지 알 수 있는 항목
그러나 로마 제국 최고의 권력자의 직속부대이자 제국의 본국인 이탈리아 내 유일한 무력집단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특권에 프라이토리아니가 속된 말로 맛을 들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온건한 지도자 이미지로 치세 대부분을 일관했던 아우구스투스 시절에는 이런 경향이 최대한 억제되었지만, 아우구스투스에 비해 로마 시민과 원로원을 배려하는 정치 감각이 부족했던 냉혈한 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하면서부터 프라이토리아니는 점차 로마 정계에 일정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원로원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황제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원로원과 잠재적 정적들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게 되는데, 이때 티베리우스의 최측근이자 모사꾼이던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활약이 대단했다. 세야누스의 지휘하에서 프라이토리아니는 일종의 비밀경찰 내지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친위대로 활동하게 되는데, 로마 시에 근위대가 상주하는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근위대 기지)를 건설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1만 명에 가까운 황제 직속군이 눈에 띄는 형태로 로마 시내를 활보하는 상황에서 원로원을 비롯한 황제 주위의 정치세력들이 느꼈을 위압감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티베리우스의 정책은 황제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당장 티베리우스가 아들 드루수스가 죽은 뒤 황권을 목표로 정치적 야심을 키워나가던 세야누스를 숙청할 당시에도 세야누스의 심복으로 변질된 프라이토리아니의 움직임을 티베리우스 자신이 경계할 정도였고, 티베리우스 이후에는 칼리굴라의 암살과 클라우디우스의 옹립을 시작으로 황권에 프라이토리아니가 간섭하는 빈도가 갈수록 커지게 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 이후 오현제 시대까지는 황제들이 워낙 유능했거나, 아니면 근위대 자체가 쉴새없이 전선에서 활약해야 했기 때문에 이런 정치군인적 모습이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지만[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콤모두스를 시작으로 황제들 대부분의 죽음과 등극에 프라이토리아니가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가 된다. 친위세력이라고는 하는데, 오히려 그 '친위세력' 때문에 제명에 못 죽은 황제가 그렇지 않은 황제보다 많을 정도니 말 다한 셈.

근위대장을 2인 공동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던 사례라든지, 차기 황제가 될 아들 티투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했던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이 이끌던 판노니아 군단의 정예병들로 프라이토리아니를 물갈이해버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예 프라이토리아니 자체를 폐지해버린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치도 이런 정치세력으로서의 프라이토리아니가 가지고 있던 위험성을 경계한 시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전장에서의 프라이토리아니

하지만 어쨌든 프라이토리아니의 본분은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로마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했던 황제를 호위하는 엘리트 부대였던만큼, 이들은 전장에서도 적지 않게 활약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에는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간 적이 거의 없어 별다른 활동 기록이 없지만 서기 14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직후, 티베리우스가 판노니아 일대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군단들을 선무하기 위해 아들 드루수스를 보낼 당시, 프라이토리아니 2개 대대와 게르만 기병들이 드루수스를 호위했다는 것을 시작으로, 오토 황제가 직접 출전했던 베드리아쿰 전투나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황제가 전선에 나설 경우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군의 최정예 전력으로 활약했고, 그 지휘관인 근위대장들 또한 전선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도미티아누스 시절 다키아 족과의 전쟁에서 근위대장 푸스쿠스가 지휘를 맡았다가 전사하는 등, 프라이토리아니가 겪은 손실 또한 만만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정치적 격변기에도,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를 암살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는 데에도 열심이었지만(....), 황제를 따라 광대한 전선을 누비며 꾸준히 활약했다.

2.5 쇠락과 폐지

그러나 제국군의 최정예 엘리트 부대라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위상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등장과 함께 쇠락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자신부터 요비아니(제우스)와 헤르쿨리아니(헤라클레스)라는 황제 호위부대를 새로 편성하는 등, 프라이토리아니를 멀리했고,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소위 4두 정치(테트라키)를 실시하면서 황제들이 각 전선에 상주하면서 그 전선들에 배치된 군대를 직속부대로 거느리게 되자, 이탈리아와 로마 방위가 주된 임무가 된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 직속부대라는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제국 최고의 정예부대라는 명성도 옛말이 되었다.

