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석

이름송유석(宋裕錫 / Yu-Seok Song)
생년월일1966년 7월 16일
출신지전라남도 고흥군
학력고흥대서남초[1]-고흥대서중-진흥고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5년 해태 타이거즈 신고선수 입단
소속팀해태 타이거즈(1985~1996)
LG 트윈스(1997~1999)
한화 이글스(2000~2001)
등번호13(해태 타이거즈)
21(LG 트윈스)
LG 트윈스 역대 주장
김동수
(1998)
송유석
(1999)
김선진
(2000)
LG 트윈스 등번호 21번(1997~1999)
강봉수 (1994~1996)송유석(1997~1999)경헌호 (2000~2012)

1 소개

해태 타이거즈, LG 트윈스, 한화 이글스의 투수. 프로야구 초기 노예이다. 별명은 마당쇠.

2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5년 해태 타이거즈신고선수로 입단했다. 대표적인 별명은 마당쇠였는데, 그 이름대로 중간계투, 마무리도 했고 땜빵 선발로 롱미들맨도 하는 등 그야말로 보직을 가리지 않고 투입된 투수였다. 정현욱에 앞선 원조 노예.

본래 투창선수를 하다가 야구로 전향했던 탓에 투구 폼이 특이했다. 다른 선수들이 공을 던진다는 느낌이었다면 송유석은 창을 던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공을 내리꽂는다라는 느낌으로 던졌다.[2] 게다가 앞발을 굉장히 힘차게 내딛었다. 이런 특이한 동작 때문에 타자들은 타이밍을 맞추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신고선수로 입단한 뒤 배팅볼 투수로 뛰면서 실력을 가다듬다가[3] 1987년에 1군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1990년부터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시작, 1991~1995년에 전성기를 맞아 이 시기에 5년 연속 110이닝 이상을 투구하면서 해태 투수진의 허리를 책임졌다. 간간이 땜빵 선발로 나오기도 했지만 선발 출장 횟수는 10번을 넘긴 적이 1993년을 제외하곤 없었다. 마무리를 하던 선동열에 앞서서 나왔기 때문에 현대 야구의 개념으로 따지자면 셋업맨이 되겠지만 당시로선 그런 개념은 없었으니... 뒤늦게 생긴 홀드 제도의 빛을 못 본 케이스.

특히 1993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송유석은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이날 삼성은 에이스 박충식, 해태는 문희수를 선발로 예고했는데 김응용 감독은 문희수가 불안하다고 판단해 3회 2사 1,2루에서 문희수를 강판하고 선동열을 등판시켰다. 삼성 팬들의 눈에 가시같았던 선동열은 기대대로 연장 10회말까지 7과 3분의 1이닝을 호투했지만 결국 11회에 내려가고 말았다. 선동열이 내려가는 순간 삼성팬들은 승리를 예감하고 환호를 질렀지만...

11회에 등판한 선수는 바로 송유석. 특이한 폼 때문에 전날 온 비로 인해 마운드에서 미끄러질 우려가 있었던 송유석은 땅이 거의 다 마른 상황에서 등판해 15회까지 무실점 투구를 보여주며 비록 팀이 승리하지는 않았어도 패배하지도 않게 호투했다. 이때 해태와 삼성은 1승 1패를 주고받고 있던 상황에다 삼성은 박충식이 불가사의한 투혼을 발휘해 구원투수를 쓰지 않은 상황이라 만약 여기서 해태가 지기라도 했다면 한국시리즈의 균형추가 삼성에게로 급속하게 넘어갈 상황이었기 때문에 송유석의 호투는 의미가 있었다.[4]

선동열이 빈볼 투수의 조건에 대해 밝힌 바 있는데, 배짱과 제구력 그리고 연기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과거에는 송유석이 그런 투수였으며, "송유석은 두둑한 배짱을 지닌데다 뛰어난 제구력까지 갖고 있었다"고 평가한 뒤 "타자와 몸쪽 승부를 즐겼는데 가끔 몸에 맞는 공을 던지기도 했다. 그래서 고의로 몸을 맞춰도 표가 안났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송유석은 1996년 시즌을 마친 후 LG 트윈스최향남, 동봉철과 함께 최훈재, 조현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원인은 1996년 2월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일어났던 항명사태. 이때 송유석은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이건열과 함께 야구를 그만두겠다면서 짐을 싸는데 동참했고 그 결과 김응용 감독에게 찍혀 트레이드된 것이었다.

