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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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생활당 대표 취임식 장면. 표정이 심히 억울해보인다

小沢一郎(소택일랑) / Ichirō Ozawa

1 개요

일본정치인. 일본 생활당 대표. 과거 자민당의 거물이었으나 탈당하여 두차례나 자민당을 무너트린 일본 야권의 옛 거물. 2009년 일본 민주당 대표로 사임 직후 총선에서 승리하며 정권교대에 성공했으나, 2012년 자파 의원들을 데리고 분당을 결행하여 일본 미래당을 창당했다가 중의원 선거에서 개털렸다.(...) 다시 생활당으로 당명을 바꿨지만 참의원 선거에서도 참패.

2 생애

2.1 "다나카의 수제자"

본래 자민당 소속 의원이었으며 1969년 자민당에 입당해 그 해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이 때 다나카 가쿠에이의 도음을 받아서 나중에 다나카의 수제자가 되었다. (나중에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반기를 들은 타게시다파의 일원이 된다.) 이후 자민당 총무국장과 자치대신을 맡으며 경력을 쌓아갔다.

가이후 내각아래서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 1990년 총선에서 자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1991년 도쿄도 지사 선거에서 자민당이 지원한 후보가 패배하자 간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당내 2인자로 남아있었으며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하고 "정치개혁"을 구호를 내걸어 일본 신생당을 결성했으며 그해 중의원 총선에서 약진하고,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등극시키는 조건으로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신당 사기가케, 일본신당,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과 연립정권을 구성하는데 성공을 하며 잘 나가는 듯 싶었지만...

2.2 야권 연합 실패와 신진당, 자유당 창당

호소카와 총리가 국민복지세 논의를 구상하다가 여론의 반발에 밀려 사퇴했다. 이와중에 민사당과 일본신당, 신생당등이 통일회파 개신을 구성하기로 하면서 연립정권내 1당이었던 사회당이 강력 반발하며 연정에서 이탈, 과반수가 붕괴되었다. 이후 하다 내각이 출범했지만 오자와는 하타 쓰토무 총리와 갈등이 일어났다. 하타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시켜 총선을 통해 안정의석을 확보할려고 했지만 결국 해산을 포기하고 사임했다.

이에 자민당은 사회당 무라야마 도미이치 위원장을 수반으로 한 자민-사회 연립 정권 수립을 기도하고, 오자와는 자민당 출신 가이후 토시키를 내세워 자민당의 반란표를 발판삼아 비자민 연정을 유지하려 했으나 결과는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당선. 그 유명한 무라야마 담화가 나온게 바로 무라야마 총리의 성향 때문인데 자세한 것은 무라야마 도미이치 항목 참고.

이후 오자와는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야당을 통합해서 신진당이라는 정당을 만든다. 신진당은 1995년 참의원 선거에서 40석으로 선전했으나 1996년 중의원 총선에서 156석을 확보해서 부진을 거두자 비주류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는등 위기에 빠졌다. 오자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자민당과 연정을 시도했으나 이는 당내에서 거세게 반발을 샀고 결국 1997년 12월에 신진당을 해산했다. 1998년에 자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자유당은 일본 민주당에 밀려 원내 3당으로 전락했고, 지지율도 높지않았다. 다만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6석의 의석을 거두며 생각보다는 좋은성적이라는 평은 받았다.

간 나오토를 총리후보로 내세웠으나 자민당이 중의원 다수의석을 차지했던고로 오부치 게이조가 총리로 등극했다. 이후 오자와는 자민당과의 연립정부를 구성했지만 이후 공명당이 자민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를 하며 연정이 깨졌다. 이 때 연정잔류를 지지하던 의원 26명은 보수당이라는 정당을 구성했다. 다행히 이들은 2000년 중의원 총선에서 참패하고 반대로 자유당은 22석의 의석을 확보하며 선전했다. 자유당은 다시 2001년 참의원 선거에서 부진하면서 오자와는 일본 민주당과의 합당논의를 진행했고, 결국 2003년에 자유당이 일본 민주당에 합류하는 식으로 통합되었고 오자와 이치로는 일본 민주당의 당대행이 되었다.

2.3 민주당 트로이카

2003년 총선에서 177석을 확보해 선전을 거두었다. 2004년 간 나오토가 연금 미납문제로 사퇴하면서 일본 민주당의 당대표로 내정되었으나 연금미납 문제로 고사했다. 이후 참의원 선거 승리 이후에 부대표로 등극하며 승승장구 할것 같았으나...

