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섀클턴

Sir Ernest Henry Shackleton CVO OBE FRGS

1874년 2월 15일 아일랜드 킬데어 주 출생[1]~1922년 1월 5일 사망

영국의 위대한 탐험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자 중 한 사람

1 소년 시절

섀클턴은 2남 8녀의 둘째(장남)로 태어났다. 농부였던 섀클턴의 아버지는 의사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섀클턴은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과 대부분의 소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후 1887년, 섀클턴은 덜위치 학교에 진학한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책을 읽기 좋아했다고 한다.

2 디스커버리 호의 탐험

섀클턴이 남극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시기는 1901년이다. 영국은 디스커버리호를 보내 남극을 탐험하도록 했는데, 이때 섀클턴도 참가했다.

이 탐험대의 대장은 로버트 스콧이었고, 그는 섀클턴과 에드워드 윌슨을 데리고 남쪽으로 향하지만 얼마 못 가서 쓴맛을 보게된 다. 데리고 간 개 22마리를 모조리 잃고 세 명 모두 설맹, 동상, 괴혈병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특히 섀클턴의 병세가 심각했고, 결국 그는 기지로 돌아온 후 스콧에 의해 강제로 본국으로 송환당한다.[2]

첨언하자면 여기서 언급된 에드워드 윌슨은 나중에 스콧과 함께 최후를 맞는 그 윌슨이다.

3 님로드 호의 탐험

1907년, 섀클턴은 다시금 남극을 방문한다. 이번에는 탐험대의 대장 자격이었으며, 이 탐험은 1909년까지 계속된다.

다만 영국 탐험대임에도 불구하고 스콧이 "멕머도 만은 나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딴지를 거는 바람에 웨일스 만과 에드워드 7세 랜드에 잇달아 상륙을 시도하지만 얼음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멕머도 만에 기지를 세우게 되지만, 이 일로 스콧은 "섀클턴 개새끼"를 외치게 된다.[3]

그러나 그가 거둔 성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3.1 성과

  • 제임스 에덤스가 지휘한 등반대는 남극 최대의 화산인 에러버스 산의 정상에 올랐다. 이 산의 높이는 3734m이며, 현재도 활동하는 활화산이다.
  • 앨리스테어 F. 멕케이가 지휘한 분견대는 남위 72도 25분, 동경 155도 16분에 위치한 자남극점을 정복했다.
  • 과학적인 성과도 컸다. 섀클턴은 남극에서 석탄 조각을 발견했는데, 석탄이란 식물이 땅속에 묻혀서 생기는 것이라,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극지 기후에서는 생성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지질학의 패러다임을 대륙이동설로 바꾸어준 증거가 된다. 물론 발견 당시에는 오파츠 취급
  • 섀클턴이 이끈 본대는 남극점에서 156km 떨어진 지점인 남위 88도 23분까지 도달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최고 기록이었다.

3.2 죽은 사자보다 산 당나귀가 낫다

성과도 컸지만, 섀클턴의 탐험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만주산 조랑말과 스노모빌을 투입했는데, 그걸 본 노르웨이 탐험가인 프리드쇼프 난센(1861~1930)은 기겁하면서 그를 말리며 "조랑말은 위험하다! 개가 낫다. 그리고 저 스노모빌은 과연 극지방에서 제대로 움직이기나 할 수 있나? 개썰매가 낫다"며 충고[4]를 해줬지만 섀클턴은 개 대신 조랑말로 남극 탐험을 떠났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섀클턴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계산했기 때문이다.

조랑말은 1마리가 하루에 무려 800킬로그램을 끌고갈 수 있다. 그런데 먹이로는 하루에 5킬로그램을 먹이면 된다. 그럼 그 짐으로 먹이도 가져가고 두둑한 먹을거리와 연료와 의료품이나 생필품을 끌고 가게 하면 된다. 스노모빌이 고장나도 문제없다.

하지만 는 1마리가 무리를 해도 하루에 겨우 50킬로그램밖에 못 끌어간다. 그러고도 먹이를 하루에 750그램이 필요하다. 따라서 짐을 운반하는 데 개보단 조랑말, 그것도 추위에 강한 만주 지역 말이 안성맞춤이다.

맞는 말이었다.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말이 교통수단의 대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섀클턴의 탐험대가 가는 곳은 평범한 한랭지역이 아니고 하필이면 지구 최대의 혹한지남극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남극까지 갈 것도 없이 만주보다 북쪽에서는 말이 아니라 개썰매를 이용한다. 몽골 제국의 그 유명한 역참 제도도 최북단에서는 말이 아니라 개를 이용했다.

  • 개는 땀을 흘리지 않고 말은 땀을 흘린다. 땀은 극지방의 맹추위 속에서 순식간에 얼어 버리므로 동상의 위험이 크다.
  • 개는 털이 무성하지만 말은 갈기를 제외하고는 털이 없는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매우 짧다. 때문에 털이 두둑한 개썰매용 개들은 영하 40도에서도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말은 담요를 씌워주는 등 조치가 필요하다.
  • 조랑말은 200kg이 넘기 때문에 크레바스에 빠지면 꺼내기가 불가능하지만, 2~30kg 정도의 개는 한두 마리가 빠지면 한, 두사람으로도 충분히 꺼낼 수 있었다.
  • 개는 잡식이라 먹이를 사람 것과 같이 쓸 수 있지만, 말은 따로 사림이 먹을 수 없는 말먹이를 준비해야 한다.

