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길종

(1941~1979)
파일:Attachment/ha gil jong.jpg

1 개요

한국영화 감독.

짧은 생애동안 7편 밖에 만들지 못했으나, 그 실험정신과 모더니즘 때문에 한국의 천재 감독으로 평가 받는다.

2 상세

부산 출신. 9남매중 가장 영특해 신동소리를 들었지만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내성적이고 음울한 성격으로 변했다. 서울대 불문과에 진학한 하길종의 대학시절은 기행의 연속으로 유명했으며 김지하, 김승옥등과 함께 '문리대 거지그룹'이란 특이한 서클을 만들었고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골든 라즈베리상 비슷한 최악의 영화상을 만들어서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 신성일에게 이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졸업후 신상옥 감독의 스튜디오인 신필름에서 연출부 말단으로 일하다가 에어 프랑스사로 전직했고 1964년 프랑스에 갔다가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하여 한국인 최초로 UCLA 영화과에서 학위를 받았다. UCLA재학시절에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더 도어즈짐 모리슨과 친했다고 하며, UCLA를 졸업할 당시 만든 단편영화 "병사의 제전"은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미국 MGM영화사가 뛰어난 영화학도 4명을 뽑아 수여하는 그랜드 메이어상을 수상할 정도였다. 이때의 인상이 강렬했던지 UCLA는 하길종에게 강사직을 제안했고 헐리웃 영화사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있었지만 하길종은 모두 거절하고 1970년에 귀국길에 올랐다.

한국에 돌아온 하길종은 한국 영화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72년작 "화분"에서 독창적인 스타일과 사회비판의식을 보여주었지만 워낙 소재가 파격적인 데다가 스타일상 난해한 측면이 있어서 평단은 좋은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사전검열로 여러 부분이 삭제된 탓에 온전하게 영화의 이해를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다. 74년에 나온 두번째 작품 "수절"에서도 이런 비판적 의식이 뚜렷했다. 그러나 "수절"역시 무려 20여분이 삭제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그의 대표작이라 할만한 작품은 75년작 "바보들의 행진"이다.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최인호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70년대 대학생들의 꿈과 절망,고뇌를 낭만적이고 슬프게 그려냈다. "바보들의 행진" 역시 사전검열과정 에서부터 수많은 장면들이 삭제되어 난도질된 채로 상영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들의 행진"은 흥행에 성공했고 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영화가 되었고 작중에 등장하는 노래 "고래사냥"과 "왜 불러" 역시 히트를 쳤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 두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해주시는 센스를 발휘해주셨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바보들의 행진"이 흥행하자 하길종은 더욱 박정희 정권의 요주의 인물이 되어버렸다. "바보들의 행진"이 당시 청년들에게 끼친 영향 때문이었는데 하길종은 정권의 압박을 벗어나고자 이후 작품들은 철저하게 예술성을 강조하는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76년작 "여자를 찾습니다"와 77년작 "한네의 승천"이 이런 경향의 작품들이었지만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하길종은 이후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게 된다. 78년작 "속 별들의 고향"은 하길종이 작정하고 만든 상업영화였고 당연히 흥행했다. 이듬해에는 "바보들의 행진"의 후속편격이라고 볼수있는 "병태와 영자"를 만들어 연이은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하길종의 행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하길종이 현실과 타협했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지만 1보 전진을 위한 2보 후퇴로 보는 시각이 더 지배적이다. 실제로 하길종은 "병태와 영자"이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한 영화를 구상중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상업영화를 만든 이유도 어느정도는 이해가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길종은 끝내 동학농민전쟁 영화화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79년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어 유신체제가 무너지던 바로 그 해에 말이다(...).