3 LG 트윈스 ~ 한화 이글스 시절

LG에서도 중간계투로 그럭저럭 활약해주었지만,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말 그대로 불을 지르기도 했었다.[5] 그 뒤 1999년에는 LG 트윈스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시즌 후 FA를 신청했지만 방어율이 4.72로 불안정해[6] 노쇠화의 기미가 보였고, 과거 혹사 덕분에 성적이 하락세를 탈 것으로 보여 FA시장에서 FA 미아가 되어 LG와 1년, 연봉 5000만원에 울며 겨자먹기로 계약했다. 해태 시절 팀 동료인 이강철이 3년 8억이라는 FA계약으로 삼성에 이적한 것을 생각하면 안습(......)[7]

하지만, LG 구단에서는 송유석을 쓰지않고, 2000 시즌 전에 최익성을 상대로 신국환과 묶어서 한화로 트레이드 했는데, FA를 신청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베테랑인 김기범과 같이 선수협에 우호적이었다는 점에서 구단에게 밉보였던 것이 크다.

당시 불펜진이 시망이던 한화로 이적했고, 2000시즌은 제법 이닝도 먹어주었지만, 노쇠화의 여파로 5.34라는 한화의 흔한 불펜스러운(...) 성적을 내는데 그쳤다. 그리고 2001시즌은 1군 4경기 3이닝 12점대 방어율을 찍었고 그해 6월에 웨이버 공시되었다. 그 뒤 소속팀을 찾지 못했고 그대로 은퇴하게 된다.

4 은퇴 후

은퇴 이후 건설업을 하고 있으며, 광주 CMB의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 중이다.

그의 아들 송원호 군도 배명고에서 야구를 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동국대에 진학했으나 중도에 야구를 쉬었다. 2013년 KIA 타이거즈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가 그 해 방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학교 후배인 김진우에게 싱커를 전수해주었다고.

5 역대 성적

역대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이닝 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87해태 타이거즈415⅔00002.8718104
1988315⅓10003.521665
1989316⅔00005.942338
1990349821203.77905362
199137145⅔114502.971267074
199237117⅓410405.601465859
199339124⅓116102.901095667
199441116⅓108703.401215457
199542120⅔103302.981074951
19964171⅓21304.29744232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97LG 트윈스4778⅓27104.37864141
1998559133302.97923044
1999528253504.72873351
년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2000한화 이글스386414225.34705621
200143000012.00441
통 산4671159⅔62503623.841169565577
  1.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교됐다고 한다.
  2. 메이저리그 투수인 팀 린스컴의 투구동작 역시 투창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실제로 비슷한 편.
  3. 같은 팀의 고참 김성한이 타격감에 문제가 있을 땐 당시 송유석을 일찍 불러서 배팅볼을 던지게 하고 짬뽕 한 그릇을 사줬다고 한다. 땀과 눈물의 짬뽕을 먹으며 제구력을 갈고 닦을 수 있었다.
  4. 이날 해태가 졌다면, 연속우승 신화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엇다. 1승1무2패와 1승3패는 다른 것이다.
  5. 다만 천보성 감독이 한국시리즈 매 경기마다 송유석을 등판시켰고, 정규시즌에서만 100이닝 가까이 소화한 30대 중반의 불펜투수가 가을야구에서도 혹사당한걸 생각해보면, 잘 하기는 쉽지는 않다.
  6. 다만 1999년에 LG 투수진이 개발살 난 걸 생각해보면 차라리 재계약을 하는게 나을 지도 몰랐다.
  7. 정작 이강철은 삼성에서 7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선발,불펜 어디에도 쓸모없는 선수였다. 결국 2001 시즌 중반에 다시 기아 타이거즈로 이적했으며 2002~2004시즌은 핵심 불펜으로 뛰면서 통산 150승을 달성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