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상

1 후한 말의 인물

袁尙
(187년?~ 207년)

후한 말의 군벌인 원소의 삼남(혹은 막내아들)으로 삼국지의 인물. 는 현보(顯甫).

원소의 총애를 받아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어린 나이와 원소의 급사로 인해 내부적으로 수많은 도전을 받았고, 이는 원소 사후 원소 세력이 조조에게 빠르게 몰락하는 원인이 된다.

1.1 정사

1.1.1 어린 시절

원소의 늦둥이 자식으로 아들들 중 가장 총애를 받았다. 형인 원담,원희와는 거의 10살 이상으로 나이 차가 컸던 것으로 보이고 정사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의 평에 따르면 이복형제일 가능성이 높다.[1]

진수는 단지 원상이 미소년이었기 때문에 원소의 총애를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후한서에 남아 있는 심배의 평가에 따르면 효심이 대단하며 타고난 성품이 배우는 것을 좋아해 이미 일곱 살 무렵부터 신동이라는 명성이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심배는 원상 진영의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과장을 감안해야겠지만 방탕하고 가벼운 성격이었던 장남 원담과 대비되는 영특한 면모를 보였던 것이 원소의 눈에 들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1.1.2 원담 폐출

원소의 후처였던 유부인 또한 원상을 아꼈는데, 친자관계 때문인지 황족이라서 그런지 미모(...) 덕인지[2] 유부인에게 유독 극심한 편애를 받았다고 한다. 유부인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항상 원상의 재능을 칭찬했고 당시 유부인이 원소에게 크게 총애를 받고 있었던 데다, 원소 역시 평소부터 원상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장차 원상을 후계자로 삼을 욕심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원소는 원담을 형의 양자[3]로 보내 자신의 후계자 서열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본디 원소가 원담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원상을 귀여워한 것은 사실이나 이를 살펴본다면 그렇다고 이미 장성하여 혁혁한 무공까지 세우며 입지를 만들고 있던 장남을 제껴두고 어린 늦둥이를 후계 구도에 밀어넣어 풍파를 일으킬 생각까진 아니었으나 유부인이 원소를 수 차례 부추기면서 마침내 밝히지 못하던 속내를 밖으로 표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원담을 보면 알겠지만 하도 원담의 정치력이 막장이라 굳이 유부인이 그닥 부추기지 않았어도 원소가 원담을 폐출시켰을 만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청주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제법 활발하게 활동하던 원담과 달리 남아있는 기록이 전혀 없다. 200년 1월. 유비서주를 차지해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원소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아들의 병 때문이란 설이 있는데,[4] 원소의 아들이 3명이었던 데다 원담과 원희는 모두 이미 장성해서 외지로 나가있었기 때문에 이 아픈 아들을 원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5]

195년 당시 8, 9세 전후, 많아야 13살 정도이기 때문에 원담이 폐출되면서 주목을 받았다곤 해도 별다른 입지나 경력을 쌓을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1.1.3 원소의 급사와 후계자 계승

원소는 관도대전에서 패한 이후로 병이 들어 202년 6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로 급사해버린다.

원소의 후처 유부인의 성품은 잔혹하여 원소가 죽자, 원소의 시신을 초빈(草殯)하기도 전에 원소가 총애하던 첩 5명을 다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녀들이 지하에서 원소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 여겨, 그녀들의 얼굴에 검은 칠을 하여 그 형상을 훼손하였다. 원상은 한술 더 떠서 그녀들의 일가족을 다 그렇게 죽였다.[6]

실질적으로 원상은 이때 처음 등장하는데, 원소가 죽자 신료들 대부분의 여론은 원상이 어리기 때문에 나이 많고 경력도 상당한 원담을 옹립해야 된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한다.

원담은 원소의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업으로 향했으나 평소 원담과 사이가 나빴던 심배봉기는 원담이 정권을 잡으면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했으므로 선수를 쳐서 기주를 장악하고 원상을 옹립해 원소의 자리를 승계하게 했다.

자세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심배여담서에 의하면 원상은 이미 원소의 공식적인 적사(=대를 잇는 아들)로 임명된 상태였다고 하는데, 최소한 15세가 될 무렵에 관례를 지내고 성년이 되면서 적사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소가 후사를 정함에 정하는 것에 이르지 못하고 죽었고 심배가 원소의 유명을 날조해 원상을 옹립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어쩌면 원상의 관례는 원소 사후, 심배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심배와 원담의 정치싸움에서 마치 헌제마냥 심배 측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는 존재로 내세워질 정도로 원상 본인의 입지는 취약했다는 말인데, 본디 생전의 원소는 일족 중심의 독재체제로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식들의 기량을 알아본다는 핑계로 막 20세를 갖넘긴 원담과 원희를 각주의 자사로 보내 입지를 다지게 한 바가 있고, 이를 공언했다. 폐출된 원담조차도 그러할진데 이미 후계자 계승을 기정사실화한 총아였던 원상이 별다른 입지나 친위세력이 없었다는 것은 납득되기 어려운 상황이라 관례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고 원소가 죽어 별다른 입지나 경력이 만들어질 상황이 아니었다는 추론이 있다.

이때 원상의 나이는 적으면 13세, 많아도 20세 이하였을 것이고 보통 15,6세 정도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 무렵 연의에서는 창정전투에서 원상이 등장해 사환을 일기토로 죽이는 등 활약하고, 이후 조조가 업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원소 대신 출진했다가 참패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지만 이는 단지 허구일 뿐이다.

1.1.4 여양전투

뒤늦게 기주에 도착한 원담은 이미 원상이 원소의 뒤를 이어 집권했기 때문에 후계자가 될 수 없었지만, 원상의 승계에 불복해 거기장군을 자칭하며 군사를 이끌고 여양에 주둔함으로서 원상과 대립했다. 참고로 원소가 처음 거병했을때 자칭한 관직이 거기장군이었다. 원담도 이를 따라 거기장군을 자칭함으로서 자신이 원소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이에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해졌고 원상은 봉기를 중재역으로 원담에게 파견했지만 마침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북진해 온다.

원담은 급히 원상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원상이 이에 대해 심배와 상의하자 심배는 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했고[7] 원상 또한 이에 따랐다. 분노한 원담은 봉기를 죽였다.

한편 원상 측에서는 봉기가 죽자마자 원상이 직접 나서서 원담을 구원하고 심배는 업에 남아 후방 사무를 총괄한다.

이에 대한 정황은 매우 불명확하나 한진춘추에 의하면 중재역으로 파견된 봉기가 오히려 원담을 부추기면서 양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기 때문에 원상이 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봉기를 믿고 원상한테 저항하다 상황이 악화된 것에 분노한 원담이 봉기를 죽여 머리를 보내고 후계자로서 원상의 지위를 인정함으로서 결국 화해가 이루어져 공동으로 조조와 맞선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후한서 쪽에서는 이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 듯 하다. (202년 9월)

이후 여양에서 조조와 원상, 원담 사이에는 반년에 걸친 격전이 펼쳐졌다. 전황은 일진일퇴가 거듭되었는데, 이듬해 3월 조조의 대대적인 공세가 펼쳐져 원상, 원담은 마침내 여양을 포기했고, 조조는 승세를 타고 계속 진군했지만 원상의 역공을 받아 패퇴하게 된다. 이때 원담은 조조를 추격해 궤멸시키자고 제안하지만 원상은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원담의 진의를 의심했는지 이 제안을 거절한다.

사실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의 여러 기전에서는 조조가 승리만을 거듭하다 갑자기 허도로 돌아갔다고 기술함으로서 조조의 패배를 감추고 있지만, 곽가전에서처럼 연전연승하다가 갑자기 "쟤들은 우리가 물러가면 지들끼리 싸울 테니 지금 칠 필요 없어."하고 말하며 물러선다는 것도 이상한 부분이거니와, 명시적인 구절은 없지만, 장료전에서 원상이 굳게 지켰기 때문에 업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어 조조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다. 또한 범엽의 후한서에서는 원상의 반격으로 조조가 격파되고 허도로 철수했다고 기록되어 조조의 패배로 끝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더욱이 후출사표에서도 조조의 대표적인 패전으로 여양전투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양의 전투가 조조의 패배로 끝났고, 이 패배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곡필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 하다.

1.1.5 내전

한편 원상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업에 계속 머물고 있던 원담에 대한 병력 증원과 무기의 지원을 중단했는데, 이는 더 이상의 문제를 만들지 말고 얌전히 청주로 돌아가라는 종용이었으나, 여전히 후계자의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원담은 이에 대단히 앙심을 품었다. 마침 곽도, 신평의 부추김도 있어 그대로 군사를 일으켜 업성의 외문에서 원상을 습격함으로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203년 4월?)

원상은 원담을 격파하여 업에서 내쫓았고 원담은 평원을 거쳐 남피까지 달아났다. 원담이 패하자 원담의 부하장수 유순이 반기를 든 것을 시작으로 청주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원담은 더욱 군비를 늘리고 청주와 인접한 기주 동쪽 경계의 군현들을 약탈하며 다시 원상에게 도전했다. 이에 원상도 친히 군을 이끌고 응전하여 위군 동쪽 경계의 관도현에서 맞붙었는데, 이때 원상은 서전에서 패해 달아나는 듯 했으나 복병을 숨겨 원담군을 철저히 격파했다고 한다. 원담은 근거지인 평원군으로 달아난다.

이후 원상이 다시 군대를 일으켜 평원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자 궁지에 몰린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하며 조조를 끌여들이게 된다. 조조는 재차 북상을 시작했고, 조조가 황하를 건너 여양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상은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으로 돌아온다.

1.1.6 업 공방전

203년 10월. 여양에 도착한 조조는 자신의 11남 조정과 원담의 딸을 결혼시켜 혼인동맹을 맺었으며, 원담과 내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조조까지 재차 북상하여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자 원상의 부하였던 여광,여상은 원상에게 반기를 들어 무리를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했고, 조조는 이들을 열후로 삼았다. 한편 원상 측에서는 원담에게 조조와의 관계를 끊고 화해할 것을 권하며 문제의 원흉인 곽도를 제거할 것을 종용했으나 원담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 준비를 더욱 굳게 했다.[8] 기록상 이 외의 별다른 움직임은 없지만 정황상 이듬해 정월까지 여양 인근에서 원상과 조조의 대치가 이어진듯 하다.

