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호

국산 프로펠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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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발 복합재료 항공기 개발사업 · 중형민항기 개발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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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플리카로 재현된 부활호(용산 전쟁기념관 야외 전시품) 우주유영기다.

1 제원 및 성능

제원1953년형(원형기) / 2011년형(개량복원기)
승무원2명
탑승인원0명
길이6.6 m / 6.7 m
익폭12.7 m / 12.7 m
기고3.0m / 3.1 m
익면적16.80 m² / 16.90 m²
자중380 kg / 495 kg
적재중량580 kg / 650 kg
최대이륙중량600 kg / 693 kg
엔진1× 콘티넨탈(Continental)사 O-190-1, 85 hp
/ 1× ROTAX사 912ULS2, 100 hp
성능
최대속도180 km/h / 250 km/h
순항속도145 km/h / 167 km/h
상승고도4,900 m / 4,572 m
항속시간2.0 hr / 3.5 hr
항속거리최대연료 탑재시 314 km(800 리) / 541 km
행동반경??? km / ??? km
익하중29.5 kg/m² / 30.5 kg/m²
추력중량비0.?? / 0.??

2 개요

공군기술학교 정비교육대에서 순수하게 국산 기술로 개발한 항공기.[1] 한국에서 최초로 개발한 항공기이다.

3 설명

1953년, 국내 연구진에 의해 4개월만에 제작된 부활호는 그해 10월 11일에 민영락 소령과 이원복 소령이 탑승하여 2시간여동안의 첫 비행에 성공, 1954년 4월 3일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이 부활을 이룰 것이다라는 의미로 부활 이라는 이름을 받아 부활호로 명명 되었다.

1955년까지 공군 초등훈련기와 정찰기로 사용되었으나 1956년 대구의 한국항공대학[2]에 기증되어 1960년까지 비행 훈련 기종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후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고,.그 자리에 경상공업고등학교가 들어선 후 부활호는 그대로 지하 창고에 옮겨진 채로 완전히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결국 공군에서도 소실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1990년, 직접 부활호 제작에 참여했던 이원복 예비역 대령과 문용호씨가 직접 사라진 부활호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부활호가 시험평가를 위해 미 공군에 넘겨졌다는 풍문을 듣고 직접 미 공군과 항공기 제작사에 문의하기도 했지만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하던 상황에서 2003년, 이원복씨는 한 일간지에 '부활호를 찾습니다'라는 기사를 내었고, 이를 본 경상공고의 퇴직자가 '경상공고 지하 창고에 부활호가 있었다'는 결정적인 제보를 하였다. 그리고 2004년 1월 13일, 이씨와 문씨는 학교 지하창고에서 먼지속에 묻혀 녹슬어 있던 부활호의 뼈대를 확인하였다. 하지만 당시 날개와 엔진, 프로펠러 등 주요 부품은 없어진 뒤였고, 공군이 이 소식을 듣고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부활호의 복원을 결정하였다.
공군은 경상공고와 회수를 협의한 후, 제81항공정비창의 전문요원들로 복원전담팀을 발족시켰다. 복원팀은 53년 당시 부활호의 제작팀 인원수와 동일한 27명으로 구성하였고, 복원팀은 부활호의 뼈대의 녹을 제거한 후 X-레이 촬영 등으로 균열 상태를 확인했다. 설계도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기골의 수치를 재어 항공기의 각 부품의 크기·두께등을 일일히 계산하는 역설계 방식을 사용했다. 그렇게 세로 설계도를 재현했으나 엔진을 구할 수가 없었다. 공군은 부품 수입사와 미국 거주자의 도움으로 미국의 중고시장까지 조사했지만 당시의 엔진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유사한 엔진을 소유하고 있던 서동화씨에게 2004년 7월 엔진을 기증받았다.
이후 복원팀은 종이로 만든 모형으로 비행시험을 한 후, 본격적으로 부활호 제작에 돌입했다. 기계 대신 망치로 알루미늄을 두드리고, 동체를 구성하던 70m의 천(우포)의 방수·탄성처리, 재단, 부착 모두 손으로만 작업했다. 안타깝게도 이때 문용호씨가 완전복원을 보지 못하고 9월 8일 별세하였고, 문씨는 복원식 하루 전인 10월 21일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렇게 부활호가 복원되었고, 10월 22일, 부활호는 반세기만에 제81항공정비창 주기장을 벗어나 KT-1과 함께 비행에 성공했다. 이날 복원기념식에는 당시 조종사 민영락 예비역 대령과 이원복 예비역 대령이 참석하여 부활호의 부활을 지켜보았다.
현재는 공군사관학교, 전쟁기념관, 발견지인 경상공고, 그리고 2008년에 새로 개관한 국립 과천 과학관에 전시 되어있다. 공사 소장품은 등록문화재 제 411호로 지정되었다.부활의 활동 모습과 발굴(?) 후에 복구 모습.

이후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이 한국군 정비사들의 설계와 제작으로 7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나(해군 항공대의 수상기 "해취호" 등등), 자료가 거의 소실된 관계로 어떠한 항공기들을 보유중인지 확실하게 공개된 자료가 없다. 이 부분은 공군인들에게는 매우 아쉬운 부분.

현재 비행가능한 복원한 오리지널 1기와 비행이 불가능한 레플리카 4대가 있는걸로 추정된다. 기체의 특징으로는 간지 폭발 부활 마킹과 2개의 주 랜딩기어, 2개의 보조 랜딩기어를 합친 총 4개의 랜딩기어.

최초로 뉴스가 보도된 일자를 기준으로,2011년 7월 14일 오후 5시 46분#에 성공적인 비행을 했다.
기존의 85마력 엔진에서 100마력 엔진으로 업그레이드되었으며,아날로그 계기판 대신 전자식 계기판을 탑재하고 동체와 날개가 원래 우포라고 불리는 천으로 덮혔는데,대신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다.껍데기만 같은 다른 비행기

이 다음 국내생산된 항공기로는 새매호가 있다.[3]

4 매체에서

국산 만화영화 소중한 날의 꿈에서 등장하며, 여기서는 경비행기로서 우주로 돌파하면서 SR-71를 능가하는 오버테크놀러지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조종석은 완전 오픈에 프로펠러달린 프롭기다. 뭔가 무시무시해진다.

  1. 다만 항공 부품의 신규개발능력이 전무하였으므로 미제 L-16 연락기의 부품을 전용하였다.
  2.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한국항공대학교와는 전혀 별개인 2년제 초급대학이었다. 이 학교가 폐교되고 그 자리에 경상공업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3. 공군에서 초등훈련기 수요를 확보하기 위해 PL-2라는 비행기의 설계도를 수입해 제작한 비행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