2005년 "우정 해산" 총선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참패하며 113석을 거두는데 그쳤고, 이 패배로 민주당 부대표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이것은 약이 되었다. 오자와는 다시 마에하라 세이지가 호리에 이메일 문제로 사퇴하면서 일본 민주당 대표로 재등극했으며,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 정권의 실정을 틈타 민주당이 참의원 1당으로 등극했고, 이후 총리로 등극한 후쿠다 다케오도 별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하다가 다시 패망하는게 오자와의 가장 큰 특징. 2009년 들어 북한의 로켓 발사 및 불법자금 수수 의혹이 터지면서 지지율에서 아소 다로 총리에게 역전당했다.[1] 결국 2009년 5월 임기만료로 물러났으며, 후임 당 대표로 하토야마 유키오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일본 민주당은 하토야마의 새 얼굴을 내세워 결국 압도적인 승리로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2.4 민주당 여당 시기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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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방한하여 국민대학교에서 "새로운 한일관계와 그 역할을 담당할 리더의 육성"이라는 특강을 했다. 이 특강에서 "불행했던 시대 사죄한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국민대 강연을 마치고 조선호텔에서 조훈현 九단을 만났다. 아마추어 바둑 6단이라서 조훈현 九단과 넉점 깐 바둑에서 이기고 친필 바둑판을 받았다. (봐줬을지도?) 저녁에는 청와대로 가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 만찬을 가졌다. 

하토야마가 총리에 오른 이후로는 섭정이라는 비야냥을 들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으며, 12월 방한에 앞서 같은 달에 있었던 중국 방문에서는 무려 세자리 수의 의원을 끌고 왔다. (...) 그야말로 막후 실세. 그 직후 한국에 와서는 "사죄한다"라는 표현과 함께 일왕의 방문을 제의하는 등의 발언을 보였다. 이 때문에 우익들에게는 매국노 취급을 받으며 신나게 (...) 까였다.

2010년 중순, 또 다시 벌어진 정치자금 문제로 인해 간사장 자리에서 낙마하였다. 그런데 낙마한지 세 달도 채 못돼서, 하토야마가 사임한 자리에 총리 한번 해보겠다고 민주당 대표 선출 레이스에 기어나와 민주당 팀킬을 감행. 하지만 2010년 9월 14일 선거를 통해 300표라는 차이로 쳐발려서 간 나오토 총리가 재선에 성공했다.

오자와의 도덕성 문제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냐면, 당 대표 선거 기간 중에 거의 모든 언론이 오자와에 대해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으며, 좌우파를 막론하고 "민주당이 아무리 글러먹어도 오자와가 총리되면 그땐 정말 끝"이라는 모토로 깠다.[2] 우스갯소리로 오자와가 총리가 되는건 엔화 가치는 떨어질테니 수출은 늘어나겠네 라고 할 정도로 비난에 비난이 겹쳤었다. 그리고 오자와가 진 날, 엔화는 1달러 80엔대라는 미친 환율을 유지했다 향후 민주당이 다시 정권을 잡을 희망이 상당히 희박해보이는 현재로서는 이 사람이 총리가 될 일은 사실상 물건너 간 것으로 판단 될 만한 결정적 패배였다.

결국 총리 선거 실패 후, 불기소 처리된 정치문제가, 고등 법원의 판단으로 강제 기소.

이리되자 간 나오토 총리는 오자와의 당원권을 정지시키고 탈당하라고 압박하는 상황. 오자와도 이에 반발하면서 자파 의원들을 동원해 간 총리의 퇴진을 압박하고 있다. 복수혈전 일각에서는 오자와가 자파 의원들을 데리고 탈당해 신당을 차릴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미 오자와 계파의 의원 16명이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마친 상황이었다.

도호쿠 대지진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간 총리가 무능하다고 질타하면서 간 총리의 사퇴를 압박했지만 자민당과 공명당이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자 간 총리가 하토야마 전 총리에게 사정해서 자진 사퇴라는 명분을 얻고 내각 불신임안을 부결시켰다. 사실상 민주당 의원 대부분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에 오자와 계파도 반대표를 던졌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내각 불신임안이 부결되자 마자 간 총리가 2012년 초에 물러나겠다고 훼이크다 하토야마! 말하자 하토야마 전 총리가 빡치면서 오자와 전 간사장측과 연대해 조기퇴진을 압박했고 결국 2011년 8월쯤에 간 총리가 사퇴하겠다는 말을 받은 상황.

