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이에서 넘어옴)

상위 문서에 대해서는 과학사 관련 정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동명의 일본 밴드에 대해서는 Galileo Galilei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조명한 오페라에 대해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필립 글래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이름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1]
생몰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
출신이탈리아 토스카나 대공국의 피사
종교가톨릭
역할물리학자이자 수학자, 그리고 천문학자
그래도 지구는 돈다!”[2]

- 갈릴레오 갈릴레이

뉴턴 역학의 토대를 만든 물리학자[3]
상대성 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물리학자

1 생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피사의 몰락 귀족인 피레네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빈첸초는 의류 교역업자이자 음악이론가이기도 했는데, 호전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종종 지적 권위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표현했다. 이런 성격은 아들 갈릴레오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갈릴레오의 집안은 귀족 집안이었지만, 그가 태어났던 때에는 가세가 기울고 생활이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갈릴레오는 10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사했고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3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수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집안의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갈릴레오가 보수가 많은 직업인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의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 피사 대학으로 보냈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의학보다 수학에 흥미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경제적 궁핍함으로 인해, 4학년 때 대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1585년 피렌체로 돌아가 개인적으로 연구를 계속하면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쳐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갈릴레오는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몇몇 대학에 편지를 보냈고 결국 피사의 모교에서 수학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대신 보수는 형편없었다.[4]

피사 대학에서의 교수 계약이 끝나자, 갈릴레오는 다시 심각한 재정 곤란에 빠졌다. 159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인 그에게는 가족들을 부양할 경제적 책임이 주어졌다. 여동생들이 결혼하여 출가하자 갈릴레오는 자신이 몇 년 동안 모아둔 월급을 탈탈 털어서 혼수를 준비해줘야 했다.

1592년 갈릴레오는 파도바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18년 동안 재직하며 기하학, 천문학, 군사기술 등을 가르치며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부양할 가족들이 갈수록 늘어났기 때문에 그의 경제적 궁핍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추가 수입을 얻기 위해 유럽 전역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개인지도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피렌체의 지도자 페르디난트 대공의 아들인 코시모 데 메디치도 있었다.

1609년 갈릴레오는 당시 막 개발되었던 망원경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망원경의 개량에 착수했고, 1609년 후반부터 1610년 초에 걸쳐 밤하늘을 관찰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몇 가지 주장을 공표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목성의 위성을 통해 우리는, 지구가 1년 주기로 태양 주위를 회전하고 있으며, 다시 그 지구 주위를 달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거부하고 우주의 이러한 체계마저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잠재울 수있는 강력하면서 우아한 주장을 갖는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눈앞에는 지구 주위를 도는 달처럼 목성의 주위를 배회하는, 그리고 그들 모두 12년의 공간을 태양 주위로 대회전하는 궤적을 밟는 4개의 별이 펼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갈릴레오의 저서 <시데리우스 눈치우스 Sidereus Nuncius> 中)

이 발견은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기존 관념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쉽게 구성되었고 이탈리아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550판까지 인쇄되었다. 갈릴레오는 이 책을 피렌체에서 메디치 왕가의 점유자이자 토스카나의 4번째 대공인 코시모 2세에게 헌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가에 전해오는 상징과 결합시켜 '메디치 성'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당연히 토스카나 궁정의 막강한 후원을 얻기 위한 계산적인 아부행동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수석 수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면서, 드디어 갈릴레오는 진저리나는 대학 체제에서 벗어나 엄청난 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손에 쥔다.

1611년, 로마에 도착한 갈릴레오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접견했다. 교황청은 이 저명한 학자를 환영했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하였다. 교황을 접견하는 이는 누구라도 교황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교황은 그 전통을 깨고 갈릴레오를 무릎 꿇게 하지 않았다. 당시 교황청의 주도 세력이었던 예수회 또한 갈릴레오의 주장을 지지했다. 갈릴레오는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곳에서 강연하며 지냈다.

하지만 반대세력도 당연히 존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이에게 끊임없이 태클을 걸었다. 개중에 토마소 카치니라는 도미니코회수도자는 종교재판소에 갈릴레오를 이단 혐의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종교재판소는 조사에 착수했지만 카치니의 주장이 근거없다고 판결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단,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를 갈릴레오에게 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갈릴레오도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고 <크리스티나 대공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코페르니쿠스 가설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철학자들을 피상적이며 불성실한 종교적 열성을 가진 천박하고 저속한 저자로 공격했다.

