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천대

國府遷臺, 國府遷台[1]

1 개요

1949년 12월 7일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중국 공산당에 패배한 장제스중국 국민당이 자신들의 본거지 및 중화민국 정부를 중국 대륙(본토)에서 대만으로 옮긴 사건을 말한다. 직역하면 국민당(國) 정부(府)가 대만(臺)으로 옮기다(遷)라는 뜻이다. 중화민국이 '대만' 혹은 '타이완'으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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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민당의 이동 과정. 이 지도에서 조금 연한 색은 중화민국의 명목상 영토이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실질적 영토는 아닌 곳이다.

중국 국민당은 처음에 중일전쟁 때 정부를 이전한 적이 있던 쓰촨성 등의 중국 서남부로 옮기려 계획했었다. 실제로 중화민국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촉나라에 비유하여 제갈량후출사표에 나오는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한나라(촉한)와 도적떼(역적, )는 양립할 수 없다)이라는 표현을 써오기도 했다. 물론 중화민국이 말하는 한적불양립의 '한'은 당연히 대만으로 옮겨간 중화민국 스스로를 가리키고, '적'은 중화인민공화국(당시 중화민국의 표현으로는 중공)을 가리킨다. 타이베이로 옮기기 전에 일시적으로 충칭이나 청두에 머물렀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중국 국민당이 타이베이로 가지 않고 청두에 눌러 앉았다면, 쓰촨 성을 중심으로 윈난 성, 구이저우 성, 광시 성 등을 기반으로 대륙에 잔류하면서 중원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치하였을 것이다. 이럴 경우 타이완 섬이 정권의 중심지가 되는 일 없이, 지금과 같이 중국 본토인과 구별되는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은 옅었을 것이다. 물론 섬 지역의 특성상 내륙인들과는 좀 다른 지역색이 강했을 테지만 적어도 나는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이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었을 수 있다. 하지만 대륙의 분단이 지속되게 되면, 중국 서남부지역의 중국인들이 지금의 대만인들과 비슷하게 중원의 중국인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중국 국민당미국, 영국, 포르투갈, 티베트, 위구르 등의 지원을 얻어가며 중공과 맞서서 북쪽으로는 중원을 도모하고 동쪽으로는 중국 중남부 내륙을 엿보며 동남으로는 중국 동남부 연해지대를 노려 제2의 북벌과 반공 대륙을 시도했을 것이다 이같은 중국 분단의 정세는 남북으로 이념대립 중이었던 한반도에서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적어도 중공의 지원이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김일성이 남침을 주저할 것이고, 남침을 강행할 경우 중공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북한 정권 자체가 와해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쓰촨 성에 자리잡았을 경우 중화민국의 수명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높다. 국민당군의 주력이 중국 서남부에 몰려버리므로 섬을 지킬 병력이 매우 부족해서 생각보다 일찍 중공군에게 접수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만 독립파들은 국민당 정권이 옮겨오지 않았다면 인민해방군은 대만을 자국이라 생각하지 않아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티베트 등을 생각한다면 인민해방군이 대만에 안 들어올 리가 없었을 거다. 중화민국이 21세기까지 존재하는 이유는 당시 인민해방군이 안 들어온 게 아니라 못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만이 아닌 진먼마쭈도 중화민국의 통치를 받는 이유도 마찬가지. 실제로 하이난 섬의 경우 대만 섬에 필적하는 크기를 가지고 수십 킬로미터의 해협으로 중국 본토와 분리된 상태였으며, 이미 본토를 거의 상실한 중화민국군이 상당수 주둔한 지역이었지만 1950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게 함락된 전례가 있다. 또한, 중공군이 티베트까지 완전 점령한 것이 1952년이고, 윈난 성과 쓰촨 성에 국민당군이 상당수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죽지세로 밀린 끝에 버마와 태국 국경선을 넘어서 피난가게 되므로 이들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다면 피난 과정에서 와해되거나 지배영토가 하나도 없는 망명정부 수립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내륙 깊숙이 있어서 유사시 미국이 항공모함등으로 도와주러 오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다. 설령 이 모든 것을 버티고 살아남더라도 쓰촨 성이나 윈난 성은 군벌의 세력이 강한 곳이라 기존의 방식인 중앙정부 따로, 군벌 지배지역 따로의 현상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으며, 이렇게 되면 지금의 대만처럼 버티기는 커녕 내부 분열로 인해 자멸할 가능성이 높다.[2] 그렇게 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별다른 피해도 입지 않고 아주 손쉽게 하나의 중국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대신 해외 화교들이 남베트남 망명 정부처럼 중화민국 망명정부나 만들었겠지(...)

