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경


山海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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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낯선 지방의 생산물과 강과 육지의 풀 ,나무,새,짐승,곤충,기린,봉황이 사는곳과 상서로운 조짐이 보이는 곳 및 이 세상 바깥으로 떨어진 나라나 색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기록하였습니다 토지에 따라 공물을 정하고 백익 깨선 사물의 좋고 나쁨을 유별하여 이 산해경을 지었습니다"

-상산해경표 中 유흠

"산해경을 읽는 세상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책이 황당무계하며 기피하고 유별난 말이 많기 때문에 의혹을 품지 않는 이가 없다"

"천하의 지극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더불어 산해경의 의미를 말하기 아렵다. 아! 통달하고 박식한 사람이 이를 거울로 삼을것이다. "

- 주산해경서中 곽박

"산과 내의 줄기를 탐색하여 가없는 경지를 두루 살피고 그 가운데에 괴변을 서술하여 백성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하였으니, 아름답도다! 우의 공덕이여! 그 밝은 덕 무궁하로다. 본래 신성한 존재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 책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후세의 독자들은 이 책을 이견의 기록의 비기고 제해 같은 책에 견주었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

- 산해경소서中 학위행

중국 선진시대에 쓰인 것으로 기록된 고서이다.산해경 자체의 존재는 사마천[1] 등의 그 이전 시대의 사람들도 언급하고 있으며, 저자가 누군지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하나라(禹)왕이나 계포 혹은 백익이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설인데 전한시대의 유흠에 의해 주장되어져서 다른 중세의 학자들에 의해 이런 의견이 계속 주장 되어 왔다.

하지만 후세로 내려가면 갈수록 이러한 의견들은 여러번 지적을 받게 되고 드디어 현대에 오면서 하나라의 우나 백익같은 태고시대에 살았던 전설적인 가상의 인물에 의해 저술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이 형성된뒤,근대와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대체로 춘추전국시대쯤에 제작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견해 조차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된다.

산해경의 최초의 교정본은 유흠이 쓴 상산해경표로 그 당시 산해경의 기존32편을 18편으로 정리 하였으며, 현재의 산해경은 동진 시대의 곽박(郭璞)이 주산해경서라는 교정본을 내서 정리한 것으로 시작하여 청나라의 학위행이 산해경소서를 써서 다시금 교역한 것.

이외의 명나라~청나라시기의 산해경 교정본으로 산해경보주, 산해경석의, 산해경광주, 산해경교본등이 있다.

2 판본

산해경의 원문은 미지의 영역에 있지만 오래동안 거론되어 온 책인 만큼 판본은 다양하다. 사실 산해경의 판본에 대해 쉽게 풀어 이야기 하자면 나무위키 문서의 아날로그 버전이라고 볼수 있다. 여러 편집자가 있는 만큼 리버젼도 다양하며 그만큼 편집자 마다 다양한 내용을 추가 하기도 하였으며 편집자의 성향에 따라 추가된 내용의 성격도 각양각생이다.

산해경을 나무위키 문서로 비유하며 오랜 역사를 지닌 문서이며 그만큼 문서의 편집자도 많고 추가된 내용도 많은데 정작 그 문서의 첫 버젼과 문서를 처음 개설한 사람은 정확히 누군지는 알수 없는 문서(...)

산해경의 여러 문서 편집자주석가와 리버젼판본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2.1 유흠의 산해경

기록상으로는 최초로 산해경이라는 책을 정리해놓은 판본이지만 그가 쓴 판본 전체는 복구가 불가능한 모양,그래서 그가 쓴 산해경의 서문인 "상산해경표"만 후대의 여러 산해경 판본에 수록되어있을 뿐이다. 상산해경표는 산해경을 정리한 계기등을 보고하듯이 써내린 서론이다.

2.2 곽박의 판본 산해경서와 관련도서

현재까지 복원에 성공한 판본중 가장 가장 오래된 판본은 바로 동진 시대 곽박[2]의 산해경 판본이다. 산해경은 명나라~청나라 시기때 후대 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연구되고 개편됬는데 산해경 개편본의 대부분은 이 곽박의 판본을 기본으로 하여 그 위에 학자 자신들의 주석을 덧붙인 것이 대부분.한국에 출간된 정재서 교수의 산해경에서도 당연히 곽박의 주석을 인용하고 있다.

이 곽박의 산해경은 아래 소개될 <도장(道藏)>,<사부총간(四部叢刊>,<고금일사(古今逸史)>라는 총서에 수록되어 출판되어 왔으며 이중 가장 대중적인 것은 <고금일사>에 수록된 것이라고 한다.

곽박이 주석을 붙인 산해경을 원문을 살펴보면 동진시대 당시로서 얻을 수 있는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다채롭게 주석을 붙여 놓았다.당시 사람들이 산해경이라는 미지의 책을 쉽게 이해 할수 있도록 설명하기 위해 주석을 붙여 놓은것,곽박이 주석을 붙여 놓은 문장과 그 주석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동해의 안쪽,북해의 모퉁이에 조선과 천독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산다.[3]
이곳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여우 같은데 아홉 개의 꼬리가 있다[4]
곤민국이 있는데 성은 구씨이고 (기장을)먹고산다. 왕해 라는 사람이 있어 두 손에 새를 잡고지금 그 머리를 먹고있다. 왕해가 유역과 하백에게 기른 소를 맡겼는데 유영이 왕해를 죽이고 소를 차지했다.[5]

첫번째 예문에서 처럼 본문에서 강이나 산의 이름 지명이 언급 될때마다 그 지명에 대한 고증을 제시하기도하고,두번째 예문에서 처럼 산해경에 나오는 기이한 동식물을 부르는 명칭을 정립하거나 추가적인 설명을 붙이기도 했다. 그 유명한 구미호의 명칭 또한 문헌에 최초로 기록한것이 곽박. 세번째 예문에서처럼 산해경 본문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고증을 시도한 흔적도있다 그리고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내용이 나오면 솔직하게 모르겠음(...)이라는 식의 주석까지 달아 놓았다.

