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질(소설)

1 개요

虎叱

연암 박지원의 단편소설. 제목은 '호랑이의 질책', 혹은 '호랑이가 꾸짖다'라는 뜻이다.

2 내용

열하일기에서는 박지원의 순수창작이 아니라 청나라로 가던 중 들른 한 상인[1]의 집벽에 적혀있던 이야기[2]가 모태이며, 이야기를 본 박지원이 호탕하게 웃으며 이걸 가져가면 한양이 유쾌하겠구나 생각하여 옮기기 시작했다고 해 놓았다.[3] 그리고 그때 자기 말고 다른 한 명과 서로 반반씩 나눠서 필사를 했는데, 자기 거는 제대로 옮겼는데 다른 사람이 옮긴건 오탈자에 빠진 부분도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문맥을 통하게 하려고 반절은 적당히 기억나는 대로 옮겼다고 써 놓았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 사상적 탄압을 빠져나가기 위한 작가의 의도된 설정인 것으로 보인다.[4]

조선, 아니 한국의 마스코트(?)라 할 수 있는 호랑이를 통해 조선 상류층(혹은 선비 계층)을 비판한 소설…이기도 하지만, 호랑이가 사람을 죽일 때마다 그들의 혼령(창귀)이 호랑이에게 붙어 호랑이를 도와준다는 것이 재밌다. 호란을 당한 사람의 혼령은 호랑이에게 붙잡힌다는 민간설화에 바탕을 두고 작성된 모양.

초반에 박지원이 만들어낸 對호랑이 전용 괴수들을 보면 박지원이 얼마나 야사집 등에 밝으며 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했는지 알 수 있다. 비위, 죽우, 박, 오색사자, 자백, 표견, 활, 황요. 산해경을 비롯한 신화집과 야사 등 책의 영향을 받은 듯 싶다.

호랑이가 먹이로 사람을 추천하는 수하들한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사람은 먹을 게 못된다고 평가하는 것도 이색적이다. 온갖 약재를 품고 사는 의원은 '의醫는 의疑(의심할 의)라, 뒷구멍으로 빼돌리는 것이 많아 먹을 것이 못된다'[5]라고 평하며, 신내림 때문에 몸을 정갈히 하는 무당의 경우는 '무巫는 무誣이니, 백에 한 가지도 진실된 것이 없어 먹을 것이 못된다'라고 한다. 하지만 "선비라는 종자는 그 중에서도 가장 못먹을 족속이다.[6]라는 게 선비에 대한 호랑이의 평가. 실제로 사람고기는 체취가 매우 강해서 처음 접하는 동물은 먹기를 꺼린다. 대개의 식육목 포식자들은 공포감 + 냄새 때문에 인육을 기피하지만, 한 번 맛을 보고 나면 잡기 쉽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상습적으로 인간을 노리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학자가 가장 먹을 만하다'는 창귀의 추천을 들은 호랑이가 마을에 내려가보는데, 그 마을에는 나이 사십도 안 되는데 1만 5천 권의 경전을 번역하고 집필한[7] 유학자 북곽선생이 있었는데, 또한 그 마을에는 정절을 잘 지키어 천자한테도 칭호를 받았고 땅까지 하사받은 동리자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런데 이 동리자가 거느리고 있는 다섯 아들들이 모두 각성바지라는 점이 포인트. 더욱이 이들이 자기 어머니와 북곽선생이 밀회하는 걸 보고 '북곽선생같은 분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나. 저건 필시 여우가 둔갑한 것이다.'하면서 덮쳐오자, 여기에 놀란 북곽은 도망가다가 똥통에 빠져서(……) 허겁지겁 밭고랑을 달리던 중 호랑이를 만난다.[8] 식겁한 북곽은 호랑이한테 아첨을 늘어놓지만, 호랑이는 "평소에는 날 그렇게 욕하더니 이제와서는 산중왕이라고 하는 거냐?"라면서 신나게 공박하는데 대충 요약하자면 만물의 이치는 하나다. 내가 악하면 늬들도 악하고 내가 선하면 늬들도 선하다. 우리는 딱히 법이나 처벌이 없어도 잘 사는데 인간들은 법을 만들고 온갖 도구로 벌을 내리거나 죽여도 악행이 끊이질 않는다. 우리가 표범을 안 잡아먹는 이유는 차마 제 동류에 손댈 수 없어서 안 먹는데 너희들은 제 동족에게도 해를 입힌다. 그렇게 따지고 보자면 호랑이와 인간 중 누가 더 악하냐 하고선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진다.

