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덩후이

역대 중화민국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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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7대8대, 9대10대, 11대
장징궈리덩후이천수이볜
중화민국 역대 부총통
6대7대8대
셰둥민리덩후이리위안추

李登輝(이등휘) / Lee Teng-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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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총통에 오른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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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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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지원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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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근황. 확실히 많이 노쇠했다.

  • 생몰년 : 1923년 1월 15일 ~ 현재
  • 중화민국 부총통 1984년 5월 20일~1988년 1월 13일
  • 중화민국 총통 1988년 1월 13일~2000년 5월 20일(12년 128일)
    • 총통대행 : 1988년 1월 13일 ~ 1990년 5월 20일 (2년 128일)
    • 8대 : 1990년 5월 20일 ~ 1996년 5월 20일 (6년)
    • 9대 : 1996년 5월 20일 ~ 2000년 5월 20일 (4년)

1 개요

중화민국(대만)의 8,9대 총통.

총통 자리에 있으면서 세운 최초 타이틀이 많다. 우선 중화민국 최초의 대만 출신 본성인 총통이고, 부총통 경력이 있으면서 승계가 아닌 선거로 당선된 유일한 총통이며, 그리고 첫 민선 총통이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



리덩후이의 육성을 실제로 들을 수 있는 동영상. 뉴스 도입부에서 지금의 CG 떡칠 대만 방송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한국 뉴스데스크급의 깔끔함을 느낄 수 있다.(...) 아래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리덩후이의 모국어가 표준중국어가 아니라 표준중국어 발음이 많이 좋지 않다. 대만어일본어 어투가 섞여나온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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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제국대학 재학 시절

현 행정구역 기준으로 신베이시(新北市) 싼즈 구(三芝區)에서 태어난 본성인이다. 아버지가 일제시대 경찰관이었기 때문에 집안 사정은 괜찮은 편이었다고 한다. 공부를 꽤 잘 해서 구제 다이호쿠 고등학교[1]를 거쳐 1943년에 교토제국대학 농학부 농업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2] 그러다가 학도병으로서 징집되어 육군 소위로 임관해 나고야의 고사포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실전에 나가기 전에 일제가 패망하여 실제 전투에 참여한 적은 없다.

전후에는 대만으로 귀국하며 국립타이완대학 농업경제학과에 편입, 계속 농경제학을 전공하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코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타이완대학 교수 재직 중 농업 전문 관료로서 장징궈의 눈에 들어 1971년에 국민당에 입당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였다.

2.28 사건국부천대 당시, 본성인이면서 일본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던데다가 공산당에 가담한적도 있었기 때문에 중국 국민당의 탄압을 피해 은둔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잡히지 않기는 했지만 국민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진출한 뒤로도 본성인 및 일본 관련 경력, 공산당 가입 경력등이 문제가 되어 별다른 이유도 없이 구속되어 경찰 조사를 받거나 출국을 금지당하는 등의 탄압을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리덩후이가 국민당 당원으로 있으면서도 대만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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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부총통 시절의 모습. 왼쪽은 장징궈 당시 총통)

어쨌든 장징궈가 집권한 이후로는 승승장구해서 1978년부터 1981년까지 타이베이 시장을 맡았고, 1981년에 타이완 성 주석에 올라서 3년간 재직하다가, 1984년 부총통 자리에 발탁됨으로써 권력의 정점을 넘보게 된다. 본성인 출신인 리덩후이가 권력 2인자인 부총통으로 지명되었을 당시, 집권 국민당을 위시한 대만 정계는 이를 상당히 의외로 받아들였다. 장징궈는 마땅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고, 이미 이 당시에 장징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당시 부총통 자리는 일반적인 부통령같은 병풍이 아니라 진짜 차기 권력자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아래와 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3]

와병 중이던[4] 장징궈 총통에게 국민당의 측근들이 물었다. "총통 각하. 각하의 후계자는 누가 좋겠습니까?" 장징궈가 고향 저장성 사투리로 대답했다. "니 덩 후얼"(你等會兒. 기다려라(아직 결정할 때가 아니다)). 그러자 이를 잘못 알아들은 측근들의 반응. "니 덩 후얼? 아, 후계자는 리덩후이라는 말씀이시군요!"

