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二共識 / 1992 Consensus
목차
1 개요
1992년에 정립되었다고 알려진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혹은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 양측 사이의 양안관계 원칙. 오늘날 양안관계에 대한 해석, 평가는 이 92공식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 여부를 기준으로 구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주제다.
2 상세
1988년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사망한 직후 중화민국의 후임 총통으로 취임한 리덩후이는 과거 억눌려 온 대만의 정치적 민주화를 본격화하는 동시에, 중국 본토와의 관계 개선을 제도화하기 위한 조치에도 나서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1990년 행정원(내각에 해당) 산하에 양안관계를 직접 담당하는 대륙위원회(한국의 통일부에 해당)를 신설했고, 1991년 4월 말에는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폐지하며 중국공산당의 본토 지배를 인정할 것임을 선언했다. 1949년 국공내전 패배에 따른 국부천대 이후, 40년이 넘도록 지속되어 온 중화민국 정부의 '본토수복' 노선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 본토와 대만은 일단 비공식적이나마 양안 교류, 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1992년 10월 28일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海峽交流基金會. 통칭 해기회),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海峽兩岸關係協會. 통칭 해협회)가 양안관계 원칙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1][2] 그 결과 11월 16일 중국 해협회가 대만 해기회에 다음의 제의를 전달했다.
- 해협 양안은 모두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한다는 전제 아래 국가의 통일을 추구한다.
- 단, 해협 양안의 실무적 협상을 함에 있어서는 ‘하나의 중국’의 정치적 의미를 건드리지 않는다.
- 이러한 정신에 따라 양안의 협정서 작성 혹은 기타 협상 업무의 타협책을 찾는다.
이러한 중국 해협회의 제안에 대만 해기회는 "(양측이 그 내용에 대해 당장 합의하기 곤란한) '하나의 중국'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각자가 구두(口頭)로 표명하고, 양측이 합의할 수 있는 사항들을 합의하자"고 응답했다. 그리고 중국 해협회가 이를 받아들였다.
(92공식 합의 이듬해인 1993년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해협회, 해기회의 첫 양안회담)
이리하여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되(一個中國), 그 표현은 양안 각자의 편의대로 한다(各自表述)"는 양안관계 원칙이 탄생했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93년 4월 싱가포르에서 중국 해협회의 왕다오한(汪道涵), 대만 해기회의 구전푸(辜振甫) 이사장 사이의 첫 양안회담이 개최될 수 있었다.[3] 22년 후인 2015년 11월 열린 마잉주 대만 총통,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상 첫 양안 정상회담에서도 양측은 92공식이 양안관계의 근간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참고로 92공식이라는 명칭은 1992년에 이루어졌다고 해서 유래한 명칭이다. 본래 위의 8자를 줄인 '일중각표(一中各表) 공식'이라는 용어로 알려져 왔는데, 민진당 출신인 천수이볜의 총통 당선을 앞둔 2000년 당시 대륙위원회 주임인 쑤치(蘇起)가 92공식으로 명명해서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4]
3 논쟁
(92공식의 해석에 관한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양측의 주장 비교 이 자료를 만든 쪽도 92 공식에 동의하지 않음을 맨 위의 표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외견상 공동인식(共同認識), 즉 '합의'라고는 하지만, 그 해석을 놓고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정부,더 나아가 대만 내부 정치의 양대 세력인 중국국민당 중심의 범람연맹과 민주진보당을 중심으로 한 범록연맹 사이에서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으로 치자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북한과 채택한 6.15/10.4 남북 공동선언에 대한 찬반 논란과 비슷한 논쟁거리.
애초에 92공식 자체가 양안간의 교류, 협력을 위한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타협책의 모색일 뿐이었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양보로 이어질 공산이 큰 '하나의 중국' 원칙 내용에 관한 완벽한 합의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던 한계를 반영한 것이다.
3.1 중화민국 (중국 국민당 및 범람연맹)
'(하나의 중국에 관해) 각자의 표현을 따른다'는 내용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중국이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5]. 공산당 정권의 군사적 도발, 침략 명분을 주지 않고, 안정적인 교류와 대화를 위해 '하나의 중국'이라는 통일 원칙을 넣었을 뿐이지, 중공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따를 의사는 없다는 뜻이다. 물론 범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당은 중공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따르는 나라 파는 집단이라 하는 식.
3.2 중화인민공화국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만이 전적으로 합의했다고 주장하며, 대만이 홍콩과 마카오처럼 중국 본토에 편입되는 일국양제 통일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근거로 강변한다.