토마소 카치니가 갈릴레오에 대한 공격을 하고 나서 1년 뒤,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향했다. 자신을 방어하고,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그들의 의견이 잘못되었음을 개인적으로 로마 당국에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이 당시 로마의 분위기가 갈릴레이의 1차 방문 때와는 달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인해 교황청은 '새로운 것'에 민감한 상태였고, 갈릴레오의 주장이 물리학과 수학의 한계를 넘어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자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든다고 여겨 그를 만나기를 꺼려했다.

갈릴레오는 침묵하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논쟁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교황청은 모든 성서 해석에,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교황청의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행동에 매우 민감했다. 개인이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개신교 개혁론자들의 주장과, 성서는 코페르니쿠스의 가설과 일치할 수 있도록 재해석해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은 교황청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보였다. 저명한 신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벨라르민 추기경은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을 설파하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권했고 갈릴레오는 그것을 받아들여 그만두었다.

갈릴레오는 수년 동안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공공연히 가르치고 옹호하는 것을 자제했다. 이윽고 1624년 봄, 새로운 교황인 우르바노 8세의 즉위 축하식에 참여하기 위해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출발했다. 우르바노 8세는 예전부터 갈릴레오와 절친한 사이였다. 새 교황과 갈릴레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갈릴레오가 환대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메달 2개와 그림, 그리고 아들 빈센초를 위한 교회 장려금을 포함한 많은 선물을 교황에게 받고 로마를 떠났다.

1633년,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될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나쁘고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곧바로 가택연금으로 감형을 받았다. 3년의 금고형을 지냈는데, 한번은 위에서 언급된 토스카나 대공의 저택에서 지내다가 그다음은 시에나의 대주교의 자택에서 손님으로 지내다가 그다음엔 피렌체 근처의 아르체트리라는 작은 시골에서 국가 연금을 받으면서 평온하게 연구에 전념하며 살았다.

늘그막에는 노환으로 실명상태가 되었는데 1642년 1월 8일 찾아온 두 제자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쓰러져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 때 제자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지않나하여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숨을 거둬서 유언이 제자들과 나누던 평범한 대화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토스카나 대공은 갈릴레이를 기리기 위해 산타크로체 성당 본당에 묻고 성대한 기념비를 세워주려했지만, 교황청은 갈릴레이를 평범한 시민으로 부속 예배당에 묻을 것이며, 아무런 허례나 예식을 갖추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했다[5]

2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그의 생애에 대한 흔한 인식 중 하나는, 그가 '종교적 반지성과 싸운 과학의 순교자'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큰 오해이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천동설은 가톨릭의 교리가 아니었고
  2. 당시 종교재판은 '지동설이 맞는가, 틀리는가'가 아니라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야기된 사태들'이 관심 대상이었다.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우선 천동설의 경우, 당시 교회가 이를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리로써 천동설을 진리로 생각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자연철학자(훗날의 과학자)들의 영역이었지 종교의 영역은 아니였으며, 중세의 사람들도 당연히 성직자의 능력밖임을 알고 있었다. 교회가 천동설을 가르친 것은, 어디까지나 중세의 교회가 교육, 복지 등등을 모조리 담당하는 공공기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천동설을 가르쳤다는 것은, 중세의 교과서에 천동설이 사실로 나왔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가지지 못한다. 물론 천동설이 신학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에게 나름의 사유대상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천동설과 지동설 둘 중에 그들 개개인의 호오는 있을 수 있겠으나 딱 여기까지이다.

그렇다면 교황 우르바노 8세가 그를 종교재판으로 몰아세운 것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는 당시에 유럽을 뒤흔들었던 시대적 배경인 종교개혁과 연결해서 생각하여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톨릭 내부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 문제에 갈릴레이가 연루되고, 여기에다가 그의 저서들이 교회를 풍자한다는 소문까지 도는 등, 여러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즉 애초에 종교재판의 주제는 '지동설이 맞냐 틀리냐'가 아니었고, 성직자들은 당연히 이것을 판단할 권한도 능력도 책무도 관심도 없었다. 재판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초래한 여러 상황들'이었다.

