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주

1 농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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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은주(河恩珠)
생년월일1983년 9월 25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서울특별시
출신학교시즈오카대학교
포지션센터
신체 사이즈202Cm, 98Kg
프로입단2006년 안산 신한은행 에스버드 입단
소속팀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2006~2016)
가족관계아버지 하동기, 동생 하승진
2008-2009 한국여자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정선민(안산 신한은행 에스버드)하은주(안산 신한은행 에스버드)전주원(안산 신한은행 에스버드)
2010-2011, 2011-2012 한국여자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전주원(안산 신한은행 에스버드)하은주(안산 신한은행 에스버드)임영희(춘천 우리은행 한새)

1.1 개요

한국여자 농구 선수이자 정선민의 뒤를 잇는 끝판왕이놈의 끝판왕은 다 센터다 2m 센터였던 김영희 이후, 한국 여자 농구가 가진 정통 2m 센터. WKBL 무대에서 적수가 없는 센터. 하지만 동시에 한국 학원 스포츠의 병폐로 인해 고통받았던 아픈 기억을 가진 선수이기도 하다. 하승진의 누나로도 유명하다.

1.2 선수 생활

1.2.1 학원 스포츠 병폐의 희생양

아버지는 국가대표 농구 선수였던 하동기. 어릴 때부터 농구에 흥미를 느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농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초등학교와 중학교 무대를 평정했다. 그런데 키가 큰 선수들이 늘 가지는 고질병인 무릎 부상이 하은주에게는 일찍 찾아왔다. 중학교 때, 무릎 부상을 당했는데, 이미 연골이 닳아 없어지는 중상이었다. 결국 농구를 포기하는 선택을 한 하은주에게 학교인 선일여자중학교는 혹시나 하은주가 다른 중학교로 갈 것이 두려워 하은주에게 농구 포기 각서를 요구했다. 결국 하은주는 농구 포기 각서를 쓰고 수술을 받았고, 그렇게 한국에서는 농구 선수로서의 삶을 포기했다.

그런데 농구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던 하은주는 다른 길을 모색했고, 그 길은 현해탄 건너 있는 일본에서 알려줬다. 일본의 오카고가 하은주에게 치료와 재활을 병행하면서 농구와 학업을 동시에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의를 하면서 하은주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하은주는 어린 시절 재능을 보였던 명석한 머리를 바탕으로 공부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농구도 병행했다. 그러면서 몸이 점차 회복했고, 시즈오카 대학교로 진학해서도 농구 선수로서의 삶을 계속할 정도는 되었다.

졸업 무렵, 한국 농구 관계자들은 한동안 자신의 시선에서 떠났던 하은주를 떠올렸다. 마침 동생인 하승진이 남자 농구의 유망주로 주목받던 시점이었기에 하은주를 국가대표로 발탁하면 아시아 무대 평정은 어렵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하은주는 상처를 입었던 한국 대신에 제 2의 고향이나 다름없던 일본에 더 마음이 끌렸고, 결국 일본 국적을 선택했다.[1] 그리고 그런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2.2 한국 무대 복귀, 그리고 정ㅋ벅ㅋ

일본 국가대표팀 엔트리에도 등록된 적이 있지만, 일본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실제로 출전을 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2] 또, 몸 상태가 회복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시즈오카대학교를 졸업하고, 샹송화장품에 입단하면서 일본에서 실업 생활을 할 것으로 보였던 하은주는 WNBA의 드래프트에 응시해 LA 스파크스 입단에 합의했다. 그런데 여기서 샹송화장품의 반대로 인해 WNBA 진출이 무산된다.