이로 인해 후임 총리 인선 준비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기묘하게도 일본에선 이제 오자와의 판이 도래했다라는 식의 분석이 나왔었다. 심지어 야후 저팬에서는 차기총리감 1위로 오자와가 지목되기도 하는 등 의외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마지막 기회에도 불구하고 정치자금 문제라는 약점때문에 결국 본인이 직접 나서지는 못했다. 당초 오자와 계파와도 다리가 걸쳐있는 노다 요시히코를 지지하지 않을까 했지만 결국 가이에다 반리 산업장관을 내세우기로 하면서 민주당 대표선거는 다시금 오자와 대 반 오자와의 흐름으로 가게 되었다. 1차 투표에서 가이에다 반리가 1위, 노다 요시히코가 2위를 차지했지만 과반득표자가 없어 2차 결선투표를 치루게 되었는데 이때 반 오자와 세력이 결집해 노다를 밀면서 노다가 가이에다를 제치고 대표에 당선되었다. 가이에다를 통해 막후 실권자의 위치를 회복하려던 오자와는 영향력의 쇠퇴를 절감해야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5 민주당 탈당과 일본 미래당 창당

2012년 4월 26일, 일본 법원은 오자와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다! 물론 1심에서 무죄판결이 나온것이긴 하나 일본의 법전문가들의 분석은 항소를 하더라도 오자와에 대한 무죄판결이 뒤집어지긴 어려울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3] 일본 언론들이나 세간의 인식은 오자와가 영향력을 회복할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심지어 2012년 9월에 있을 민주당 대표경선이 출마해서 총리를 노릴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으며, 심지어 하시모토 토오루 오사카 시장이 이끄는 오사카 유신회와의 연대로 차기 정권을 노릴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며 오자와는 다시 기회를 잡는가... 했다.

그러나 6월이 되자 다시 오자와의 정권 장악에 빨간 불이 켜지고 말았으니, 원전사태때 비서와 함께 도피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인 마사코가 폭로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1. 방사능 누출 정보를 접하자 고향이자 자기 지역구인 이와테를 버리고 내연녀인 비서와 도쿄로 도망가버림.
2. 근데 조강지처인 마사코는 정치인이 국민을 저버려선 안된다며 이와테에 남음.
3. 잠행타다 취재가 들어오니까 그제서야 기어나옴.
4. 지진피해 복구기간동안 지진지역에서 제일 떨어진 지역에서 낚시나 하고 있음
5. 그러면서도 간 나오토 총리가 지진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다는 이유로 총리 해임안을 강행함.

본인은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증언 당사자가 40년간 함께한 부인임을 감안하면 절대 쉽지 않다. 팀킬 최강

결국 2012년 7월 12일, 노다 총리가 소비세 증세를 밀어붙여 통과되자 이에 반발해 자신을 포함한 계파 의원 51명과 함께 민주당을 탈당했다. 곧 반 증세신당을 창당하고 노다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겠다는 상황. 신당의 이름은 "국민 생활이 제일당"으로 결정되었다. 네이밍 센스가 참... 더구나 이 과정에서 녹색바람으로 일부 도망간 홋카이도 의원들이 있었다![4]

국민 생활이 제일당은 2012년 7월 15일 기준 지지율 3.7%라는 경이롭게 낮은 수치를 기록했고 일본인의 81.8%가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라 중의원 선거가 치러지면 대부분의 현역의원들이 날아가고 오자와 조차도 생존을 장담할수 없는 지경이라 당이 공중분해 되거나 잘해야 소수정당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그럼 그렇지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당 이름을 일본 미래당으로 바꾸었다.

결국 2012년 12월 16일 제4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 일본 미래당의 62석의 의석이 9석으로 줄어드는 사태를 맞이했다. 비례 득표율은 일본 공산당(6.1%, 비례만 8석)에도 뒤지는 7위(5.6%). 3.7%보다는 높구나! 오자와 자신은 탈원전집회에 참석하는 생쇼를 해서 겨우 지역구 수성에 성공했으나[5] 여당 민주당도 원내 2당(득표율 3당)으로 떨어졌거니와, 이 결과는 오자와의 정치생명에 종지부를 찍었다는점 에 의미가 있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

2.6 총선 참패 이후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일본 미래당 대표직을 사임한 뒤 자진 탈당하였다. 그러나 자기 계파였던 가이에다 반리민주당 대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복당이 불허되자 미래당으로 돌아와서 일본 미래당 이름을 일본 생활당으로 변경한 뒤 생활당 당 대표가 되었다. 2013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어떻게든 유의미한 의석을 확보한 뒤 민주당과 거래를 할 모양인 듯. 하지만 참의원 선거에서도 발릴 거 같은데

2013년 2월 25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기사.