사실 우르바노 8세는 갈릴레이와 절친한 사이로, 교황이 되기 전 있었던 논쟁에서 갈릴레이를 변호한 적이 있다. 그 외에 지동설과 관련하여 교황청 주관의 공개 토론회을 열었다고. 당시 가톨릭 내부에선 '지동설이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면 지동설을 인정해야 하지 않나'라는 분위기가 있었다.[6] 갈릴레이가 책을 출판하기로 한 것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그가 교황이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괜찮다고 판단한 것과, 당시 가톨릭 내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각에선 갈릴레이가 가톨릭의 근본교리 중 하나인 성체의 실체변화(성변화)을 부정한 탓이라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가톨릭과 길릴레오의 관계에 대해서는 갈릴레오의 저서 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에 나오는 다음 내용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몇 년 전에 로마 교황청은 지구가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의견을 금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위험한 사조를 막기 위한 온당한 조치였다. 이 칙령이 분별 있는 심리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격정에 의해서 잘못 내려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솔한 사람들이 있다. 천문학 관측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성직자들이 성급하게 금령을 내려서 지성적인 사색을 방해하고 있다는 불평이 있다.
이런 오만하고 무례한 불평을 듣고,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현명한 결정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 넓은 무대에 나서서 진실을 증언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 나는 로마에 있었다. 재판정에서 가장 높은 고위 성직자가 나를 반겨 주었으며, 그들은 나를 칭찬해 주었다. 그들은 그 칙령을 미리 내게 알려준 다음에 공표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이탈리아, 특히 로마에서도 이 문제애 대해 외국 못지않게 잘 알고 있음을 밝히겠다. 알프스 너머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모든 사항을 다루겠다. 이 모든 것들은 로마의 검열을 거쳤음을 밝힌다. 우리도 지적 즐거움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으며, 매우 교묘한 이론을 발견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을 보이기 위해서 나는 이 책에서 코페르니쿠스 편인 것처럼 꾸몄다. 순수한 수학 이론으로서 지동설이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론에 비해 더 낫다는 점을 조목조목 밝혔다. 그러나 그게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일부 소요학파 철학자들의 주장에 비해 낫다는 말이다. 사실 이 사람들은 걷지도 않으니 소요학파라는 이름을 붙일 값어치조차 없다. 그들은 그늘을 숭배하며, 정당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색을 하지 않고 몇몇 그릇되게 이해한 원리들을 바탕으로 철학을 전개한다.
(중략, 이 이후로는 지동설의 근거를 다루고 있음)

실제로 갈릴레이는 한때 수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저작에서 '성서와 자연은 모두 성스러운 말씀에서 생겨났습니다. 전자는 성령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고, 후자는 하느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집행한 결과물입니다' 라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한다.

물론 당시 가톨릭 내부의 정치적인 배경 때문에, 저명한 학자가 불이익을 본 것은 사실이기에 이는 당시 교회 구성원들의 병크로 오래오래 회자되었다. 결국 1979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이 재판을 재심하라고 지시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온 갈릴레이와 지동설은 1980년 교회가 갈릴레이에게 오심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1992년 10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 교황 과학원에서 갈릴레이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다시금 인정함에 따라 사후 350년만에 명예가 회복되었다.

3 업적

아이작 뉴턴이 말하길, "내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봤기 때문이다."의 그 거인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람.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렇지만 물리학자로 보는 건 뉴턴에 의해 고전물리학이 성립된 이후의 사후적 평가이다. 당대에는 저명한 수학자였으며, 직업면에서도 수학자로 커리어를 쌓았다. 당시에 수학자는 천상이자 논리의 학문인 천문학보다 한 수 아래로 취급되었고, 이에 갈릴레오의 업적은 직업면에서는 평가하자면 이런 경향에 반대하여 수학적으로 천문학의 원리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피터 디어, 2011. <과학혁명>, 뿌리와이파리)[7]

당시 진리라고 여겨졌던 "천동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저서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을 통해 "지동설"을 주장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종교 권력에 대항한 과학의 순교자 정도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자세한 건 천동설 항목 참조.

