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 라틴어: Philharmonia Hungarica
독일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관현악단. 이름의 '훙가리카' 에서 볼 수 있듯이 헝가리 연주자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던 악단이었다.
2 연혁
1956년에 일어난 헝가리 혁명이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의해 유혈 진압된 뒤 수십만 명에 달하는 헝가리인들이 주로 중립국이었던 오스트리아를 통해 망명했는데, 이들 중에는 헝가리의 관현악단들에서 연주 활동을 하던 음악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 망명 연주자들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 근교에 자리잡은 소도시 휴양지인 바덴 바이 빈(Baden bei Wien)의 에스플라나데 호텔에 거점을 둔 관현악단을 결성했고, 지휘자로는 같이 망명해온 헝가리 국립 교향악단 전직 지휘자 로스너이 졸탄이 부임했다. 로스너이는 갓 창단된 악단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서방과 미국 등 자유 진영에 이 악단을 위한 재정 지원을 호소했고, 창단된 지 3년 뒤인 1959년에는 록펠러 재단과 포드 재단의 후원으로 첫 미국 순회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로스너이가 미국에 정주하기 시작한 1961년 이후에는 로스너이를 도와 악단을 같이 이끌고 있던 헝가리 출신 지휘자인 언털 도라티가 뒤를 이었다. 이 때를 전후해 중립국인 탓에 반공 성향 망명자들의 편만 들어주기가 좀 거시기했던 오스트리아 측에서 이들의 활동에 난색을 표하자, 자유 진영을 표방하고 있던 서독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 있는 소도시 말(Marl)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끌고 있던 당시 서독 정부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대립하고 있던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한 선전 차원에서 이 악단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악단의 정기 공연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요 도시들인 뒤셀도르프나 쾰른, 빌레펠트, 에센, 부퍼탈 등지를 돌며 진행되었다.
도라티는 녹음 작업에 열성적인 지휘자 답게 1958년부터 미국 음반사인 머큐리나 영국 음반사 데카 등을 통해 이 악단과 수많은 음반을 제작해 악단의 명성과 재정 자립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70년대 초반 데카에 녹음한 하이든의 교향곡 전곡(107곡)은 역사상 두 번째 전집 녹음이자 본격적인 상업용 음반으로는 최초라는 진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1]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도라티는 악단으로부터 명예 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클래식 뿐 아니라 이런저런 크로스오버 음반 제작에도 참가했는데, 1976년에 나온 딥 퍼플 키보디스트인 존 로드의 '사라방드(Sarabande)' 라는 앨범에서 에버하르트 쇠너의 지휘로 관현악 연주를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동안 단원들의 모국인 헝가리를 비롯해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위축되기 시작했다. 결국 소련의 붕괴를 끝으로 냉전이 사실상 종식되자, 통일 독일 정부도 이들에게 배당되었던 예산을 단계적으로 삭감하기 시작했다.
악단 내에서도 1988년 도라티가 별세하면서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진 상태에다, 악단의 주축을 이루던 망명 음악인들도 상당수 고령으로 은퇴하고 그 자리를 헝가리와 별 상관없는 나라의 연주자들이 메꾸는 등 정체성이 점차 희박해지고 있었다. 여러 음악인들이 이 악단의 존속을 위해 기금을 끌어모으고 자발적으로 협연하거나 직접 지휘대에도 서는 등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2001년 4월 22일 뒤셀도르프의 톤할레 대강당(현 멘델스존 홀)에서 로베르트 바흐만의 지휘로 브루크너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한 뒤 해체되었다. 이 마지막 공연도 많이 안습이었는데, 악단이 속해 있던 독일 관현악단 연맹 측에서 공연이 취소되었다고 잘못 통보하는 바람에 연주회를 감상한 청중은 15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참고로 톤할레 대강당의 총 객석 수는 1854석으로, 1/10도 차지 않았다(...).
3 주요 활동과 음반
정치적인 사건으로 인해 결성된 악단이었던 만큼, 이들의 활동을 지탱하던 키워드는 '헝가리' 와 '반공' 두 가지였다. 이 때문에 자신들이 헝가리 음악을 지켜내고 있는 진정한 악단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했고, 버르토크나 코다이 같은 모국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에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소련 작곡가들의 작품은 해당 국가가 자신들을 짓밟고 내쫓았다는 반감 때문인지 거의 연주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같은 독일이 거점이었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1971년 처음으로 소련 공연을 개최하는 등 동구권에도 발을 담그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이 악단은 어차피 그 쪽에서 공연을 승낙해줄 리도 만무했고 악단 자체도 그러고 싶지 않아서 주로 서방 세계에 묶여 있는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 냉전이 종식된 후 헝가리에 남아서 음악 활동을 계속 하던 음악인들과도 '떠나가 자유를 누렸던 이들' 과 '남아서 고생하던 이들'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쉽게 화해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이 악단의 존재 가치는 냉전 종식과 함께 폭락해 버렸고, 잔존 단원들도 헝가리로 돌아가거나 독일의 다른 악단에 입단하는 등 뿔뿔이 흩어지면서 악단의 근본이 통째로 흔들리게 되었다. 공산 독재에 반대해 결성된 악단이 그 독재의 종식과 함께 타격을 받다가 사라진 아이러니한 사례인데, 해체 뒤에도 간헐적으로 재결성 움직임이 있기도 했지만 기념 공연 몇 번 하는 선에서 대부분 끝나버렸다.
그래도 한창 활동하던 1950년대 후반~1970년대 후반까지의 리즈시절에는 특히 도라티 밑에서 내놓은 수많은 음반들 덕에 나름대로 서방 세계의 메이저 악단으로 후한 대접을 받았다. 하이든 교향곡 전집이야 더 이상의 말이 必要韓紙? 수준이고, 그 외에 코다이 관현악 작품집이나 레스피기, 차이콥스키 관현악 작품들의 음반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