204년 1월. 조조는 다시 황하를 건너 돌아갔고, 수로공사를 벌여 군량 수송로를 확보하는 등 장기전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한편 원상은 심배와 소유에게 업의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재차 원담을 공격하러 평원으로 향하는데 조조의 부재를 틈타 속전속결로 원담을 처리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204년 2월. 원상이 원담을 치러 평원으로 가자 조조는 또 다시 황하를 건너 북상해 기주를 공격한다. 이때 업에서는 소유가 조조에게 내응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심배에게 발각되어 업성 내에서 시가전을 벌이다 패하여 조조에게 달아난다. 한편 조조는 황하를 건너고 여양을 거쳐 불과 업에서 50리 떨어진 원수(=洹水.황하의 지류)까지 순조롭게 진군해 소유와 합류하고 곧바로 업을 포위했는데, 심배가 비록 주요인사의 내응을 적발하는데 성공했으나 신속한 제압에 실패하고 수도 내에서 소유의 군사들과 시가전까지 벌이게 되는 등 시간을 지체하게 되어 요격 기회를 놓치고 대응이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조는 업을 포위하고 4월까지 토산과 땅굴을 만들어 업을 공격했으나 소득이 없자 조홍에게 전선을 맡긴 채 주변지역 공략에 나서 모성에 주둔하던 무안장 윤해를 격파해 고간이 다스리고 있던 병주와의 연결을 끊었고, 한단에서 저곡을 격파했으며 역양령 한범과 섭장 양기의 항복을 받는다. 원상은 별도로 견초 등을 고간에게 보내 조조의 침공으로부터 병주에서의 지원을 감독하게 했지만 차근차근 원상의 목이 죄어지는 상황에서도 고간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데, 형세를 관망하듯 보이는 고간의 소극적인 면모는 기록상의 부실도 원인이겠지만 이후 고간의 행동으로도 알 수 있듯 조조와 원상의 대립을 틈타 자립할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5월. 업으로 되돌아온 조조는 전략을 수정해 토산과 땅굴을 허물고 장수(=章水. 황하의 지류)의 물길을 바꿔 업을 수몰시킨다. 수공으로 성내의 식량이 썩은 상황에서 8월까지 포위가 지속되자 아사자가 속출해 급기야 성내 인원의 절반이 굶어죽는 등 업의 상황은 막장이 된다.

7월. 한편 평원에서 원담과 대결하고 있던 원상은 업의 소식을 듣자 황급히 업으로 귀환했다. 원상이 이끌던 본대의 정황은 기록에 언급되지 않으나 포위 안 풀린다고 원담이 징징대는 전론의 주석을 보면 원담을 평원에 고립시켜 궁지에 몰아넣은 상태로 업성 수몰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초기전략에 따라 진행되었던 듯 하다.

업에서 70리 떨어진 부수에 도착해 영채를 세워 이부를 통해 자신의 귀환 사실을 알렸고, 횃불과 봉화를 통해 서로 연락했다고 한다. 이부가 재차 포위를 속이고 무사히 귀환하자 원상은 조조의 포위망을 야습했고 심배 또한 군사를 내보내 호응했지만 이 '양면 야습작전' 은 심배,원상이 나란히 조조에게 털려버리면서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조조는 패주한 원상을 추격해 포위했는데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 원상은 진림과 예주자사를 지낸 음기를 사절로 보내 강화를 시도하지만 조조는 이를 거부하고 더욱 급하게 포위한다. 이에 원상은 밤중에 포위망을 뚫고 기산(祁山)으로 달아나 추격해오는 조조에게 회전을 시도하나 합전하기 직전 부하장수 마연장의가 배반하여 조조에게 호응하면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단기로 달아나게 된다. 조조는 원상군의 치중을 모두 노획했으며 원상의 의복과 원소에게서 물려받아 가지고 있던 대장군,강향후의 인수와 절월 등 개인 소지품까지 모두 거두어 이를 업성의 병사들에게 보이는 등 선전공세로 업성 주둔군의 사기를 꺾었다. 얼마나 동요가 심했는지 진수는 아예 '성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표현을 쓰고 있다.

곧 업성은 성문교위를 맡고 있던 심배의 조카 심영야인시대의 그분이 아니다!이 항복하여 성문을 열고 조조군을 들이면서 함락되었고, 심배는 이를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단기로 달아난 원상은 중산국에서 세력을 수습하나 곧 원담의 공격을 받아 다시 세력이 와해되었고 그나마 다시 모은 군사를 모두 잃은 채 유주에 있던 원희에게 달아났으며 원희는 탁군 고안현에서 원상을 맞아들였다.

원담은 원상이 업으로 귀환할 때부터 뒤치기를 시도하며 원상군의 후방을 유린한 것으로 보이는데 원상 본대까지 추격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나 일단 공식적으론 조조의 휘하임을 확고히 표명한 상태였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원상을 방해하면서 조조에게 협조했을 가능성은 높고 실제로 원상이 회군한 7월부터 반격에 나서 9월 무렵까지 감릉,안평,발해,하간에 더해 원상이 세력을 수습하고 있던 중산까지 총 5개 군국을 점령했는데 업성이 있던 위군의 동쪽지역은 전부 먹었다고 보면 되고 사실상 기주 절반을 차지한 샘이다. 확실히 원상에게는 치명타였겠지만 조조에게 이득만 주는 게 아니라 조조와 원상을 싸움붙이고 그 사이에 원상의 세력을 날로 먹으면서 이를 기반으로 삼아 원상과 싸우느라 지친 조조를 몰아내는 것이 원담의 기본전략이었기에 조조에게 협조하기보단 자신의 세력 확대에 매진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조조는 업성 함락 이후 이를 지적하며 원담과의 관계를 파기하고 신속히 원담 토벌에 나서 이듬해 1월에 남피에서 원담을 참수한다.

한편 고간은 업성 포위 내내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심배 또한 멀리 떨어져 있던 원희의 구원까지 기대하면서 옆에 붙어있던 고간의 구원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점, 구원은커녕 어부지리로 업을 빼앗을 것을 노리고 있었다는 순욱전의 서술을 봤을때 미칠듯한 병신짓으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던 원담과 달리 공공연히 드러날 정도로 노골적인 어그로는 피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원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듯하다. 견초전에 의하면 이후 원상이 중산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원상을 맞아들여 도울 것을 재촉하던 견초를 죽이려 했지만 견초는 이를 눈치채고 간신히 달아났다고 한다. 견초는 달아났지만 견초처럼 운좋게 도망친 경우를 제외하곤 원상 측에서 보내진 사람들 대부분이 죽거나 휘하로 강제편입되는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이후 일단 조조의 기세가 강하자 투항하며 병주자사 자리를 유지했지만 206년에 조조에게 반기를 들게 된다.

이런 난리의 와중에서도 고분고분하게 원상의 지지를 표명했던 원상의 둘째형 원희는 이때 뭘 하고 있었는지 알려진 기록이 없다. 유일한 기록은 유주 탁군 고안현에서 원상을 맞아들였다는 것인데 탁군은 기주 북동쪽 경계인 발해군과 인접하고 발해의 남쪽은 원담의 근거지인 평원국과 인접하므로 원희가 이전부터 이 근방에 주둔하고 있었다면 아마 원담과의 싸움에서 원상을 지원하는 형세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원담이 고작 2,3개월 남짓한 동안에 위군 동쪽 전역을 날로 먹으면서 원상에게 치명타를 줬던 걸 봐선 거의 도움이 안됐다는 의견이 있는데, 원담이나 고간이 제각기 꿍꿍이속이 있어서 원상을 공격하거나 방관했던 반면 이쪽은 그런 야심을 내보인 적도 없고 최후까지 원상과 함께하는 등 충심으로 원상을 보좌하려던 쪽에 가깝기 때문에 더 기괴하다(...)는 평가.

원담을 치러 청주로 향할 당시 원상의 기본전략은 조조가 재차 북상해 오더라도 심배와 소유가 지키고 서쪽(병주)에서 고간이 이를 지원한다면 버틸 수 있고, 동쪽(청주)의 싸움이 길어지더라도 북쪽(유주)에서 원희가 지원한다면 혹 변고가 생기더라도 원상의 본대가 안전하게 귀환해서 조조를 맞아싸울 수 있는 구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소유는 일찌감치 조조에게 붙으면서 배신했으며, 심배는 소유의 배신을 적발했으나 그 과정에서 조조를 맞아싸울 기회를 놓치고 포위되었다. 이를 지켜본 고간은 어부지리를 노리고 심배를 방관했으며, 결국 원상이 급히 귀환했으나 원희가 이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해 조조, 원담에게 앞뒤로 공격당하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오게 됐고, 업을 구원하기 위해 회군했던 원상 자신도 결정적으론 부장의 배신으로 군대가 철저히 궤멸되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기 힘든 원희 정도를 제외하고는 굵직한 전략적 축의 대부분이 배신으로 무너진 셈이고, 사실상 심배를 제외한 주요인사 전원은 주어진 역할과 임무를 방기했다. 원소 사후 후계자의 권위가 약했던 원가 진영에 얼마나 배신과 줄타기가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조조는 원상이 업에 도착하기 이전 이전 원상이 큰 길로 왔다면 피해야 하지만 서쪽의 산을 따른 지름길로 왔다면 간단히 사로잡을 수 있다고 말했고, 원상이 서쪽 길로 와서 이미 한단에 도착해 있다는 척후에 크게 기뻐하며 "이제 기주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다."고 호언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원상 주변의 정황이나 야습같은 기책으로 상황을 타개하려 했던 것을 봐선 아마 조조에 비해 확연히 군사가 적었던 것 같다.[9][10]

1.1.7 유주 망명

원희가 유주자사로 원상과 있던 시기는 204년 10월, 고안에서 원상을 맞아들였다는 것 외에는 불분명하나 204년 11월부터 205년 정월까지 조조와 원담 사이의 전쟁이 있었으며 조조가 평원에서 남피로 도망쳐 저항하던 원담을 공격하면서 별도로 장합을 보내 옹노현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 경계지역에서 조조의 별군과 몇 차례의 지엽적인 분쟁 정도가 있었던 것 같다.