다만 갈릴레오는 지동설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발견하진 못 했다.[8] 당시 지동설이 완전히 인정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지구가 정말 움직인다면 사람들이 왜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어서였다. 갈릴레오도 이에 대한 대답은 못 했고, 저서에서는 그저 천동설 지지자 = 얼간이라는 표현으로 일관했다. 밀물/썰물의 원인에 대해서는 매우 황당하게 적어놓기도 했다. 또한 '지구가 움직인다면 우리가 제자리에서 점프하면 왜곡된 궤도로 움직일 것이다'는[9] 비판에 대해서도 '너는 움직이는 함선에서 점프하면 다른 곳에 착지하냐?'는 정도의 말만 하였을 뿐 과학적으로 이를 설명하진 못했다. 그리고 우주에서는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지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동설의 증거는 원주시차가 될 수 밖에 없는데 당시 관측 장비로는 이 미세한 차이를 잡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의 지동설도 천체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설명하진 못 했는데, 이는 행성들이 원 궤도가 아닌 '타원' 궤도를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오류는 결국 나중에 케플러가 해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왜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함이 합당한가'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합리적 설명을 하지 못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의거하여, 천체는 에테르라는 지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져있다고 보았으며, 지상계와는 전혀 다른 논리체계를 적용하여서 해석하였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서 지상계의 먼 곳을 관찰해보니,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흡사했습니다. 아마도 천상계 역시도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라고 하였을뿐, 어째서 망원경으로 관찰한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과 흡사한지 논리적으로는 입증할 수 없었다.[10] 다만 이러한 사례가 갈릴레오가 가진 학자로써의 위대함을 절하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유명한 일화로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실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 라는 통설을 깨기 위한 것으로, 피사의 사탑에서 무게가 무거운 추와 가벼운 추를 동시에 낙하시켜서 두 추가 동시에 지면에 떨어지는 것으로 증명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으로, 당시(사실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질량이 2배 무거운 물체는 다른 물체보다 2배 빨리 떨어진다는 것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이런 관념이 제대로 된 실험 없이 그냥 "그런 것 같으니까" 통용되었다는 것.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이러한 "통념"들을 깨부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즉 직관과 이성에 의지해 세상을 파악하는[11] 기존의 지식 체계에서 벗어나 경험과 실증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초석을 다졌으며, 당시까지 '자연 철학'이라는 철학의 한 갈래에 불과했던 학문이 제대로 된 '과학'으로 발전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것에 무엇보다 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위의 일화는 현재는 사실이 아닌 일화로 알려져 있다. 갈릴레이가 한 실험은 위와 같은 것이 아니라 고도의 사고 실험이었다.

"만약 무거운 물체가 먼저 땅에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서로 연결해서 떨어뜨리는 경우를 고려해 본다면, 무거운 물체는 빨리 떨어지려 하고 가벼운 물체는 그보다 늦게 떨어지려 할 것이므로, 그 결과는 처음의 무거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늦고, 가벼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빨리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물체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전체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서 더욱 빨리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도 나온다. 하나의 가정에서 이처럼 상반된 두 결론이 나왔으므로, 그것은 애초의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거운 물체나 가벼운 물체나 동시에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수학적 증명 中》

즉 갈릴레이는 실험 과학자라고는 보기 힘들다. 이런 거짓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은 아마도 갈릴레이의 제자 비비아니가 이야기를 지어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보다 3년 빠른 1587년에 시몬 스테빈이 해당 일화와 비슷한 실험을 했는데 이걸 갈릴레오가 책에서 한 말과 섞어서 만들어낸 일화라는 소리. (물론 스테빈도 피사의 사탑에서 저 실험을 한 건 아니다.)

갈릴레이가 실험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고 길다란 판자에 홈을 만들어 놋쇠의 철구를 굴려 낙하에 필요한 시간을 측정하여 이론을 세웠다. 그러나 과학사학자인 버너드 코헨은 "이 실험은 갈릴레이가 실험 결과를 사전에 얼마나 확고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실험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다. 뭣보다 저 때 시간 측정을 자기 맥박으로 했으니까.[12]

어찌됐건 갈릴레이의 이론은 아이작 뉴턴에 의해 후일 증명된다.

그 후 아폴로 15호의 승무원들이 달에서 이 실험으로 이를 입증했다.



당시 실험 영상. 한손에 망치를 들고 다른 한손에 깃털을 들어 동시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후 BBC에서 NASA의 세계 최대 규모의 진공 실험실을 방문해서 실험한 영상 (2분 45초부터)


스스로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체를 관찰했으며 목성의 4개의 위성을 비롯한 수많은 위성과, 태양계의 일부 행성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당시 파도바 지방의 수학교수이던 갈릴레오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가에 전해오는 상징과 결합시켜[13] 궁정의 후원을 얻었다. 참고로 당시 갈릴레오의 연봉은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싸바싸바를 잘해야(…)[14]

그와 관련하여 유명한 건 지동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야기된 여러 상황들 탓에 종교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으며[15] 어쩔 수 없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때 재판장에서 나가면서 한 말이 상기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전해진다.[16]

관성을 말한 것도 이 사람이다. 이는 대부분 사람들이 지동설을 반박할 때 "만약에 지구가 움직인다면 항상 강한 바람이 불어야 하는데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갈릴레이는 공기역시 (움직이는 배에 탑승한 사람처럼) 지구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강한 바람이 없는게 당연하다면서 이런 반박을 재반박하기 위해 관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이 말이 맞는지는 확인 바람.) 또한 갈릴레오는 진공에서 움직이는 물체에 힘을 주지 않으면 물체가 스스로 원운동을 한다고 주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추가바람.