도장(道藏)본
이 판본은 민국 14년(1925)에 상해의 함분류 상무인서관[6]에서 복원한 영인본으로 도장(道藏)[7]본은 <태현부[8]>로 파트에 포함되어 있으며 18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식[9]의 크기는 반곽[10]이 세로 20.1,가로 13.2이고 선장본[11]이다. 산하쌍면[12]에 좌우에는 광곽[13] 계선(界線)이 없고 판심[14]도 없다 주(注)는 쌍행[15]으로 쓰여있다.

편목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맨앞에 곽박이 주석을 넣은 <산해경서> 를 수록해 놓고 <산해경목록>을 기록해 놓았는데,먼저 총 18권의 본문 글자 수와 주석의 수 및 총 합계를 쌍행으로 기재해 놓고 이어서 유흠(劉歆)의 <상산해경표>[16]를 수록해 놨다 마지막으로 곽박이 주석을 붙인 본문 18권을 실어 놓았는데 본문 가운데 14권과 15권이 누락되어 있다. 곽박이 고대에 유통 되었던 삽화[17]등을 보고 그 감상을 시적으로 표현해낸 <산해경도찬>[18]은 일반적으로 본문과는 별도로 수록 되어있으나 이 판본에서는 매 권에 본문뒤에 그 권을 지칭하는 산해경 도찬이 수록되어 있다.
사부총간(四部叢刊)본
이 판본은 민국 18년(1929)에 상해의 함분류에서 장안현의 쌍감루[19]에 소장되어 있던 판본을 영인[20] 한 것으로 본래 명나라때, 1470년에 국자감[21]에서 간행된 책이다.

장원제[22]가 출판한 사부총간이라는 책에 자부[23]로 분류 되어 수록 되어 있으며 총 18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식의 크기는 세로 14,가로 10이고 선장본 이며 필사본이다.
도장본과 마찬가지로 곽박의 <산해경서>를 첫머리에 실어 놓고 그 뒷부분에는 별도로간략하게 산해경서를 사부총간에 수록하게 된 이유와 시기 그리고 수록자의 이름을 행서체로 적어 놓았다.

뒤를 이어<산해경목> 과 유흠의 <상산해경표> 그리고 본문 18권을 기존에 전승되어 내려오던 순서대로 수록해 놓고 마지막으로 청시대의 학자인 황비열[24]이 교차 검증을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산해경교감기[25]>가 있어 정리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해 두었다.
고금일사(古今逸史)본
이 판본은 명대의 오관(吳琯)이 편찬한 고금일사를 영인한 목판본으로 간행된 시기는 전해재재 않고 있다.산해경파트는 <逸志/志分>에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다.오관이 송나라[26] 때의 판본을 정리한 것으로 명나라 시대 민간 서국에서 인쇄된 판본 중에서 가장 널리 유통 된 판본이라고 한다.하지만 앞서 언급한 판본들과는 달리 이 판본에는 곽박의 산해경서만 수록되어 있다.
학술적인 목적 보다는 민간에 판매를 위해 만들어 졌으므로 가장 간략하지만 오류가 많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2.3 왕숭경의 산해경석의[27]

이 판본은 청나라시대 1690년에 [28] 판각된 목판본으로 중각(重刻)본이고총 18권 6책으로 구성되어 잇다 판식의 크기는 반곽이 세로 22.2 가로 13.8이고 사주단변을이루고 있으며 반 페이지에 9행 행마다 19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계선이 있고 백구에 상혹어미가 있으며 주는 쌍행로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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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圖象)산해경의 일부

당연히 위에 언급된 곽박의 <산해경서>를 첫머리에 놓고 그뒤에 왕숭경 자신이그 위에 주석과 자신의 의견을 덧붙[29] <서산해경석의>를 실어 놓았다 한유[30]들의 <重刻산해경釋義서>와 유흠(劉歆)의 <상산해경표>,그리고 <산해경총목(總目)>을 순서대로 수록해 놓았으며, 그 뒤를 이어 조유원[31]쓴 <산해경석의발[32]>을 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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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추가된 삽화들
그리고 그 뒤에는 <도상산해경[33]>을 수록해 놓았는데 여기서 산해경의 삽화 75폭이 추가 되었고,그 당시까지의 산해경의 삽화집은 하나의 캐릭터에 대해 특징 만을 잡아내어 간결하게 그려낸 것과는 달리 여기서 추가된 75폭의 그림은 캐릭터를 좀더 정밀하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배경까지 그려넣어져 있다.