제23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더 낮은 1.77%를 득표하며 0석. 비개선 2석만 남으면서 진짜로 망했다.(...) 2.36%로 2석이라도 챙긴 일본 사회민주당보다도 망한 셈. 반면 일본 공산당은 꾸준하게 약진하여 9.68%나 득표하며 제5당, 민주당과 유신회를 뒤이은 사실상 제3야당이 되었다.

2014년 9월에는 한국의 국민대학교에 방문하여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수여식 영상을 보려면 링크를 클릭.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 생활당은 지역구 0.9%, 비례대표 1.9%라는 처참한 성적을 받으며 완전히 폭망했다. 그래도 오자와 이치로 본인은 어찌어찌해서 다시 당선되었다.

2014년 12월, 무소속으로 활동하던 야마모토 다로를 영입해서 중, 참의원 숫자 5명을 채워 간신히 정당 요건을 채워 교부금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당명이 생활당과 야마모토 다로와 친구들이라는 기묘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2015년 2월에는 김종필 전 총리의 상가를 방문해 조문하였다.

2016년 10월 12일, 당명을 자유당으로 변경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 자신이 만들었던 자유당과 동일하다.

3 떡밥1 - 오자와 대표의 "제주도를 사자" 관련 발언

2009년 3월에 오차와 이치로는 "제주도를 사자"라는 혐한 발언을 했다는 의혹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러나 한국 정치학과 학자들 사이에선 꽤 평가가 좋은 편인 오자와 대표가 별 생각없어 보이는 저런 말을 했다는 것에 의심을 품은 네티즌이 관련 대화 전문 자료를 확인한 바에 따르면, 언론의 부분 캐치 속칭 가위질에 의해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관련 사안 자체가 논란이 되었던 만큼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아고라에 올린 원게시물이 삭제되어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 상황을 간단히 전하자면 이랬다고 한다.

사시모리 연합회장이 "최근 한국인들이 대마도 땅을 많이 산다는데, 위험하지 않느냐"고 묻자 오자와 대표가 신경 안 쓴다고 대답했고, 다시 "일본 땅이 한국 땅이 된다는 건데 신경 안 쓴다니요?" 라는 식으로 묻자 어이없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면서 "일본인이 제주도에 땅을 산다고 해서 제주도가 일본 땅이 됩니까?"라고 예를 들며 말했을 뿐이라고 한다. 실제 발언. 한국인이 대마도 땅 많이 산다는 소린 여기서 첨 듣네 제주도 중국인 땅 된다고 선동하는 애들이 문득 떠오른다

한편 해당 링크에서 그의 모친인 오자와 미치의 무덤이 제주도에 있으며, 한국인이란 것은 근거가 매우 희박해보인다. 기본 출처 자체가 2ch 등이며, 비슷한 예로 간 나오토 총리도 할머니가 제주도 출신자라는 카더라 통신이 있지만 근거는 높지 않다. 비슷한 예로 부친인 오자와 사에키가 조총련 지도자란 설도 있지만 이 역시도 오자와를 "춍"이나 재일교포로 몰아붙이려는 소문으로 보인다.

국민대학교 일본학 연구소와 링크가 있는듯 하다. 한창 위세가 등등하던 시기에도 방문하여 위안부에 대해 보다 진보적인 태도를 취할것을 요구한 바 있는데, 그후 2014년 9월3일에 다시한번 국민대를 방문하여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4 떡밥2 - 일본 우경화의 스타트를 끊은 자?

오랫동안 야권에서 활동해왔고 2010년대엔 "일본의 우경화가 우려스럽다," 혹은 "위안부에 대한 진정성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인터뷰를 해왔기에 상당히 의외인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사람은 헤이세이 연호 이후 벌어진 일본 우경화의 스타트를 끊은 정치인들 중 하나로 꼭 언급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도 자이니치라 그러고 있으니 넷 우익의 수준이 어디까지 갔는지 알 만하다 오자와는 1993년 <일본개조계획>(日本改造計画)라는 저서를 통해 전후의 평화헌법이 모든 종류의 전쟁을 포기하면서 일본의 자체 방위, 국제기여 기회를 박탈한다고 비판하면서 해당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자위대의 지위를 격상,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6] 오자와는 이를 '보통국가'(普通國家)라는 용어로 소개했는데, 이후 우익 진영 등에서 일본의 정치-군사대국화를 주장할 때 항상 사용하는 단어로 정착되었다.