결국 말들은 거의 모두가 얼어 죽었고, 스노모빌도 죄다 고장났으며, 최후까지 살아남았던 한 마리의 조랑말도 훗날 비어드모어 빙하라 불리는[5] 험준한 빙하를 넘다가 크레바스에 빠져 죽었기에 탐험대원들은 직접 생필품을 실은 썰매를 끌어야 했다. 그렇게 빙하를 넘어 남극점으로 향했지만, 결국 식량 부족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6] 이대로 간다면 남극점에 도착할 수도 있겠지만, 돌아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섀클턴은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Better a live donkey than a dead lion).[7]

이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린다. 식량부족과 추위로 온갖 고생을 다했지만, 그래도 섀클턴의 탐험대는 한 명도 죽지 않고 모두 무사히 귀환했고, 이는 극지탐험에서 실로 드문 일이었기에 영국에서 기사 작위와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한편 스콧은 섀클턴이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열폭했고, 이번에야말로 남극점을 자신이 정복하겠다며 남극으로 떠나지만 그 탐험에서 죽고 만다. 자세한 과정은 로버트 스콧, 아문센 VS 스콧 참조.

그러나 섀클턴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된 탐험은 따로 있었으니...

4 위대한 실패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한 후, 섀클턴은 1914년 3월에 영국 남극횡단 탐험대의 대장이 되어 인듀어런스 호[8]를 타고 남극으로 떠난다. 총인원 27+1명. +1은 퍼스 블랙보로(Perce Blackborow)라는 이름의 밀항자. 영국에서부터 탄 것은 아니고, 본래 퍼스는 탐험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 당시 주방 보조로 잠시 와 있었다. 그런데 퍼스의 친구인 선원 윌리엄 베이크웰이 다른 선원들과 짜고 퍼스를 몰래 태운 것이다. 이를 안 섀클턴은 노발대발했으나[9] 어쩔 수 없이 탐험에 동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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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 모집 : 어렵고, 보수도 적고, 혹한의 추위에, 몇달간 지속되는 어둠에, 계속되는 위험에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지 못하는 모험. 성공할 시 영광과 명예를 얻을 수 있음.

섀클턴이 당시 탐험대원을 모집하기 위해 신문에 낸 광고. 너무나 정직(...)한 내용이지만 외려 그 때문에 피가 끓지 않는가?

그런데 하필이면 이 때가 1914년이라 준비 도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섀클턴의 탐험대는 출발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10] 하지만,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출발을 명령함으로서 탐험은 시작된다.

그러나...

4.1 인듀어런스 호,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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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들 해에 진입해서 상륙을 시도하던 섀클턴 탐험대는 얼음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았다. 계절상으로는 분명히 한여름이었지만, 바다가 꽁꽁 얼어붙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인듀어런스 호는 1915년 1월 20일부터 10월 27일까지 얼음에 갇힌 채 남극해를 표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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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때까지는 비교적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주위에 널린 바다표범펭귄을 잡아먹을 수 있었기에 식량도 비교적 풍부했다. 이때까지가 섀클턴 탐험대의 호시절이었지만, 봄이 되자 얼음이 녹으면서 지옥이 시작되었다. 얼음이 인듀어런스 호를 짓눌러서 박살내 버린 것이다. 운명의 10월 27일, 섀클턴은 명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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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포기하라!"

섀클턴 탐험대는 개인소지품 대부분을 버리고 쓸모 있는 물건들만 건져낸 후, 부서진 배 근처에 임시캠프를 설치했다.

덤으로 이런 사진이 왜 남았냐 하면, 재정적으론 궁핍했던 섀클턴은 투자자에게 융자받는 대신에 모험 도중 찍은 사진들에 대한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계약을 맺었기에 팀원 중 하나가 사진을 수시로 찍어야만 했고, 배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사진기와 필름이 물에 빠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필름을 건져내야만 했다.

4.2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 되겠어! 안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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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 탐험대는 얼음 바다에서 빠져나가 육지로 가기 위해 행군을 시작하지만, 곧바로 우린 안될거야 아마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집채만한 얼음덩이가 언덕을 이룬 바다 위에서, 보트를 끌고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 결과 출발한 날에 그들이 전진한 거리는 무려고작 1.6km(...).[11]

이렇게 되자 섀클턴은 비교적 안전한 부빙 위에 '오션 캠프'라는 이름의 새로운 캠프를 설치한 후,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인듀어런스 호의 잔해에서 쓸 만한 물건을 모조리 꺼내왔다.

11월 21일, 인듀어런스 호의 잔해도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이후 섀클턴은 폴렛 섬으로 진로를 잡았다. 과거에 다른 탐험대가 물자를 비축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12월 22일, 그들은 가져갈 수 없는 물건 전부를 성탄절 만찬에 소비한다.

그러나 이 항목의 제목대로 섀클턴 탐험대는 또다시 정지당하고 만다. 부빙이 점점 얇아지면서 자꾸 갈라졌고, 바다 위를 떠다니는 얼음들은 그들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결국 섀클턴 탐험대는 다시 전진을 멈추고 페이션스[12] 캠프를 설치한 후, 오션 캠프에 남아 있던 짐과 조각배 한 척을 그곳에 끌고 온다.

