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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1996년 시즌 전 하와이 전지훈련장에서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이 김응용 감독과 코치진에게 집단으로 항명한 사건이다.
2 사건 요약
2.1 사건 전 배경
사건의 시점이던 1996년 초, 1995년 시즌 후의 해태는 김성한이 1995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 수순을 밟고, 선동열은 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선수로 이적하는 등 여러모로 전력 유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건배 구단주는 선동열의 이적 협상을 문제삼아 노주관 사장과 이상국 단장을 해임시키고 마의웅 사장을 임명한다.
이렇게 프런트가 통으로 물갈이 되는 상황인지라 구단 내부에서는 흔들렸다. 김응용 감독은 인터뷰에서는 "어떻게 이런팀으로 우승을 해, 올해 기대는 접어둬."라고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당시 해태는 방위병인 이종범, 이대진이 복무가 끝날 예정인지라 전력상에서는 꿀리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나름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2월부터 하와이 호놀롤루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러나 당시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코치진은 선수들에게 잦은 폭력과 욕설을 하였고 거기에 빨래까지 맡기는 쌍팔년도 군대식 분위기였다. 결국 훈련 중 선수들의 분노는 쌓여만 가는데....
2.2 사건 발생
2.2.1 1996년 2월 25일 새벽 1시 30분
1996년 2월 25일 새벽 1시 30분, 주장인 이순철의 방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순철은 "어떤 새끼가 밤에 전화질이야." 라면서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장채근 배터리 코치였다. 당시 코치중에서 막내인 장 코치는[1] 김응용 감독의 "선수들 밖에 못 나가게 잘 감시해라" 라는 명령을 받고서 선수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던 것. 이순철은 전화를 받고서, "아니 지금이 몇 시인데, 전화해서 감시 하냐." 라면서 짜증스럽게 받고 끊었다.
가뜩이나 주장을 맡으면서 후배 선수들을 다독거리느라 힘든 판에 미칠 노릇이었다.
2.2.2 1996년 2월 25일 아침 6시
짜증내면서 아침 산책을 나가려는 이순철은 감독과 코치진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결국 화를 참으며 아침 산책[2]을 나가려는데 옆에 있던 유남호 수석코치가, "이 자식 뭘 그거 갖고 성질내냐" 라고 하면서 계속 옆구리를 찌르자, 짜증이 폭발한 나머지 엉겁결에 주먹질을 했는데 유 코치가 뺨을 정통으로 맞았다.
선수들과 코치진들이 뜯어 말렸고 결국 이순철은 산책길의 정 반대로 씩씩거리면서 나갔고 선수들이 이를 따렀다.
2.2.3 1996년 2월 25일 아침 8시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에 간 선수들은 제대로 빡친 상황이었다. 아예 "코치진의 버릇을 고치겠다"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훈련이고 뭐고 거부하고 귀국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윤기두[3] 매니저에게 "코치들이랑 같이 못있겠으니 호텔 옮겨주고 여권이나 내놓으십시오"라고 따진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응용 감독은 직접 식당에 나와서 "이렇게 썩어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은 나가고 싶어도 비행기 표가 없으니 참아달라. 나 1년만 더 하자. 이렇게 끝낼수는 없다." 라면서 선수들에게 눈물로 읍소한다.
당시 최윤범 운영팀장과 윤기두 매니저의 설득에 선수들은 " 그래도 훈련이라도 하자." 라는 자세로 나름 온건하게 나아갔다.
2.2.4 1996년 2월 25일 오후 1시
이 날 청백전의 선발은 강태원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선수단의 분위기는 개판이었고 선수들은 기자들의 눈치도 보여서 훈련을 했다. 그러나 코치들이 "이 따위 놈들과는 훈련 할 생각 없다."라는 말을 하면서 훈련을 거부했다.
김응용 감독이 직접 펑고를 쳐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강태원은 팔꿈치가 아프다는 변명을 하고 청백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부터 기자들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챘으며 선수들은 식사를 위해서 식당에 갔다.
2.2.5 1996년 2월 25일 오후 3시
고참들은 비교적 빠따를 덜 맞았지만 후배들은 많이 맞았다. 이렇다 보니 젊은 선수들은 호텔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순철은 자신의 저지른 사태가 확대되는 일이 생기자 할 말이 없었는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는 이 사태를 절단내지 않겠다는 무언의 메세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강경파인 김정수, 이건열, 조계현, 송유석, 이강철, 홍현우는 강경했고, 선수들은 귀국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윤기두 과장은 선수들을 설득했는데, "팀이 이 사태로 분열되면 너희만 피해본다." "이 사건이 퍼지면 이순철은 야구계에서 영원히 매장될지도 모른다." 라면서 설득했다. 결국 이 설득이 먹혔고 고참선수들은 이를 수용하게 되었다.
결국 선수들은 저녁에 숙소로 돌아갔다.
