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소

미국의 영화 감독에 대해서는 토미 위소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오서 「왕누하위화전(王樓賀韋華傳)」
왕번누현하소위소화핵

韋昭
(? ~ 273)

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자는 홍사(弘嗣). 오군 운양 출신.

정사에서는 사마소의 이름을 기피해 위요(曜)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배송지의 주에 등장한 위소가 지었다는 오서의 기록에는 위소와 위요 둘 다 표기되었다.

2 생애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해 문장쓰는 능력이 있었다. 승상연으로부터 서안현의 령으로 승진했다가 또 상서랑이 되어 태자중서자로 승진했다. 이 때 태자 손화채영이라는 자가 박혁[1]을 좋아해 관서에서 일하는 자들이 그에게 박혁을 배우는 것을 싫어해 위소에게 이 문제를 논하도록 하자 위소는 박혁론을 지어 그것의 쓸데없음을 널리 알렸다.

250년에 손화가 태자 자리에서 쫓겨나자 황문시랑이 되었으며, 252년에 손량이 즉위해 제갈각이 권력을 잡자 태사령이 되어 화핵, 주소, 양광, 설영과 함께 오서를 편찬했다. 258년에 손휴가 즉위하자 중서랑, 박사좨주로 임명되며, 유향의 옛 일에 의거해 서적을 바로잡게 하고 시강을 담당하도록 했다.

손휴가 친애하는 장포가 정사를 엉망으로 처리하자 위소는 이를 싫어해 유사들에게 시강하는 것을 꺼렸으며, 장포 또한 그런 위소를 싫어해 262년에 손휴가 위소와 성충을 불러 도덕과 육예에 관해 토론하기를 바랄 때 장포 자신이 한 잘못된 일이 밝혀질까봐 반대해 무산시킨다.

264년에 손호가 즉위하자 고릉정후, 중서복야로 임명되지만 이후에 직위가 강등되어 시중으로 임명되고 좌국사를 겸임했다. 손호가 즉위해 여러 곳에 상서로운 징조가 있자 손호는 위소에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위요는

이것은 다른 사람의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일 뿐입니다.

라고 답했다.

손호가 부친 손화를 위해 기(紀)를 만드라고 하자 그는 황제에 오르지 않았으므로 이름을 전(傳)으로 해야 한다고 고집하자 손호는 이 일로 위소를 증오하게 되었으며, 점점 더 위소를 질책해 노여움을 드러냈다. 위소는 겁에 질려 시중, 좌국사 두 직책을 사직하기를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으며, 위소가 약을 먹으면서 간호를 받을 상황까지 악화가 되자 더욱 긴급하게 사직을 요청한다.

이렇게 위소에 대한 총애가 줄어들자 일곱 되를 무조건 마시게 하는 자신의 연회에서 두 되 밖에 못 먹는 위소를 위해 감량시켜 주거나 술 대신 차를 내리던 것을 그만두어 위소는 죄를 짓게 되었으며, 또한 위소는 손호가 거행한 연회에서 술에 취한 손호가 신하들을 욕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했다가 결국 273년에 손호는 그를 붙잡아 감옥에 가둔다.

위소는 옥중에서 상소를 올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역사책을 완성해야 한다면서 온갖 비굴한 문장까지 쓰면서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했으며, 화핵도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했지만 손호는 듣지 않고 위소를 죽이면서 그의 가족을 영릉으로 유배보낸다.

3 기타

위요의 아들 위륭(韋隆) 역시 문학에 자질이 있었다고 한다.

유성숙에 따르면 위소는 오나라의 초대 승상 손소와 사이가 나쁜 장온의 당이었기 때문에 오서에는 손소의 전이 없다고 한다.

송서에는 위소가 관우를 비판하는 고취곡 관배덕 통형문이 실려있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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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평범한 내정용 문관.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18/17/68/74. 혼란을 가지고 있으며 박혁론의 정치 보정 +3을 받아 실질 정치력은 77.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18/20/68/73/68의 평범한 문관형. 특기가 상업 하나밖에 없다. 진수처럼 지리 특기가 없으므로 사서 편찬 엔딩을 보려면 지리를 배워야 한다. 특이점으로는 본인이 저술한 박혁론(지력 +2)을 소지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 지력은 70이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16/19/65/73/70으로 평범한 문관형. 수명은 길기 때문에 발전시킬 여지는 있으나 애매한 인상이 남는다.

삼국지 12는 대전판에서 추가. 자신의 저서인 박혁론을 들고있는 일러스트다.
  1. 바둑, 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