그외에도 최초로 온도계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지금처럼 정확한 온도계는 아니고 초기 수준의 온도경인듯.

4 성격

당시 대단한 독설가로도 유명했다. 일생 내내 삐딱한 태도를 유지하고 논쟁을 즐기며 문제를 일으키는 타입이었다.흔한 키보드워리어 근데 이론물리학자가 키배말고 할게 뭐있겠어 그의 편지에서는 '내 말을 이해못하는 무식한 것들 때문에 짜증나죽겠다'는 식의 불평이 여러번 발견된다. 대표적인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면

  • 대학 학생 시절부터 그는 강사들과 하루가 멀다하고 싸워서 '논쟁꾼'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갈릴레오와 대학의 관계는 한번도 원만한 적이 없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교편을 잡아 온 강사들을 조롱하고 비판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낡은 생각을 양처럼 고분고분 받아들인다고 동료 학생들을 비난했다. 그의 이런 반골 기질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아서 기존 학자들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 1591년 갈릴레이가 피사 대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하던 무렵 그는 강한 주장과 급진적인 과학 의견 때문에 동료 교수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그는 특유의 거만한 태도로 선배들을 조롱하며 그들이 구식 사고 체계에 노예처럼 매여 있다고 비난했는데, 비난이 지나쳐서 무모한 지경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갈등을 빚은 교수들이 일부러 갈릴레이의 수업에 학생들을 심어둬서 질문 공세를 퍼부으며 수업을 교란하는 일도 있었다.
  • 1592년에 페르니단도 1세 대공이 피사에서 가까운 리보르노 마을의 항구를 개량하는 대규모 기술 사업을 승인하면서, 아버지 코시모 1세의 서자인 조반니 데 메디치가 발명한 기계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근데 갈릴레이는 이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거라면서 대놓고 깠다(...) 이건 곧 발명가인 조반니 데 메디치를 비난한거나 다름없었고 메디치 가는 피사 대학교의 든든한 후원자였다.스폰서를 까다니 패기 보소 1592년 가을 갈릴레이는 계약이 끝나자마자 대학에서 해고당했다.
  • 본격적으로 교황청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을때 갈릴레이는 로마에 찾아가 이 집 저 집 다니며 수십명의 사람과 논쟁을 벌였다. 피렌체 대사인 구이치아르디니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는 열정적으로 싸움에 몰두해서, 주변 상황을 전혀 보거나 느끼지 않는다……이것은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키배 좀 작작떠라며 탐탁치않게 생각하는 기록을 남겼다.
  • 갈릴레이는 교황청과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가설 이상으로는 가르치거나 쓰지 않겠다'고 흔쾌히 약속했고 갈등은 일단락됐지만 이후에도 로마에 남아 사람들과 논쟁을 계속했다(...). 구이치아르디니는 갈릴레이의 후원자였던 코시모 2세에게 '갈릴레오는 수도자들과 고집을 겨루고, 공격했다가는 자기만 망할 것이 뻔한데도 명사들과 다툴 기세입니다. 그가 미친듯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는 소식을 피렌체에서도 곧 듣게 되실 겁니다'저놈 키배 좀 그만 뜨라 하세요 편지를 썼고, 코시모 2세는 갈릴레이를 피렌체로 다시 소환했다.
  • 갈릴레이는 조석 현상에 대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조석 현상이 지구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는데, 당시에도 조석 현상이 과 지구의 인력 때문이며 지구의 공전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무덤에 갈때까지도 이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 갈릴레이가 재판에 회부되고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교황청이 부추기지 않아도 많은 학자들이 얼씨구나 들고 일어나서 그를 공격했다. 갈릴레이가 그동안 적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5 에피소드

파도바에서 생활하던 무렵 갈릴레오는 마리나 감비나라는 여인을 만나 1남 2녀를 낳았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집을 구해주고 가족의 뒷바라지를 해주었을 뿐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았다.[17] 결국 1610년 갈릴레오가 피렌체로 떠날 때 그들의 관계는 끝났고, 두 딸은 피렌체 근처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살아서는 떠날 수 없는 종신 수녀원이었다.[18] 아들인 빈센초는 그나마 처지가 나았다. 갈릴레오는 빈센초의 교육비를 부담하고 결혼 후 신혼집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경제적 의무는 다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큰딸 버지니아는 수녀원 생활에 잘 적응했지만, 작은딸은 심리적으로 고통을 받았고 종종 정신적&육체적인 발작을 보이곤 했다. 이에 대해 버지니아와 갈릴레오가 주고받은 여러 통의 편지가 지금까지 보존되었고, 이를 토대로 연구한 <갈릴레오의 딸>이라는 서적이 나오기도 했다.