이게 하은주의 운명을 바꿨다. 미국 진출이 무산되고, 비록 일본이 제 2의 고향이지만 이 일로 인해 일본에서도 계속 선수 생활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전격적으로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컴백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6개 WKBL 구단들이 모두 접촉을 했고, 승자는 안산 신한은행 에스버드였다. 하은주가 신한은행으로 간 이유는 팀 분위기가 좋고, 존경하는 전주원이 있어서[3], 그리고 무엇보다 홈 구장이 집에서 가까워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력이 강해지던 신한은행은 하은주의 영입으로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다. 하은주 영입 이후, 신한은행은 우승을 놓치지 않는 레알 신한이 되 버렸다. 비록 하은주는 여전히 어릴 때의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많은 출전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있지만, 3쿼터에만 나와도 하은주를 막을 선수는 없다. 키도 워낙 크고, 키에서 파생되는 공격과 포스트 플레이, 외곽으로 빼주는 플레이만으로도 이미 전력에서 앞서고 들어간다. 하은주를 막기 위해 많은 팀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 실제로 신한은행을 상대하는 팀들은 단 3쿼터에만 나오는 하은주의 포스트 플레이에 대비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다. 단지 하은주가 무릎 부상의 후유증과 체력 문제로 3쿼터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유일한 약점일 뿐이다. 그리고 이 점 때문에 출전 시간과 스탯이 부족해서 MVP 투표에서 물을 먹은 적이 많았다.

다만 국가대표의 1옵션은 아니었는데,[4] 역시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오랜 시간을 뛸 수 없다는 것이 한계. 그리고 한국 무대에서는 다른 선수들이 키 자체를 감당할 수 없었지만, 웨이트가 약한 편이어서 국제 무대에서는 다른 나라의 센터들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은주의 등장 이후, 최소한 다른 나라의 센터들은 하은주를 의식하고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

출전 시간 문제 때문에 정규시즌 MVP는 아직 없지만, 챔피언 결정전 MVP는 3회나 차지했다. 단기전에서는 출전 시간을 늘리면서 위력을 극대화하는데, 뻔한 패턴이지만 이를 막을 팀이 없다.

하지만 용병제 도입과 함께 하은주의 위력은 급감하고 말았다. 2012년 11월 18일 용병이 도입된 첫경기에서 하은주는 삼성생명 용병인 앰버 해리스에게 2블락을 당하며 무득점의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경기들에서도 용병과의 매치업에서 계속 약한 모습을 보이며 이전과 같은 막강한 영향력은 상당히 잃어버린 상태. 더이상 골밑 높은곳에서 받아먹기만 하는 안일한 플레이로는 살아남기 힘들것이며 골밑 드리블이나 포스트업 등 다양한 골밑공격패턴을 익혀야 할 것이다.

1.3 비판

하은주에 대한 비판은 하은주가 여자농구 리그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특별한 개인기가 없는 하은주가 단순히 큰 키와 육중한 몸무게만으로 골밑에서 쉬운 이지슛으로 꼬박꼬박 득점을 올려주며 남자농구에서도 볼 수 없는 '1분에 1점'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팀간 전력 불균형이 심화되고 특정 구단이 6년 연속 8할이 넘는 압도적인 승률로 독주를 지속하는 기형적 리그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 중학생 농구에 키 큰 대학생이 뛰는 거랑 뭐가 다르냐

하은주로 인해 다른 신한은행 선수들의 커리어와 실력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된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하은주가 코트에 투입되면 같이 뛰는 다른 선수들의 야투율도 급상승하며 하은주가 나오기 전까지 20점 이상 뒤지던 점수를 한 쿼터만에 단번에 뒤집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은주의 높은 2점 야투율때문에 어시스트 스탯을 너무 쉽게 적립한다는 주장도 있다. 타 구단 팬들의 편견과 하은주에 대한 원망만으로 하는 주장들이 아니라 실제 수치로 드러나는 것들이기에 그냥 넘길 수만은 없어 보인다.