유방전에 의하면 이 당시의 탁군태수는 어양 사람 왕송이었는데, 왕송은 "대세가 조조에게 있으니 지금 먼저 항복하면 상을 받겠지만, 나중에 항복하면 처형당할 뿐."이라는 유방의 조언에 따라 조조가 원담과 싸우던 무렵에 조조에게 투항했다고 한다. 탁군태수였던 왕송이 원상과 원희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원상과 원희가 이 무렵 탁군에 머물렀음을 감안하면 탁군태수의 투항은 심각한 위협이었을 것이다.

이후 원상과 원희가 어느 곳에 머물렀는지 알 수 없고 이듬해인 205년 1월에 원희의 부하인 초촉 등에게 습격을 받아 요서 오환으로 달아났다고만 전하는데, 원상과 원희를 몰아낸 뒤 초촉은 수만명의 군사로 유주 각 군현의 태수,현령들을 조조에게 투항하도록 협박했고 유주자사를 자칭하며 조조에게 항복한다. 조조의 기주 장악이 확실시되자 왕송의 배반을 시작으로 조조에 대한 투항이 가속화되며 급속도로 유주의 영향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1.1.8 오환 망명

이후 오환왕 답돈의 보호를 받으며 재기할 기회를 노렸다. 유주에서 쫓겨난지 3개월 만인 205년 4월, 오환의 지원을 받아 어양군 일대를 침입해 조조가 파견한 선우보를 공격했으며 조조에 대한 반란을 사주해 유주자사와 탁군태수를 죽였다.[11]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4개월 뒤인 8월에 조조가 직접 나서 반란의 중심인물인 고안사람 조독과 곽노를 참수하고 선우보를 구원하러 광평으로 향하자 원상이 그대로 국경 밖으로 달아나면서 겨우 진정된다. 이는 오환,원상군과 이에 호응한 반란군이 4개월동안 유주를 활개치고 다니는데도 그때까지 별다른 대응을 취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로 인해 골치를 썩힌 조조는 10월에 업으로 돌아가 오환을 공격하기 위해 군비를 갖췄으나, 206년 1월, 때마침 이 틈을 탄 고간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홍농,하동,하내 등 사예주의 3군을 장악하고 유표와 연계하는 등 더욱 심각한 위협이 되었기에 이를 막고 수습하는 결과적으로 과정에서 원상의 경계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게 되어 206년 내내 유주는 원상과 삼군오환의 샌드백이 되고 만다. 원상과 오환족은 수차례 유주를 격파하고 10만호의 유주 백성들을 붙잡아 오환으로 돌아갔다.[12]

한편 평판이 좋았던 원가의 정치에 대한 그리움과 조조의 가혹한 정치와 악명으로 인한 반발 때문인지 원상을 따른 오환으로의 자발적 망명도 상당했는데 후한서 오환전에 따르면 원상이 오환의 답돈에게로 망명하자 이를 따라 오환으로 달아난 기주,유주의 백성들이 10만 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상의 오환 망명 이후 도합 20만 호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가 만리장성 이북에 거주하게 된 것인데, 1호당 5인으로 쳐도 총 100만에 이르는 등 규모가 워낙 큰지라 10만 호가 이주한 같은 사건을 두고 사가의 사관 차이로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원상이 약탈했다고 쓰고, 범엽이 쓴 후한서에서는 자발적으로 원상을 따라갔다고 적은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 10만 호 사건에 대해 삼국지에서는 유주인으로, 후한서 쪽에서는 기주+유주인, 대체로 기주인 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차이가 있는데, 원소의 정치가 하북4주에서 모두 평판이 좋았지만 특히 기주는 오랬동안 근거지로 삼기에 신망이 남달랐을 테고, 또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기주출신 장병 7만을 파묻어 죽인 전력이 있는 사람이니만큼 그 반감 또한 유달리 강했을 것이란 추측도 개연성이 있기에 기주인의 자발적 망명과 유주인의 강제이주라는 별개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원상이 오환으로 망명한 이후 매우 많은 규모의 인구가 오환으로 간 것은 사실이며 원상은 그 성과에 상당히 고무되어 이를 기반으로 장차 다시 조조와 패권을 겨룰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13]

1.1.9 백랑산 전투

오환으로 달아난 시점에서 원상에 대한 조조 진영의 평가는 대체로 낮았으나, 이런 행보로 인해 점점 조조의 골칫거리가 된다.

이듬해인 207년, 조조가 북벌에 나서 원상과 삼군오환을 치는 것에 대해 의논할 때도 대부분의 제장들은 원상은 도망친 포로에 불과하고 오환족들은 야만족으로 통제가 되지 않으니 원상은 그들을 부릴 능력이 없으나, 원상을 치기 위해 북으로 나선 사이 남쪽의 강적인 유표유비를 내세워 후방을 공략할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지만, 곽가는 의심많은 유표는 유비를 견제하여 제대로 쓸 수 없으리라 평가한 반면, 원상은 원소의 후광을 제대로 이용하고 있다며 경계하여 그를 내버려둔 채 남쪽으로 유표와 치러 나서면 유주는 물론 하북 4주 전역의 판도가 원상에게 뒤집힐 것이라 평가했다.

이에 따라 조조는 마침내 오환 원정을 결행하는데, 초반엔 요서오환의 근거지인 유성으로 향하는 대로가 장마로 진창이 되고 여러 샛길도 원상,오환군이 선점하여 철저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고전하고 있었으나, 때마침 조조 진영에 합류한 전주가 2백년 이상 사용이 끊겨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극소수인 노룡 계곡의 고도를 소개하고 길을 따라 습격하자는 계책을 내놓으며 길잡이를 자처했다. 이에 조조는 전주의 안내를 받으며 노룡새의 길을 따라 유성에 도착했고, 본영에서 불과 2백리 떨어진 곳에서 조조의 대군이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척후를 들은 원상 등은 경악한다.

이후 백랑산에 올라 정찰을 돌던 답돈이 역시 소수병력으로 정찰을 돌던 조조의 본대와 마주쳤다가 어이없게도 그 곳에서 사로잡혀 죽어버리면서 바닥을 치던 사기가 패닉상태까지 떨어져 내려가 오환군은 허무하게 궤멸되고 만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답돈 항목 참조.

1.1.10 요동 망명

답돈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혼란을 틈탄 조조군의 일방적인 살육[14]에서 원상은 재차 달아나 요동의 공손강에게로 망명한다. 이때 요서오환 선우 누반과 요동오환 선우 속복환, 우북평오환 선우 오연 등 삼군오환의 지도자들도 근거지를 버리고 원상을 따라 요동으로 향하게 된다.[15]

후한서에 따르면 당시 완전히 폭망했음에도 아직 수천의 정예기병이 원상을 따랐다고 하며.업에 근거지를 두었던 시기에는 심배, 오환 망명 시기에는 답돈이 제각기 원상의 섭정격에 해당하는 위치로 사실상 실세에 가까웠지만 이 짧은 시기 동안 원상이 실질적으로도 완전한 중심인물이 되었던 것 같다.

이 때문인지 원상 개인과 관련된 일화는 전무하다가 이 최후 무렵에만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전하는데 이전에 오환을 무찌른 조조에게 요동까지 진군하면 원상을 잡을 수 있다고 진언하는 자가 있었으나 조조는 공손강이 평소부터 원상을 두려워했으므로 그를 친다면 원상과 연계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원상을 죽여 머리를 보내올 것이라고 예측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한 전략과 후한서에 따르면 원상 자신은 요동의 경계에 가까워지자 원희에게 말하길, 요동에 도착하면 반드시 공손강과 자리를 갖게 될 것인데, 요동이 광활하고 사람도 많은 곳이니 자신이 그 자리에서 공손강을 한칼에 베어버리고 요동을 차지해 기반으로 삼는다면 예전 이상으로 크게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며 격려했다고 하나 공손강만 죽이면 요동이 평정된다는 등 워낙 터무니없는 식의 이야기인지라 정황상 어느 정도는 격려성 허세에 까웠던 것 같다...

다만 실제로 원상에게 유리한 조건이 너무나 많았던 것은 사실인데, 우선 중원에서 군웅할거의 난세를 피해 벽지인 요동군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기에 요동의 잠재력이 크게 신장된 것은 사실이고, 중원의 명문가 출신에 원소의 후광까지 입은 원상이 매우 명망이 높았던 반면 공손도 이래로 한미한 가문에서 벼락출세해 요동에서 황제처럼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공손씨가 현지의 호족들에게 반감이 심하고 이주민들에게도 신망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며 본토와 떨어진 채 할거주의를 표방해 중국 동북부 끝자락에서 왕노릇하며 주변국가들과 끓임없이 대립하던 공손씨 정권과 달리 원씨의 기본적 외교전략은 그 답돈 또한 원소의 사위로 원상의 자형뻘이 되는 등 비한족 국가들에게 대체로 유연한 스탠스였던 것도 사실이었고 게다가 조조가 이끌던 중앙정부에서 부정하긴 했지만 원상이 공식적으로 내세우던 관직은 원소의 관직을 그대로 승계한 대장군+지절+기주목+유,병,청주독+현후에 절월,호분,궁시의 삼석특진을 더한 것으로 관직상의 권위만큼은 당대 중국 최고로 조조조차 미치지 못했던 반면 공손강은 고작해야 요동태수+향후에 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공손강과 원상은 대략 20세 이상의 나이 차이가 있었기에 [16] 원상이 경계받을 행동을 피하고 그저 소일하는 나날로 그저 잉여롭게 지내더라도 시간 자체가 원상에게 훨씬 유리했다. 공손강이 살아있는 내내 원상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공손강이 늙어죽은 뒤 공손강의 어린 아들들이 그동안 닳도록 닳아 노회한 원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보장은 거의 없기 때문.