하길종은 독창적인 자기만의 색채를 가진 천재감독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밖에 볼수없다. 그가 내놓는 영화들 마다 사전검열의 무자비한 가위질로 수난을 겪어야 했는데 "바보들의 행진"의 경우는 잘려나간 필름도 남아있지 않아 완전판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개봉일 첫회에 국도극장에서[1] 상영할 당시, 당국에서 심의로 잘려나간 장면[2]을 몰래 붙여서 상영해 버렸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 기관의 요원들이 당장 영화사에 쳐들어 와서 네가티브 원판까지 압수해서 싸그리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런 수난속에서도 그만한 작품들을 내놓은 하길중 감독에게 경의를 표할수밖에 없다.

3 기타

아들인 하지현씨는 건국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로 저서들을 통해 간간히 부친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인터뷰 최근에 언론에서 업계 전문가로 자주 등장하고 있고 저서들도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관심있다면 읽어볼만 하다.


동생은 배우 겸 영화 감독인 하명중. 미남배우인 하명중씨의 친형이며 하길종 본인도 배우의 길을 걸을뻔 한 적이 많다고 한다. 영화 마부의 강대진 감독은 하길종을 서울대학교까지 쫓아가서 배우하라고 했었다. 한국 영화사에서 감독중에서는 한국의 장가뱅이라는 별명의 이병일감독과 더불어 가장 미남감독이다. 잘생긴 외모와 더불어 당시 충무로에서 유일하게 저항정신이 투철하여 대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잘생긴 본인의 얼굴이 쑥스러워서 수염을 기르기도 하고 일년 내내 바바리 코트를 입고 다니기도 하며 양치질을 안 하고 늘 껌을 씹었다고 한다.기만자

제자로 박평식 평론가가 있다. 그래서인지, 하길종 감독 관련 연구를 찾다보면 박평식 평론가가 기여한 연구를 자주 볼 수 있다.

욱하는 성질이 강해서 오늘날 강준만교수가 했던 실명 비판을 술자리에서 선배를 불문하고 여러 동료들에게 하는 바람에 많이 맞았다고 한다.

재주도 많아서 대학생때 시집을 내서 이상문학상을 받았고 영화감독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현 서울예전의 교수, 고려대,한양대 강사, 그리고 번역가 일을 했다. 번역서로는 캐리, 스타워즈 등이 있다.

또한 충무로에서 유일하게 유학경험이 있는 감독으로서 평론가로도 일을 했다. 평론가 일을 하면서 김기영감독과 유현목감독을 제외하고 당시에 유명한 감독들을 무차별적으로 비판해서 기성감독들이 하길종감독을 싫어했다고 한다

일례로 김응천 감독의 청춘영화를 당시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에 얘덜 돈빨아먹는 ........ 이런 식의 평을 써서 작업용 가위를 들고 하길종 감독을 해치려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우에볼 감독의 복싱사건은 애교로 보이는 장면이다

4 하길종의 작품들

  • 화분(1972)
  • 수절(1974)
  • 바보들의 행진(1975)
  • 여자를 찾습니다(1976)
  • 한네의 승천(1977)
  • 속 별들의 고향(1978)
  • 병태와 영자(1979)
  1. 요즘은 멀티플렉스가 많지만 예전에는 모두 단관개봉이었고, 외국영화 보려면 대한극장, 국산영화(당시 말로 방화) 보려면 국도극장, 그 외에 무슨 영화는 무슨극장... 하는 식으로 상영관이 대충 정해져있었다. 바보들의 행진은 국산 영화였기 때문에 당연히 국도극장.
  2. 지금 이 영화를 봐도 이상한 부분이 두 장면 있는데, 첫번째가 학생들이 야구경기 응원 간다고 강의실을 단체로 빠져나가는 장면과, 병태와 영철이 지방을 여행하다가 갑자기 피를 흘리는 장면이었다. 첫번째는 원래 학생들이 데모한다고 수업도중 강의실을 빠져나가는장면이었고(그래서 검열로 인해 엉뚱하게도 데모장면 대신에 고연전 필름이 삽입되었고 교수의 대사가 "원 무슨 야구응원을 매일 해야 하는건가..."하는 대사로 대체되었다.) 두번째는 부산행 기차 안에서 일본인들과 싸움을 하는 장면이었다. 각각 반체제와 폭력성으로 검열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