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khazar

서기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지금의 카프카스 산맥 북부와 러시아 남부인 우크라이나, 볼가 강 하류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튀르크계 주민들이 세운 강대한 유목제국이다.

군주의 칭호는 '카간'(또는 하간)인데, 투르크-몽골계 유목민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1 성립 및 발전

하자르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한 점이 많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자르를 구성하는 민족들이 투르크 계열 민족들이라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이들은 원래 훈 제국의 일원이었다가 제국의 통치가 약화 내지 붕괴된 이후, 다른 투르크계 민족인 사비르족에게 밀려 서 유라시아의 초원지대로 쫓겨났다.(463년경) 그 후, 유연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온 돌궐에 복속되었다.(552년경)

630년 즈음을 전후하여 하자르는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들의 지배계층은 주로 서돌궐의 귀족층, 특히 왕족의 경우 서돌궐의 왕족인 아사나(Ashina) 씨족인 것으로 여겨지나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학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간에, 하자르는 건국 후 상당한 기간동안 돌궐의 구성원이었음은 여러 증거를 보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로 보이는데, 이 관계는 돌궐의 계승분쟁을 시작으로 657년, 당의 장수 소정방의 공격으로 서돌궐이 소멸해버리며 크게 요동치게 된다.

가장 극적인 상황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볼가 강 서쪽과 크림 반도 북쪽에서 불가르 족의 지배가문인 둘로 일족(Dulo clan)의 수장, 쿠브라트(Kubrat)가 대 불가리아 연합(Old great bulgaria)을 선포하고 매우 공격적인 확장을 시작했고, 이슬람 왕조의 북상은 초원을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그 당시에도 여전히 아사나씨족의 통치 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자르는 당연히 초원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불가르족, 그리고 이슬람 세력과 전투를 벌였고, 결과는 쿠브라트의 아들들이 각각의 세력을 이끌고 유럽과 초원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끝났으며[1],이슬람과는 그 후로도 약 백여년간의 전쟁이 이어졌다. 하자르는 이 과정에서 독립 왕조이자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굳힌 것으로 추정된다.

2 아랍인들과의 전쟁


750년경의 하자르.

서기 7세기 말부터 흥기한 아랍제국과 1백년 동안, 격렬한 전쟁을 벌여 그들이 카프카스 산맥 이북으로 세력을 뻗치는 것을 막아냈다. 그로써 러시아 남부와 동유럽이슬람화를 수백년 이상 늦추었다고 평가되며, 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전선에 가해지는 부담을 일정 수준 덜어주어 제국의 안정에 기여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던롭(Dunlop) 교수는 매우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하자르국은... 아랍세력의 전방에 위치한 자연적 방어선을 따라 위치하고 있던 국가이다. 무함마드가 죽고 (632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랍 군대는 쇠약해진 비잔티움 제국사산조 페르시아 두 제국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전진하여 마침내 코카서스라는 거대한 산악 장애물과 마주쳤다. 일단 이 방어벽을 넘기만 하면, 거기서부터는 동유럽으로 얼마든지 쉽사리 이동할 수가 있었다. 아랍인들이 막 그러한 시도를 했을 때,그들은 이 지역에서 자신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세력과 마주쳤다. 비록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랍인들과 하자르인들간의 전쟁은 한 세기 이상 지속되었으니, 마땅히 이는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

프랑크인들의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은 투르(Tour) 전투에서 아랍인들의 물결을 돌렸다. 거의 같은 시각, 유럽의 동쪽에서 가해진 위협도 다급하기가 결코 그에 뒤지지 않았다. 승승장구하던 무슬림들은 하자르 왕국의 군대와 마주쳐서야 진격을 멈추었다. 코카서스의 북부지역에서 버티었던 하자르와, 동방의 유럽문명의 보루였던 비잔티움 제국이 없었더라면,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의 역사는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크게 달라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카스피해 연안의 다르반드 Darband 협로를 두고 652년에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아랍군과 하자르군은 공성기(캐터펄트와 발리스타)까지 동원하며 치열하게 싸웠다. 여기서 아랍인들은 그들의 지휘관이었던 아브달-라만 이븐-라디쉬(Abdal-Rahman ibn-Rabiah)를 포함한 4천명의 전사들을 잃었으며, 생존자들은 산맥을 넘어 패주했다.