3 총통 재임기간

3.1 1기: 권한 대행 (1988-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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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월. 장징궈의 사망 직후, 권한 대행으로서 취임 선서를 하는 리덩후이)

1984년 당시 총통이자 국민당 주석이었던 장징궈는 리덩후이를 부총통 후보로 지명하고 국민대회에서 당선되어 부총통이 되었지만, 장징궈는 일관되게 자신의 후계가 헌법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만 언급했을 뿐 후계자를 키우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1988년에 장징궈가 죽자 헌법에 따라 리덩후이가 총통(대행)이 되고 국민당 주석대행이 되었지만, 그는 본성인으로 국민당 내에서는 비주류에 속했으며, 하오보춘 등의 국민당 보수파의 견제를 받았다. 그렇기에 언론통제 철폐나 야당 법제화같은 부분적인 개혁은 시행했지만 일단은 양안통일과 민주화 등 핵심 이슈와 관련해 국민당의 기존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5] 그러나 리덩후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파벌을 키워 국민당 주석대행이 아닌 주석이 되었고, 보수파의 견제를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990년에 총통 임기가 만료되고 국민대회에서 선출되는 간선제 총통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때에 이르면 국민당 내 리덩후이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보수파들은 리덩후이가 국민당 총통 후보가 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부총통 후보만큼은 보수파의 인물을 내세우려 했지만, 리덩후이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파벌의 인물인 리위안추(李元簇)를 부총통 후보로 세운다. 보수파들은 이에 반발해 린양강(林洋港)을 후보로 세우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간선제 총통선거에서 무사히 당선되었다.

3.2 2기: 개혁의 본격화 (1990-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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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총통직에 정식 취임하는 리덩후이)

정식으로 총통에 당선 및 취임한 후, 리덩후이는 국민당의 전통적인 노선과 반대되는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고, 이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야당인 민주진보당이 내세운 정책들을 점차 받아들이면서 민주화를 추진했다.[6] 우선 1948년에 선출된 의원이 아직도 의원 노릇을 하고 있는 입법원국민대회의 해산 및 재선거가 시급했는데, 장징궈 정권 때에도 검토가 되었던 것이지만 결국 시행하지 못했다. 이들이 국민당 독재를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리덩후이가 총통에 재선되자 이미 민주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어 국민대회 및 입법원 의원 재선거 여론이 고조되고 민주진보당 역시 이를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국민대회 및 입법원 의원들은 그 대가로 고액의 퇴직금 및 연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리덩후이는 전격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었던 학생운동 지도자들 및 민주진보당 인사들과 회견하여, 여론 및 야당의 요구를 무기로 1991년에 장제스가 제정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폐지하고 헌법을 수정했다[7].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장제스공산당을 토벌해야 한다는 이유로 국민대회 및 입법원 선거를 중지하는 근거가 되었던 만큼, 1991년과 1992년에 국민대회와 입법원은 해산되고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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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3월 중정기념당에서 열린 대만 재야진영의 국민대회, 입법원 재선거 요구 시위. 백합을 앞세웠다고 해서 '야생백합화 운동'(野百合學運)이라고 불렸다.[8] 리덩후이는 이러한 민주화 여론을 앞세워 국민당 내 입지를 강화시켰다)

아울러 1990년대 초반부터 국민당 내 보수 진영과의 타협을 위해 입각시켰던 군부 출신의 거물 하오보춘을 행정원장, 국민당 부주석에서 퇴진시켜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시키고, 군부의 통수권까지 실질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오보춘이 차지했던 행정원장, 국민당 부주석 직에는 자신의 측근인 롄잔을 임명하여 한층 더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4년에는 타이완 성장, 타이베이 시장, 가오슝 시장을 임명직에서 지역 주민의 선거를 통한 선출직으로 바꾸어 완전한 지방자치를 실현하였다.[9] 그리고 같은 해에 총통 역시 직선제로 선출하도록 헌법을 수정했다. 국민당 보수파들은 이에 대해 선거인단을 통한 미국간선제 총통 선거를 제안했으나 리덩후이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총통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총통 임기를 6년에서 4년으로 변경했으며 1회만 연임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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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의 첫 2.28 사건 공식 추도행사에 참석한 모습)