수많은 황제들을 갈아치우거나 살해해온 프라이토리아니의 마지막 정치적 행동은, 서기 306년에 막센티우스 황제를 옹립하고 세베루스 황제를 살해한 것이었다. 이후 6년간 프라이토리아니는 막센티우스 황제 치세하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처단하고 로마로 입성하면서 그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3]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에 있던 근위대 기지를 철거하고, 프라이토리아니를 폐지한다. 근위대장(praefectus praetorio)이라는 칭호는 여전히 존속했지만, 이는 황제의 최측근 비서실장 내지는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재상을 뜻하는 정치적인 용어였고, 군사권은 박탈되었다.

다만 그래도, 콘스탄티누스는 살아남은 프라이토리아니들의 경우, 비록 그에게 적대하긴 했지만 끝까지 용감하게 싸운 모습엔 크게 감동하여 목숨만은 살려주었고, 게르마니아 방면 국경으로 이동 배치해서 현지 리미타네이로서 먹고 살게 해주었다. 이들은 이후 그곳 지역에서 크게 용맹을 과시했다고 한다. 한편 어찌어찌 남은 일부가 콘스탄티누스의 새로 창설한 근위대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의 기간병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정황은 있으나, 이는 리미타네이로 활약한 기록이 분명히 있는 전자와는 달리 확고한 근거는 없어 혹시 그랬을지 모른다는 정도의 추측만 할 뿐이다.

3 편제와 규모

최초 창설 당시 프라이토리아니는 보병 9개 대대와 각 대대에 약 30기 정도로 편성되는 소규모의 기병대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각 대대 병력은 초기에는 500명, 이후 대부분의 기간 중에는 1000명으로 편성되었지만, 때로는 1500명까지 증강될 때도 있었다.

대대의 숫자도 부침을 반복해서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47년에는 12개 대대까지 증강된 적이 있었고, 비텔리우스 황제는 아예 16개 대대까지 증강한 적이 있다. 물론 비텔리우스 사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하면서 프리아토리아니는 다시 9개 대대로 감축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프라이토리아니 보병은 로마 내지는 이탈리아 반도 출신으로 충당하는 것이 대체적인 관례였지만, 비텔리우스 시절에는 황제 자신이 신임하던 라인 강 전선의 군단에서 병사들을 끌어와 새로운 프라이토리아니를 편성한 적이 있고, 세베루스 황제는 아예 프라이토리아니를 판노니아 군단에서 선발한 정예병으로 물갈이해버린 적이 있다. 사실 세베루스의 경우는 이전 프라이토리아니의 부대 깃발을 모독하는 공식 행사까지 로마에서 버젓이 거행하여 모욕감을 느낀 그 전 프라이토리아니 대원 일부가 자살할 정도였고, 해당 부대원들은 전원 강제 제대당해서 세베루스 이후의 프라이토리아니는 그 전 프라이토리아니와는 직제에서든 인원에서든 전혀 연결 고리가 없다.

다만 의외로, 세베루스 당시의 프라이토리아니는 세베루스가 군단장으로 있던 게르마니아 군단 군인들로 구성되었으나 이후로는 이탈리아 본국 출신들이 점점 많아지더니 결국, 적어도 3세기의 위기 중엔 다시 이탈리아인들로만 구성된 부대로 회귀했다. 의도적으로 한 조치는 아니었고, 부대가 로마에 주둔하다보니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젊은이들을 뽑아 채우게 된 게 필연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때문에 막센티우스 시절의 프라이토리아니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인들의 부대가 되어 있었다.

기병 전력의 경우, 이들은 황제 경호 기병대(Equites singulares Augusti)로 따로 분류되었는데 기병은 양성 자체가 어려우니만큼 딱히 출신 지역을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각지의 이민족들로부터 특별히 선발한 정예기병 720기로 근위기병대를 크게 증강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에는 약 1000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이를 다시 2000기까지 증강했으며, 이 부대의 지휘관은 통상 9개 대대로 편제되는 프라이토리아니의 10번째 대대장, 즉 대대장 대우를 받았다.