그리고 이 <도상산해경>의 뒤를 이어 <산해경석의>가 18권권이 실려 있다,왕숭경의 <산해경석의>의 구성은 [원문/곽박 주/왕숭경 주] 이런 식으로 역시 다른 산해경 판본과 다름없이 원문과 곽박의 주석을 기본으로하여 그 위에 자신의 주석을 달아 놓았고왕숭경의 주석과 그 주석이 달린 문장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남산경>의 첫머리는 작산이라는 곳이다. 작산의 첫머리는 소요산 이라는 곳인데 서해변에 임해 있으며 계수나무가 많이 자라고 금과 옥이 많이 난다.(중략) 이곳의 어떤 나무는 생김새가 닥나무 같은데 곁이 검다.[34]
(중략) 여궤수가 여기에서 나와 서쪽으로 바다에 흘러드는데그 속에는 육패가 많고 이것을 몸에 차면 기생충 병이 없어진다.[35] [36]

왕숭경은 정통적인 유학관을 지녔던 인물이였던지라 산해경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식물,문화 등에서는 대부분 그런게 실제로 있을 턱이 없다.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고 산해경의 비현실적인 내용에 대해 나름의 실증적이면서 현실적인 해석을 제시한게 유의해볼만한 점이다.더 예를 들면,

다시 동쪽으로 500리를 가면 녹오산이라는 곳인데 산 위에서는 초목이 자라지 않고 금과 돌이 많다.이곳에 이름을 고조(蠱雕)하는 짐승이 있는데,생김새가 수리 같고 뿔이 있다 그 소리가 어린애 음성 같으며 사람을 잡아먹는다.[37]

그러니까 산해경에 있는 상상의 동물에 대해 실제로 그런 동물이 존재 할리 없고 사람들이 실제 있는 동물을 보고 착각을 한거라는 식으로 서술해 놓은것.유교적인 논리하에 합리적인 기준을 세우고,그 기준에 맞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는 이런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을 한것이다.

이런 해석이 담긴 주석은 너무 딱딱하며 오히려 왕숭경 본인의 편향적이고 주관적인 서술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단점으로 지적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왕숭경 산해경의 <산해경석의>는 전한 시대 곽박의 판본 <산해경서> 이후 천여년의 공백기를 깨고 두번째로 나온 산해경의 판본인 것이라는 큰 의의가 있다

따라서 왕숭격의 <산해경석의>는 명나라 시대때 유행한 수많은 산해경 판본 출시의 스타트를 끊었다고 볼 수 있는 것.

2.4 양신의 산해경보주

양신은 역시 곽박의 산해경을 기본으로 하여 자신의 주석을 붙여 산해경보주라는 판본을 만들었다 이 산해경 보주와 관련된 판본은 숭문서국[38]에서 판각한 <백자전서(百子全書)>본 <승암외집(升庵外集)>본 <함해(函海)>본 <심기도설(藝海珠塵)>본 그리고 일본 마에가와대학교영당 산해경이라는 제목 그대로 판각한 판본등이 있다.

양신의 판본은 당시로서는 주석의 방식이 당시로서는 특이 했는데 기존의 주석가인 곽박이나 왕숭경이 원문 아래에 주석을 덧붗이는 행태를 취한것과는 달리,원문을 통째로 따로 수록해놓고 자신이 쓴 <산해경보주>에다가 [원문에서 주석할 일부 문장 발췌/곽박의 주석/양신 자신의 주석] 이 형식으로 글을 써 본문과 분리된 책 한권을 따로 더 써낸 것.그리고 양신이 주석한 산해경의 문장과 그 주석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천지산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토끼 같은데 쥐의 머리를 하고 그 등으로 날며 비서(飛鼠)라고 한다.[39][40]
곤륜허는 처제의 하계의 도읍이다. 여덟 구석의 바위굴과 적수의 물가가 있는데 동이[41]의 예[42]같은 사람이 아님면 아무도 이 구름의 바위에 오를 수 없다.[43][44]

