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나라와 서진의 인물
胡沖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오나라와 서진의 관료. 호종의 아들로 성정이 온화하고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정사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되는 오력(吳歷)을 저술했으며, 유비가 조조 밑에서 채소를 기르면서 자신을 얕보도록 한 기록이 이 오력에서 나왔고 이 기록에 대해서는 배송지가 이것은 날조다라고 주장했다.
243년에 아버지 호종이 죽자 작위를 계승했으며, 천기 연간[1]에 중서령으로 임명되었다. 280년에 서진이 오나라를 공격하자 설영과 함께 손호에게 서진으로 항복할 것을 권한다.
그가 내린 평 중에서 정사에 실린 것 중에 누현, 하소, 왕번 등을 평가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누현, 하소, 왕번은 그 시대의 맑고 우수한 인물로 대체로 우열의 구분은 없다. 반드시 부득이 구분한다면 누현이 응당 앞에 있어야 하고, 하소는 응당 다음에 있어야 한다. 화핵은 문장을 짓는 재능에 있어서는 위소를 넘는 점이 있지만, 공식적인 글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호가 석두성 안에서 진군이 입성했다는 말을 듣고 검으로 자기 목을 베려고 하자 설영과 함께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안락공 유선을 본받지 않으십니까?"라고 해서 손호가 수레의 관을 싣고 자신의 몸을 묶어 문무 관원들을 거느리고 왕준의 군사 앞에 이르러 항복하게 했다.
1.1 미디어 믹스
삼국지 8,9 |
삼국지 시리즈의 8, 9편에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는 통솔 19/무력 17/지력 55/정치 73의 능력치. 병법도 누선과 조영 뿐이니 내정이나 시키자.
2 촉한의 인물
狐忠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이엄 밑에서 참군을 지내 231년 봄에 제갈량의 군대가 기산에 주둔하면서 이엄이 수송 업무를 재촉해서 감독했는데,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계속 장마비가 쏟아지자 수송이 힘들어지면서 식량 운반이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자 이엄의 명령으로 독군 성번과 함께 파견되어 이엄의 뜻을 설명하고 제갈량에게 후퇴해 돌아오도록 했다.
후일담으로 이엄은 군대가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놀란 체하면서 군량미는 아직 충분하면서 어째서 돌아왔냐고 했으며, 이렇게 해서 호충에게 명령을 내린 이엄은 자기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벗어나기 위해 제갈량이 진군하지 않은 잘못을 분명하게 나타내려고 하면서 우리 군대가 거짓으로 퇴각한 것은 적을 유인해 함께 싸우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3 삼국지연의의 가공인물
胡忠
촉한의 인물.
제갈량의 4차 북벌 때 종군한 비장으로 제갈량이 위수 남쪽을 칠 계획을 상의했으며, 날마다 군사를 내보내 싸움을 걸었지만 위군은 맞서지 않았다. 제갈량이 수레를 타고 다녀 위수의 지리를 살피던 도중에 어느 골짜기에 이르자 모양이 조롱박 같아 안에는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어 안에는 두 산이 합쳐져 골짜기가 또 하나 이루어져 4, 500명을 수용할 만 했으며, 길잡이를 통해 그 장소가 상방곡임을 알아내면서 장막으로 돌아오면서 두예와 함께 제갈량의 부름을 받았다.
제갈량이 귓속말로 비밀 계책을 알려주면서 종군할 장인 1000여 명을 모아서 상방곡으로 들어가 목우, 유마를 만들게 했으며, 두예와 함께 골짜기 안에서 장인들을 감독해 법식에 따라 목우유마를 만들었다.
본래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하지 않다가 모종강본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3.1 미디어 믹스
진삼국무쌍6에서는 오장원의 전투에서 등장해 전편에서는 본진의 동쪽에서 두예, 이회, 조직과 함께 위치하고 있으며, 후편에서 촉군의 본진에서 북동쪽으로 가장 가까이 위치하면서 두예와 함께 위치해 호충은 왼쪽에 있다.
4 후한 말의 인물
胡种
(? ~ 192?)
후한 말의 인물.
사례교위를 지냈고 왕굉과 평소 사이가 나빴는데, 당시 이각, 곽사 등이 장안을 점령했지만 왕굉과 송익을 두려워 해 왕윤을 죽이지 못했다. 이각이 칙명으로 왕굉과 송익을 부르자 왕굉은 송익과 함께 거병하려고 했지만 송익이 부름에 응하면서 왕굉은 어쩔 수 없이 혼자서는 힘이 없어 같이 조정으로 갔는데, 이 둘은 도착하자마자 하옥되었다.
왕굉이 하옥되자 그를 죽이려고 애썼기에 기회로 여겨 옥리에게 처형을 재촉하도록 했는데, 192년 음력 6월 7일에 왕윤, 왕굉, 송익 등이 처형되고 왕굉이 죽는 순간에 호충을 저주했다. 이후 호충은 잠자리에 들 때마다 꿈에서 나타나 자기를 지팡이로 때렸으며, 이 때문에 호충은 병이 들었다가 며칠 가지 못하고 죽었다.
태평광기에서는 호신(胡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 277 ~ 28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