한편 중국 국민당타이완 섬 이전을 건의한 것은 지리학자 장치윈(張其昀)이었다. 장치윈에 따르면, 대만은 오랫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이 남기고 간 산업자원, 공산당 세력이 미약한 점, 그리고 섬의 전략적 가치 등을 고려했다고 한다. 물론 본성인들과의 충돌과 이에 따른 타이완 독립운동의 발흥은 고려하지 못했다. 이에 더해서 대만은 일본이 장기간 점령한 상태라서 독자적인 군벌 세력이 없다는 점도 장개석의 흥미를 끌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쓰촨 지역으로의 피난이 위험요소가 많았던 걸 고려하면, 국민당의 대만 이전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난징 함락은 4월 23일이었고, 그 후 국민당 정부는 타이베이에 정착하기까지 8개월간 광저우, 충칭, 청두 등을 전전했다. 난징 함락 후 국민당 정부는 일단 광저우로 퇴각했으나, 중공군이 화난(華南, 화남) 지방을 석권하면서 광저우가 위태로워지자, 10월 13일 광저우를 버리고 중일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충칭으로 이동한다. 그러다가 11월 30일 충칭마저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자, 국민정부는 재차 청두로 퇴각하였고, 12월 7일 쓰촨성 시창(西昌)에 대본영을 남겨두고 타이베이로 철수하게 된다. 12월 27일 청두는 함락되었고, 시창에 잔류한 국부군은 이듬해 4월까지 저항을 이어갔다.

엄밀히 말하면 타이베이는 정식 수도가 아니라 본토를 수복하기 전에 중화민국중국 국민당이 임시로 머물며 권토중래를 노리는 곳이었지만, 60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의 힘이 커지면서 본토 수복은 불가능해지게 되었고, 타이베이중화민국의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게 된다.

3 유물

이 때 장제스는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군의 하위층은 버려놓고 중국 국민당의 고위층을 데려오는데, 미국의 수송선을 빌려서는 자금성 국립고궁박물원에 보관하고 있던 중국 유물들을 싸그리 털어서 대만 섬으로 가져왔다. 당시 민간인 수송을 핑계로 대서 미국이 매우 빡쳤다 국부천대를 할 때 털어온 중국 유물들은 타이베이로 옮긴 국립고궁박물원에 전시하여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는데 실컷 잘 써먹고 있다. 장제스가 이때 털어오지 않고 남겨 두었다면 문화대혁명개발살 났을수도 있으니 문화재를 지킨 셈이 되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3년 11월 3일 방송분에서 소개되었다.

이외에도 유물은 아니지만, 중국 역대 왕조가 대대로 우대한 공자의 직계 적손(嫡孫)으로 제32대 연성공(衍聖公)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이었던 쿵더청(孔德成)도 장제스가 대만 섬으로 데리고 건너갔다. 북송금나라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내려갈 때 송고종이 중화로서의 정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제3대 연성공 공단우를 함께 데리고 간 것에 비견할 만한 일로, 이 당시 공자 가문의 직계 남자가 쿵더청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현재는 타이완에 공자의 직계 가문이 이어지고 있다.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은 중화민국 정부의 유일한 세습 공직으로 지위는 특임관(장관급)에 준한다. 쿵더청은 국부천대 이후 고시원 원장, 총통부자정 등의 고위직을 역임했고 쿵더청 사후 제2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을 세습한 손자 쿵추이창 또한 총통국책고문을 맡고 있다.

4 결과

우선 당연하게도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을 석권했다. 단 실제 건국은 국부천대 이전인 1949년 10월 1일에. 난징 함락인 4월부터 10월까지는 과도기로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탈바꿈을 준비하는 기간이 되었다. 그리고 중화민국은 세계에서 4번째로 넓은 국가에서 스리랑카의 절반 조금 넘는 크기의 작은 섬나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인구 면에서도 인구 5억 6천만의 세계 최다 인구국에서 800만 남짓의 그저 그런 규모의 국가로 추락한 것도 덤.[3]

그 후로도 신생 국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을 계속해서 점령하게 되었고, 중화민국의 실질적 영토가 현재와 같이 확정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이 전쟁은 이후 교착상태를 유지하다가 1970년대 말에 사실상 끝났다. 사실상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양안이 휴전이나 정전 협정을 특별히 맺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덩샤오핑은 대만에 대해 (현 체제를 유지하는 한)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적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에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중화민국이 지금 이미 없어졌고 과거 중화민국의 권리 자신이 계승해햐야한다고 주장한다.[4]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현재의 중화민국은 말하자면 중화민국을 참칭하여 타이완을 점거하고 있는 국민당의 불법 정권인 셈이다. 중화민국 역시 공식적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대만으로 이전함으로서 중국 국민당의 생존은 보장되었다. 대만 침공을 준비하던 중공군(인민해방군)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에 투입되느라,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내부 문제와 경제난 때문에 사실상 상륙작전을 포기했고[5], 덤으로 미군의 주요 기지인 오키나와와 가까우므로 양자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미국이 항공모함을 파견했으니 이 시점에서 사실상 안전이 장기간 보장된 셈이었다.