그러나 섀클턴 탐험대의 목표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이 올라탄 유빙은 폴렛 섬에서 동쪽으로 100km 이상 떨어져 있었고, 그 거리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섀클턴은 결단을 내린다.

"다른 섬으로 가자!"

이를 위해 섀클턴 탐험대는 남극 탐험을 위해 데려왔던 54마리[13]의 개를 전부 죽이고 식량으로 삼았다. 개들까지 보트에 태울 여력은 이미 없었던 것이다.

4.3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4월 8일, 페이션스 캠프가 있던 부빙이 갈라졌고, 거기에 있던 섀클턴 탐험대는 세 척의 조각배를 바다에 띄웠다. 대원들은 "이제 자유다!"를 외쳤는데, 그동안 자신들을 가두었던 얼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맑은 날은 오지 않았다. 날씨는 닥치고 흐렸고, 물의 흐름은 실로 거셌으며, 얼음 덩어리가 사방에 돌아다니고, 좀 큰 얼음 덩어리 위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올라갔더니 갑자기 부빙이 갈라지면서 대원 하나가 침낭에 든 채로 바다에 빠지기도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 대원은 얼음이 다시 붙어 버리기 전에 구조되었지만, 이래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4월 15일, 섀클턴 탐험대는 난관을 이겨내고 엘리펀트 섬 발렌타인 곶에 상륙한다. 497일 만에 처음 보는 육지였다. 나중에 그들은 좀 더 안전한 와일드 곶으로 캠프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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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곧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들이 상륙한 엘리펀트 섬은 무인도였고, 먹을 거라고는 섬에 있던 바다표범과 펭귄 조금, 그리고 홍차밖에 없었던 것이다.[14] 더욱 고약하게도 그들이 자리 잡은 와일드 곶은 구아노라고 불리는 새 똥[15]으로 뒤덮여 있었고, 잠을 청할 자리는 그 똥무더기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료는 부족했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으며, 구조선이 올 가망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섀클턴은 4월 20일 중대발표를 하는데

"사우스조지아 섬에 가서 구조대를 불러오겠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4.4 내게 불가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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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커드 호가 이동한 자취는 파란색이다. 저 파란 선의 길이는 무려 1,300km를 넘는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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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배를 타고 남극해를 뚫고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우리는 이제껏 최고의 모험을 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모험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위대하겠죠. 우리는 이기면 살 것이고 패배하면 죽을 것입니다.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섀클턴이 자인한 것처럼 그의 계획은 무모했다. 실현 불가능한 이유는 많지만 몇 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 섬까지 타고 갈 제임스 커드 호는 남아있던 세 척 중에서는 큰 편이었지만, 10m도 안되는 조각배였다. 이 배에는 갑판도 없고, 동력원도 없었다. 그나마 돛대가 하나 있었고, 다른 조각배에서 떼어낸 돛대를 하나 더 설치했다. 하지만 원하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야만 했다.
  • 배를 타고 1300km를 항해해야 하는데, 중간에는 섬이 하나도 없다. 오직 육분의와 크로노미터만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조금만 삐끗하면 사우스조지아 섬을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 통과해야 하는 드레이크 해협은 세계에서 가장 사나운 바다이며, 시속 100km의 바람과 20m짜리 파도가 밤낮으로 몰아친다. 사우스조지아 섬보다 가까운 포클랜드 제도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리고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유인 포경기지가 있다.)
  • 식량도 변변찮았다. 영국인의 필수품인 홍차 외에 바다표범고기와 펭귄고기가 전부였다. 식수는 바다에서 건져낸 얼음 덩어리로 해결해야 한다.[17]

그러나 대원들은 앞다투어 지원하고 나섰고, 무모한 바보 5명이 섀클턴과 같이 가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4월 22일, 바보들의 보트는 엘리펀트 섬을 떠나 바다로 향한다. 문자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 섬에 남는 대원들에게 섀클턴이 마지막으로 전한 명령은 "한 달 후에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날 기다리지 말고 탈출해라"였지만, 그들이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16일 동안, 제임스 커드 호는 불가능에 도전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날씨는 닥치고 폭풍밖에 없었다. 맑은 날이 딱 하루 있기는 했지만, 반나절 만에 폭풍으로 복귀했다. 그 다음에도 맑은 날이 한 번 더 오기는 했는데, 드디어 하늘을 보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섀클턴 일행은 곧 자신들이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맑은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들이 평생 처음 보는 어마어마하게 큰 파도였던 것이다. 그 즉시 모두는 배를 꽉 붙들었고, 그 뒤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8] 파도가 칠 때마다 배는 푹 젖었으며, 안 젖은 것은 구석에 있던 성냥밖에 없었다. 침낭 역시 확실하게 젖었다. 이 침낭은 밤이 되자 얼어붙었고, 결국 섀클턴 일행은 침낭 6개 중 2개를 버리고 교대로 수면을 취해야 했다. 얼어붙은 침낭의 무게는 얼음까지 더해 무려 30kg에 달했기 때문에 그냥 두면 배를 가라앉힐 판이었던 것이다. 노 4개 중 2개도 같은 이유로 버려졌다.[19] 또한 세찬 파도에 배가 한 번 흔들릴 때마다 균형을 잡기 위해 돌을 끌고 앞뒤로 기어다녀야 했고, 어두컴컴한 배 안에서 무거운 돌을 끌고 다녀야 했기에 움직일 때마다 큰 소리로 방향을 말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원들이 상처투성이가 된 건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물통이 찌그러지면서 뚜껑과 물통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식수가 부족해졌으며, 마지막 날인 5월 9일에는 어마어마한 폭풍을 만나게 된다. [20]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해냈다.