필원[45]은 양신은 주석본을 충분한 실증이 이루어지지 않은채 서술 했다고 지적했는데. 비교적 곽박은 당시에 구할 수 있었던 서적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신뢰감 있고 객관적으로 주석을 한 반면,양신은 믿을만한 서적에서 정보를 인용하거나 확실한 증거도 없이 주석가 개인의 추측을 기반으로 한 주관적인 독자연구를 나열해 산해경을 주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이런 내용적인 한계도 있자만, 주석의 형태나 구조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을 높이 살만하며 서문에서 하나라의 우임금의 구정[46]에 새겨닌 그림을 보고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산해경>이라는 견해에 반박을 하면서 산해경의 성립시기 및 성립방식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여 이후 <산해경>의 정확한 유래를 연구하는데에 있어 하나의 방향향을 제시 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승암외집 본
이 판본은 명나라 1616년 에 고기원이[47] 교정하여 간행한 양신의 승암외집 가운데 100권 가운데 제 50권에 <잡설[48]로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으며 반 페이지에 10행,행마다20글자로 되어있다. 상비는 없으며 흩어미로 상혹어미이고 줄이 있으며 주는 쌍행으로 쓰여있다. 이책은 양신이 쓴 <산해경보주>만을 수록해 놓았을 뿐, 기존에 전해져온 유흠이나 곽박의 서문밑 산해경의 본문도 실려 있지 않고. 양신이 또 쓴 <산해경후서[49]>역시 실려 있지 않다.
함해 본
이 판본은 청나라 1825년[50]에 이조원[51]이 편찬한 <함해> 160책 가운데 46권에 수록되어 있는 산해경 판본으로,목판본이며 중무본[52]이다. 총 1권으로 판식의 크기는 반곽이 세로 21,가로 15cm 이고 선장본이다. 사주 쌍변을 이루고 있으며 상비는 없고,흩어미로 상혹어미에 선이 있으며 반 페이지에 10행 20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주는 쌍행으로 쓰여있다. 이 판본 역시 기존해 내려 오던 <산해경>의 서문이나 본문을 제외한체 <산해경보주서>와 <산해경보주>만이 수록 되었다. 이조원은 서문에서 유흠이나 곽박의 주석본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여 보주를 지었고 오임신이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학설들을 두루두루 수집,검토하여 <산해경광주[53]>를 지었다는 등의 당시 <산해경>의 주석본의 개편 상황등을 간략하게 적어 놓았다. <산해경보주서>다음에는 본문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본문내용 가운데 일부만을 발췌하여 그 부분에 대한 간략한 설명 및 고증을 밝혀 놓은 <산해경보주>를 수록해 놓았다.
백자전서(百子全書)본
이 판본은 청대 말엽에 각지에 설치된 서국에서 발행한.국본[54]으로 1875년[55] 숭문서국(崇文書局)에서 판각한 백지전서 시리즈 109권 가운데 <소설가/이문류[56]> 분류되어 제 87~89권에 수록되어 있다 총 18권 3책으로 판식의 크기는 반광이 세로 25.3cm,가로 17cm이고 선장본이다. 사주쌍변에 문무변란을 이루고 있으며 반페이지에 12행,행마다 24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계선이 있으며 상하 내향혹어미이고 대혹구에 주는 쌍행으로 쓰여있다.
위에 서술한 다른 산해경보주분과 달리 유흠의 <상산해경표>는 물론 곽박이 쓴 <산해경서>까지 수록해 놓았다, 그리고 양신 본인이 산해경의 주석가가 된 이유를 간략하게 <산해경후서>에다가 서술해 놓았다.<산해경후서>의 내용은 첫째, 전설속의 인물인 하나라의 우 임금이 그 나라의 기이한 산과 동식물의 형상을 그려놓은 그림이 <산해도>고 그 그림을 글로 표현한 것이 <산해경>이라는 논지를 제시함으로서 <산해경>의 성립 시기와 성립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산해경은 청대에 이르러 구판은 사라지고 그림과 도교경문에 실린 글만이 남아서 후대로 전승되고 되고있는 산해경의 유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후대의 사람들이 <산해경>이 실제 지명과 맞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산해경>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우 임금이 지어냈다는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한 현실이 안타까워[57] 후대 학자들에게 <산해경>의 근본을 일깨워 주고 의혹을 풀어주기 위해 주석을 붙이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양신 자신이 산해경보주를 간행한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산해경후서>의 뒤를 이어 총 18권으로 구성된 <산해경> 본문과 <산해경도찬>을 수록해 놓았고,양신의 주석이 담긴 <산해경보주>가 마지막으로 실려있다.
심기도설(藝海珠塵)본
이 판본은 청이당에 소장되어 있는 목판본으로 간행된 지역과 시기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청대의 오성란[58] 편찬한 7권 가운데 1권인 <포집[59]>에 양신의 <산해경보주>가 수록되어 있고 또다른 1권인 <혁집[60]>에는 곽박이 편찬한 <산해경도찬>이 수록되어 있다. 판식의 크기는 반곽이 세로 15.1cm,가로 11.3cm이고,선장본이다. 좌우쌍변을 이루고 있으며 반페이지에 10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글자수는 일정하지 않다,계선이 없다.
이 판본 또한 위에서 언급한 함해본과 마찬가지로 <산해경>의 본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고 <산해경보주>와 <산해경도찬>이 각각 <사부/지매류[61]> <사부/도찬류[62]>에 나누어져 수록되어 있다.
일본 산해경
이 판본은 일본의 마에가와 대학교 영당에서 판작된 목판본으로 간행된 시기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총 18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판식의 크기는 세로 19.4cm,가로 13.4cm이고 선장본이다. 사주 쌍변에 문무대란을 이루고 있으며 반 페이지에 9행 행마다 20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홀어미로 상백어미이고 백구이다. 이 판본은 일본에서 유통된 판본으로 일본의 독자들이 쉽게 판본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자와 행 사이에 가타가나를 판각해 좋았다.
이 판본은 일본에서 유통된 판본으로 양신의 서문인 <산해경후서>를 <산해경도서>라는 명칭으로 개명해 수록해 놓았으며,일본의 독자들이 쉽게 판본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자와 행 사이에 가타가나를 판각해 좋았다. 일본에 수출된 이 판본의 가장 큰 특징은 산해경의 내용 보다는 삽화에 더 신경쓴 점인데, 지금까지의 산해경은 글과 그림이 따로 분리되어 출간되어 왔는데 이 판본의 경우 글 사이사이에 글의 내용과 관련된 삽화가 삽입되어 있다. 그림을 중요시 여기는 만큼 당연히 왕숭경의 산해경 석의에서 추가된 75폭의 섬세한 그림도 수록되어 있다.
본문및 글자수의 합계를 통계해놓은 <산해경목>이 수록 되어 있으며 이밖에 이밖에 곽박의 <산해경서> 또한 수록되어 있고 유흠의 <상산해경표>가 수록되어 있지만 양신의 서문을 빌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양신이 주석을 한 <산해경보주>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2.5 오임신의 산해경광주

이 판본은 청의 乾隆 51년 (1712)에 진창[63]의 화업당(書業堂)에서 판각한 목본으로,<산해경> 본문 18권과 <산해경도> 1권이 총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식의 크기는 반곽이 세로 19.1,가로 12.4cm이고 선장본이다. 좌우쌍변에 문무변란을 이루고 있으며 반 페이지에 9행,행마다 22글자로 구성되어 잇다. 계선이 있고 백구에 어미는 없으며,주는 쌍행으로 쓰여있다.
이상의 편목을 살펴보면 먼저 시소병[64]이 쓴 <산해경광주서>와 오임신 본인이 쓴 또다른 <산해경광주서>를 순서대로 실어 놓았으며,그 뒤어 <산해경도총목[65]> 영기[66],이역[67] 등의 다섯가지로 분류하여 수록해놓았다. 다음에는 <산해경> 본문의 내용을 토대로 각 차경[68]의 지리적 범주를 정리해 놓고,次經의 순서가 정해지게된 원인 및 산/광물 등 경문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검토해 놓은 <독산해경어[69]>와 고대 전적들에 기록된 <산해경> 관련 내용들을 정리해 놓은 <산해경잡술[70]>이 실려 있다. 이어서 <산해경도>가 위의 편목에서 볼 수 있듯 영기/이역/수족/우금/인개[71] 의 다섯가지로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고,<산해경광주> 18권이 그 뒤에 있다 그리고 <산해경도>에 대한 발문이 가장 뒷부분에 자리 하고 있다.