국부천대에 따라 사실상의 수도는 난징에서 타이베이로 옮겨졌다. 하지만 천도 이후에도 중화민국은 오랫동안 명목상 수도난징이라고 했으며, 천수이볜, 마잉주 집권기를 전후해서 '법적인 수도'에 대한 인식이 약해졌다. 행정원이 발행하는 연감에선 아예 대륙지구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며, 정부 관료들도 당당히 "중화민국의 수도는 타이베이"라고 말한다.

이 때 중국 국민당과 함께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 성[6] 관할 지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외성인이라 부르며,[7] 타이베이, 신베이, 지룽, 타오위안 등 대만 섬 북부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 아무튼 국공내전 패배 덕에 타이베이는 중화민국의 '변방의 고만고만한 도시 중 조금 크기가 있는 도시'에서 '중심 도시'로 변해버렸다. 1661년에 세워진 타이완 정씨 왕국의 수도가 자리잡았던 타이완 섬 남부에 있는 타이난 이래로 중국 역사에서 수도를 섬에 둔 첫 사례인 것. 설마 그 뒤도?

여담으로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을 선언하자 중화민국의 승인을 전격 취소해버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8] 그 뒤를 사회주의 국가들과 제3세계 국가들이 따랐는데 영국, 노르웨이 등의 서방 일각도 뒤따랐다! 다만 영국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게, 당시 영국령이었던 홍콩이 중국 공산정권 코앞에 있었기 때문. 노르웨이는 몰라도 영국만큼은 미국과 매우 밀접했기 때문에 홍콩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빨리 중국 공산정권을 승인할 일이 없었을 거라는게 중론이다. 그러나 정작 중공은 단절된 서방과의 교류를 위해 홍콩과 마카오(과거 포르투갈령)를 사실상 일부러 방치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영국의 판단은 좀 성급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최종적으로 국제사회에 뛰어드는 데에 성공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선견지명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5 관련 항목

  1. 원칙적으로는 國府遷臺로 써야 하지만 전통적으로 한자 문화권에서 臺를 빨리 쓸 때 발음이 같은(한국어에서는 완전히 같진 않고 비슷한) 台로 쓰는 경우가 많아 관습적으로 國府遷台도 통용된다(참고로 중국 대륙의 간화자나 일본의 신자체는 아예 공식적으로 臺를 폐지하고 台에 병합해 버렸다). 國府遷臺, 國府遷台 모두 한국 한자음으로 읽을 때는 '국부천대'로 읽어야 한다. 台의 원래 한국 한자음은 '태'(별 이름에 사용)와 '이'('기쁘다'라는 뜻. 이때는 怡와 동자)만 있지만 臺를 대신하는 글자로 썼을 때는 당연히 臺의 음을 따라 '대'라고 읽어야 한다.
  2. 삼국시대 촉한꼴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촉한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촉한은 적어도 제갈량이 있는 동안 현재의 쓰촨성 지역뿐만 아니라 윈난성까지 정벌해서 어쨌든 지배 체제는 충분히 다져놨는데 당시 국민당은 그런 거 없다
  3. 1950년 당시 일본(8300만)의 10분의 1, 남한(2000만)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고, 북한(950만)보다 더 작은 규모였다.
  4. 정확하게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단 한번도 자신들이 중화민국의 후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실제로 중화민국의 국채라던가 기타 국가승계의 의무는 모조리 타이완에 있는 국민당에게 해결하라고 뻐기거나 아예 외국자산을 몰수시키기도 했다. 좋은거는 내가 나쁜거는 니가
  5. 게다가 대만은 하이난 섬과는 달리 대륙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상륙 자체도 쉽지 않았다. 때문에 중국 국민당도 꽤나 고생한 피난길이 되었었다.
  6. 국부천대 기준. 중화민국의 현행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타이완 성 뿐만 아니라 타이완 성에서 분리된 직할시들도 포함.
  7. 당연히 푸젠 성 관할인 진먼, 마쭈를 여기에 포함하지 않는다.
  8. 스탈린은 그전까지 같은 공산당인데도 마오쩌둥을 무식하다며 별로 안 좋게 보았고 차라리 장제스를 더 선호했었다. 그러다 마오쩌둥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태도를 180도 바꾸어 UN에서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CHINA)으로 취급하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