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날리던 시절
1920년
파일:Attachment/코코 샤넬/cocochannel.jpg
후반생의 시절
Coco chanel/Gabrielle Bonheur Chanel
1 개요
Coco - Inside CHANEL
프랑스의 복식 디자이너. 본명은 가브리엘 보네르 샤넬로[1] 메종 샤넬의 설립자이다. 코코 샤넬은 가난하던 시절 변두리 술집에서 노래부르고 하던 시절 사람들이 부르던 애칭이었는데, 그녀는 죽기 전까지 이 이름을 매우 싫어했다. 그럼에도 살아서도 이 이름으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은 데다 제품 이름으로까지 쓰였고 죽어서도 이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 아이러니하다.
2 생애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출생하였다. 가난에 시달리던 집안에서는 어린 그녀를 고아원에 맡겼는데, 그녀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현대 여성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자 연인들에게 둘러싸여 독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살아간 여인이 되었다.
아래에는 단순히 여성들의 패션을 바꾼 대단한 사람 수준으로 서술되었으나, 12남매와 아내를 두고 외가에서 받은 돈을 유흥가에서 흥청망청 날려먹으며 가족을 버린 아버지 덕분에 유년기를 수녀원에서 보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존심과 독립심이 투철하여 평생 남자들에게 도움받기를 매춘이라 비유하여 꺼려했고, 패션, 에티엔의 여자들에게 모자를 만들어주기 전엔 노래와 춤, 승마를 익히는 등, 패션의 대모 이전에 대하 소설을 연상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했다.
3 업적
샤넬은 여성복에 대한 유럽의 전통[2], 코르셋을 많이 이용하던 1910~1920년대의 여성복에 대해 <왜 여자들은 비실용적인, 쓸모없는 복장을 고수해야 하나>라고 회의를 느껴 당시 애인이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고향이던 영국에서 신사복의 소재를 여성에게 적용해 스포티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현대적 여성복인 <샤넬 슈트>로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 활동을 시작하여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실마리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현대 여성복의 시초. 실제 그녀가 디자인에 영감을 얻은 것들은 대부분 서민층의 아이템이었는데 그렇게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제품들이 오늘날 명품의 최정점에 있다는 게 엄청난 아이러니.
장식이 생략된 옷의 본체에 브레드나 코드의 테두리를 붙이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고 작은 색유리나 크리스털 글라스의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유행의 변천 속에서도 별로 변함이 없이 오늘날에도 애용된다. 또, 그녀가 선택한 향수 '샤넬 No.5'[3]도 유명하다. 마릴린 먼로가 생전에 자기는 이것만 입고(뿌리고) 잔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4 성격
단 상업적 재능이나 디자인 쪽의 천재성을 제외하면, 정치적으로는 극우 성향에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나치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나치 고위층과 친분을 유지하며 최고급 리츠 호텔에서 지냈으나 종전 후 부역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친분을 유지한 사람들은 나치 고위층 뿐만이 아니라 영국 상류층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윈스턴 처칠 수상의 도움으로 풀려나 스위스로 도피, 10년간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한다. 1995년에는 나치 독일의 스파이였다는 내용의 책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는 2016년 3월 파리 외곽에서 당시 나치 독일 정보 조직인 아프베어(abwehr) 등을 위해 일했던 문서가 공개되며 확인사살. [4]
사생활 또한 좋게 말하면 세기의 연인들에 둘러싸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매우 복잡하였다. 또 재밌는 점은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해 했던 말들(출생, 성장, 가족관계 등)은 거의 모두가 거짓말이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그녀의 생애에 대한 전기들은 내용이 많이 다른 경우가 있다. 이때문에 자기애성 성격장애 환자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 밖에 당시에 같이 활동했던 디자이너들하고 사이도 안 좋았다. 기존 디자이너들의 물건을 보고 진부하고 한심하다며 어그로를 끌고 다녔다. 특히 폴 푸아레와 사이가 안 좋았다.[5] 그 밖에 엘자 스키아파렐리[6]하고도 라이벌시돼서 그녀를 싫어했으며, 파코 라반[7]을 보고 금속공이나 다를 바 없다고 비평했다.
반대로 이브 생로랑을 두고는 자신의 정신적 후계자라며 칭찬했다. 후에 엘자 스키아파렐리가 은퇴하자 그제서야 인정하는 말[8]을 할 정도.
1969년
1970년
5 사망
1971년 갑작스레 사망했다. 가슴이 답답하다며 문을 열라고 가정부에게 말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그가 제대로 된 전범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국 땅에 묻히는 것을 불허했고, 망명지였던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
6 사망 이후
2014년에 프랑스 국영TV 다큐멘터리《의혹의 그림자》(L'Ombre d'un Doute)에서 그녀가 나치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문서가 발견됐다고 방송됐다. 그녀의 요원 번호는 F-7124,암호명은 웨스트민스터였다. 그녀는 1940년에 독일과 프랑스가 휴전을 한 이후 나치의 비밀경찰과 가까워지자 스파이가 되었고,1943년에는 독일이 영국에 휴전을 제안할 때 비공식 사절로 윈스턴 처칠과 만났다.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로서 현대 패션계에 큰획을 그은 인물이지만, 나치 스파이로서의 행적이 공식적으로 사실로 드러나면서 그녀는 프랑스인들에게 오욕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겨지게 되었다.
7 관련 항목
- ↑ 프랑스 본토 기준으로 발음은 '갸브히엘(르) 보뇌흐 샤넬'에 가깝다.
독일어는 쾰른이라고 잘만 불러주면서 o움라우트와 같은 발음인 프랑스어의 eu는ㅚ라고 안 써준다. - ↑ 초경을 시작하기 이전의 여자아이에게는 무릎 길이의 치마를, 초경을 시작하여 성인 여성으로서의 대우가 시작되면 발등까지 덮는 긴 치마를 입는 것. 이것은 동서남북을 막론한 유럽의 오랜 전통이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에 촬영된 유럽 각 국 왕실이나 귀족들이 남긴 전신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역으로 남자의 경우 어린 남자아이, 혹은 어린 소년에게만 반바지를 입혔고 그가 노동력과 분별력을 갖춘 성인 남성으로 성장해야 긴 바지를 입는다.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유럽 남성들이 편하다는 이유로 툭하면 반바지를 입는 미국 성인 남성들을 비웃던 시선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 여담이지만 어린 남자아이에게 반바지를 입히는 전통은 이후 한참 근대화를 추진하던 일본으로 건너가서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는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 ↑ 1920년대 초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이름을 건 향수를 런칭하려고 했고, 당시 유명 조향사였던 Ernest Beaux에게 의뢰하여 몇 가지 샘플을 건네받았다. 그 중 그녀가 선택한 향이 바로 5번이다. 그래서 제품 명이 간단하게 5번이 됐다는 이야기.
- ↑ http://m.huffpost.com/kr/entry/9482620?
- ↑ 폴 푸아레는 우아하고 여성적이지만 덜 실용적인, 파티에나 입고 갈 옷을 만들었다. 샤넬의 정반대의 디자인을 한 사람. 하지만 그는 자타공인 패션의 왕이었고, 여성복에서 최초로 코르셋을 뺀 장본인이기도 하다. 다들 그걸 샤넬의 공으로 알고 있지만 최초는 그.
- ↑ 초현실적이고 예술적인 옷의 대가. 역시나 샤넬의 철학하고는 맞지 않았다.
- ↑ 재질을 초월해 옷을 만드는 전설급 디자이너
- ↑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예술로 생각했고 그녀만한 창의성을 가진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