아울러 장제스, 장징궈 시절 억눌려 왔던 과거사 문제를 정리하고 해소하기 위한 조치들도 단행했다. 먼저 대만 사회 최대의 금기였던 1947년의 2.28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를 지시하고, 국가원수로서 처음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책임 인정과 사과를 표시하였다. 이러한 조치 역시 리덩후이 스스로가 대만 출신의 본성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993년에는 시안 사건으로 54년간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던 장학량을 석방하였다. 기사 1994년 1월 1일부로 장학량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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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대만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에서의 유세 모습. 오른쪽은 러닝메이트인 롄잔)

아울러 그는 민주화와 함께 조금씩 대만 독립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1991년에 국가통일위원회 강령을 선포하면서 양안관계는 두 개의 동등한 정치실체라는 발언을 했다. 이는 중화민국이라는 국가 정통성을 강조한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양안이 똑같이 주장해오던 하나의 중국과는 배치되는 발언이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로 내몰린 보수파들은 반발하여 탈당하였으며, 리덩후이도 자신의 방침에 반발하는 국민당 인사들을 제명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책을 강경하게 추진했다. 이렇게 제명되거나 탈당한 국민당 인사들은 신당(중화민국)이라는 정당을 세웠고 1995년 입법원 총선에서 그럭저럭 선전을 거둠에 따라 리덩후이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듯 싶었다. 또한 1996년 최초의 직선제 총통 선거에서 제명된 린양강(林洋港)과 탈당한 천리안(陳履安)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총통 직선제에 반발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그의 3선을 저지하려고 대만해협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10] 그러나 리덩후이는 부총통 후보로 지명한 롄잔과 함께 오히려 총통 선거-국민대회 선거에서 압승하였고, 따라서 국민당이 갈라서지는 않았다.

3.3 3기: 드러나는 본심 (1996-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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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5월 총통 취임식에서)

그 후 1990년대 후반에 대만의 경제성장이 주춤해지면서 1997년 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이 민진당에 참패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그 틈을 타서 1998년 입법원 총선과 지방선거[11]에서 국민당이 입법원 과반을 확보하지 못해 여소야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지만 예상을 뒤엎고 1998년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며 그럭저럭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그 전에 소극적으로 중화민국을 중국과 다른 또 하나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선에서 머물렀더지만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대만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1999년 5월에 <대만의 주장>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중국을 7개의 국가로 분할해야한다라는 주장을 펼쳐 파문을 일으켰고 1999년 7월 양안관계는 (특수한) 국가 대 국가라고 발언하면서 그 동안 감춰왔던 본색을 드러냈다. 앞서 말한 1991년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이 발언 역시 어찌보면 중화민국의 정체성을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비하여 강조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하나의 중국 원칙을 사실상 깨는 발언이라 당시 중국 정부가 격노하여 대만을 침공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졌을 정도다. 장쩌민 당시 주석은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사실상 대만 침공 의사를 밝혔다. 물론 리덩후이 본인은 중국의 반발에 오히려 "대륙이 대만을 침공해올 경우 홍콩, 상하이, 난징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엄포를 놨다. (!)[12]