2.2.6 사건 이후
선수와 코칭스탭은 더 이상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훈련을 끝냈다. 김응용 감독은 선수들에게 강하게 원성을 사던 B 모 코치를 2군으로 내렸다.
어느 고참선수는 "저도 처자가 있는 몸이니, 잘 좀 부탁 드린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6년 해태는 결국 우승하는데 성공했다.
그 러 나
1996년 시즌 후 김응용 감독과 해태의 프런트는 이를 잊지 않고 되갚아 주었다.
- 이순철 : 1996년 당시 해태의 주장이자 이 사건의 주동자였다. 1996년 시즌은 그래도 어찌어찌 주전 외야수 자리를 지켰고 6차전에서 결승득점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97년에 2차 1라운드로 김창희가 입단하면서 급격히 자리를 잃었고, 결국 주장임에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 일로 김응용 감독과 원수를 졌고 1998년을 끝으로 삼성에서 방출되면서 은퇴했다. 그 뒤 삼성코치로 2년간 있었다가 2000년 시즌 후 김응용이 부임하자, 2001년에 연대 선배인 이광은의 부름을 받고 LG 트윈스로 이적했으며, 코치를 거쳐 2004년에 이광환의 후임으로 LG 감독이 되지만 알다시피 6668587667을 이끌어냈다. 그 뒤 엠스플에서 1년간 해설을 했으며, 우리 히어로즈 수석코치로 1년간 재임했다. 다시 엠스플에서 2011년까지 해설을 하다가 2012년에 선동열을 따라서 15년만에 타이거즈에 수석코치로 돌아왔다. 그러나 알다시피 2013년에 타어강이라는 역대급 DTD가 터졌고 결국 2년 만에 해임되었다. 2014년부터 SBS 스포츠에서 해설을 하고있다.
- 송유석 : 1996년에 출전기회를 잡지 못했다. 대신 그 무렵부터 마당쇠로 굴려지던 임창용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결국 1996년 11월에 LG로 트레이드했다. LG 구단에서도 불펜투수로 뛰면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1999년에는 주장이 되었으나 시즌 후 구단과의 FA 협상에서의 이견ᆞ선수협 문제 등으로 LG 구단의 눈 밖에 나 버렸다. 결국 2001년 한화에서 조용하게 은퇴했으며, 이후로는 야구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 이건열 : 1996년은 한국시리즈에 나가서 우승반지를 얻었지만, 1997년은 김응용 감독이 떠오르는 2년차 신인인 장성호를 주전 1루수로 밀어주면서 은퇴를 종용했다. 1997년에 방출되어서 은퇴했으며 2000년에 SK에서 2군코치를했으며 2001년 고교 선배인 김성한 감독이 취임하자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이후 2004년에 팀 선배였던 이순철을 따라서 LG로 갔으며, 2006년까지 외야수비코치를 맡았다. 다시 2007년에 기아로 돌아오나, 서정환의 라인을 쳐 낼때 잘린다. 2008~2009 시즌은 화순고 감독을 맡았으며 2010년 ~ 2012년 시즌은 다시 기아에서
공무원타격코치를 맡으면서 팬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2013년부터 동국대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나름 괜찮은 지도력을 보이고 있다.타이거즈에 해준건 김호령을 추천 해준 것밖에 없다.
- 조계현 : 1996년 시즌은 16승 + 2점대 초반의 방어율로 호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1997시즌은 3점대 후반의 방어율 + 8승으로 전년대비 부진했다. 결국 4억원에 삼성에 팔려갔다. 거기서 불만 지르다가 방출되었고, 김인식 두산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으로 이적했다. 2000~2001시즌은 두산에서 팀의 베테랑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으며, 2002년은 KBS 해설, 2003년 ~ 2005년 시즌은 기아로 돌아와 투수코치를 했지만 투수진 발굴에 실패했으며 해임되었고 2006년 ~ 2009년 시즌에 선동열의 부름을 받아 삼성 투수코치로 갔으나 알다시피 조원수박차를 만들고 역시나 해임. 두산 베어스에서도 무능했다는 평을 받았지만 2012년 ~ 2014년에 LG 수석코치로서는 나름 괜찮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2015년부터 수석코치가 되어 다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이 기간 모두 김기태 감독의 수석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 김정수 : 1996년은 선동열의 후임 마무리로 뛰면서 잘했지만, 1997년 ~ 1999년 시즌은 4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김정수를 빼면 좌완투수가 강태원 밖에 없었기에 계속해서 기용되었다. 그 뒤 1999년에 FA를 신청했으나 구단에서 FA를 거부해, 울며 겨자먹기로 재계약했다가 SK로 트레이드 되었고 SK에서 방출되어 한화 이글스로 갔으며, 좌완 불펜으로서 잘해 주었다. 2003년에 다시 SK로 와서 은퇴했으며, 그 뒤 2004년 ~ 2005년은 한화의 2군 투수코치, 그리고 2006년 이래로 계속 기아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 다만 키운 투수도 없고, 1군 코치시절의 삽질도 있는지라 철밥통 취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