급습에 가까운 형태로 공손강을 죽이고 나머지 공손씨 일파와 투쟁을 벌여가며 요동을 순조롭게 점거할 확률은 낮지만 장기적으로 공손씨를 축출하고 요동을 장악하려 한다면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이는 원상뿐 아니라 공손강도 알고, 저 멀리 떨어진 조조도 알고, 1800년 뒤에 키보드 두들기는 위키러도 아는 일이었으며 당장은 공손강이 칼자루를 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정말로 일단 선수를 쳐서 공손강을 제거하고 밑그림을 그려보겠다는 계산이었을 수도 있다. 매우 극단적인 방법이었지만 그런 위험요소에도 자신을 받아줄 거의 유일한 이유였던 조조가 움직이지 않고, 따라서 공손강이 자신을 피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시도해볼만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요동행을 포기하고 공손강을 피해 변경을 떠도는 것은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일정한 지역적 기반이 없으니 아직도 남아있는 수천명의 군대를 먹여살릴 군량조차 확보할 수 없고, 이미 그렇게 된 상황에서도 낙오하지 않고 요동까지 따라온 병사가 수천명이나 남아있었던 것은 상당한 수완이라 볼 수 있지만, 결국 군량이 없으면 군사들은 자연히 흩어지며 이미 이름과 얼굴이 널리 팔리고 조조가 장악한 중앙정부에서 역적으로 현상금이 걸린 원상 형제가 군대조차 잃었다면 일개 향리의 백성에게조차 살해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좋든 싫든 원소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충분히 정치적이었다.

1.1.11 최후

요동에 도착한 원상이 첫 공식 회견 자리에서 그대로 공손강을 살해할 생각을 품은 것과 마찬가지로 공손강 역시 결단에 주저함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는 원상을 만나는 자리에 정용한 무사들을 여러 명 숨겨두었고 신호를 하면 나타나 원상 일행을 치도록 계획했다. 원상 일행이 공손강을 만나 회견 장소로 들어가기 직전, 문득 원희는 두려워하며 들어가지 않으려 했으나 원상은 이를 못마땅해 하며 원희를 강하게 나무랐다고 한다. 하지만 원상 일행이 들어가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공손강은 소리쳐 복병을 불러들였으며 이 때 원상은 죽지는 않았지만 생포되었다.[17]

위서 원소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전략에 의하면 생포된 원상은 결박되어 꿇어앉혀졌고 추위가 일찍 찾아와 날씨가 무척 춥자 죽기 직전 앉을 자리를 구했는데 이에 원희가 "우리 머리가 만릿길을 떠나는데 무슨 자리가 필요하겠느냐"며 원상을 나무랐다고 한다. 원상은 곧 죽는다는 상황 자체도 이해하지 못하고 뜬금없이 앉을 자리를 구해 빈축을 샀다는 이야기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원상의 기량이 용렬함을 알 수 있는 일화로 이를 소개하고 있다.

다만 후한서의 묘사는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내용이 다른데, 원상이 사로잡힌 뒤 결박되어 심문을 받았고 이때 날씨가 무척 추웠다는 부분까지는 같다. 후한서의 묘사는 비슷하지만 앉을 자리를 구하며 원상이 한 말이 자세히 나온다.

未死之間(죽지 않는 동안), 寒不可忍(추위를 견딜 수 없으니), 何相席與(자리를 마련해줌이 어떨지).

이에 대답하는 사람도 원희가 아니라 공손강으로 되어 있으며 이 말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진 공손강이 화를 내며 "경의 머리가 만리 길을 떠날 텐데 무슨 자리가 필요하겠는가"라고 말한 뒤 곧 원상을 참수했다고 한다. '죽지 않은 사이'라는 표현과 그 대답을 공손강이 했다는 내용을 따라가면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는데, 원상은 상황을 벗어날 수 없자 "추우니까 빨랑 죽여 ㅅㅂ"을 외치며 객기를 부려 공손강을 비꼬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만릿길 드립을 원희가 쳤다면 고문관이 따로 없었겠지

1.1.12 사후

공손강이 요동에서 조조에게 원상의 머리를 보내오자 조조는 이를 효수하고 삼군에 영을 내려 원상을 위해 곡을 하는 자는 그대로 참수한다는 엄명을 내렸지만 예전에 원상을 섬겼던 견초가 원상의 효시된 머리를 보고 통곡하며 그 앞에 제사용품를 차려와 장례를 주관했다는 기록이 있고. 전주 또한 원상의 조문을 읊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을 보면 조조의 영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듯 하다. 하북에선 두 사람의 영향력이 대단했기 때문인지[18] 조조도 이를 처벌하지 못하고 불문에 부쳤다.

삼군오환의 선우들 중 일부는 원상과 동행했다가 원상과 함께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이며, 일부는 따로 주둔하다가 원상을 처치한 공손강이 재차 군대를 내어 격파하고 참수한 것으로 보인다. 공손강은 이들의 머리 또한 원상,원희의 머리와 같이 조조에게 보냈다.

그의 사후 30년이 지난 237년,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이 요동에서 위왕조에 반기를 들고 관구검이 이를 공손연을 치기 위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우북평오환 선우 구루돈과 요서오환도독 호유섭이란 친구들은 관구검에게 화친하며 5천의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 토벌에 합류했는데, 구루돈과 호유섭은 본디 원상을 따라 요동으로 왔던 자들이라 한다.[19] 원상 사후 공손씨의 토벌을 피해 살아남은 잔당 몇몇이 세력을 형성하는데 성공해 이때까지도 남아있었던 것 같다.

1.2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무인 이미지로 등장. 원담의 막장성이 다소 희석되는 대신 원상은 원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밀리지 않는 훌륭한 막장(...)으로 묘사된다.

관도대전에서 오소가 털리고 장합,고람이 항복해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원소 본대의 전력을 줄이기 위한 업과 여양을 공격하는 척 양공을 펼치자 여기에 낚인 원소가 원상에게 별군을 이끌고 업을 지키게 하는 것으로 첫 등장.

관도전 이후 재기를 노린 원소를 따르며 창정전투 초반에 사환을 일기토로 죽이는 등 활약하지만 원소가 십면매복게에 걸리며 창정전투에서 참패해서 별 의미가 없었다. 창정전투 직전 원소는 원담이 난폭하고 성질이 급해 사람 죽이기 좋아하며, 원희가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반면, 원상은 영웅다운 기상이 있으며 어질고 선비를 아껴서 후사를 잇기 적합하다고 띄워주는 대사를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데 이후 조조가 하북으로 침공해오자 중병에 걸린 원소를 대신해 총대장으로 나서지만 사환을 잡은 자신의 무예를 과신해 형제들의 합류를 기다리지도 않고 깝치다가 장료에게 패하여 군사의 태반을 잃는다. 이 때문에 원소가 빡쳐서 피를 토하며 죽는다.(...)

그렇게 원소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 심배, 봉기와 짜고 원소의 유서를 위조해 후계 자리를 가로채는 등 막장성을 보이고, 조조가 북상해오자 다시 원담과 연합하며 여양에서 싸우고 연패를 거듭한다.

이후 곽가의 조언에 따라 갑자기 조조가 철수하자 원담은 원상을 연회에 초대해 죽이려 하는데, 이것이 함정일 것이라는 심배의 조언에 원상은 그대로 군사를 일으켜 원담을 치고 형제간에 일기토까지 벌이는 등 막장 드라마를 찍는다.어쩌다보니 선공도 원상이 먼저 걸게 되었다.

최후 부분도 좀 다른데 조조에게 연이어 털려서 결국 요동의 공손강을 만나러 갔지만 회견하는 장소에 앉을 자리가 없자 공손강에게 일단 자리부터 깔자고 먼저 요구하고 이에 공손강이 만리길 드립을 치며 복병을 불러들여서 복병들에게 죽는다.

원상에게 죽은 사환은 정사에서는 원상 사후에 죽었으며 꽤 많은 공을 세워서 비중이 있는 인물이고 연의에서도 나름대로 활약이 있는데 왠지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유일하게 3편에서만 클론무장으로 등장하고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환과의 일기토에 패해 죽은 나오는 수고는 사환을 간단하게 잡아버린 원상과 무력이 같다. 역시 코에이는 원까다.

1.3 평가

삼국지 팬덤에서 상대적으로 유독 저평가되고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원소 보다도 훨씬 비중이 낮은 데다가, 찌질하게 상속 싸움 하다가 망했다는 인상이 대부분이라 안습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분명 원소의 정통 후계자가 맞고, 망한 이유 역시 스스로 자초한 것이 아니라 원소가 생전에 매듭지었어야 할 문제들을 해결짓지 못한 채로 죽어버리면서 그 짐들을 모조리 떠안은 채로 폭파한 쪽에 가깝다.

1.3.1 정통성

연의에서 원담 폐출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잘 알려져있지 않기에 현재에도 원소 사망 당시 정통성으로는 원담이 우세했으나, 원상이 생전 원소의 총애와 이를 기반으로 얻은 실력행사로 이를 뒤엎었다는 해석이 많은데,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로 원소 사후의 여론이 원담을 지지하다 원상이 옹립되며 상황이 반전되는 과정은 비록 원상에게 정통성은 있지만 기반이 취약하자 정통성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던 원담이 청주자사라는 입지와 기반을 내세워 실력행사로 나가고 여기에 불안을 품은 원담의 정적 심배가 원상의 정통성을 옹호하며 개입한 것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반기를 드는 원담이나 고간을 충분히 제어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가해질 순 있으나, 당시 원상은 어린 나이와 경력의 부재로 통치력을 의심받아서 정통 후계자면서도 불신임당해 쫓겨날 위기에 놓일 정도로 집권 당시의 입지가 개판이었고, 섭정포지션으로 원상을 옹립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심배는 원소, 원상에 대한 충성심은 강했지만 특유의 독선적인 성향으로 내분을 가중시켰고 여기에 더해 조조의 북상이라는 문제까지 더해졌으나 그래도 원담에 대한 원상의 대응은 강경하지만 최소한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원담이 워낙 상식을 뛰어넘은 인간이라 그렇지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후계자 구도 완성 못한채로 급사해버린 원소의 책임이고 순전히 개인적인 야심으로 명분 없는 싸움에 달려든 것도 모자라서 수틀린다고 아예 적국에 항복해서 세력을 전부 다 말아먹는 병크까지 저지르던 원담은 절대적으로 개샛퀴가 맞다.