망원경을 접한 갈릴레오는 파도바로 돌아오자마자 3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었고. 곧 그것을 개량하여 8배율의 망원경으로 진척시켰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로원을 초대하여 망원경의 효율을 설명했고 감동한 원로원은 많은 선물과 함께 갈릴레오의 교수 연봉을 2배 인상했다. 하지만 이미 망원경은 몇몇 유럽 국가에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나중에 이것을 알게 된 원로원은 인상된 월급을 지급하지 않았고 갈릴레오의 월급이 앞으로도 영원히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명문화했다. 임금동결

6 케플러와의 관계

갈릴레오와 동시대 인물이자 똑같이 지동설을 지지했던 요하네스 케플러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천문학자이며 갈릴레오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는 갈릴레오의 학술을 지지하는 논문과 저서를 여러 개 발표했고 자신의 모든 출판물을 보내며 논평을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통수를 치고 케플러의 요구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갈릴레오가 대체 왜 그랬는지는 과학사의 커다란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자신과 경쟁 상태에 있는 다른 천문학자의 생각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 갈릴레오의 오만함 때문이거나, 가장 우아하며 가장 아름다운 대칭을 보여주는 ''에 집착하느라[19] 일부러 무시했다는 추측도 있다. 갈릴레오는 '모든 자연운동은 원형'이라고 강하게 믿었다.

7 남동생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갈릴레오에게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미켈란젤로로 풀 네임은 미켈란젤로 갈릴레이(Michelangelo Galilei, 1575-1631)이다. 약 100년 전에 활동했던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동명이인이다. 형 갈릴레오와 11살 차이가 나는 어린 동생으로, 당시 유명한 작곡가이자 음악 이론가였던 아버지 빈첸초의 뒤를 따라 작곡가가 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이었지만 주 활동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바이에른폴란드였다.

그는 20대 초반에 폴란드로 가서 그곳의 한 재력있는 귀족 집안에 고용되어 일했다. 한편 그는 고향 피렌체를 다스리던 메디치 가문의 궁정 음악가에 지원했지만 여러 번 고배를 마시면서 그냥 쌩까고 취업난은 역사가 깊다 일터가 있던 폴란드에서 한동안 일하다가 뮌헨의 한 공작에게 고용되어 그곳으로 일터를 옮겼다. 그 후 그는 8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정력 좋소 형은 정식으로 결혼도 안했는데

그의 음악은 힘차고 웅장한 음율이 특징이며, 즉흥적이고 빠른 음색이 특징인 토카타(toccata) 형식이 주를 이룬다. 미국의 음악가 폴 베이어(Paul Beier)가 미켈란젤로가 1620년 펴낸 악보집인 'Il primo libro d'intavolatura di liuto'를 음반으로 제작했다.

쾌활하고 진취적인 그의 음악성과는 달리 그는 그의 형 갈릴레오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갈릴레오에게 너무 많은 돈을 빌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갈릴레오와 주고 받은 편지들에 따르면, 그는 그의 아들[20]의 사정이 어려움을 들어 형에게 자주 돈을 빌리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감성팔이

8 이름의 표기법

믹서기에 갈릴레오

대한민국에서 과거에는 그의 이름을 갈릴레오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근래에는 갈릴레이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는 영어의 영향이다.

갈릴레오의 이름을 포함한 많은 이탈리아식 이름은 -o가 이름이고 -i가 성인 조합이 많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Silvio Berlusconi, Benitto Mussolini. 이는 이름은 단수형이고 성은 복수형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갈릴레오는 이름이고 갈릴레이는 성이다.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호칭이 아닌 공식적인 호칭에서는 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갈릴레이가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는 성이 아닌 이름으로 표기하는 것은 존경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예컨대 유명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일반적으로 '미켈란젤로'라고 부르지 '부오나로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라고 부르며, 일본대한민국에서도 갈릴레오라고 표기했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갈릴레이라고 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단 위키피디아나 NASA 목성 탐사선처럼 Galileo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근래에 대한민국에서도 갈릴레이라고 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은 영어 자료의 영향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인지 갈릴레이 갈릴레오인지 헷갈린다헷갈릴레이

9 트리비아

가끔 갈릴레이가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는 잘못된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있다.[21] 참고해두자면 지구가 둥글다는 건 아리스토텔레스가 훨씬 전에 주장했으며, 중세의 종교성상물에서도 땅이 '사과처럼' 구형으로 표현되곤 한다.