2000년 총통선거에서는 자신의 파벌로 부총통이었던 롄잔(連戰)을 총통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에 강력한 국민당 총통 후보였던 쑹추위가 반발하여 국민당을 탈당하고 독자적으로 총통 선거에 출마했고, 이에 따라 국민당 지지층이 분열되어 어부지리로 민주진보당천수이볜 후보가 총통에 당선될 수 있었다.뭔가가 생각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리덩후이가 같은 대만 독립주의자인 천수이볜을 지지했다는 의혹이 있다. 선거 유세 때 인터뷰에서 천수이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무슨 총통이냐" 등의 힐난을 퍼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롄잔을 적극적으로 밀어준 것도 아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이 직접적으로 언급을 안해서 알 길이 없지만, 1994년에는 황다저우 시장이 민심을 잃은데다 국민당을 탈당한 자오샤오캉까지 신당 후보로 출마한 상황에서 그냥 황시장을 공천해버렸으니 천수이볜에게 타이베이를 조공한거나 다름없었으며, 2000년에는 타이완의 97%를 차지하는 타이완 성장을 민선으로 지낼만큼 경쟁력이 있는 인물인 쑹추위에게 기회조차 안 주고 그냥 롄잔을 국민당 후보로 내세워서 기어이 국민당 표를 분산시켜 또 천수이볜을 당선시켰다. 그렇게 해서 민주진보당 등의 범록연맹이 2004년 총통선거에서 단독으로도 국민당을 위시한 범람연맹과 겨룰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 이는 불과 10여 년 전의 민주화 초기 시절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국민당 소속인 리덩후이가 사실상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한 만큼 범록연맹의 성장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4 퇴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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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후임 총통 천수이볜의 취임식에 참석한 모습 계획대로)

천수이볜의 당선 이후에는 총통 선거 승리패배를 책임지고 국민당 주석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2001년에는 자신의 파벌을 이끌고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대만단결연맹이라는 새 정당을 만들어 민주진보당범록연맹을 세우게 된다. 이에 꼭지가 돌아간 국민당은 그를 제명하기에 이른다.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진 리덩후이는 퇴임 후에는 '중화민국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발언까지 해가며 대만 독립을 주창했으며, 공공연하게 천수이볜을 지지하고 2004년 총통 선거에서는 지지연설을 하기도 하였다.[13] 현재에도 2012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유세 마지막날인 1월 13일 저녁, 민주진보당차이잉원 후보 지원유세를 나가는 등 대만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참고기사

2015년 기준으로 만 92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저술, 강연이나 해외방문 등의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총통선거 등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대만 독립을 주장하고 있기에 지금도 뉴스에서 심심치 않으면 볼 수 있는 존재 중 한 명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리덩후이 기금회'(李登輝基金會)란 이름의 재단까지 설립, 운영하고 있을 정도다.[14]

하지만 90세를 넘긴 고령의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최근 몇년 동안에는 간간히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최근의 경우 2015년 11월 말 가벼운 뇌경색 증상으로 입원했고, 이로 인해 오른손을 움직이는 데 불편해졌다는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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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 직후인 2015년 12월 16일 손녀 리쿤이(李坤儀)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건재함을 보여줬다.
한 뉴스에 따르면, 리쿤이의 아버지 리셴원(즉, 리덩후이의 아들)은 리쿤이가 어렸을 때인 1982년에 암으로 죽어서 리덩후이가 손녀 리쿤이를 애지중지 키웠다고.

2016년 5월 20일 차이잉원의 총통 취임식에도 전직 총통 자격으로 참석했다.

5 평가

총통 재임기에는 대만의 민주화 이행을 주도했고,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역사에 남을만한 치적을 세웠지만, 그의 재임 기간에 추진되었던 적극적인 대만 독립 정책과 퇴임 이후 드러난 노골적인 친일 성향은 대만 내에서 크게 평가가 엇갈린다.

그렇지만 그가 대만의 대중정책에 끼친 영향은 커서 후임 총통인 천수이볜마잉주 모두 리덩후이가 내세운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차이잉원은 아예 리덩후이가 직접 자문위원으로 임명한 인물이라 리덩후이의 수제자나 마찬가지인 인물이다

대만 민주화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총통 재임 시절 그가 소속했던 중국 국민당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오히려 평가가 좋지 못하고 범록연맹 쪽에서의 평가가 괜찮은 편이다.

대만 독립을 추구했기에 중국 대륙에서의 평가는 당연히 좋지 않다. 대륙에서 한간으로 분류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한국의 경우, 그의 총통 재임 시절을 비롯하여 대만 역사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이상 아는 사람이 없으며, 안다 하더라도 단순히 친일 성향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비호감 이미지가 강하다.