오임신의 <산해경광주>는 곽박이 주석을 붙인 <산해경>을 바탕으로 하여 작자의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여 그 주석을 보충/보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 구조는 [원문/곽박 주/오임신 주]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남산경>에 있는 그의 주석과 그 문장을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동쪽으로 300리를 가면 靑邱山이라느 곳이다.[72][73]

<사고전서(四庫全書_>에서는 이 주석본에 대해 "사물의 이름과 형상,훈과,산과 내, 길과 거리를 모두 바로 잡았다"고 극찬을 했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임신이 기이하고 박식한 것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구구절절히 나열된 인용문들이 조금 번잡하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산해경광주의 장점이자 단점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풍부한 인용문을 주석으로 덫붙여 놓은것이며,다른 명나라 시대의 주석본들과는 달리 개인의 주관적인 사상을 담은게 아니라 고대의 서적들을 두루 인용하여 주석을 덫붙여 놓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해 주석이 설명충스러운게 단점이자 장점.

다. 이렇게 주관적인 의견이 아닌 기존의 서적을 이용한 주석 방식은 명나라 시대때는 드문 방식이였으며,앞으로 등장할 청나라 시대 <산해경> 주석서들의 기본적인 주석 방식이 된다.

2.6 서지사항

판본명판본
사항
주석가권수수록
사항
소장처
1민국 14년
함분류(涵芬樓)
영인본/필사본
곽박18권상산해경표
산해경도찬
산해경목록
산해경서(序)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2민국 18년
함분류(涵芬樓)
영인명대본/필사본
곽박18권상상해경표
산해경목
산해경서(序)
산해경교감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3함분류(涵芬樓)영인명
방각판/목판본
곽박18권산해경서
산해경목록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4강희(康熙) 28년
옥당
중무본(重梓本)/목판본
왕숭경18권산해경석의
도상산해경
산해경서
상산해경표
산해경총목
산해경석의발
중판산해경석의
장서각(藏書閣)
5만력 44년
각본(刻本)/목판본
양신산해경보주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6도광(道光) 5년
만권루(萬卷樓)
각본(刻本)/목판본
양신산해경보주
산해경보주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7광서(光緖) 원년
숭문서국(崇文書局)
각본(刻本)/목판본
양신18권상산해경표
산해경보주
산해경도찬
산해경목록
산해경서
산해경후존(後存)
규장각
일본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8청이당(聽彛堂)
소장각본(所長刻本)/목판본
양신산해경보주
산해공도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9일본 마에가와대학교영당(前川大 榮堂)
각본/목판본
양신18권산해경도서
산해경표
산해경목
산해경서
국립중앙도서관
일본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10불화 화업당(乾降 書業堂)
각본/목판본
오임신18권산해경광주
산해경도총목
산해경도
산해경광주일총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11광서 3년 
제강서국(淛江書局)
각본/목판본
필원-산해경신교정서
곽박주산해경서
산해경목록
산해경고금편목고
상산해경표
산해경신교정후서
규장각
12光緒 13년
대동서국(大同書局)
각본/석인본
필원-산해경신교정서
곽박주산해경서
산해경목록
산해경고금편목고
상산해경표
산해경신교정후서
규장각
13동치 12년~ 광서 31년 
각본/석인본
왕불9권양신주산해경서발일본연구소
14도광
해환독루(海還讀樓)
학위행-각산해경전소서
산해경전소서
교간산해경전소서
교금산해경전소서
중각산해경전소후서
산해경서록
산해경전소심정교
감작리성씨
산해경도찬
산해경정궤
규장각
15도광 20년
상해서국(上海書局)
목판본
학위행-각산해경전소서
산해경전소서
교간산해경전소서
교금산해경전소서
중각산해경전소후서
산해경서록
산해경전소심정교
감작리성씨
산해경도목록
산해경도
산해경도찬
산해경정궤
산해경목록
규장각
16산해경휘설도광25년
백화형(柏華型)
각본/목판본
학위행4권序 序-
17민국 구서제
간본/목간본
오승지6권산해경지리금석서-
18민국 구서제
간본/목간본
오승지6권산해경지리금석서-
192001年 제남:
산동화보출판사
(山東畵報出版社)
마창의18권序言 凡例
索引
-
20산해경1985년 서울:민음사/
1993년
서울:민음사
개정판발간
정재서-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일러두기
해제
상산해경표
주산해경서
산해경소서
주석가에대한소개
차고문헌
원문색인
-

곽박이 쓴 산해경 최초의 판본인 도장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산해경목록총 18권
본문총 30,919자
주석총 20,350자
제목본문주석
남산경1권3,547 자2,107자
서산경2권5,672 자3,202 자
북산경3권5,746 자2,382 자
동산경4권2,240 자375 자
중산경5권4,718 자3,485 자
해외남경6권511 자622 자
해외서경7권537 자452 자
해외북경8권584 자493 자
해외동경9권442 자595 자
해내남경10권364 자709 자
해내서경11권439 자695 자
해내북경12권594 자495 자
해내동경13권624 자1,495 자
대황동경14권864 자813 자
대황남경15권972 자598 자
대황서경16권1,282 자1,203 자
대황북경17권1,056 자767 자
해인경18권1,211 자967 자

대황동경부터 해인경 까지는 후대에 쓰여 산해경에 편입 되었다고 한다.