그리고 722년에서 737년 사이에 다시 하자르와 아랍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하자르의 기병대는 다리엘 통로나 다르반드 관문을 돌파하여 남쪽의 칼리프국 영토로 쳐들어갔다. 이에 맞선 아랍측 반격군은 동일한 통로나 우회로를 통해 볼가강으로 진격했으나 다시 후퇴했다. 실제 사실을 자주 과장하곤 했던 아랍인들의 사료이기는 하나 그에 따르자면 양측에서 10만명에서 30만명에 이르는 군대가 대치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로마-아랍 전쟁에서 양측이 평균적으로 동원한 전력에 맞먹는 수치이며 적게 잡아도 서유럽에서 같은 시대에 있었던 투르전투의 승패를 가르는데 필요했던 병사들의 수를 압도하는 것이었음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전쟁의 특징 중 하나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광신이었다.일례로 한 하자르 마을은 전체가 항복을 거부하고 스스로 불을 질러 집단자살을 택하거나 밥 알 아브왕의 식수로에 아랍 장군이 독을 풀도록 명령하기도 했다.또한 패주하는 아랍군대가 다시 마지막 일인까지 남아 싸우게 만든 "지옥이 아닌, 천국과 무슬림을 위해 -천국의 기쁨은 성전에서 죽은 모든 무슬림 군인들에게 약속되어 있었다- " 와 같은 전통적인 구호등에서도 이러한 점은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15년간의 전쟁 속에서 하자르인들은 조지아아르메니아를 초토화시키기도 했으며 아르다빌 전투(730년)에서도 아랍 군대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심지어는 칼리프국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에서 절반도 남지않은 거리에 위치한 모술과 댜르바키르(Dyarbakir)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이 훈련된 무슬림 군대가 그들을 가로막았고 이에 하자르인들은 결국 산맥을 넘어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 해에는 당대에 가장 유명한 아랍 장군으로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을 이끌었던 경력이 있는 마슬라마 이븐-압드-알-말리크(Maslamah ibn-Abd-al-Malik)가 발란자르를 점령하였으며, 그 후에는 더욱 북쪽에 위치한 하자르인들의 대도시인 사만다르(Samandar)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침공군은 점령지를 확고히 지켜내지 못했고 또다시 코카서스 이남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아랍인의 마지막 공격은 장차 칼리프가 될 마르완 2세(Marwan II)가 거둔 피루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마르완은 하자르 카간에게 동맹제의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코카서스의 두 통로에 기습공격을 가했다. 하자르 군은 이 첫번째 전투에서 입은 타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볼가강 지역까지 후퇴했다. 이에 카간은 동맹 조건에 대해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완은 자신들이 정복한 다른 나라에게 제시한 조건의 전례에 따라 카간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을 제안했다.

카간은 이 조건에 응하기는 했지만 이는 단지 일시적인 시간벌기에 불과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조건이 충족된 것에 만족한 마르완은 군대를 이끌고 하자르인의 땅을 떠나 트란스 코카시아로 돌아갔는데, 이때 그는 어떠한 수비대나 총독, 혹은 행정기관도 남겨놓지 않고 돌아갔다. 오히려 얼마 후, 그는 하자르에게 남방의 불충한 부족들에 대항한 동맹협정을 제의하기까지 했다.마르완이 그렇게까지 관대한 조건을 내건 이유는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페르시아나 아르메니아,조지아와는 달리 이 사나운 북방의 야만족들을 무력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르완은 시리아와 옴마야드 칼리프 왕국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주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결국 750년에 암살되었다.