5.1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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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검도 복장을 한 모습 이때부터 일빠의 싹수가 보였다

대만 정치인 중에서 대표적인 친일파(2번 항목)이다. 대만 독립론 진영은 청나라나 일본이나 중화민국이나 외부 지배자로 간주하는데 그러다 보니 "그나마 역대 지배자들 중에서는 일본이 나았다"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꽤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당한 게 많은 한국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일본이 물러가고 중화민국이 대만을 통치했을 때의 평판은 그 일본보다도 나빴을 만큼 막장이었고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일본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들은거냐이로 인해 2.28 사건이 발생해 많은 대만 사람들의 희생되었으며[15], 일본이 조선과는 달리 대만에서는 비교적 유화적인 통치를 펼쳤던 것도 있다.[16]

또 대만은 본성인(17세기부터 온 한족)들과 외성인(국부천대 당시 피난 온 한족)들 중 본성인들이 상대적으로 일본에 관대한 편인데 출생지에서 알 수 있듯 리덩후이도 본성인이다. 이 양반이 그 중 극단적인 케이스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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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에도 참배했다. 본인의 형 리덩친(李登欽, 일본명 岩里武則, 1921년 ~ 1944년 12월 15일)이 합사되어 있다고 하며, 리덩친은 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군 해군 병으로 입대해 필리핀에서 전사했다. 겸해서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중국과 한국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해서 제대로 중화인민공화국대한민국어그로를 끌었던 적이 있다. 기사

리덩후이 본인의 모어는 당연히 대만어이고, 제2언어가 일본어, 표준중국어는 제3언어이다. 일본어가 표준중국어보다 편하다고 하며, 지금도 표준중국어는 유창한 편이 아니라고 한다. 표준중국어를 하는데 대만어 말투가 많이 들어가 있다고...

대만 독립에 매우 긍정적이기에 중국을 싫어하는 일본 우익들과의 교류가 많다. 그리고 이들과 교류하기 위해 일본을 자주 찾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입국 비자 내지 말라고 일본을 압박하지만 일본이 그걸 들어줄 리가 없다. 일본 인사들과 인터뷰를 할 때에는 일본어를 쓴다고 한다.

센카쿠 열도 분쟁에서 일본 편을 들었다. 그러자 중화민국 외교부가 진화에 나서 "댜오위타이(일본명 센카쿠)는 중화민국의 영토라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했으며 앞서 밝혔듯 국민당보다 상대적으로 일본에 관대한 민주진보당마저도 "전 총통이라는 작자가 일본놈 행세를 한다!"라며 더욱 강도높게 비난했다. 독도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한국에도 알려졌다. 2015년 7월말에 다시 일본을 방문해서도 해당 발언을 반복했고, 당연히 중국과 대만 내부의 국민당 지지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오죽했으면 같은 국민당 출신으로 한때 리덩후이를 보좌하기도 했던 마잉주 현 총통이 대만 유력지 <중국시보>에 직접 글을 기고하여 리덩후이의 발언을 반박했을 정도. [17]

관련 발언이나 주장들을 근거로 종합하자면 리덩후이는 미국보다는 일본이 대만의 생존 여부에 대해 지리적, 전략적으로 보다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일본이 중국에 직접 맞설 정치-군사대국의 행보를 본격화함으로써 대만의 후견국가 내지는 제1동맹 역할을 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간단히 말하면 과거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안전보장 측면에서 미국에 대해 가졌던 의존심리와 비슷한 셈. 리덩후이가 일본의 우익진영, 특히 아베 신조 현 수상을 비롯한 정치-군사대국화 지지세력과 밀접히 교류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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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화캐릭터 코스프레를 한 적이 있다. 대상이 바로 에다지마 헤이하치. 왜 친일파 이야기하는 데 나오는지는 저 캐릭터 항목에 들어가보면 안다. 옆의 두 따까리들은 각각 츠루기 모모타로다테 오미토를 코스프레한 것으로 보이는데 상당히 조잡해 보인다.