5월 10일, 엘리펀트 섬을 출발한 지 16일 만에 그들은 살아서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상륙한 킹 하콘 만은 목적지인 스트롬니스 만과는 정반대편에 있었고, 배를 타고 사람이 사는 마을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해류를 잘못 타면 망망대해로 나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들은 킹 하콘 만을 떠나 보트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간 후, 섬을 가로질러 스트롬니스 만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상륙한 지점에는 페고니 캠프가 세워진다. 그러나 대원들은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기에, 섀클턴은 대원 세 명을 페고니 캠프에 남기기로 한다. 보트를 뒤집어서 만든 캠프에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5월 12일, 섀클턴과 위슬리, 크린은 3일분의 식량을 갖고 목적지로 출발한다. 그러나 성공 가능성은 여전히 0에 가까웠다.

  • 그들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먹을 것도 펭귄고기와 홍차 정도밖에 없었다.
  • 등반도구라고는 나사못을 박아둔 신발 세 켤레와 도끼 한 자루밖에 없었다.
  • 그들은 사우스조지아 섬의 지리에 무지했다. 등반로도 없는 산악 지대에서 방향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구글 지도를 통해 살펴보면 이들이 상륙한 킹 하콘 만에서 스트롬니스 만까지 가려면 동서로 길죽한 섬을 최단거리로 넘는 게 아니라 동에서 서로 산맥을 따라 5~6개의 고산준봉을 넘어야 한다. 히말라야 릿지 스케일[21]
  • 결정적으로, 이 때까지 사우스조지아 섬을 횡단하는 데 성공한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슬슬 작작하고 이쯤에서 죽어라.고 말하고 있는 악의적인 초월적 존재가 있는거 아닌가 의심스러운 상황. 그러나 섀클턴 일행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나아갔으니,

"이 산이 아닌가 봐"

그들은 몇 번이나 산을 올랐지만, 그들 앞에는 수직의 절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간신히 산을 넘었더니 또다시 산이 기다리는 경험을 수 차례나 반복한 끝에, 그들은 결국 이름 모를 바위 옆에서 잠에 빠지고 만다.

"30분 지났다. 일어나."

겨우 5분을 잔 대원들에게 섀클턴이 던진 말은 그것이었고, 덕분에 대원들은 얼어 죽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산길을 걸어갔고, 마침내 산마루에 도달했는데, 경사가 너무나 급해서 바닥에 걸터앉으면 두 다리가 허공에 매달릴 정도였다! 안개는 자욱하고, 남극의 긴 밤은 어둡고, 후퇴는 생각할 수도 없고, 얼음으로 뒤덮인 산비탈에 피켈로 한 발씩 발 디딜 자리를 파며 내려가자니 어느 세월에 내려갈 수 있을지 알 수 있기는커녕 탈진으로 모두 쓰러질테고,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조만간 얼어죽을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섀클턴이 내린 결론은

"여기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가자."

당연히 경악한 위슬리와 크린은 그에게 제정신이냐고 물었지만 섀클턴은 반문했다. "여기서 더 버틸 수 있어?" 결국 대원들은 각자 자기 몫의 로프를 깔아 깔개를 만들었다. 섀클턴이 맨 앞에 앉고, 대원들은 서로의 목을 뒤에서 껴안고 찰싹 붙어 한 덩어리로 단단하게 엮였다. 이제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상황, 섀클턴이 땅을 박차자 모두들 미친 듯이 산마루를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분야에는 선배가 있다.

"마치 허공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머리털이 모두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고 내가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미끄럼타기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경사가 급한 산허리를 분당 1.6km 정도의 속도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나는 흥분해서 고함을 질렀다."(대원 워슬리의 회고)

점차 그들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마침내 섀클턴 일행의 미끄럼은 어느 눈언덕 밑에서 멎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엄숙한 기분으로 서로 돌아가며 악수를 나누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에 목숨을 걸고 도전해, 마침내 짜릿한 성취를 이룬 사나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악수였다.

그들은 드디어 스트롬니스 만의 후스빅 항에 도착한 것이다. 산을 내려온 그들에게 포경기지 선원들은 그들을 괴물 취급했다. 이제껏 내륙 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포경기지 책임자가 누구냐고 묻자 산에서 나타난 사람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섀클턴입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전쟁은 끝났겠죠?"
"천만에요. 전 유럽이 전화에 뒤덮혔습니다. 수백만명이 죽었어요. 유럽은 광기에 휩싸였습니다."
노르웨이 출신 기지 대장과 나눈 대화

포경기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섀클턴 일행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평생 동안 거친 바다와 싸우며 살아온 그들이 보기에도 불가능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40년간 남극해에서 배를 탔다는 사람도 있었다. 식사를 마친 섀클턴 일행은 곧바로 배 한 척을 빌렸고, 위슬리는 그 배에 타고 킹 하콘 만에 남은 세 사람을 데리러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 국왕은 곧바로 섀클턴에게 축하전보를 쳤고, 신문은 섀클턴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했다.