실제로 심배에 의해 일단 원상이 옹립된 이후에는 기주는 물론 병주의 고간도 유주의 원희도, 동맹국인 유표도 모두 원상을 정통으로 인정했다. 사실상 신평, 곽도 정도 외에는 아무도 원담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청주의 원담 진영 내부에서도 원담을 지지하지 않아 청주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청주의 별가(=주내 2인자) 왕수는 자신들만의 영달을 위해 의친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분란을 조장하는 간신(곽도, 신평)들을 베어 원상에게 바치고 화해하라고 진언하기까지 했을 정도이다. 결국, 장남에게 권력을 물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례의 모범으로 두고두고 까이는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진수는 원상에 대한 평가를 따로 남기진 않았지만 원소가 도리에 어긋났다고 실컷 까고는 원소가 그러니 그로 인해 후계자(=원상)가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엎어져도 결코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며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원소 때문에 평생 개고생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지만 원소의 아들로 태어난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일고의 동정할 가치가 없다는 말인데 제법 매정한 평가지만 동이원유(동탁, 원소, 원술, 유표)전의 집필의도 자체가 해당 인물들을 사정없이 까내리는 것이 목적이다.

다만 진수는 후한말의 쟁쟁한 군벌들을 일컬어 제각기 주와 군을 다스렸지만 전부 망할 만해서 망했으며 일반 백성만도 못한 무능한 자들(...)이라고 혹평했는데, 이에 비해 원상의 실패는 원상 본인이 초래한 결과가 아니라 순전히 선대의 실책 때문이라는 말이라 다른 군벌들에 비하면 그럭저럭 실드 쳐준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결과적으론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어린 나이에 옹립된데다 그 자신이 자초하지 않은 수많은 문제를 지고 시작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기 때문에, 그 문제를 키운 장본인인 원담과 마찬가지인 어리석고 개념없는 2세 정도로 취급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로 보인다.

1.3.2 능력과 성품

진수는 원상이 어리고 미모가 빼어났기 때문에(少子尙貌美) 원소의 극심한 사랑을 받아 후계자가 됐다며 왠지 미묘하게(...) 적고 있다. 貌라는 글자 자체가 얼굴을 뜻하는 것으로 단지 표면적인 외모에 한정되는 느낌이 강하기에 원상은 순전히 미소년이란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됐다는 것이다. 왠지 원소가 게이라고 까는 같다.

수신기에 기록된 도삭군 전설에도 원상에 대한 미모를 알 수 있다.

후한서에서는 후처 유부인이 혀가 닳도록 원상의 재능을 칭찬하는 것에 원소도 긍정했던 것에 더해 원상의 자용(姿容)이 특별히 기이한 것이라 여겼으므로 마침내 원상을 후사로 삼고자 했다고 적고 있다. 자용은 외모도 포함되지만 그보다는 언행과 몸가짐 등 품격의 의미가 강한데, 이쪽은 재능,용모,품행 등 좋은 조건이 워낙 많으니 형들과 나이차가 큰 막내아들이라도 후계자로 밀어볼 만 하겠다 여겼다는 쪽에 가깝다.

다만 원소가 원상을 아끼면서도 차마 밝히지 못하던 속내를 공공연히 드러내게 된 것은 유부인의 부추김이 결정적이었는데, 유부인과 원상의 친자관계는 불명확하고 원소에게 원상을 칭찬하는 것에 앞서 '(삼남) 원상이 어리고 미모가 빼어났는데 원소의 총애를 받던 후처 유부인이 원상을 극심히 편애했다.'(尚少而美, 紹後妻劉有寵,而偏愛尚)는 서술이 있다. 원상이 유부인 소생이라면 자기 자식이라 후계를 잇게 하고자 했다고 설명하는 게 당연한데, 원상은 어리며 미모가 빼어났고 후처 유부인은 원상을 편애했다고 연결되는 서술 때문에 친자식은 아닌데 미소년이라 유부인의 사랑을 받은 게 아니냐는 말이 있다. 이쪽도 왠지 미묘하긴 마찬가지라 한때 삼갤 같은 곳에서는 원소의 출생의 비밀, 원희 고자설, 원씨 유전병 설 등과 엮이며 원씨는 근친상간을 즐기는 콩가루 집안이라는 각종 개드립이 끊이지 않았다(...) 이래저래 미모 덕을 보긴 한듯..

이러한 기록에 대해서 원씨 일족이 뭔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후한말, 삼국 시대에는 사람을 평가할 때 '용모'를 비중있게 따졌고, 용모가 뛰어난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무렵의 여러 기록에서도 사람을 평가할 때 용모가 칭찬할 만하다면 '아름다웠다'는 평가가 많이 나타나고, 용모가 아름답다는 이유로 평판이 높아지거나, 호의를 가지거나 좋은 대우를 해주는 사례도 많았다. 이런 측면은 당대의 기풍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심배는 원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상의 재능을 극찬한다. 후한서에 남아있는 이 글에 따르면 원상은 이미 7세 무렵부터 신동이란 평판이 자자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성품은 어질며, 장(章=문체의 일종)을 무척 잘 쓰며, 일처리는 사리에 통달하여 기민하며, 항상 고금 성현의 행동을 살피고 흥패의 징험을 찾고, 재산 축재를 경멸하여 똥처럼 하찮게 여기고 깨끗함을 태산처럼 중히 여긴다고 하는데, 너무 완벽초인에 가깝게 띄워줘서 오히려 신뢰도가 떨어져 보인다. (원상이 쓴) 장(章)에서 총명함이 빛난다는 표현이 유독 뜬금포인데, 아마 서예를 상당히 좋아했던 듯 하다.

다만 한진춘추에 남아있는 버젼은 조금 다르고, 이쪽은 그나마 진솔해 보인다. 원소의 상중에 원담이 좋은 집에 거하며 편히 지내는 동안 원상이 어린 나이에도 상주로서 훌륭히 장례를 주관했던 일을 칭송했으며 여양전투 당시 원담을 구하기 위해 군사와 병기,식량을 아낌없이 풀어 창고가 비었던 것을 들어 대범함을 칭송했다. 전리의 수입이 모두 전쟁으로 향하여 곳간이 비었으나 원상이 전선에 임하여 솔선해 몸소 선진에 나아가고 고난을 함께하여 불만을 잠재웠던 일 등을 언급하며 칭찬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장군이 아직까진 별다른 공적이 없으니..' 같은 표현으로 원상의 경력 부족을 꼬집기도 하고, 이미 내전이 진행되는 시점에서도 원담에게 지나치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우유부단했기에 전황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갔고 결국 조조의 개입으로 이어졌으니 내가 동쪽(원담)의 군장을 볼때마다 어찌 한숨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식의 말도 하는데, 이 말인즉, 어리고 심약한 원상이 정에 얽매이며 우유부단하게 굴어서 당신을 조기에 쳐죽이지 못하고 결국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된 것에 분통이 터진다는 소리다.[20]

후한서에서는 뭐든지 잘하고 잘 배운다는 식의 극찬 일색인 반면 한진춘추의 평가는 사려깊음을 칭찬하는 듯 하면서도 아직 어려서 뭘 모른다는 식으로 은근히 까는 쪽에 가깝지만 성실, 검소하며 솔선수범한다는 측면에서는 양쪽이 대체로 일치한다. 원소가 청렴한 이미지를 여러차례 강조하며 명성을 얻은 반면 원담,원희[21]가 사치스럽고 놀기 좋아한다는 평이 있었기에 적어도 품행이나 성실성의 측면에선 형들과 확연히 비교되었을 것이다.

행적 자체는 원가 몰락의 과정에서 드라마틱하게 미칠듯한 존재감병신력을 어필하던 원담과 달리 특별히 두드러지는 부분이 별로 없고 오환 망명 이후부터는 기록도 급감하기에 좀 심심한 감이 있다.

다만 조조의 일등 참모인 순욱, 곽가는 모두 원상은 내버려 둔다면 분명히 재기할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등 상당히 경계했고, 조조 역시 유표와 원상을 비교하며 유표는 단지 앉아서 지키기만 할 줄 아는 도적에 불과하지만 원상은 교활하기 때문에 빨리 쳐서 없애야 한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원소의 후광이라는 측면을 감안한 면이 크지만 원상이 원소의 후광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는 점을 평가한 측면도 있고, 실제로 원상은 원씨를 따르던 호족들이나 옛 구신들에게 반란을 사주해 조조가 임명한 자사, 태수같은 고관들을 살해해 조조의 지배력을 뒤흔들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결과적으로 오환 원정이 허무할 정도로 어이없이 성공하는 바람에 그 위험성이 축소된 감이 있으나 괜히 유표보다도 원상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건 아니다. 그런데 조조와 곽가가 원소보다 유비가 더 위험하다고 여기던 것은 자주 회자되면서, 같은 맥락으로 당시 조조의 유일한 맞수가 될만한 세력이었던 유표보다 일개 망명객 신분에 불과했던 원상이 더욱 위험한 인물로 평가되던 것은 어째 전혀 회자되지 않는다.(안습)

삼국지에는 미남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 인물들이 손책, 주유, 조예, 맹달, 원소, 공손찬, 진랑, 유기, 유표, 순욱, 원상 등이 있다.

1.4 미디어 믹스

삼국지의 스토리 라인 자체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주인공인 유비가 투명라인으로 전락하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거의 모든 삼국지 창작물에선 여포의 죽음까지가 군웅할거의 클라이막스로, 관도대전은 아예 생략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혹여 관도대전을 다루더라도 이쯤 되면 대부분 기세를 잃는다.[22]

의무감에 관도전을 다루더라도, 이후 원소의 죽음과 원상vs조조의 5년간의 대립은 "이후 조조가 하북을 평정했다.식으로 나레이션 처리되는 것이 거의 필연적인 클리셰에 가까운 수준이며 이렇게 쿨타임 가진 뒤 삼고초려와 적벽대전이란 메인 이벤트로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 원류가 되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구성 자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기세를 거의 잃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줄기 정도는 묘사하던 나관중은 그나마 양반에 속한다.