무언가를 주장할 때는, 책 속에서 가공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서로 다른 견해를 취하게 함으로써 토론을 붙이는 기법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의견에 맞장구를 쳐주는척 하다가 신랄하게 깎아내리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파이어아벤트라는 철학자가 갈릴레이의 이론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저작을 주로 이탈리아어로 썼는데 이것이 라틴어를 쓰던 천동설 에 비해 대중에게 친숙하게 인식되어 갈릴레이의 이론이 큰 호응을 얻었다는 주장이다. 즉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순전히 사회적 이유라는 건데 이런 주장이 결국 과학전쟁으로 이어진다. 나중에는 같은 인문학 계열의 차머스가 갈릴레이의 이론이 널리 퍼진 이유는 풍부한 증거와 설득력있는 주장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면서 사장된다.[22]

오늘날의 대중들에게는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순교자 정도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건 어느정도 왜곡된 생각이다. 위에서 언급됐듯이 갈릴레이는 성공을 위해 메디치 가에 아부할 정도로 권력과 밀착한 인물이었고, 압력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교황청에서는 자기 입으로 주장을 번복했다. 고문당한 적도 없고 죽지도 않았으며 말년까지 좋은 대접을 받으며 살다 갔다.

갈릴레오가 고문당했다는 생각은 데이비드 브루스터라는 19세기 과학자가 쓴 <과학의 순교자>라는 책에서 시작되었다. 갈릴레오는 형식적인 고문의 위협을 받았을 뿐으로 어떤 문헌에도 고문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설로는 갈릴레이가 당한 경험은 각종 고문기구들을 견학하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혹은 갈릴레이 지동설을 주장하기 10여전 쯤에 죠르다노 브루노라는 수도자가 우주의 별들이 또 다른 태양과 지구일꺼라고 전 유럽을 떠돌면서 주장하다가 결국 고향인 이탈리아에서 고문 끝에 화형당했는데 이것이 와전된 걸 수도 있다. 아무튼 몇몇 과학자들의 영웅 만들기 작업으로 인해 이러한 신화가 탄생했다.

어쨌든 저런 잘못된 인식 때문인지 오늘날 어떤 학자가 무슨 일에 얽히기만 하면 '권력에 희생당하는 불쌍한 갈릴레이' 식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대표적인 게 바로 황우석 사건(...) 링크 1링크 2 보면 알겠지만 분명히 윤리적인 잘못을 한 황우석을 갈릴레이에 대입시켜 실드치는 기사들이다.

르네 데카르트는 본래 철학보다 과학(수학)에 흥미가 있었으며, 1619년 11월 10, 11일 밤에 생생한 꿈을 3번 꾸고 일생을 과학에 바치기로 마음먹었지만, 1633년 갈릴레오가 교회로부터 단죄 받아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과학을 버리고 철학을 선택했다.