2015년 8월 22일에는 일본 우익 잡지 중 하나인 'Voice'와의 인터뷰에서 "70년 전에는 일본인... 조국(일본제국)을 위해 싸웠다"라는 발언을 하여 대만 정치권 내부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원래 "70년 전에 일본인이었다"는 발언은 과거 일본 우익 인사들과의 인터뷰에서 꽤 자주 언급했었다. 리덩후이는 이 발언을 좀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반복했고 대만의 총통 선거와 겹쳐 다시 이슈화된 것으로 보인다. 훙슈주는 "국민당이 정권을 잡지 못하면 나라가 일본에 다시 넘어간다!"라고 발언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전직 총통 예우를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기사 반면 차이잉원 주석을 비롯한 민진당 측에서는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결국 리덩후이의 발언은 친일, 반일 논란을 넘어서 대만에 대한 중화민국 정부의 지배 정당성, 대만과 중국 본토와의 관계 등 보다 민감한 역사, 정치, 사회적 논란에 관한 대만 내부의 첨예한 논란을 드러낸 일면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다가 2015년 9월 13일에는 본인도 그동안의 발언이 좀 과했다고 느꼈던지 "대만이 줄곧 외부의 통치를 받고, 대만인이 일본의 '노예'로 전락했던 점을 대만인으로서 매우 비통하게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본이 패전 후 대만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하여 대만이 중화민국의 성(省)이 되었는바, 설상가상으로 “가 가더니 돼지가 온 꼴”[18]이라고 말하여 국민당 정권에 대한 디스는 빼놓지 않았다.

6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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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만의 주장>(台灣的主張): 1999년 저작. 총통 임기 막바지에 출간한 책이다. 후술할 동일 제목의 2015년작은 이 책의 후속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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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덩후이는 총통 퇴임 이후에도 1~2년에 책을 꼭 한두권씩은 출간한다. 90넘게 나이먹은 사람이 이렇게 다작을 할 수 있는가 신기할 정도. 총통 퇴임 이후에만 9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7 트리비아