1.4.1 영걸전 시리즈

시리즈 중 삼국지 조조전에서만 등장. 얼굴은 영걸전의 손환의 것을 재탕했다. 2장의 공동 최종보스 중 한 명. 다른 한 명은 원희. 하지만 이 위치에 비해 역할은 거의 없고, 원담과 함께 한심하기가 난형난제를 다투는 수준으로 묘사된다. 전체적으로 어리버리하고 고문관스러운 이미지가 강조되는 편인데, 연의에서도 분명 초반만큼은 사환을 베는 것으로 나름 임펙트있게 등장하지만, 조조전에서는 허저의 뻔한 도발에 허저 본인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쉽게 넘어가 십면매복을 설정한 지역으로 깊숙히 유인당하고 복병이 예상된다며 이를 수습하려는 원소와 원희까지 같이 말려들면서 원소의 참패를 결정짓는가 하면, 업성 전투에서는 평원에서 원담과 싸우던 중 업성의 고전 소식을 듣고 회군해 구원하려던 것이 아니라 원담과의 싸움은 뒤로 미룬 채 정상적으로 조조를 요격하러 나갔지만 조조군의 위치를 착각해 전혀 엉뚱한 곳에 포진하면서 요격계획 자체가 무산되고 업성은 포위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유성 전투는 오환족이 등장하지 않은 채 원희의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것으로 설정되었는데, 여기서도 명목상은 총대장이지만 조조군의 움직임을 보며 멍떼리거나 우왕좌왕하는 등 뻘짓만 하고 있고, 그나마 지휘다운 지휘는 원희가 다 하는 것으로 묘사(...) 그나마 유성전투에서 정사&연의에 없는 조조전 한정 클래스인 맹호대라는 것을 선보이지만, 곽가를 살리기 위해 퇴각을 하건[23], 아니면 씹고 진격을 하건 결국에는 패배하고캐발리고 퇴장한다.

도대체 어떻게 후계자가 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개노답으로 나오는데, 일단 원희는 능력과 별개로 너무 착해서 배제되었다고 하고, 원담은 그나마 원상이 나아보일 수준의 핵노답으로 나오기 때문에, 원소 입장에서는 원상이 원담보다는 조금 낫다고 판단한 듯...

연의에서는 원희와 함께 공손강에게 참수당하지만, 조조전에서는 공손강은커녕 전쟁에 시달려서 궁핍해진 농민 출신의 잡졸 1, 2에게 시골길에서 습격당해 죽는다. 어째 연의보다도 더욱 초라해졌다(…).

조조전 온라인에서도 등장하게 되는데, 두 형은 이전 병과 그대로지만 원상 혼자서는 군주 클래스로 변경되었다.

1.4.2 삼국지 시리즈

217-Yuan-Shang.jpg
삼국지 9,10,11
삼국지 12,13

수염 기른 원경국의 추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이래저래 안습 취급. 대대로 찌질한 장수로 나오며 연의 기준으로나 정사 기준으로나 말이 안되는 능력치를 주고 있다. 대체로 모든 능력치가 원담보다 약간 높지만 이러나저러나 둘다 오십보백보의 D급 무장이다. 정사에서나 연의에서나 어느정도 네임드에 속하는 사환이 삼국지 시리즈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사환이 등장하면 연의에서 사환을 간단히 잡아버린 원상의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대폭 상향되어야 하기 때문이란 말이 있을 정도...

덧붙여 미소년이었다는 기록 때문인지 삼국지 시리즈에 장수열전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이래로 열전란엔 그 외모에 대해 항상 수려한, 빼어난, 단정한, 아름다운 등의 수식어가 붙는데, 그런 주제에 일러스트는 항상 찌질하게 나온다. 그럴 거면 아예 외모드립을 치질 말든가. 게다가 일러스트 우려먹기도 심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코에이한테는 어지간히 미움을 받는 듯. 사실 코에이가 원소 세력을 터무니없이 까는 성향이 있긴 하지만... 최신작으로 갈수록 능력치가 조금씩 상향되고는 있으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사실 아버지 원소도 상향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지라.

삼국지 1에서는 다른 능력치는 그렇다 쳐도 무력이 87, 매력이 98이나 된다. 삼국지 시리즈 통틀어 가장 쓸만한 원상이라 할만하다. 물론 이후에는...

삼국지 3에서는 육전이 74 수전이 20 무력이 69 지력이 63 정치가 57 매력이 51인데 무력이 69라 장군이 될 수는 없지만 육전과 무력,지력이 괜찮아서 의외로 성능이 괜찮다. 원소군이라면 전투요원으로 충분히 굴릴 수 있는 수준. 그리고 원소의 아들들 중에서는 그나마 능력치가 좋게 나왔다.[24]

삼국지 5에서는 진형이 언월에 특기 무쌍, 화시, 원시를 가지고 있어서 쓸만하다. 그래봐자 무력이 70이지만. 언월과 특기덕에 잉여급 취급에서는 벗어났다.

삼국지 7에서는 지력이 70대로 급격히 올라갔다. 하지만 어째선지 무력은 40대로 급격히(...) 내려갔다. 무력과 지력수치가 서로 뒤바뀐걸지도 모른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62/73/44/34. 병법은 분전외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써먹기 힘든 충차와 매도 뿐이다. 결국 버려진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66/70/50/44/79에 특기도 4개밖에 없어 역시나 쩌리이지만, 매력이 79에 징병특기가 있어서 나름대로 효용가치는 있다. 그리고 모든 능력치가 원담보단 높다.(원담은 62/68/30/40/57에 특기 3개)

삼국지 11에서는 당연하게도(?) 원상은 무특기인데 뜬금없이 원희는 친오를 가지고 있고 史 란에 "답돈이 특히 원희를 도왔다."는 정체불명의 기록이 있다. 원희의 평균능력치가 원담, 원상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것을 보면(그런 원희도 사실 c급을 넘기기 힘들지만) 원담, 원상이 워낙 덤앤더머로 취급되면서 은근히 외부효과를 받는 듯...

원소가 미소년이었던 원상을 총애해 후계자로 삼으면서 결국 나라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삼국지 갤러리에선 삼국지 11에서 원상의 특기로 경국을 줘야된다는 꾸준글이 있었다. 이제는 아예 별명이 원경국이 되어버렸다.

삼국지 11 콘솔판 추가 시나리오인 영웅난무에서는 무릉에서 군주로 등장한다. 유씨, 원희, 심배, 봉기, 고간, 곽원, 여광, 여상, 이부를 부하로 데리고 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부하의 질도 썩 좋지 않은데 바로 밑에 깡패 유비, 위에는 육손, 옆에는 조예, 한 다리 건너면 조조까지 있어서 매우 하드코어하다.

삼국지 4를 리메이크한 삼국지DS2에선 원소의 삼남중 능력치합[25]이 두번째로 높게 등장한다[26]. 통무지정매순으로 61/72[27]/46/52/70으로 전체적으론 잉여지만 그나마 원가 삼형제중 가장 전투적인 스탯이다. 사실 매력도 70이면 능력치가 전체적으로 낮은 원가기준으론 상당히 고스텟이며 무력 72도 꽤나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지력이 40대로 매우 낮고[28] 정치력도 청주의 전설 원담보다 낮다는 점이다. 게다가 원가기준으론 고스탯이지만 보통 기준으론 조비보다도 넘사벽으로 약한 수준이다. 특기도 총 6개밖에 없지만 장특기중 보병을 가지고 있고 전법중 쓸만한 강습과 파격을 가지고 있다. 계략중 알짜배기 화계도 있고. 물론 매도나 화공같은 희대의 쓰레기도 보유중이고 특기수도 많지 않아서 대충 C급 취급. 능력치를 템으로 떡칠한다면 나름대로 쓸만한 군주로 거듭날 수도...

미소년이었다는 열전의 내용과는 달리 항상 찌질하게 나오긴 해도 수염을 달고 나온 적은 삼국지 2만 빼고 없었는데, 삼국지12에서는 턱수염을 달고 나왔으며 일러스트 자체도 안습함은 물론이요, 포즈조차 챔피언벨트 자랑하듯 알 수 없이 요상해서 최악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삼국지13에서도 12편의 일러스트 재탕으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성능면에선 드디어 재평가을 받았다. 전법이 전공격강화으로 변했다. 원담은 무력상승, 원희는 사정약화라는 매우 잉여스러운 전법들인데 반해 원상은 전법 자체로는 꽤 쓸만한 전공격강화를 가졌기에 원소하고 조합하면 진정한 함락명족이 되지만 그마저도 낮은 지력탓에 오래 못간다. 또 pk에서는 원소도 전공격강화로 변경되면서 그저 지못미가 되었다. pk에서 오환족이 추가되었으니 병종이라도 오환이었으면 쓸만했을텐데...

사환은 이번 작에서도 등장하지 않지만, 연의에서 사환을 베었다는 점이 감안되었는지 무력도 전작에 비해 4가 상승한 75가 되었는데, 무려 87을 찍은 삼국지 1 이래로 역대 최고 수치로 간신히 70을 찍거나 60대에 머무르던 전작들과 달리 보통 S급무장들의 칼밥용으로 나오는 흔한 '적국의 용장'(...) 수준으로 상향되었으며, 일러스트만은 효도르도 씹어먹을 기세인 남만 본좌들과도 자웅을 겨룰 수준이 되었다. 다만 3, 40대의 낮은 지력, 정치력은 여전하고 그나마 70대를 찍던 매력이 삭제되면서 평균치는 더욱 안습해졌다.