10 저서

11 창작물에서

  •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필립 글래스)을 클릭할 것.
  • 대항해시대 5에서는 청년으로 나와 라몬의 해도에 감춰진 비밀을 찾기 위해 항해하는 주인공 일행이 토스카넬리의 추천을 받아 갈릴레이를 찾아갔는데, 갈릴레이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서 뉴턴에게 찾아갈 것을 이야기했다.
  • 가면라이더 고스트에서 파카 코스트로 나온다.
  • 고딕 메탈 밴드 해거드의 3집 앨범 Eppur Si Muove[23]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주제로 한 콘셉트 앨범이다.
  1. 성과 이름이 비슷한 이유는 장남에게는 성을 겹쳐 쓰는 토스카나 지방의 풍습 때문이다. 갈릴레이 갈릴레오인지 갈릴레오 갈릴레이인지 사람을 은근히 헷갈리게 만드는 이름이지만 라틴어이탈리아어를 안다면 헷갈릴 일은 없다. -o가 주격 -i가 소유격이며, 라틴어에서 보통 소유격은 피수식 명사의 뒤에 온다.
  2. 물론 이 말도 수많은 실존인물들의 수많은 명언처럼 그가 정말 이 말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말을 했을 확률은 매우 낮다.
  3. 정확히 말하면, 갈릴레오의 시대에는 자연과학이라는 말도 물리학이라는 말도 없었으며 비슷한 의미의 어휘로는 '자연철학'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자연철학자에 해당한다. 다만 정작 그는 수학자로 커리어를 시작하였고, 동시대 자연철학자들에게 '수학자가 자연철학에 간섭한다'며 신나게 디스 당했다(...)
  4. 당시 의학 교수는 1년에 2,000 스쿠디를 받았지만, 갈릴레오는 60 스쿠디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대학에서 수학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다.
  5. 이전 항목에서는 교황청이 아예 장례식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 잘못된 내용이 적혀있었다. 사실 갈릴레이에 관련해서는 이렇게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많은 편이다.
  6. "지동설이 '참된 논증'을 통해 입증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지동설이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며 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발언이라고 한다. 또한, 교황청은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는데 지동설이 매우 유용함을 인정하여 하나의 가설로는(계산할 때는 쓰라고) 인정했다는 얘기도 있다.
  7. 하지만 수학적으로 천문학을 재구성하려고 한 동시대의 인물로는 케플러도 있으며 케플러는 케플러의 법칙을 만들어서 이름을 남긴 반면, 갈릴레이의 법칙 같은 건 없다. 지동설 또한 갈릴레이의 오리지날은 아니다. 종교 재판에서 유죄를 받고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감과 투쟁심을 안겼지만, 그것 역시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갈릴레이를 이토록 유명하게 만든 최대의 공로자는 우르바노 8세 교황일지도 모른다.
  8. 비록 BBC의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에서는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증명했다고 잘못 언급했지만 말이다.
  9. 이건 사실이다. 실제로 지구의 자전 때문에 우리가 점프하면 제자리에서 착지하지는 못한다. 다만 이는 우리가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미세한 변화에 불과하며, 군대에서 포탄을 쏠때 정도에나 계산에 감안할 뿐이다.
  10. 이것을 입증하려면 '광학' 이론을 빌려와야 하는데, 이건 갈릴레오보다 훨씬 후대의 물리학이다.
  11.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 내부의 영혼에 이미 지혜가 깃들어 있다고 믿었으며, 때문에 순수하게 이성을 갈고 닦는 것만으로 지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2. 그런데 이 시대는 아직 시계가 발명되기 이전이었다.
  13. 당시 세속 군주이던 코시모 2세의 아버지 코시모 1세는 제우스에 비유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4명이었다. 갈릴레오는 당시의 신화적 의미와 발견을 결합시켜 코스모 2세에게 헌정하였다.
  14. 여담이지만 단순히 권력욕으로만 볼 순 없는 부분도 있다. 당시 (이탈리아) 학계에는 신학/철학/수학으로 나눠지는 일종의 위계질서가 있었다. 이중 수학자는 카스트 수준의 하위층(?)으로, 단적으로 말해서 수학 교수는 다른 교수들과 봉급이 8배까지 차이 났다. 갈릴레오는 수학 교수였고, 이 때문에 갈릴레오가 발표하는 천문학 주장들은 다른 학자들에게 무시 당하기 일수였다고 한다. 더욱이 천문학은 신학/철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오직 신학자나 철학자만이 다룰 수 있는 학문이라는 부심 고정관념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얻으려 했고, 결국 "토스카나 대공의 수학자 겸 철학자"가 되었다.
  15. 이 항목에서도 언급되지만, 지동설 그 자체가 옳냐 그르냐는 종교재판의 떡밥이 아니었다.
  16. 사실 갈릴레오는 재판에서 자비를 청하는 매우 낮은 자세로 일관했기에 이런 발언을 재판 끝나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들리도록 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갈릴레오는 성격상 신념을 바탕으로 투쟁하는 성격보다는, 처세술의 달인에 훨씬 가까웠다. 아마 가능성이 있다면 혼자 속으로만 말하거나 나중에 제자들 앞에서 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것이다.
  17.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다. 갈릴레오가 전통적인 결혼 및 가족 제도에 대해 큰 저항을 느꼈다거나, 혹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까봐 최소한의 지원만 해주고 버린거나 다름없다는 등이다.
  18. 갈릴레오의 딸들은 수녀원에 보내질 당시 12세, 13세였는데 이는 수녀원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규칙을 무시하고 들여보냈다. 역시 옛날이나 지금이나 빽이 중요한 거다
  19. 행성의 궤도에 관한 문제에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수용하여 궤도가 완전한 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케플러는 타원형이라 주장했고, 이는 코페르니쿠스가 해결하지 못한 모든 복잡한 문제를 다 풀어냈다
  20. 이름이 빈첸초(Vincenzo)로 갈릴레오의 아들과 이름이 같다. 헷갈리지 말길.
  21. 일부 학습만화가 그런 경우가 있다.
  22. A Chalmers,'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open university press,1999,챕터 10-11
  23.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