  • A733POL02-02_1433145967906_242857_ver1.0.jpg 600_169.jpg 부인 쯩원후이(曾文惠) 여사와 1949년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이중 장남인 리셴원(李憲文)은 1982년에 암으로 30대의 나이에 타계했고,[19] 나머지 두 딸 리안나(李安娜)와 리안니(李安妮)가 있다. 특히 리안니는 사회학 박사 출신으로 부친처럼 대만 독립을 지지하는 인물이며, 범록연맹 계열 정당인 대만단결연맹 소속으로 활동 중이다.
  • 2012년 중반에 대학에서 대만 독립 문제를 가지고 대만에서 공부하는 대륙 유학생과 설전을 매우 크게 벌인 바 있다. 하지만 마무리는 직접 싸인한 자기 책을 주고 서로 껴안는걸로 훈훈하게 마무리. 과연 그 책을 불쏘시개로 썼을지 아니면 중국 대륙에 보내서 분노를 유발했을지
  • 베트남에서는 리왕조의 마지막 왕족이자 왕자인 이용상이 보트피플행을 하며 대만과 난징 부근을 지나 옹진혹시나 중국 쪽에 옹진이란 같은 지명을 가진 데가 있네라고 생각하시는 분을 위해 말하지만 대한민국의 그 옹진군 맞다. 베트남판 환빠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면서 바로 이 양반이 이용상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그럼 대만에서 현지 살림을 차리고 도망갔다는 건가...
  1. 현 국립 대만사범대학
  2. 후에 일본 극우와도 관계를 가진것과는 다르게 이때는 좌파성향의 학생이었다고 하며, 귀국 후에 2.28 사건의 충격으로 일시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적도 있었다고 한다.
  3. 출처: 최창근, <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리수: 2014), 148쪽.
  4. 화장실에 대변을 놓았을 때라는 버전도 있다. 장소만 제외하면 내용은 똑같다.
  5. 1980년대 후반에 대만에 민주화 바람과 함께 노동운동이 격화되고 있었는데 리덩후이 정부에서 강하게 찍어내렸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대만내 노동운동가에게 욕을 좀 얻어먹기도 한다.
  6. 그러나 민주진보당의 일부 인사들은 이를 두고 리덩후이가 자신들의 주장과 노선을 가로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7. 중화민국 헌법은 미국처럼 조문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수정조문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특정 조항의 효력을 중지할 수 있다.
  8. 이때를 계기로 백합 꽃은 오늘날까지 범록진영을 비롯한 대만 내 민주, 독립 계열이 관련 집회에서 애용되고 있다. 이후 발생했던 대만의 주요 정치, 사회 운동에서도 꽃을 상징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등장했다. 예컨대 2014년 중국과의 ECFA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입법원 점거 시위는 '해바라기 운동'(太陽花運動)이라고 불렸다.
  9. 현이나 성할시 등의 기초자치단체장은 이미 선거로 선출되고 있었다. 물론 국민당 독재 시절에는 국민당만이 후보를 낼 수 있었지만, 장징궈가 민주진보당 창당을 묵인함에 따라 야당 역시 지방선거에 후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10. 미사일 발사훈련으로 촉발된 이 사건을 양안사태라 말하며 이 양안의 충돌이 미국이 마지막으로 개입한 사태였다. 이 당시 미국은 항모전단을 파견해 중국의 무력시위에 맞대응했고 결국 중국이 한 발 물러서며 일단락됐으나 이를 간 중국이 10여년 뒤 내놓은 물건이 바로 랴오닝급이다.
  11. 타이베이 시장과 가오슝 시장 선거
  12.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는게 얼마나 쉬운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나 대만도 엄연히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고 중국의 경제활동이 집중된 동부 대도시에 미사일 세례를 퍼부을 정도의 능력은 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중국의 피해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힘들기 때문에 리덩후이의 엄포는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어차피 죽을거 그냥 순순히는 못 죽겠다는 거지
  13. 다만 천수이볜 정권 말기에는 천수이볜의 부패 등을 이유로 그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래도 대만 독립의 동지라서 그런지, 천수이볜 탄핵 소추안 투표 때는 백지표로 무효표를 만들어 부결에 기여했다.
  14. 중국어권에서 '기금회'는 한국 등 다른 나라의 '재단'(財團: foundation)에 해당하는 명칭이다.
  15. 일본이 물러가고 중국 국민당 국부군이 대만에 진주했을 때, 꽤 많은 대만인들이 자신들을 같은 한족이라고 여겨주는 국민당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륙에서조차 중국 국민당의 통치능력은 매우 저열한 것이었으니, 이는 대륙의 역사와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던 대만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본토인들이 대륙 사람들에 대해 가진 실망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2.28 사건 당시 본성인이 외성인을 판별하는 기준이 기미가요 제창 여부였다는 점과, 저항의 메시지를 일본어로 방송하는 등 반일감정이 매우 높았던 국민당을 제대로 자극했고, 국민당은 표준중국어로 말 걸고 대답 못하는 자=친일파로 간주해서 일괄적으로 끌고 가 총살해 바다에 수장하는 걸로 답했다. 희생자들의 재산을 싹쓸이해가고 이후에도 본성인 지식인들 다수를 친일파 청산을 명분으로 씨를 말려버린 건 덤. 2.28 사건 자체는 분명 정당한 항쟁이지만, 그 수단은 파시즘 국가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대만 내에서도 논란이 다분하다.
  16. 대만은 유럽, 중국의 청나라, 일본 등의 지배를 줄곧 받으면서 외세에 대항하려는 자생적인 민족 의식, 세력이 희박했고, 그 결과 일본에서도 굳이 강압적인 통치를 적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측면이 강하다. 일본의 식민지배 시절 대만 내부의 저항은 1895년 초기 수개월만에 진압당한 대만민주국, 토착 인사들의 자치 요구 정도가 고작이었다. 똑같이 일제 식민통치를 겪었어도 훨씬 오랜 세월동안 독자적인 민족, 국가로 존재해 온 한민족의 경우와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17. 마잉주 총통은 대만 야당으로부터 친중반일 정치가라는 딱지가 붙어있으나, 본인은 자신의 대일외교 방향이 친일도 반일도 아닌 '우일'(友日)이라고 못박았다.
  18. 이 표현은 리덩후이 개인만의 발언은 아니며, 2차대전 후 대만을 접수한 국민당의 실정(失政)에 실망한 대만인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퍼진 이야기였다. 자세한 내용은 2.28 사건 문서 참고.
  19. 위에 소개된 손녀 리쿤이가 리셴원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