글로만 써 놓으면 읽기에는 간단해 보일지 몰라도 이들 셋이 겪은 여정은 험난했다. 위슬리는 나중에 회고하길,

그땐 정말이지 다 귀찮고 그냥 드러누워 영원히 자고 싶었다. 하지만 새클턴 대장은 발길질을 하면서 우리 따귀를 때리며 "포기하여 잠잘 바에는 마지막까지 기어서라도 움직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얼음물을 마시고 펭귄고기를 날로 억지로 씹어 삼켜가면서 추위와 피로로 주저앉고 싶었던 우리에게 그나마 조금씩 마시던 홍차는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까지 태어나서 그때 마신 홍차만큼 인생에서 가장 맛 좋은 홍차를 마신 적이 없다.

여담으로 그 산을 두 번째로 넘은 사람은 30년 뒤에야 나왔는데, 충분한 장비와 완벽한 준비를 마치고 만체 상태에서 산을 넘은 그 등정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평한 바 있다. 섀클턴은 실로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4.5 전원 무사합니다!

섀클턴은 곧바로 구조선을 수배했지만, 세 차례나 이어진 시도에도 불구하고 엘리펀트 섬에 상륙하지는 못한다. 남반구는 이 시기가 한겨울이었고, 가뜩이나 지랄맞은 남빙양의 얼음과 풍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첫 번째 구조선은 얼음에 막혀 되돌아왔고, 두 번째 구조선은 심하게 망가졌으며, 세 번째 구조선은 침몰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영국 역시 전쟁 중이라 배를 구하기가 힘들었고, 이 과정에서 무려 4개월의 시간이 흘러가고 만다.

마침내 섀클턴은 칠레 정부로부터 증기예인선 '엘코 호'를 빌리는 데 성공한다. 얼음이 없는 바다에서만 항해하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어쨌든 배를 손에 넣은 섀클턴은 바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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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22]

그날도 여전히 조개잡이를 하러 나갔던 엘리펀트 섬의 대원들은 배 한 척을 발견한다. 드디어 그들을 구할 배가 왔던 것이다. 배가 왔다는 말에 모든 대원들은 캠프 밖으로 뛰쳐나갔고, 문이 좁아서 못 나간 대원들은 벽을 부수고 나갔다. 섀클턴이 뱃머리에 서서 모두 무사하냐고 묻자,

"전원 무사합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이들 중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23]

4.6 엘리펀트 섬의 이야기

섀클턴이 제임스 커드 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으로 떠난 후, 섬에 남은 대원들은 바다표범과 펭귄고기로 연명했다. 그들은 식량이 고갈될 경우에 대비해 남는 고기를 저장하려고 했지만, 모두 상하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24]. 그나마 해변에 있는 조개와 해초를 채집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덕에 조금은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모자라는 양은 먹다 남은 뼈를 파내 끓여 먹는 방법으로 채워야 했다. 이런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에 남은 식량의 양은 펭귄고기 4일치 정도였다고 한다.

섬에 남은 대원들은 2척의 보트를 뒤집어서 캠프를 만들었으며, 마개조를 통해 거주환경을 조금씩 개선시켰다. 보트 지붕에 작은 창을 만들어서 햇빛이 들어오게 했고, 깡통을 이어 만든 굴뚝을 달았다. 이 굴뚝은 연기를 밖으로 뽑아냄으로서, 밀폐된 캠프 안에서 불을 피워 요리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이들은 동상에 시달리던 대원 한 명[25]의 발가락을 잘라내는 수술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 수술은 다리 전체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으며, 구출된 후 그것을 본 의사는 대단히 성공적인 수술이었다고 평가했다.

엘리펀트 섬에 남게 된 대원들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부대장 프랭크 와일드인데, 그는 섀클턴이 반드시 8월쯤에 구출하러 온다는 낙관론을 갖고 있었고 날씨가 좋아질 때마다 "오늘 대장님이 오실지 모르니 짐을 싸놔라"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 덕에 섀클턴이 정말로 구조선을 이끌고 왔을 때, 탐험대는 한 시간 안에 구조선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 짐 중에는 위에서 서술한 대로 후원자에게 판권을 넘겨줘야 해서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사진들도 있었고, 그 덕에 섀클턴 탐험대의 이야기를 다룬 책에는 그들의 생생한 사진이 수록될 수 있었다. 인간이 가장 살기 힘든 환경에서 준비되지 않은 채 대원들을 통솔해서 모두를 생존시킨 이 사람도 매우 대단한 능력자라고 할 수 있다.

5 찌질이 스테파운손

섀클턴과 자주 비교되는 인물로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Vilhjálmur Stefánsson)[26]이라는 탐험가가 있다. 그는 1913년에 캐나다 탐험대를 이끌고 북극 탐험에 나섰는데, 그가 탄 카를루크 호가 얼음 바다에 갇혀서 고립되었다.