호랑이가 떠난 줄도 모르고 연신 엎드려 있던 북곽은 아침 일찍 밭을 갈러 나온 농부에게 그 장면을 들키고, 이른 아침부터 무슨 기도를 드리냐고 묻는 농부에게 '하늘이 아무리 높아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고, 땅이 아무리 두터워도 조심스럽게 디디지 않을 수가 없다'면서 시치미를 뗀다. 그런데 똥통에 빠진 이유는 뭐라고 변명했을까?

이런 전개에서 볼 수 있듯이, 위선자와 허레허식 등을 호랑이를 내세워서 비난하고 비꼬는 내용이 일품.

201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에 고전소설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3 호질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들

그러나 비위(狒胃)는 호랑이를 먹고,
죽우(竹牛)도 또한 호랑이를 먹으며,
박(駮)도 역시 호랑이를 먹고 산다.
또한 오색사자(五色獅子)는 큰 나무가 서 있는 산꼭대기에서 호랑이를 먹고,
자백(玆白)은 날아다니며 호랑이를 먹고,
표견도 날아다니며 호랑이와 표범을 먹고,
황요(黃要)는 호랑이와 표범의 염통을 꺼내서 먹는다.
활(猾)은 뼈가 없으니 호랑이와 표범이 삼켜도 뱃속에서 그 간을 먹는다.
추이(酋耳)는 호랑이를 만나기만 하면 갈가리 찢어서 먹는다.
호랑이가 맹용(猛㺎)을 만나면 무서워 눈을 내리깔고 감히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맹용은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호랑이를 더 무서워 하니 호랑이의 위세가 참으로 높은 것이다.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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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질에서 언급한 호랑이의 천적인 박(駮)의 모습.* 산해경에 나오며,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먹고 살며, 이 박을 데리고 있으면 창칼같은 병기에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이 무슨... 당할 상대가 없다 한 것 치고는 너무 잡아먹는 짐승들이 많다. 호랑이가 이젠 점점 불쌍할 지경.... 하지만 중요한 건 위 천적들이 전부 상상의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있지도 않은 괴수들이 아니면 호랑이를 당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옛 사람들이 호랑이를 두려워했단 소리다.

호질에 관련된 옛날 학습 만화에서 자백은 부리가 긴 괴조로, 활은 고깃덩어리 같은 생물로, 맹룡(맹용)은 단순한 용으로 묘사되었다. 물론 이는 만화의 특성상 작가가 호질 원전에 표현되지 않은 부분을 임의로 상상해서 그린 것이다.

또한 네이버 웹툰 호랑이형님에서는 추이, 황요, 박[11], 표견, 비위가 등장한다.

다음은 사람을 잡아먹은 호랑이에게 붙은(복속되는) 창귀(倀鬼)들.

호랑이가 개를 먹으면 취하고, 사람을 먹으면 조화를 부리는데,
호랑이가 사람을 한 번 잡아먹으면 창귀가 굴각(屈閣)이 되어, 호랑이의 겨드랑이에 붙어 호랑이를 이끌어 부엌으로 가서 솥을 핥으면, 집주인이 배고픈 생각이 들어 마누라에게 야참을 시켜오게 만든다.
호랑이가 두 번 사람을 먹으면, 창귀는 이올(彛兀)이 되어 호랑이의 광대뼈에 붙어, 높은 곳에 올라가 조심스럽게 살펴 만약 계곡에 함정이나 쇠뇌가 보이면 먼저 가서 그 기구들을 풀어버린다.
호랑이가 세 번 사람을 먹으면, 창귀는 육혼(鬻渾 :'죽혼'인데 육혼으로 읽힌다)이 되어 호랑이의 턱에 붙어 자기가 알고 있는 친구들의 이름을 죄다 알려준다.

청우기담에 의하면 창귀들은 "호식(호랑이에게 잡아 먹힌)당한 사람의 영혼으로, 감히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오로지 호랑이의 노예가 된다."라 서술되며 어우야담에서는 호랑이 꼬리에서 나오는 사람을 홀리는 독기라 묘사한다나...? 문 앞에서 범이 꼬리를 흔들어 독기를 뿌리면 홀린 사람이 스스로 나와 범의 입속으로 들어간다고. 특히 창귀가 호랑이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친지들에게로 호랑이를 안내하고 희생자를 불러들인다는 "다리 놓기"는 설화판 피라미드 사업의 폐해....