국내 리그에선 샤킬 오닐 이상의 활약을 보이면서도 유독 국제대회에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것도 많은 비판을 받는다. 특히 여자농구 최악의 참사로 꼽히는 2012년 앙카라 프레올림픽 대회에서 하은주는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음에도 단 1초도 뛰지 않고 벤치만 지키다가 귀국했다. 상대팀이 우월한 신장을 주 무기로 내세운 크로아티아, 프랑스, 모잠비크같은 유럽, 아프리카 팀들이었기 때문에 팬들은 누구나 '하은주가 뛰어줬으면'하는 바람을 가질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장 작은 일본한테 28점차 완패.

본인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질적으로 좋지 않은 무릎 때문에 충분한 재활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시즌이 끝나고 대회까지 일정이 너무 촉박해서 몸을 제대로 만들 기간이 부족하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하은주의 무릎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며 코트에 있을 때도 무릎을 쓰는 낮은 드리블이나 기술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리고 충분한 재활을 거치고 출전한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신한은행에서처럼 1분에 1점 모드를 보여주며 대표팀을 결승전에 올려놓은 1등 공신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결승전에선 4득점에 그치며 잉여 스크리너로 전락했지만.[5]

애당초 프로선수는 소속팀을 우승시키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다. 그런 점에서 굳이 몸이 좋지 않은 하은주가 소속팀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무리하게 국가대표로 뛰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야구·축구의 경우, 군면제 혜택이 없는 대회에 해외진출한 A급 선수들이 참가를 꺼린다. 그리고 그 들은 대부분 이해해 주는 편이다. 비록 하은주가 본인의 피지컬에 맞지 않는 리그를 뛰며 리그 기형화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이걸 가지고 국제대회 때 안 뛰는 걸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들도 점차 사그라들고 있는데, 2012-2013 시즌부터 뛰기 시작한 용병 앞에서 하은주의 위력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은주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이 못해야 좋은 거냐며 불만을 표하기도 했는데, 현재와 같은 리그 상황을 감안하면 용병제는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1.4 은퇴

2015~2016 시즌 종료 후 신정자와 함께 현역 은퇴 선언을 하였다. 고질병이었던 무릎 문제가 끝내 은퇴의 원인인 듯하다. 뛰는 것은 물론 걸을 때도 통증을 느끼고, MRI 촬영본을 들고 많은 병원을 찾아다녔는데 모든 의사가 '걸어다닐 수 있느냐'라고 되물을 정도라고... 앞으로는 남아 있는 스포츠심리학 박사과정을 마무리하고 학위 취득(논문)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한다. # [1]

그리고 2016년 8월 25일 4년만에 박사 학위를 따냈다. 논문의 주제는 '농구선수들이 지각하는 지도자의 리더십과 상호의존성 및 조직몰입의 관계'이다. 내년 초에 미국으로 떠나 스포츠심리학에 관해 더 공부할 것이라고 한다.

2 夏殷周

고대 중국의 세 국가인 , , 를 일컫는 말. 이 시대를 가리켜 하은주시대라고 부른다. 은나라상나라라고도 불리기 때문에 '하상주시대'라고도 부른다.

3 신데렐라 일레븐의 등장인물

하은주(신데렐라 일레븐)으로.
  1. 한국 국적 재취득 후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사실이라면 당시 일본 여자농구에는 외국인 선수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농구를 하려면 국적을 취득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본 국적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고.
  2. 이에 대해서는 훗날 한국에 귀국한 후에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사실을 밝혔는데, 일본에서 소속 팀과 계약을 할 당시에 "본인의 승인 없이는 일본 국가대표로 절대 뛰지 않을 것" 이라는 조항을 사전에 삽입해 놨었다고 한다. 즉 국가대표팀 엔트리에 등록이 된 건 엄연히 계약 위반에 당시 일본 농구협회 측의 병크.
  3. 전주원은 하은주의 선일여자중학교 11년 선배다.
  4. 당시 국대 센터 1옵션은 신정자였다.
  5. 하지만 이건 그렇게 전술을 짠 코칭스태프의 잘못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