이로써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나아가려는 아랍의 시도는 영원히 중단되었다.그리하여 서쪽으로는 페레네 산맥을, 동유럽 방향으로는 코카서스 산맥을 넘으려는 무슬림들의 강력한 협공은 거의 동시기에 각각 저지되었다. 샤를 마르텔이 이끄는 프랑크인들이 갈리아와 서유럽을 구했다면, 마찬가지로 하자르인들은 볼가강과 다뉴브강과 동로마 제국으로 통하는 동방의 진입로들을 지켜냈다고 보아야 한다.

3 유대교 개종

다소 특이한 사항은 투르크계 유목민이 세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740년 경을 기점으로 국교로 유대교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왕과 귀족들의 이름도 요셉, 아론, 다윗같은 유대인의 이름을 쓰게 되었다.

덕분에 하자르 왕국에는 유럽에서 박해받고 쫓겨난 유대인들이 많이 이주해와서 살았다고 한다.

반유대주의자들과 어리석게도 이들의 선전에 속아넘어간 음모론자들은 이 하자르 왕국이 유대교를 국교로 삼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현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하자르 왕국의 후손이며 모두 가짜 유대인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DNA 분석기술이 실용화되면서 모든 유대인 지파들은 정도는 차이의 있을지언정 다들 중동지역의 조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결론이 났다. 더군다나 하자르 왕국이 세워지기 한참 전인 기원후 300년대에 유대인은 이미 유럽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4 신기한 풍속

하자르 왕국에서는 새로운 카간이 즉위하면 신하들이 "폐하께서는 앞으로 몇년 동안 통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카간이 "30년 정도 하겠다."라고 말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카간이 30년 이상 살아서 제위하게 되면 신하들은 카간을 목졸라 죽였다고 한다[2].

그리고 정확한 시점은 명확치 않으나 카간의 권력은 종교 및 의례적인 영역으로 제한되었고 카간-베크(왕-장군)라는 새로운 직위가 생겨나 정치, 군사 면의 실권을 차지하는 이두 정치 체제가 수립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자르인 스스로 남긴 기록이 많지 않아 비잔티움 제국을 무찌른 요셉 벤 아론 왕 같은 경우는 이 왕이 카간인지 카간-베크인지 아직도 학자들 간에 논의가 분분하다.

5 멸망

흔히 10세기 무렵, 북방에서 쳐들어온 루스(러시아)인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오해로 밝혀졌으며 사실은 그 뒤에도 수백년 동안 더 세력을 보존하며 존속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유목제국 중 하나.

6 기타

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의 작가인 유대계 미국인 작가 마이클 셰이본의 소설 '길 위의 신사들(Gentlemen of the road)'은 10세기 하자르 왕국을 무대로 게르만계 유대인인 의사 젤리크만과 에티오피아계 유대인인 전사 아므람이 하자르 왕국의 왕위 계승전에 휘말려 겪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 주요 등장 인물들이 모두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면서 막상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은 아니라는 점이 아이러니.

오랫동안 '카자르 사전' 이라고 알려졌던 소설 <하자르 사전>은 이 하자르 칸국이 국교를 정하게 되는 사건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중 하나)를 모티브로 한다

7 관련 항목

  1. 이때 흩어진 아들들 중 2남 코트라그(장남 바트바얀을 축출)가 이끄는 세력은 볼가 강과 카마 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북상하여 훗날의 볼가-불가리아를, 3남 아스파루크가 이끈 세력은 다뉴브 강 남쪽으로 도피하여 그곳의 슬라브족들과 연합해 훗날의 불가리아 제1제국의 기틀을 다진다.
  2. 여기서 모티브를 따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사이비 종교인 선구의 교주가 여주인공인 아오마메에게 '옛날의 왕들은 일정 기간을 재위하고 후계자를 지명하고 나면 그 밑의 신하와 백성들이 왕을 잔혹하게 살해했다'고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