삼국지 13에서는 능력치는 그대로이며 중신특성은 당연히 없고, 전법은 아군의 사기를 올려주는 고무. 특기는 신속 2, 공성 3, 일기 3, 훈련 3, 순찰 1로 원담, 원희보다는 확실히 나은 편이다. 다만 병종적성이 좋지 못한데, 창병과 기병 B가 전부. 문관들의 부장으로 쓰면 밥값은 하나 원소의 아들이자 후계자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이나 계급이 높다는 게 문제. 아예 원소랑 한 부대를 이뤄 출진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1.4.3 창천항로

창천항로에서는 형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등장. 공손찬의 최후를 그리는 에피소드에서 역경루가 무너지자 가족들을 죽이고 자살하려는 공손찬의 최후를 지켜본다. 이때 공손찬에게 패업을 이루려는 자는 자신의 일생 안에서 완수하려 노력해야지 차대로 미룰 생각을 하면 안되고, 어떠한 명문이라 할지라도 부모에게 물려받아야 할 것은 영토나 병력 따위가 아닌 패자로서의 도량 뿐이라며 공손찬을 비웃는다. [29]

등장에만 한 화 전체를 할애하며 띄워줬기에 제법 간지폭발이었으나 관도전이 시작되면서 뚜껑을 열어보니 그저 패기 넘치는 바보(...)일 뿐이었고, 깝죽대면서 이런저런 병크[30]를 저지른다.[31]

관도 이후 조조와의 싸움은 나레이션 한컷으로 처리되었으며 오환과의 싸움에서 수염을 달고 재등장하지만 여전히 바보로 나오며 오환족에게도 무시당한다...

항상 조조를 의식하며 조조는 원가를 라이벌로 여긴다고 생각하지만 작중의 조조는 원가따윈 안중에도 없고 작중 인물들에게서도 조조가 원상따위를 의식할 리가 없다고 여겨지는 등 등 철저히 무시당하며 [32] 작중에서 조조가 북방을 향한 이유 역시 절대 원상을 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북방 미지의 대지에 조조라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답돈이 죽자 오른손이 잘린 채로 요동으로 도망가 공손강에게 조조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은 천하의 백성들이 아직도 아버지인 원소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감하여 자신이 재기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니 같이 조조를 쳐서 천하를 탈환하자고 말하지만 공손강은 이에 대해 '어이없을 정도로 무지하고 몽매하다.'고 생각.

이후 복병으로 원상 일행을 포위한 뒤 조조가 당신의 목을 원해서 북으로 올라왔을 리는 없지만 조조가 있다는 자체는 그 자체가 질문이기에 자신들은 뜻을 밝혀야 한다고 얘기하자 공손강 이름 부르다가 찌질하게 죽는다. 공손강은 원상,원희의 머리를 들곤 "이정도 선물로 우리 의사를 받아줄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후 조조가 투항자들을 이끌고 재차 장성을 건너 돌아갔다는 나레이션과 함께 원희와 함께 까마귀가 아무렇게나 버려진 머리에서 눈알을 뽑아먹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등 죽은 뒤조차도 능욕수준으로 안습하게 나왔다.

처음에 한 회 전체를 할애해서 뭔가 대단한 놈처럼 띄워줬다가 재등장하면서 그냥 안습캐로 전락했는데, 창천항로에서 뭔가 있을 것처럼 나왔다가 갑자기 안습캐로 전락한다던가 복선이 회수가 안된다던가 하는 경우가 한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스토리 작가인 이학인씨의 투병과 작고가 원인이 된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1.4.4 화봉요원

화봉요원에서도 형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등장한 원소의 아들. 초반에는 꽤나 깐죽거릴 뿐더러 뭔가 나름대로 똑똑한 척 행동하는게 사실 바보짓이라 상당히 안습한 캐릭터 였는데...형들이 더 안습한 꼴로 등장한 후 그래도 형제 중에서 나은 편임이 밝혀졌다. 관도에서는 잠시 원방을 대신해 전선을 총괄하기도 했고,최측근인 심배가 그래도 원소 군 내에서는 원방 다음으로 똑똑한 편인지라 그의 보좌 덕을 많이 본다. 원방과의 관계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지, 관도대전 중반부 까지는 나름대로 손발이 맞는 것 같았으나...결과적으로는 이용 당하고 만다.

어찌 됐든 관도대전 이후 조조와의 길고 긴 전쟁을 이끌어나갈 중심인물이 되어야 했으나....

작중 원소 진영에서는 작가 오리지날 캐릭터인 원방이 모든 사건의 중심축이 되고 나머지 인물들은 물론 심지어 원소조차도 이야기의 축이 될만한 힘이 없이 거의 잉여에 가깝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관도대전을 끝으로 원방이란 캐릭터가 퇴갤하면서 원소 사망과 그 이후 조조와의 대립은 거의 대부분이 나레이션 처리되거나 다른 캐릭터들의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식으로 처리되는 등 주마간산으로 진행되며 광탈.

작중 1년의 시간이 진행되는 동안 현실에서도 1년의 시간이 진행되던 화봉요원의 전통이 깨진 샘인데, 애초에 작가 오리캐인 원방을 제외하면 원소진영 인물 전원의 비중이 공기,잉여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우려가 많았다.

1.4.5 삼국전투기

데긴으로 역변한 원소의 젊은 기믹을 이어받아 가르마 자비로 나온다. 원소의 아들들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했는데, 당시 가르마는 원소가 먼저 써먹었고 원담이 기렌 자비로 나왔으니 기렌과 대립관계였던 키시리아 자비로 나올 것이란 예측도 많았지만 결국 원소의 젊은 모습과 똑같다는 설정으로 가르마 자비로 등장.

다만 머리모양과 색깔이 미묘하게 다르고 정복을 입고 나오던 원소와 달리 항상 갑옷차림에 등엔 칼을 메고 있는 디자인인데, "우유부단한 원소와 달리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지만 정치적 역량은 비할 바가 못된다.|는 소개를 보면 대체로 전투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듯 하다.

역경전투에서 원소군의 에이스로 첫등장했으며, 역경루가 무너지자 가장 먼저 중앙누각으로 달려가 공손찬을 죽이는 공을 세우고 공손찬을 비웃는데 아무리 봐도 창천항로 따라한 것 같다...

이후 연의와 믹스해서 창정전투에 병이 든 원소 대신 총대장으로 참전해 초전엔 사환을 잡지만 정욱의 십면매복계에 걸려 완전히 작살나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난다. 이 소식을 들은 원소의 병세가 악화되어 식물인간이 된 사이 심배,봉기와 업을 장악하고 원담의 후계자 자리를 가로챈 것으로 나오는데, 원소의 사망을 두고 1년 이상 의식불명 상태였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로 얼렁뚱땅 넘어갔기에 욕을 많이 먹었다.

원담 폐출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으나 한 독자가 이를 지적하자 단행본에서 원담 폐출에 대해 언급하며 이를 적극 부정했는데, 문제는 일정한 논거를 들어 반박한 게 아니라 "못 믿겠다, 아니겠지, 그만하자"는 행간이라(…)

삼국전투기 역시 어지간한 2차 창작물과 비슷하게 관도전투 이후 급전개가 진행되어 창정전투와 원소의 사망도 날림이란 말이 많았지만 원소 사망 이후와 오환 원정까지는 대놓고 날림으로 연재해서 6화만에 끝내버렸는데, 그 와중에 마초 띄워준다고 중심축이 아니라 곁가지에 가까운 곽원과의 전투에만 그 절반인 3화를 할애했기 때문에 사실상 여양 전투부터 시작된 원상과 조조의 5년간의 대립을 단 3화만에 끝내버린 샘이다.

이후 3화를 더 연재한 뒤 1부 종결이란 말로 6개월간 휴재를 때려버렸다. 본래 이보다 한참 이전부터 답돈을 등장시키며 뭔가 있을것처럼 묘사했는데, 답돈 역시 단 한컷만에 순삭당했기 때문에 당초 계획은 최훈이 강한 빠심을 밝혔던 곽가나 장료를 띄워주기 위해서라도 원소 사후 원가에 대해(혹은 최소한 유성전투 정도는) 나름 비중 있게 연재하려다 아무래도 귀찮아지면서(…) 소드마스터 야마토마냥 급전개로 간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1.4.6 삼국지를 품다

관도대전이 시작되는 3막 후반부부터 등장하며 원씨 삼형제 관련 번외퀘스트가 있는데, 삼형제가 모두 고유 모델링도 있는 등 의외로 비중이 있다. 젊은 미남형의 모델링이지만 미소년 이미지는 전혀 아니고, 거구의 대장부(...) 이미지로 등장한다. 성우는 시영준.

연의에서 나름대로 일기토 전적이 있어서인지 관도전 시작하자마자 죽는 안량,문추 이후 원소군 무력의 아이콘(...)겸 원소 사후 조조의 하북 평정을 다루는 4막 초반부의 보스 컨셉으로 기획된 듯.

원소의 비위를 잘 맞추고, 특히 공손찬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거의 원맨쇼 급의 맹활약으로 입지를 확고히 하며 원담과 대립한다. 원담에 대해서는 머저리 같은 놈이 장남이라고 설친다며 철저히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원담은 어린놈이 위아래도 모르고 건방지다며 열폭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꾸미지만 결과적으로 더욱 입지를 깎아먹는 식.

등장 초반에는 공손찬과 조조를 통해 원소의 아들 중 이렇게 대단한 놈이 있는 줄 몰랐다며 띄워주는 대사도 치지만, 호전적이고 거만한 성격에 야심이 많아 끓임없이 분란을 조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2 조선 시대의 임시 관직

院相

조선 왕조 시기 국왕이 질병이나 사망, 기타 이유로 정상적인 업무가 곤란할 때 재상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관리하는 직책.