여기까지는 섀클턴과 유사하지만, 그는 순록 사냥으로 식량을 조달하겠다는 거짓말을 쓴 편지를 남기고 식량과 탄약을 휴대한채 4명과 함께 떠나갔고 그 이후 본인들은 북극 탐험을 끝까지 마치고 살아서 돌아왔지만, 남아 있던 대원들 중 11명은 상대방을 헐뜯고 속이고 싸우다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었고 나머지는 간신히 구조되었다. 당연히 스테파운손은 욕만 직살나게 먹었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카를루크 호 항목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그의 저주받을 리더쉽을 비판하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여담인데 실패자이긴 해도 스테파운손은 83살 장수를 누리며 살다가 갔고 섀클턴은 48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테파운손은 당시만 해도 캐나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탐험인지라 캐나다 정부의 비호 아래 그닥 어렵지 않게 살아갔고, 이후에도 탐험가 클럽에 초청되어 회장직도 받고 다시 모험도 떠나곤 했었다. 현재의 저평가는 처음엔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진 것.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인권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하다.(영국해군에서도 프래깅이 자행되던 시절) 참고로 스테파운손은 브랑겔 섬을 캐나다 땅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다가 소련 정부에게 내쫓겼고[27] 1940년대까지 주된 탐험지였던 옛 소련 지역을 옹호하다가 전후 냉전이 심화되면서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로 몰려 배척받으면서 늘그막은 쓸쓸하게 죽었다.

6 기적 이후

1922년 섀클턴은 로웨스와 같이 남극 탐험대를 이뤄 퀘스트 호를 타고 원정을 떠났지만 사우스조지아의 그리트비컨(Grytviken)에서 쓰러져 앓다가 죽었다. 여행경비를 만들기 위하여 고생하며 얻은 스트레스와 여러 가지로 인한 과로가 큰 원인이라고 한다.

그가 사망하자 영국 남극 탐험대의 베테랑이었던 레너드 허시(Leonard Hussey)[28]가 섀클턴의 시신을 영국으로 가져가는 데 자원했고, 영국을 향해 가던 중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 머물렀다. 이 때 섀클턴을 사우스 조지아에 묻어달라는 새클턴의 부인 에밀리의 전보가 왔고, 허시는 섀클턴의 시신을 가지고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돌아와 간단히 예배를 치른 후 그리트비컨의 묘지에 시신을 안장했다. 어니스트 섀클턴의 묘지.

사망했을 때 4만 파운드 (2011년의 가치로 환산하면 160만 파운드,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26억 정도)의 빚을 남겼지만, 그의 생애를 다룬 책 '어니스트 섀클턴 경의 삶(The Life of Sir Ernest Shackleton)'이 출판되고 섀클턴 기념 기금이 조성되어 부인과 자녀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섀클턴의 실패담은 탐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대원을 살렸기 때문이다. 비록 당대에는 로버트 스콧의 명성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20세기 말 그의 위대함은 재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에 영국 BBC 설문조사에서는 가장 위대했던 탐험가 순위 5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물론 이 순위는 스콧보다 위다.

2011년 8월 30일, 섀클턴이 갖고 있던 비스킷이 230만원에 팔렸다. 관련 링크를 보면 이 비스킷이 왜 고가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비스킷이라면 쉽비스킷이겠지

7 기타

  • 인듀어런스 호의 침몰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기에, 섀클턴 탐험대는 질 좋은 침낭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제비뽑기로 침낭을 분배했는데, 일반 대원들은 곧 섀클턴이 사기를 쳤음을 눈치챘다. 일반 대원들은 전원 질 좋은 침낭을 뽑았고, 섀클턴과 간부들은 전부 질 나쁜 침낭을 뽑았던 것이다.
  • 섀클턴 일행이 사우스조지아 섬의 산을 넘어갈 때, 그들 전원은 우리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나중에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 섀클턴은 탐험에 챙겨간 책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불쏘시개로는 최고였다고.[29] 물론 섀클턴은 읽는 책으로서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매우 아꼈다. 그 아끼는 책을 한낱 불쏘시개로 써야 했으니 대단히 기분이 묘했을 듯 하다.
  • 팀의 기상학자인 레너드 허시[30]밴조를 가지고 왔는데, 인듀어런스호의 침몰 이후 그것을 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 악기를 섀클턴이 회수해서 전해주었고, 허시는 구조될 때까지 이 악기로 대원들에게 음악을 연주해줘서 사기앙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탐험대는 축음기도 가지고 갔지만, 축음기용 바늘을 주문할 때 업자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1상자를 제외하고 모두 뜨개질용(...)이었다고. 참고로 이때 당시의 축음기는 원통형이 아닌 원반형 음반인 SP 음반이었는데 이 음반은 한면을 듣고 바늘을 교체해야하는 형식이였다. 즉, 축음기 바늘은 1회만 사용하는 형식이었다. 덕분에 정말 중요한 날에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허시는 섀클턴의 마지막 탐험에도 참가하였고, 섀클턴의 장례식 때도 밴조로 브람스의 자장가를 연주해 애도를 표했다.
  • 위대한 극지 탐험가 로알 아문센은 "나는 섀클턴이 그런 보잘것없는 장비로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것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탐험을 포기했거나,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용기와 결단력과 리더십은 위대하다. 조금만 더 경험이 있었더라면 그는 남극점 정복과 남극대륙 횡단을 이뤄내고도 남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섀클턴을 극찬했다. 섀클턴도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아문센의 업적을 칭송했다. 당시 영국은 아문센의 업적에 열폭하며(...) 죽은 스콧을 치켜올리고 아문센을 흉보고 있었는데, 당시 영국에서 아문센을 칭송한 자는 섀클턴이 거의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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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양이가 바로 치피 여사이다. 사진 속 남성은 바로 퍼스 블랙보로.