3.3 민주진보당 및 대만 독립 지지 세력(범록연맹)
아예 92공식 자체를 부정, 거부하고 있다. 1992년 당시 중국 본토의 공산정권, 대만의 정권을 장악했던 국민당 정권이 대만인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상태로 선언한 것일 뿐이라는 논리. 무엇보다도 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민진당 등 범록연맹은 양안 통일을 전제로 하는 92공식의 수용을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미 민진당은 1991년 당 강령에 "주권을 갖는 자주, 독립적인 대만공화국을 건설한다"(建立主權獨立自主的台灣共和國)는 '대만독립강령'(台獨黨綱)을 공식적으로 채택했으며, 이 내용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민진당 내 온건 대화파 가운데는 대만독립을 명시한 당 강령 내용을 삭제, 혹은 일시 정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민진당 내 주류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3.3.1 차이잉원
제14대 중화민국 총통 당선자인 차이잉원 민진당 주석은 2012년 첫 총통선거 출마 당시에 92공식을 대체할 '대만공식'(臺灣共識. Taiwan Consensus)을 제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마잉주 총통의 양안관계 개선 정책이 대체로 양호한 평가를 받았던 시점이어서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했고, 낙선했다.
이를 반영한 듯, 2016년 총통선거에서 차이잉원은 '현상유지'(維持現狀)만을 강조하며 천수이볜 시절의 급진적 분리독립과는 거리를 두는 듯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총통선거 막바지인 12월 말에 발표한 "중국과의 소통(有溝通)、도발 자제(不挑釁)、정책 투명성(沒意外)"의 양안관계 3원칙도 그 연장선상이 있다.
다만 92공식 수용 여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는 중국 공산정권, 국민당의 요구에는 여전히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1차 TV 토론에서도 "92공식이 양안관계에서 여러 선택들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 유일한 선택이어서는 안된다"(九二共識是選項,但不是唯一的選項)는 식으로 답했다.
그리고 2016년 5월 20일의 총통 취임연설에서는 "1992년에 양안 기관들 사이에 수차례의 접촉, 회담이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통점을 모색하려는 노력과 성과들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존중할 것"(1992年兩岸兩會會談的歷史事實與求同存異的共同認知,這是歷史事實)이라고 밝혔다. 92공식의 의미를 양안간의 '합의'보다 '만남' 정도로 규정한 셈.
7월 21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92공식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라는 기한을 설정했다는 말이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만은 이미 매우 민주적인 곳이며, 여론의 흐름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기한을 설정하여' 대만 정부가 여론을 무릅쓰고 상대의 조건을 수용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는 '시한부 조건'에 반대한 것이지, '92공식'을 직접 부정한 것은 아니다. 관련 내용 92공식을 중국과의 정치외교적 '합의'에서 과거 실재했던 '논의' 정도로 격하시키면서, 이를 정면 부정한다는 중국의 비판은 회피하려는 모호성 유지의 연장선성이라고 할 수 있다.
3.3.2 리덩후이
리덩후이는 92공식이 도출될 당시 대만 총통이었지만, 정작 퇴임 후에는 노골적인 대만 분리독립 노선을 강조하면서 92공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반복하여 논란을 빚었다.
이에 마잉주 총통이 92공식의 정부 해석에 관한 리덩후이 당시 총통의 서명이 담긴 문서를 공개하며 반박에 나서기도 했다.[6]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 현재까지도 리덩후이는 92공식이 부인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 ↑ 해기회와 해협회 모두 공식적으로는 민간 재단 형식의 기구였는데, 이는 중국과 대만 양측이 상대방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양안관계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반도로 치자면 남북한이 통일부,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를 대신하여 적십자를 앞세워 회담을 벌인 셈.
- ↑ 실제 남북 적십자 회담은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등장하는 타개책이다.
- ↑ 이 회담은 중국에서는 왕구회담(汪辜会谈), 대만에서는 반대로 구왕회담(辜汪會談)으로 불린다.
- ↑ 쑤치는 천수이볜 정부 시절 국민당 입법위원으로 활동하며 민진당의 대만 분리독립 노선에 대한 반대를 주도했고, 2008년 마잉주의 총통 취임과 함께 총통부 국가안전회의 비서장(한국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되어 중국과의 3통(三通. 무역, 우편, 교통 개방) 실현, ECFA 타결 등을 주도했다.
- ↑ 단 범록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이라 불러서 용어혼란을 유도한다. 즉, 범람이 '우리는 중(화민)국'이라 하면 범록은 '그러니까 대만에 있지 말고 너희가 좋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가라' 하는 식
- ↑ 마잉주는 92공식이 도출되었던 1990년대 초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대변인, 부주임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실무 차원에서 당시 양안정책의 일선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