시초는 1467년(세조 13년)에 국왕인 세조가 병으로 인해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기 곤란해지자 공진 정승인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에게 승정원에서 국정 업무를 수행하게끔 하는 것에서 비롯하였다. 이후 1468년 예종 때는 이를 확대하여 9명이 맡았으며 성종 재위기간까지 지속하였다. 이후에는 그 규모를 축소하여 의정부의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국정을 총괄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시대에서 마지막으로 원상이 기능을 수행한 것은 철종이 사망한 직후로, 고종이 즉위할 때 까지 당시 영중추부사인 정원용이 원상을 맡았다.
  1. 155년생 조조와 동년배였던 원소는 최소 21세 전후에 6년상을 지냈고 이 기간이 176~182년 무렵으로 추정되는데, 상중에 자식을 낳는 것은 지탄받을 일이라 원소의 아들들이 이 사이에 태어났을 가능성은 적다. 이를 따라 역산해본다면 190년에 이미 관례를 지내 성년의 나이었던 원담,원희는 원소의 6년 복상 이전에 태어난 자식이고 원상은 그 이후에 태어난 늦둥이었을 것이다. 원상의 나이에 대한 자세한 의견.
  2. 삼국지연의와 달리 유부인과의 친자관계는 불명확하다.
  3. 태복 원기로 동탁에게 낙양의 원씨 일족이 몰살당할때 죽어서 후사가 끊겼다. 이 사람은 원술의 형이며 원소에겐 이복형이나 원소가 원봉 가문에서 내쳐져 원성의 가문을 이었으므로 사촌형이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원소는 자신이 폐출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장남을 폐출시킨 것이다.
  4. 물론 일족이 몰살당하는 상황에서도 눈하나 깜짝않던 원소의 전력을 감안했을 때 이는 단지 표면적인 핑계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5. 〈조만전〉에 원상의 동생으로 원매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원상4남설이 있지만, 〈오록〉에서는 원매가 원상의 형의 아들. 즉 조카라고 적고 있어서 상충된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사서에서는 원소의 아들이 세 명뿐이라 적고 있고 〈오록〉이나 〈조만전〉에서조차 원매에 대해 "불분명하다." 고 적고 있다.
  6. 단, 기록의 출처가 (원담,유기에게 편파적인 서술을 보이는)전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과장의 가능성도 어느정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7. 원군을 보내면 원담이 병사들을 장악할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8. 전론에 따르면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렸으나 곽도에게 겁박당하여 화해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 시점에서 원담은 이미 실권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원담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전론은 조비가 원래 자기과시 목적으로 쓴 책이며 자신과 처지가 비슷했던 원담을 실드쳐주는 내용이 많다.
  9. 업으로 회군하던 원상의 군대는 1만이라고 하는데, 적은 수는 아니나 업을 포위하고 있던 조조의 포위군이 수공을 위해 너비와 깊이가 2장(약5m)에 이르는 참호를 40리(약16km)에 걸쳐 단 한나절만에(!) 팔 정도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가지고 있었던 것을 봐선 확연히 열세였을 것이다.
  10. 당시 조조의 군사수에 대해 언급된 기록은 없지만 이미 진수는 관도대전에서 조조군이 1만밖에 안 됐다는 뻔히 보이는 구라를 쳐놨기에(...) 이후로도 세력기반의 정비보다는 연이어 전쟁을 벌였던 쪽에 가까웠던 조조가 여기서 대군을 거느렸다고 하면 앞뒤가 안 맞게 된다.
  11. 앞서 언급된 초촉,왕송과 동일인물인지는 불명확하나 개연성은 높다.
  12. 이 무렵 원상의 행적에 대해서 정사에는 이 외에는 완전히 생략되어 있지만 명나라 때의 책인 백전기략에 의하면 원상이 상곡군에 주둔하며 오환기병들을 이끌고 여러차례 유주를 공격해 조조에게 피해를 줬다고 한다.
  13. 법엽의 후한서에 따르면 원상이 오환으로 망명했을때 10만호가 이를 따랐기에 원상이 다시 '중국'을 도모하려 했다고 하고, 진수의 삼국지에 따르면 오환의 힘을 빌려 '기주'를 도모하려 했다고 적고 있는데, 아무래도 진수 쪽이 스케일을 축소시킨 것 같다.
  14. 시체로 들판이 전부 뒤덮였으며 포로만 20만에 달했다고 하는 서술을 보면 답돈의 요서오환부는 아예 절멸에 가까웠던 것 같다.
  15. 생전의 원소가 황명을 교제해 요서오환왕 답돈에게 내린 직위는 오환선우로 요동오환의 초왕(숙부환), 오북평오환의 한로왕(오연)을 제각기 좌,우선우로 삼아 이를 보좌하도록 하는 등, 사실상 오환 전체의 지배자임을 공인한 것이었으나, 답돈은 본디 요서오환왕 구력거의 조카로 구력거의 아들인 사촌동생 누반의 나이가 어린 것을 핑계삼아 구력거의 자리를 계승했기에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이후 누반이 장성하자 숙부환 등이 누반을 내세워 답돈에게 선우 자리를 넘길 것을 요구했고, 이에 답돈이 순순히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왕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강등된 이후로도 여전히 모든 실권과 대계는 답돈에게서 나왔다고 하며, 정사의 서술상으로도 답돈이 중심인물이지 나머지는 떨거지 취급(...)이다.
  16. 코에이 게임에서야 공손강 172년, 원상 179년생이지만 원상의 나이에 대해서는 앞서 여러차례 언급되었고, 공손강의 아버지 공손도는 최소 150년 이전에 태어났으며 이미 168년에 유도로 관직에 천거되며 중앙정계에 진출한 경력으로 봐선 인물로 원소,조조보다 반세대쯤 앞의 사람이고, 공손강은 공손도가 실각해있던 180년대 중반 무렵에 이미 오장(=병장쯤 된다)으로 군역을 마친 사람이다. 원복이 기존의 20세에서 15세 이하로까지 당겨졌던 것이 당시 트렌드였지만 그렇다고 군역까지 그리 당겨지진 않아 보통 20세 이후에 징집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손강이 군대 전역할 무렵에 원상이 태어났다는 소리가 된다. 군벌할거시대 무렵에는 소년병도 예사였겠지만...
  17. 후한서 원소전
  18. 견초는 원소 생전부터 오환 돌기를 담당했고 조조를 따른 뒤에는 오환을 설득해 원담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고, 일부 부족을 조조에게 귀순시키는 등 적지 않은 공을 세웠고 전주는 오환과의 전투에서 곽가를 능가하는 최고의 공을 세웠다. 일단 두사람 다 정사에 따로 개인열전이 존재하는 인물...
  19. 오환이 후한 중기에 장성 안쪽으로 들어와 유주 11군에 나뉘어 살았기에 00군 오환 하는 것은 지파 개념에 가깝다.
  20. 자세한 정황이 매우 불분명하긴 하나 심배는 여양전투 직전 상황에서 원담과의 공조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내부의 상속 분쟁은 제쳐두고 서로 공조하여 조조라는 외적을 막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 원론적으로는 맞는 얘기지만 결과적으로 원담은 조조가 퇴각하자마자 배신하여 내전을 일으켰고 조조를 재차 끌어들면서 원씨 세력이 멸망한다는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갔는데, 끝까지 포용할 수 없을 바엔 아예 여양의 원담을 아예 방치하여 조조의 손을 빌려 죽게 하거나 겨우 조조를 막아내기만 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지원하여 원담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원상의 전력을 온전히 보전한 뒤 조조가 물러가면 그대로 제거하여 미리 고름을 째버리는 것이 심배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봤을때 원상이 병사와 재화를 아낌없이 풀어 곳간이 비었으나 솔선하여 분투하니 상하가 감탄하여 흐느낄 뿐 불만의 소리가 없었다곤 하지만 곳간이 비었다는 것에 실질적으로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을 사람은 기주의 실권자이자 원담의 정적인 심배였을 것이다.
  21. 원담의 사치벽이야 본전과 주석에서 대놓고 언급되기에 말할 필요가 없지만, 원희는 의외로 볼 수 있는데 197년, 원소의 아들들이 칙사로 온 유송에게 술을 권하며 며칠동안 밤낮으로 술판을 벌인 데서 하삭음이란 고사가 생겼다고 하며 이를 비웃는 오언시도 남아있다. 또한 최염은 206년, 청춘의 방탕함을 즐기던(?) 조비를 비판하며 마치 아버지 위세를 믿고 점점 사치스러워지던 원소의 아들들을 보는 것 같다는 언급을 한다. 원담은 말할 필요도 없고 원희 또한 평판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서 원상이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은 다른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워낙 크기에 형들이 사치스럽다는 평을 얻었던 196년 무렵에 고작 9세 전후로 사치가 두드러질 시기가 아니었고 202년엔 15,6세가 되지만 당시 상황상 사치는 커녕 격무에 시달렸으리란 점. 청렴성을 무기로 정치적 명성과 커리어를 얻었던 원소에게 두 아들과 달리 유독 총애받은 점, 실제로 심배의 발언에서 검소함을 칭찬받는 점 등이다.
  22. 본편에 속하는 관도대전의 비중은 거의 없지만 관우안량, 문추를 베는 것은 메인급으로 다뤄진다.
  23. 퇴각을 결행한 후 조금 있으면 투입시킨다
  24. 원담은 모든 능력치가 58이하라 잉여고 원희도 육지,무력이 50대라 정치65로 내정이나 하는 것이 낫다.
  25. 301
  26. 1위는 306의 원희
  27. 부친 원소와 동일한 수치다
  28. 엄백호보다 낮다
  29. 다만 작중에서 공손찬의 비중은 내내 엑스트라에 가까웠고 실제 공손찬은 오히려 공손속에게 쓴 편지에서 내가 죽으면 갈 곳이 어디 있겠냐며 머리를 땅에 박더라도 장연에게 원군을 받아오라 종용했는데 자신이 죽더라도 공손속이 뜻을 이뤄주리라 생각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순전히 원상을 띄워주기 위한 포석.
  30. 예를 들어 조조 측의 움직임을 사소한 것으로 취급한다던지.
  31. 그래도 사실 따지고 보면 삼형제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낫다. 첫째는 명분과 명예에 얽매이는 바보지, 둘째는 하는 것 없는 찌질이지. 적어도 셋 중에서는 얘가 가장 생각을 많이 하고 행동한다.
  32. 조조군의 습격을 받자 분기충천해 뛰쳐나가 "조조, 바라는대로 결판을 내주마. 이 원상 앞에 당당히 모습을 나타나라!|라고 외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임드도 아닌 조조군의 엑스트라 병졸에게 말머리채로 팔이 잘려나가는 연출이 좋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