3 설명

3.1 산해경의 기원에 대한 갈래

편목산경해경언급문헌
시기연구자남산경북산경동산경서산경중산경해내경해외경대황경
전한유수백익이 이었다고 기록함상산해경표
후한조엽백익이 이었다고 기록함오월춘추
후한왕충백익이 이었다고 기록함논형
서진장화나라의 우왕이 지었다고 기록함박물지
북위역도원하나라의 우왕이 지었다고 기록함수경수
북제안지추우익이 지었다고 기록함안씨가훈
당나라유지기하나라의 우왕이 지었다고 기록함사통
송나라나필백익이 지었다고 기록함노사
청나라필원우익이 지었다고함주~진시대때 확인됨류슈가만듬산해경교정
청나라학위행우하(주 나라의 한 시대)시대에 지어졌다고 함산해경전소
청나라기윤주~진시대에 지어졌다고 함,미래 세대의 이익을 위해 작성됨사고전서총목
근대노신선진시대의 무당서,진나라와 한나라 시대에 내용이 더 붙여짐노신1925
근대위치현전국시대 진나라 시대때 지어진 위서언급안됨위치현1934
근대장심징전국시대 진나라 시대때 지어진 위서장심징1939
현대육간여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이 지음전한시대때 만들어짐후한~남북조시기에 만들어짐육간여1957
현대몽문통전국시대 초나라 사람들이 번갈아 만듬초나라 사람이 지음서주중기전~고촉국 사람이 만듬서주초기~전국시대 파국사람이 만듬몽문통1962
현대원가전국시대중기~전국시대말기때 만들어짐전한 초기때 만들어짐전국시대 초기~중기때 만들어짐원가1978
현대모순춘추시대때 만들어짐춘추전국시대 쯤한대에 제작모순1981
현대종치중서주에 은나라 무당 유민들이 와서 초본을 제작,전국시대 무당이 덫붙임,진한시대의 문인이 또 보충함종치중1986
현대왕젠쥔전국시대때 초본을 만듬,진한시대때 보충전국시대때 제작진한시대때 제작전국시대때 제작왕젠쥔2000
현대당세귀하상시대때 입에서 입으로 구전됨,서주이전 촉나라 사람이 파촉문화를 통해 전해짐,전국중기 초나라에서 문자로 제작됨당세귀2003
현대이풍무산해경의 원시 형태는 주 왕실 혹은 제후국의 지리관계 문서,무당의 손을 거처 오늘날의 모습이 됬음.


지은이 뿐만 아니라 그 실체 역시 오리무중이다.[74] 이름이 산해경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 바다 등의 지형과 지리에 대한 책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 지형과는 잘 연결되지 않으며[75]각 지역에 대한 설명도 그 곳에 사는 상상의 동물에 대한 기이한 설명이 주류라서 많은 사람들이 산해경은 주변 세상의 풍물을 상상하여 써놓은 중국 신화서 혹은 환상종 도감(…)으로 간주한다. 당연하게도 실제 지리서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으며, 그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도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 중심지역인지, 장강 유역인지, 중국 남부지역인지, 중국 동북 발해만 일대인지조차 불분명해 각 지역이 원류라는 많은 설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도대체 어느 시대의 신화나 전설이 반영된 것인지 역시 알 수 없다. [76] 일단 성립시기는 전국시대 후기로 보이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영향도 찾아보기 어렵다.[77]

단순히 누군가 쓴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지리서의 형태인데다 내용도 뒤죽박죽이고 읽기에 쉽지 않은 형식이라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대체 왜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한 단순히 장난 삼아 쓰인 글이나 민담의 모음집이라기엔 산해경이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춘추전국시대(선진시대)는 '글을 알고' 어떠한 지식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굉장히 귀했던 시대라는 점이 문제. 이 때문에 산해경이 불로장생을 꿈꾸는 왕들을 속이기 위한 가짜 보고서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희귀동물이 약으로 쓰일 수는 있는데, 구하기 힘들고 독성이 쩌니 사용 안 하는게 좋아요...라는 내용.
예산을 타긴 했는데, 결과물을 내놓을 수 없었던 그 옛날 중국인들의 땀과 고뇌의 결정체

이걸 순수한 허구의 창작으로 보지않는 결정적 이유는 그 내용 중에는 기원전 중국과 동아시아의 역사적인 상황이 기록되어 있고 그 일부 내용이 다른 사서 등에서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정확한 역사서나 지리서로 보기는 어렵지만 또 순수한 허구도 아닌 셈. 한국에 관련된 대표적인 서술로는 조선, 숙신, 예맥, 삼한 등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청구국, 군자국, 대인국, 백민국, 삼위산, 불함산(=백두산) 등 한국 관련 지리적 언급이 나오고 고조선을 최초로 언급한 책이 산해경이다. 한반도의 무궁화나 동방예의지국 이라는 개념, 백두산 천지에 산다는 뱀같은 괴수설도 산해경에서 처음 제시된 것.

그리고 산해경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판본이 내려오고 내려왔기에 산해경 판본의 변천의 역사는 는 중국 인쇄의 역사나 서지학의 역사와 한 궤를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은대 갑골문자에서 산해경에 언급된 제(帝)의 이름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전해지지 않은 모종의 고대의 지식이 반영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초고대문명설?

이런저런 설들이 나오고 있지만 산해경 자체와 산해경의 존재에 대한 언급 이외에는 산해경에 대한 자료도 거의 없으며, 현재까지 여전히 정체불명의 책이다. # 전한 시대부터 이미 정체를 알 수 없는 황당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곽박 역시 이런 평가를 염두에 두는 모습을 보인다. #

이렇게 오래전부터 전해온 고전서적 치고는 중국이나 조선에서 과거에는 별로 연구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유교의 가르침으론 이런 서적은 빼도박도 못하는 괴력난신에 해당되고 공자는 이런 환상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은 군자답지 못할 짓이라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고대 중국인의 지리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가치나 신화집으로서의 성격이 주목받고 있다.

