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X-1 서해호

국산 프로펠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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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1월 해취호의 추락이 있고 한국전쟁이 휴전 될 때까지 해군의 항공기 제작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휴전 후, 조경연 대위는 새로운 수상정 제작 프로젝트의 보고서를 해군총참모장에게 제출하고, 승인과 함께 예산을 얻냈다.

1953년 9월 진해 해군 공창 창장은 조 대위를 항공기 제작 관련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리하여 조 대위는 새롭게 선발한 기술사관 23명과 함께 새항공기 제작을 시작했다. 이전의 해취호가 단순히 마개조를 했던 것이라면, 이번에 만드는 항공기는 설계부터 자체적으로 했다. 다만 엔진을 만들 기술은 없었기에 공군에서 사용하던 L-5 연락기의 엔진을 들여왔고[1], 몸체를 만들 알루미늄 합금이라든가 계기 장치등은 일본에서 입수[2]하였다.
제작은 순조로웠다. 기술사관 정학윤이 광복 전에 일본항공기술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이 있었기에 항공기 구조와 날개 각도 등에 많은 조언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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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정학윤 예비역 대위

두 차례 시험비행을 거쳐 해군에 정식으로 도입된 서해호는 원래 해군 장병들로 부터 공모된 '충해호'란 이름으로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이 이순신 장군이 읊은 한시 중의 문구를 따서 서해호라 이름 지었다.높은 분이 까라면 까야지

이렇게 도입된 서해호는 우리 나라 연안 수역 감시에 활약했다. 당시 이승만은 평화선을 설정하였고, 일본 어선의 조업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서해호가 최전방에서 이를 단속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해취호와 마찬가지로 이 비행기의 삶도 그리 길지 못했다. 알루미늄의 소금 부식을 방지할 기술이 당시 한국 해군에 없었기 때문에 단 9개월만에 폐기된 것. 3년 전에 해취호 사고의 악몽을 겪은 바 있었던 해군은 결국 운항을 중지하고 기체를 해체하였다.

  1. 당시 공군 사관 배찬덕 중령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2. 이 일은 해군 병기감인 박병태 대령이 자금을 지원하면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