창귀와 관련된 자료로 중국 쪽 설화가 있다. "마증"은 호랑이로 변한 스님에 관한 일종의 괴담설화다. 호질의 저자 박지원이 이 이야기에서 창귀의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반도 전역에 퍼진 호환(虎患)과 그로인한 창귀에 대한 두려움은 민속대백과사전창귀 항목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그리고 호식장(虎食葬) 내용에는 창귀를 예방하기 위해 호환 피해자의 영혼을 봉인하는 호식총(虎食塚)이라는 주술적 의례가 나온다.[12] 결국 창귀는 단순히 박지원의 호질이나 중국 설화에서 파생한 창작물이 아닌 "호환"이라는 현실적 재앙에서 비롯된 두려움임을 엿볼 수 있다. 네이버 웹툰 호랑이형님에서는 이 호식장을 인간이 아닌 호랑이에게 해주는 역발상적 창의력을 볼 수 있다.
  1. 이름이 심유붕(沈由朋)이고 마흔 여섯살의 소주(蘇州)출신 상인이라고 적었다.
  2. <<관내정사(關內程史)>>의 7월 28일 갑진일 대목에 그 유래가 자세히 나와있다.
  3. 상인이 박지원에게 이 글을 베끼는 이유를 묻는데, 그 대답이 이렇다. "귀국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히려고 합니다. 응당 배를 잡고 웃다가 웃음을 참지 못해 뒤집어질 겁니다. 입 안에 있던 밥알이 벌처럼 뿜어 나올 것이고, 갓끈이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질 것입니다."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
  4. 이에 대해서 호질이 박지원의 창작물인지의 진위논란에 대한 연구를 한 논문들도 엄청나게 많다. 이는 단순히 작자가 누구인지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이 곧 작품의 주제의식 해석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호질은 대체 뭘 말하는 건지 작품 내용만 놓고 보면 논란의 여지가 많다; 다만 비슷한 경우처럼 돈키호테도 지은이 세르반테스가 이 책에 나온 것을 내가 다 쓴 게 아니라 자신이 노예모로코에서 있을 때 아랍인에게 들은 내용(가톨릭 성직자의 위선과 비난에 대한 부분)을 섞어썼다고 밝히고 있듯이 당시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적당한 거짓말을 했던 경우가 있다. 특히 연암은 글쓰기를 전투에 비유하며 전투를 정공법만 갖고 할 수는 없고 측공과 역공을 아울러 써야 하듯, 글쓰기 역시 전하고자 하는 바를 직설적으로만 쓸 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때로는 비유하고 때로는 에둘러 쓰고, 때로는 우의적으로 쓰는 등 다양한 방법들을 총동원해서 그냥 읽으면 진의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도록 하고, 깊이 읽어야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써야 한다고 하여 사상 탄압에 대한 방어 장치를 마련하는 데에 꽤나 신경 쓴 사람이었다.
  5. 당시에는 의사가 천대받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올 수 있었으나, 지금은 의사가 촉망받는 직업이면서도 돈 때문에 양심을 갖다버린 의사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해당 대사가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은근히 무섭다. 사실 박지원은 현대사회를 예견했다 카더라
  6. '유儒란 유諛를 의미한다더니 평소에는 대가리 꼿꼿이 세우다가도 제 목숨 위험해지면 조아린다'며 대차게 깐다.
  7. 조선시대에서는 유교 경전을 해석하고 유교 사상에 맞는 글을 쓰는 게 문학의 으뜸이라고 여겼다. 소설이 '잡스러운 이야기라는 小說이라고 명명된 것도 이 때의 영향.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경전 해설서를 쓰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평생 1만 5천 권 분량의 책을 썼다는 것은 북곽선생의 학문적 성취도를 과장하기 위함이거나 북곽(선비들)의 연구는 속이 빈 강정과도 같음을 애둘러 표현하는 해학적 장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8. 이 때 호랑이가 북곽선생에게 일갈하는 첫 대사가 백미. "儒句臭矣(유자여, 더럽다.)"(…). 북곽선생이 (위선적인) 사대부 계층을 대표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로서는 가히 흠좀무한 발언이다.
  9. 비위는 원숭이의 일종, 죽우는 야생 소의 일종, 표견은 개처럼 생긴 날쥐, 황요는 족제비의 몸에 승냥이의 머리를 한 짐승, 활은 뼈가 없는 바다동물, 추이는 호랑이를 닮았지만 덩치가 더 크고 꼬리가 더 길다고 한다. 맹용에 대한 설명은 본문의 문장외엔 찾을 수가 없다. 자료 가지신 분은 추가 바람.
  10. 사족으로 이 짐승들이 오직 호랑이만을 잡아먹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짐승들도 잡아먹으나 유독 호랑이만을 선호하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11. 다만 박은 10화 추이가 수련하는 회상씬에 추이와 싸우는 1컷 밖에 안나왔다.
  12. 호식총과는 별개로 아장살이란 무덤이 있는데 이는 호환이 아닌 병마로 죽은 아기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