현대까지도 전해져 오는 수많은 떡밥(치우, 황제의 싸움 등)의 원전으로서 가치가 높으며 번역판도 제법 있는 편. 한국어로는 정재서 교수의 역본이 있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인용한 이야기를 사기에 써 고대사 떡밥의 원인을 만들기도 했다.

4 기타

오만가지 환상종들이 등장하는 책으로의 가치도 높다. 또한 신이경(神異經)이라고 하는 유사한 책이 후대에 나오기도 했다. 환상적 지역의 지리정보와 환상적인 동물들의 도감인 걸로 봐서 고대의 중국인들이 D&D 게임과 비슷한 TRPG 놀이를 하기위한 일종의 Monster Manual 같은 역할을 하는 책이 아니었을까? 아마 산해경의 내용을 기반으로 중국풍의 환상적 현대적 TRPG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2016년 포켓몬 GO가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치자 중국에서 산해경에 등장하는 요괴들울 포획하는 짝퉁 게임 산해경 GO(...)출시 됐다. 금고아[78]를 이용해 요괴들을 잡는다고.

4.1 외부 링크

  •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문화콘텐츠닷컴에서 제공하는 산해경 일부 삽화 목록.[79] 해당 페이지 아래 '연관 목차'에서 확인할 수 있다.