황제 직속부대인만큼 대우도 특별했다. 봉급도 일반 군단병보다 많이 받았고, 정기적으로 보너스도 받았으며, 복무기간도 짧았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는 군의 최고 행사라고 할 수 있는 개선식도 정식 개선식은 황제가 독점하게 되면서, 이들은 의장대 역할도 수행해야 했으니, 장비나 복장도 화려했다. 여담이지만 영화에서는 1950년대 헐리우드 기독교 대작 사극 영화에서부터 검은색 '로리카 세그멘타타에' 갑옷을 입고 검은 망토를 두르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종의 클리셰로 작용했으며, 2000년대 작품인 《글래디에이터》,2014년 작.폼페이 최후의 날에서도 이 클리셰가 유지되었다. 검은색 갑옷 클리셰를 슈츠슈타펠의 검은 제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1867년에 그려진 그림에도 프라이토리아니가 검은색 갑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나름 역사가 오래된 클리셰다.

실제로는 수도에서 황제를 경호하는 업무 중에는 토가 차림의 평상복으로 근무했다. 요즘 경호원들이 정장 차림을 하는것과 비슷하다. 갑주는 전투시에만 착용했다. 최근에 발매된 '라이즈 선 오브 로마'라는 성인용 액션게임에서는 군단병과 비슷하지만 보라색 갑주에 동방 제국처럼 얼굴가리개를 내린 투구를 쓴 근위병들이 등장한다. 실제로 보면 군단병보다는 더 멋있다. 토탈워 시리즈에도 갑주가 다른 로마군 유닛보다 더 멋있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보여준 검은색 갑옷과 아티카식 투구를 쓰고 있는 로마 근위병과 비교해보면 어느 쪽이 더 악의 근위대? 같은지 쉽게 평가할 수 없을정도.....

근위병의 급여나 병영여건이 좋았던 대신 그만큼 정예부대로서의 체면이 있으니 훈련은 더 극심했다고 하는데, 국경 지대에 상주하는 일선 군단과는 달리, 화려한 로마 시가지를 곁에 두고 있었던만큼 전투력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더 엄격한 군율과 훈련이 필요했다고 한다.

4 예니체리의 대선배?

평시에는 황제 최측근 의장대로, 그리고 전시에는 황제를 따라 전장에서 활약하다가 권력 맛을 본 후로는 오히려 자신들이 황제를 폐위하거나 옹립하는 등의 깽판을 치고 정국을 주무르며 국가 전체를 몰락시키가다 결국 황제의 반격으로 몰락, 해체되어 사라진 모습이 마치 오스만 제국예니체리와 너무 흡사하다. 때문에 간혹 인터넷에서는 프라이토리아니예니체리의 대선배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둘을 비교하면 비슷한 점이 많아서 오스만 제국예니체리를 창설할 때 프라이토리아니를 참고로 하거나 어느 정도 의식한 게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특히 장가 못 가게 한 점도 비슷하다. 근데 예니체리만 독신을 강요한 오스만 제국과는 달리 로마제국은 프라이토리아니 뿐만 아니라 군단 전체에 독신을 강요했는데?[4]
  1. '승마 군단' 정도로 번역이 가능할 것이다. 카이사르는 게르만 족장 아리오비스투스와의 회담에 임하면서 제10군단 병사들에게 말을 태워 호위대로 편성했는데, 이때 병사들은 카이사르가 자신들을 친위대로 여기겠다더니 한술 더떠 기병으로 승진시켜줬다면서 희희덕거렸다고 한다.
  2. 그러나 이 와중에도 네르바 황제 시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에 의혹을 품은 프라이토리아니가 황제에게 반기를 든 적이 있었다.
  3.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전사하고 다른 아군들이 전부 도주하는 상황에서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위치를 사수하며 최후까지 저항하였다고 한다. 전투력의 쇠퇴와는 무관하게 마지막까지 근위대라는 자부심은 있었던 것이다.
  4. 자세한 건 밸런타인 데이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