  • 인듀어런스호를 버릴 당시 고양이 치피 여사(Mrs.Chippy 그런데 이름과 달리 수컷이었다)를 죽게한 바 있다.1970년대까지만 해도 배에 고양이를 키우던 게 많았던 것처럼 인듀어런스호에도 고양이가 있었는데 를 잡기 위함이었다. 배가 침몰하고 먹을 게 부족한 상황에서 고양이를 버려야 했지만 그대로 굶겨죽이거나 춥게 죽일 수 없다고 하여 섀클턴이 손수 죽였다고 한다.최대한 고통없이 죽인다고 했지만 배에 탄 목수이자 치피 여사를 매우 아끼던 해리 맥니시(1874~1930)는 이 일로 섀클턴에 불만을 가졌다. 물론 섀클턴이 치피 여사를 죽인 게 어쩔 수 없음을 알았기에 공식적으로 비난하지 않았지만. 맥니시는 구조 뒤에 뉴질랜드이민가서 목수로 살아가다가 죽었는데 죽기전에 미리 무덤 곁에 세워둘 치피 여사 실제 크기랑 같은 동상을 만들었으며 동상 밑에 이런 글귀를 새기게 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잊을 수 없는 고양이 치피 여사를 기리며. 인듀어런스 호 승무원으로서 귀중한 식량을 지켜낸 공로를 거뒀음에도 치피 여사는 어니스트 섀클턴이란 영웅화에 고양이라는 이유로 알려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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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니시 무덤에 있는 고양이 치피 여사 동상.

170px-Wolf_Howard._Mrs_Chippy.jpg 2011년 뉴질랜드에서 치피 여사 기념 우표가 발행됐다.

  • 위에 치피 여사랑 사진을 찍은 밀항자 퍼스 블랙보로는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브론즈 폴라 메달을 수여 받았다. 밀항 당시 18세였던 그는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 선장의 승인 없이 승선했다가 사흘 후 발각됐다. 당연히 새클턴은 크게 화를 냈지만 퍼스는 낙천적인 성격에 붙임성도 좋아서 금방 새클턴의 신뢰를 얻었고 조난 중 동상에 걸렸어도 시종일관 쾌활한 모습을 보였다. 후일 구출되었을 때는 승선명부에만 없을 뿐 새클턴과 동료들로부터 탐험대의 일원으로 인정 받고 있던 상태라 그도 당당히 메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후 평범하게 살다가 1949년 53살로 세상을 떠났다.
  • 1956년 영국 지질학자인 레이먼드 프리슬리(1886~1974)는 자신이 극지 탐험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면 무릎을 꿇고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과학적 리더쉽이 필요하면 스콧을 부를것이다.
신속한 정복을 원하면 아문센을 불러라.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할것이다

참고로 그는 로알 아문센, 로버트 스콧, 섀클턴 모두와 같이 일해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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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와일드(1873~1939).

  • 2011년 11월 27일, 섀클턴 탐험대의 부대장이었던 프랭크 와일드의 재가 섀클턴의 묘 오른쪽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섀클턴의 오른팔 (Shackleton's right-hand man)이라는 글이 새겨졌으며, 그를 기념하는 우표도 발행되었다. 와일드는 새클턴이 죽은 뒤로 남아공으로 이민가서 농장을 하면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는데 늘그막에 누군가가 새클턴에 대하여 질문하자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 2014년 가을 개봉한 SF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은하계를 오가는 메인 우주선 이름이 인듀어런스이다. 영화에 나오는 몇몇 에피소드들도 그렇고 여러 모로 섀클턴의 인듀어런스 호 모험을 오마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톰 하디 주연으로 전기 드라마를 제작한다.