4.2 관련 항목

  1. 그런데 사마천은 산해경에 대해 매우 기괴하고 언급할 가치도 없는 책이라며 산해경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그런 그의 발언은 아이러니 하게도 산해경이 굉장히 오래전 부터 존재 했다는 책이라는 사실의 결정적인 증거로 꼽히고 있다.
  2. 276년 ~ 324년생의 학자,점술가로, 훗날 점을 쳐서 불길하다며 왕돈의 모반 계획을 만류했다가 왕돈에게 피살당했다. 수신기에도 그의 행적이 실려있다.
  3.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樂浪郡)이고 천독은 天竺國(천축국)이다.
  4. 여호이구미(如狐而九尾) 곧 구미호이다.
  5. 왕해에 관한 설화는 다음과 같다 죽서(대나무로 된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은나라의 왕자해라는 왕이 유역이라는 나라에 손님으로 방문했느데 유역의 임금은 그를 죽게했다,이 때문에 왕해의 뒤를 이은 새로운 왕은 갑미가 하백에게 군사를 빌어 유역을 쳐서 멸망시킨뒤 마침내 그 유역의 임금 또한 죽였다.
  6. 1897년 상하이에서 창립되어 잡지·교과서·사서류·지도와 번역물 등의 출판과 함께 중국 고문헌의 복구에 총력을 기울인 기관.
  7. 도교 경전을 집대성한 책으로,당(唐) 개원(開元)연간에 최초로 편찬되었다.
  8. 太玄部 도교에 대한 각종 기록을 수록해놓은 파트
  9. 板式,책의 쓰거나 인쇄한 면의 짜임새.
  10. 半郭
  11. 線裝本,명대 중엽 이후에 나온 형시으로 고서의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다. 종이를 접고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은 방식이 기본적이며, 표지를 두 장 준비하여 몸통과 함께 구멍을 뚫어서 장정을 하는것이다.
  12. 上下雙邊
  13. 匡郭,책 둘레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선
  14. 版心,책이 접히는 곳에 있는 좁은 행
  15. 雙行,두줄로 쓰임.
  16. 上山海經表 유흠이 산해경을 읽고 남긴 소감.
  17. 도상(圖象)혹은 그림
  18. 上山海圖讃
  19. 雙鑑樓중국의 도서관 건물 참고(http://pedia.cloud.edu.tw/Entry/Detail/?title=%E9%9B%99%E9%91%91%E6%A8%93)
  20. 복구
  21. 중국 원,명,청대 시대의 최고의 교육기간.
  22. 張元濟,중국의 출판인(1867년 ~ 1959년)년
  23. 子部,중국의 문헌 분류법중 하나 역시 도교에 대해 다루것도 포함된다.
  24. 黃丕烈,청나라 시대 교감학자.
  25. 校勘記
  26. 宋代
  27. 山海經釋義
  28. 청나라 광희(연호(1662〜1722년)28년는
  29. 釋義 석의:『한서(漢書)』에 주석(註釋)을 달고, 저자(著者) 자신(自身)의 의견(意見)을 덧붙인 것
  30. 漢儒 중국 한 나라의 유학자들을 가르기는 용어
  31. 趙維垣 명대의 학자 참고:https://zh.wikipedia.org/wiki/%E8%B6%99%E7%B6%AD%E5%9E%A3
  32. 山海經釋義跋
  33. 圖像山海經
  34. 곡(榖)은 닥나무로, 그 껍질로 종이를 만든다.찬(璨)이란 자가 말하긴 곡은 구명(構名)이라 부르기도 한다.곡은 그 열매가 곡식과 같다.
  35. 육패:자세히 모르겠음(...)
  36. 육패:이것을 몸에 차면 길을 잃지 않는것은 곧 땅과 가깝기 때문이다.이는 감각에서 터득한 것이지 꼭 이치에 의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37. 무릇 만물 가운데 사람을 먹는 것은 모두 사악한 무리이다. 여기에서 생김새가 수리 같다고 하였으니 엄연히 일종의 짐승인 것이다.
  38. 崇文書局,중국의 도서 출판사 페이스북
  39. 그 등 위에 난 털을 이용해서 난다는 것이다,난다는 것은 즉 높이 있다는 것이다.
  40. 이것은 바로 <문선(文選)>에서 말한 날다람쥐이다. 운남성 요안헌의 몽화 지방에 있는데 내가 직접 본적 있다. 그 고기는 먹을 수 있고 난산(難産, 출산을 순조롭게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
  41. 東夷 중국이 칭하던 동쪽오랑캐의 준말.
  42. 羿,사람 이름에 쓰이는 한자 이밖에 한나라 때의 제후였던 사람을 '예'라는 인물을 지칭하기도 함.
  43. 마음이 어진 사람이자 재능과 기예가 있었던 예(한나라의 제후) 같은이가 아니면 오를 수 없다.
  44. 옛날에 재능과 기예가 있었던 사람들은 다 예라고 불렀으며 꼭 예라는 단어가 한나라의 제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45. 畢沅,후대의 나올 또다른 산새경의 주석가
  46. 九鼎,우 임금이 금을 거두어 만들어낸 큰 솥
  47. 顧起元, 명(明)나라 때 관리이자 금석가(金石家), 서예가로 활동했다.
  48. 雜說,쉽게 말하면 말그대로 잡소리(....)>
  49. 後序
  50. 도광(道光) 5년
  51. 李調元,이조원 청나라의 학자 한국에서는 박제가에게 학문을 가르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52. 重梓本
  53. 山海經廣注
  54. 局本 당시 지방정부에서 지원하여 출판된 책을 국본이라 한다.
  55. 연호상으로는 광서(光緖) 원년
  56. 異聞類 이문이란 기이한 이야기를 뜻함
  57. 공교롭게도 현대의 관점에서는 산해경이 하나라의 우 임금이 지은책은 아닐거라는 추측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58. 吳省蘭, 중국의 학자 조선에서는 심기도설에 수록된 그의 도서 예해주진(藝海珠塵)으로 유명하다.
  59. 匏集
  60. 革集
  61. 史部/地埋類,사부란 중국의 서적 분류법중 역사에 속하는 서적을 칭한다,지매는 지리학에 관한것인 듯
  62. 史部/地埋類 도찬이란 그림을 시로 감상한 문구
  63. 金閶,중국 장쑤성 쑤저우에 있는 구.
  64. 柴紹炳,당나라~청나라시기의 학자
  65. 山海經圖總目
  66. 靈祗,(신령 령)과 (땅귀신 기)
  67. 異域,동떨어진 미지의 지역
  68. 次經
  69. 讀山海經語
  70. 山海經雜述,잡술은 말그대로 잡소리
  71. 靈祗/異域/獸族/羽禽/鱗介,수족은 벌레를 포함한 짐승의 분류,우금은 새 같은 날짐승,그리고 인개는 바다 생물을 나타낸다.
  72. 靑邱國에 있으며, 바다 바깥쪽에 있다 <水經>에 이르길,즉 <上林賦>에서 秋田이 靑邱에 있다고 하였다.
  73. 내가 생각하기에는 <상림부>에서 요(堯,전설의 나라 원고시대때의 왕)임금이 태풍(大風)을 청구(靑邱)의 연못에서 잡았다고 하였다. 유준(劉峻,양나라때의 사람) 이 <변명론(辯命論,고대 서적중 하나)>에서 태풍이 청구에 서있다고 하였다. 당나라(唐)의 <소인사비(昭仁寺碑,서적)> 에 대풍이 청구를 막으니 유묘(有苗,오랑캐 종족의 이름)가 丹浦를 불렀다고 하였다.왕칙의 <九成宮頌(구성궁송,'구성'은 황금의 가치를 재는 단위)>에서 운명의 청구에 얽혀 있으니 봉숭아 들판에서 죽음의 조짐이 보인다고 하였다. 심약(沈約,중죽 남북조 시대의 학자)의 시에서 연기가 사라지니 단곡(丹谷,함경남도 지역의 옛지명)도 사라지고 달이 뜨니 청구가 보인다고 하였다.허경종(許敬宗,당나라 시대 학자)의 시에서 차후 청구에 설투(楔偸)를 묻었다고 하였다. 조시춘(趙時春,명나라의 문학가)의 <어적론(禦敵論)>에서 청구의 신령스러운 칼을 들이대니.이경(彝庚)에서 자궁(紫宮,신선의 거처)으로 돌아왔다고 하였으니, 곧 이땅인 것이다.<십주기(十洲記,산해경과 비슷한 부류의 책)>에서 청구산 위에 자궁이 있는데 진인(모든 이치를 깨우친자,아라한)과 선녀들이 이곳에서 많이 노닌다고 했는데, 바로 바다 바깥쪽에 있는 청구산 으로 이곳은 아니다.
  74. 어떤 한 해설서에선 산해도라는 지도를 설명하기 위해 제작되었지만 산해도가 소실되면서 실체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75. 예를 들어 특정 위치를 설명할 때, 어디서부터 가야 하는지 출발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동쪽으로 500리, 서쪽으로 1,000리 가다보면 00가 있고 그 00에는 XX한 동물이 사는데 그 동물은 @@하다'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76. 산해경이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의 중국은 현재 황하~앙쯔강 지역과는 기후와 지형이 완전히 다르다. 선진 시대 고대 중국 문명권은 정글이었으며, 환경적&문화적으로 15~16세기의 중남미 문명권과 비슷했다.
  77. 그렇기에 일각에서는 동주-서주시대때 편찬되지 않았냐는 주장도 있다.
  78.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머리에 쓰고 있는 테.
  79. 현재 링크에 들어가면 avst에서 위험을 감지하였다며 차단하니 이용에 주의 할 것 - 2016.05.05 기준 정상적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