위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1994년에 "평화헌법은 반드시 개정이 필요하다"라고 본인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7] 2015년 지금이야 일본 총리대신재무상이 대놓고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드니 잘 와닿지 않지만, 이 당시에만 해도 오자와의 저 발언은 한동안은 가선 우익들이나 하던 소리를 지도층급 정치가가 꺼낸 사례였기 때문에 입방아에 올랐다.

그러나 오자와 이치로가 우경화와 관련해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딴에는 "관료제를 타파하겠다"는 의도로 일본에서 원내정치인들의 영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했단 점이다. 사실 외국의 일반인 입장에서 일본 정치에 관심을 가지다보면 국회의원 지역구를 거의 봉토 수준으로 다루는 일본 원내정치인들의 지독한 족벌 체제와[8] 그러한 족벌들의 대다수가 막부 말기(바쿠후마츠)까지 거슬러간다는 데에 놀라게 되는데, 이 때문에 사실 일본의 우경화란 건 항상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였던 게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몇십년간 어느 정도 제지가 가능했던 것은 종전 후 원내정치인들의 영향력이 한 일본사 연구서적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업과 관료들의 이익을 중개하는 브로커의 존재로 위축"된 덕분이었다.[9]

그런데 오자와가 무턱대고 "관료제를 타파하겠다"면서 자민당을 탈당했고 실제로도 자민당 정권을 잠시나마 붕괴시킨데다 이래놓고 오자와 본인이 차기 총리로 밀어줬던 사람은 대놓고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호소카와 모리히로.....[10] 이러니 종전 후 몇십년만에 원내정치인들이 다시 영향력을 확대하고 기술관료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2015년 기준으로 일본 내각 지도층에 초슈 지역 출신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변화였는지 알 수 있다. 딴에는 "일본의 기형적인 지도체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식의 생각을 한 것인진 모르겠으나, 애초에 일본은 원내정치인이란 사람들이 관료계급보다도 훨씬 더 비정상이란 걸 계산에 넣지 않았다.

2010년대인 지금에야 90년대보다도 일본의 평화헌법이 더 뜨거운 감자로 떠올라 정계가 아예 호헌파/개헌파로 갈린 상황이니 오자와 이치로 본인도 스스로를 호헌으로 코스프레하고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정국이 되기 훨씬 전에 스스로가 평화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뜬금포식 입장을 밝혔던 걸 보면 이것조차 그저 아베 내각에다 딴지를 거는 모습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려는 행동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론은 정리정략에 밝은 노회한 정치인으로 오랜 기간 끈질긴 생존력을 보여줬지만 그것도 한계를 보여 망했어요
  1. 2009년 4월 총리적임자 조사에서 아소 총리 21%, 오자와 대표 12%를 기록.
  2. 물론 그 와중에도 혹시나 몰라서 막판에 오자와를 지지한다고 돌아선 각료들도 있고, 그동안 심어놓은 자파 인사들이 많이 있긴 했지만. 이 사람이 외국인 참정권 운운하면서 리버럴해보이는 탈을 쓰고는 있지만, 정치적 스탠스는 우파 쪽에 가깝다. 나쁘게 말하면, 우파와 좌파의 안 좋은 점은 다 모아놓은 인물.
  3. 일본 사법체계의 문제점 중 하나인데 지방법원에서 판결이 나면 대법원까지 올라가도 판결은 거의 뒤집히지 않는다. 사실 이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일본이 특별히 거론되는 이유는 3심제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뒤집히는 일이 없기 때문.
  4. 물론 녹색바람도 거하게 패망.
  5. 미래당 지역구는 고작 2석. 사실 당선 안 되면 이상한 것이 도호쿠 지방에서의 오자와였다. 심지어 낙선 되어도 석패로 재당선이 가능했을 것이다.
  6. 오자와가 해당 주장을 하기 2년 전인 1991년 일본은 걸프전쟁에서 자국의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거액의 전비 지원을 제공했지만, 평화헌법에 따라 실제 군사지원은 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기껏 돈을 왕창 내고서도 미국 등으로부터 비판을 들은 바 있었다.
  7. Buruma, Ian. <Inventing Japan: 1853-1964>. London: Weidenfeld & Nicolson, 2004 (한국완역판 pg.207)
  8. 이 때문에 일본 정계에 붙은 별명이 "Uncommon Democracy (특이한 민주주의)."
  9. Buruma, Ian. <Inventing Japan: 1853-1964>. London: Weidenfeld & Nicolson, 2004 (한국완역판 pg.177)
  10. 다만 헤이세이 덴노와 마찬가지로 호소카와는 집안 내력과 달리 과거사에 반드시 반성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