8 바깥고리

8.1 관련 서적

8.2 관련 영상

8.3 관련 사이트

  1. 이 때문에 아일랜드 측에서는 어쨰서 섀클턴이 영국인으로 기억되어야 하느냐고 불만을 보이지만 사실 태어난 곳만 아일랜드일뿐 그는 민족적, 종교적으로 영국인이 맞다.당장 섀클턴에서 턴(ton) 자가 앵글로색슨계에서 쓰는 성씨다
  2. 나중에 스콧이 쓴 '디스커버리 호 여행기'에서 섀클턴은 변변치 못한 인물로 그려졌다. 이 평가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스콧과 섀클턴의 행적을 보고 판단하자.
  3. 재미있는 것은, 나중에 남극점을 정복하러 온 스콧은 멕머도 만의 기지를 사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얼음이 너무 많아서 배가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4. 이후 난센은 스콧에게도 같은 충고를 했으며, 로알 아문센 또한 스콧에게 조랑말이나 스노모빌보다는 개썰매가 유용하다 충고를 했지만, 스콧은 무시했다. 문제는 섀클턴의 처절한 실패를 목도했으면서도 그냥 말과 스노모빌을 고집했다는 것.
  5. 섀클턴의 탐험을 후원한 사람이 비어드모어였기에, 빙하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6. 참고로 후술하는 스콧의 남극점 원정도 새클턴의 실패와 똑같이 흘러간다. 똑같이 개 대신에 말을 준비했기에.
  7.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와 같은 뜻. 전도서 9장 4절 문구인 "죽은 사자보다는 산 개가 낫기 때문(A live dog is better off than a dead lion)"에서 따 온 것이다.
  8. 여담이지만 인듀어런스(Endurance)는 인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배의 이름은 어느 우주 영화의 우주선에도 붙여지게 된다.
  9. 물론, 작정하고 도로 내려놓으려면 할 수 있었지만... 섀클턴은 '식량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널 잡아먹을 테다!' 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그를 일행에 동행시키고, 주방 보조 일을 주었다. 이 시대의 흔치 않은 츤데레 이 대목은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초반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 전쟁이 나면 선박 등이 징집당하기도 하고 인력과 물자도 전쟁에 우선 동원되기 마련이다. 다만 1차대전 초기만 해도 영국 입장에서는 총력전 개념은 아니었다. 나중에 가면 허리가 휘지만 본격적인 국민총동원령이 내려지는 건 2차대전기.
  11. 참고로 인간의 평지에서의 평균 시속이 4~6km 정도다.
  12. 이것도 '인내'라는 뜻으로 번역되지만, 인듀어런스가 어떤 내구성이나 피로도를 견디는 참을성의 의미가 강하다면 페이션스는 좀 더 이를 악물고 적극적으로 견디어 내는 능동적 행위라는 뉘앙스가 있다.
  13. 처음 대려올 때는 총 69마리였으나 인듀어런스에서 지내면서 일부가 병으로 죽었다. 중간에 새로 태어난 개가 몇마리 있었으나 이 개들도 마지막엔 식량으로 삼았다.
  14. 탐험대가 데리고 간 개를 잡아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섀클턴 탐험대는 위에 서술했듯이 이미 모든 개를 잡아먹었다. 개고기는 못 먹겠다고 버티던 스콧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하긴 배가 고팠고 이들은 스콧이 개고기 거부하다가 결국 굶주림도 한몫하여 죽은 걸 알았겠지만. 그나마 배를 타고 있었기에 연료가 없어 이파리를 먹으며 죽어가던 스콧 일행과 달리 이들은 배 안에 있는 식탁이나 의자를 부숴 땔감으로 써 홍차를 마시며 겨우 버틸 수 있었다.
  15. 이 똥은 농작물 비료로 딱이라서 비싸게 팔리곤 했지만 이 상황에선 더러운 똥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게 만일 말라있더라면 훌륭한 땔감이 되었을 테지만, 비바람과 습기로 인해 바닷가에 있는 새똥은 늘 젖어있어서 땔감으로 쓸 수 없었다. 말릴 곳도 없었고 말린다고 해도 냄새가 진동할 테고, 냄새도 냄새이지만 연료로 이용하기 위해서 말린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안그래도 부족한 연료를 써가면서 말리는 상황밖에 없으니 소용이 없었다.
  16. 서울-부산(412km) 육로의 3배를 넘고, 서울에서 오키나와까지 배타고 갔다는 말이다! 참고로 오키나와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3시간 걸리고 도쿄보다 더 멀다.
  17. 극지의 빙산은 육지의 빙하가 바다에 떨어져나온 것이므로 녹으면 민물이다. 실제로 극지 주민들은 빙산의 작은 조각들을 녹여서 식수로 쓴다. 바닷물이 언 유빙과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구분이 가능하다.
  18. 이 에피소드는 영화 인터스텔라밀러 행성 에피소드에서 그대로 오마쥬된다.
  19.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에 눈보라 속에서 로버트 스콧의 시체가 발견된 후에도 수색대는 스콧의 시신을 당장 운구할 수 없었다. 몇 달에 걸쳐 시신들이 얼어붙는 바람에 무게가 늘어나 백 수십kg에 달했기 때문.
  20. 이 폭풍으로 사우스조지아 섬 인근에 있던 500톤짜리 기선이 침몰했다.
  21. 참고로 지도를 확대해서 섀클턴 일행이 남극에서 사우스조지아 제도까지 이동한 거리를 한 번 봐 보자. 폭풍우와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저 망망대해를 고작 조각배 하나로 건넌 것이다(...).
  22. 섀클턴 탐험대 대원들은 이날을 '기적의 날'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평생 이날을 기념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23. 남극 반대편으로 파견된 오로라 호에서는 3명의 사망자가 나왔지만, 섀클턴이 직접 지휘한 인듀어런스 호에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섀클턴은 엘리펀트 섬의 대원들을 구조한 후 오로라 호의 사망자를 찾으러 남극에 돌아갔지만, 아쉽게도 그 수색은 실패하고 말았다. 사망자들이 남극해에 가라앉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24. 가뜩이나 추워빠진 날씨 덕분에 자연냉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해동과 냉동이 반복되면 고기가 상하고 만다. 너무 오랫동안 냉동보관해도 냉동곰팡이가 생겨 상하게 된다.
  25. 위에 언급한 밀항자 퍼스 블랙보로. 밀항했다 엄한 고생길
  26.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슬란드캐나다인이다. 과거에 아이슬란드계 이민자들이 많이 건너갔는데 주로 매니토바주에 많이 정착했다.(#)
  27. 노력의 일환으로 스테파운손은 1921년에 브랑겔 섬을 향해 다섯 명의 탐험대를 파견하였지만 4명은 전부 사망하고 이누이트족 여인 에이다 블랙잭만 살아서 1923년 8월에 구조되었다.
  28. 앞서 언급된 인듀어런스 호의 대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29.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불쏘시개는 정말 말 그대로 불을 피우기 좋은 물체를 말하는 것이지 유명한(...) 나쁜 책을 의미하는 단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30. 그러나 기상 예측은 번번히 빗나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